제5장 뒷배를 정하다
딩동댕.
“시험 끝났습니다. 모두 머리 위로 손 올리세요.”
“우아아!”
어디선가 아쉬움 가득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역대 KAIST 입시 중에 가장 어려웠다는 90학번 시험답게 나조차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영어는 평타, 과학은 꽝, 다행히 수학은 평타 이상을 한 것 같다. 올림피아드에서 나온 정수론 문제와 비슷한 유형의 문제가 꽤나 나왔다.
설마 했는데 실제로 문제를 보니 수학 문제 출제 위원이 올림피아드 출제 위원과 같은 사람이라는 걸 확신할 정도다. 다른 과목 대비 수학 과목의 배점이 두 배인 KAIST 시험의 특성상 합격은 무난할 것 같다.
정말이지 이번 생은 운발 하나는 끝장이지 싶다.
시험 못 쳤다고 울상인 재훈이를 토닥거려 주며 시험장을 빠져나왔다.
‘걱정할 필요 없어. 넌 합격한다고.’
속으로만 피식거려 주었다.
한데 고사장 입구에서 시꺼먼 양복을 입은 자들이 내 앞을 턱 막더니 말을 걸어왔다.
“유수한 님이십니까?”
“누구세요?”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찾으십니다. 가시지요.”
“누가요?”
“대현그룹 회장님께서 도련님을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약속은 미리 하셨다고.”
“약속한 적 없었…. 어어?”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건장한 사내 둘이 양쪽에서 내 팔을 하나씩 끼고 차에 태웠다. 어찌나 힘이 좋은지 173센티에 65킬로그램인 내가 종잇장처럼 펄럭거리며 차 뒷좌석으로 날아들었다. 많이 해 본 듯 나를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사내들이 앉으니 옴짝달싹도 못 하겠다.
동기들 부모님들하며 선생님들이 여럿 있었지만 시꺼먼 사내들이 대현그룹의 명함을 건네주며 염려 마시라고 하니 ‘어어?’ 하며 지켜볼 뿐이다.
부우웅.
“이봐요, 아저씨들. 나는 오늘 시험을 마쳤다고요. 오늘 같은 날엔 영화도 당기고, 애들이랑 맥주도 맛봐야 하는 역사적이 날이라고요.”
“본사 사옥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립니다. 회장님께서 이걸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꼬마 무당님께서 좋아하실 거라고.”
“에? 무당?”
운전수와 내 양옆에 있는 사내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보조석에 앉은 사내만이 말을 늘어놓았다. 그가 내민 것은 브라보콘이었다.
조금 어이없었지만 맛난 것은 사실이니 쫄쫄 빨아 먹기 시작했다.
“하나 더 있습니다.”
“됐어요. 아저씨 드세요.”
“아, 예.”
“근데 경호원 아저씨들 등발이 장난 아닌데요. 와우! 그리고 아저씨는 칼잡이 같아요. 맘에 안 들면 푹푹 찔러 버릴 것 같은 느낌?”
나는 농담이랍시고 했는데 차 안의 사내들은 살짝 긴장하는 느낌이다. 정말 찌르나?
“다들 유도대학 출신이라 등발이…. 아, 그리고 저는 군대에서 특공 무술을 좀 해서….”
“이야! 누가 제일 세요? 싸우면 누가 이겨요?”
“뭐, 당연히 제가…. 으음?”
보조석에 앉은 날렵한 이가 어깨를 으쓱거렸는데 운전대를 잡은 이가 불쑥 주먹을 내밀었다. 내 양쪽에 앉은 자들도 목을 우두둑 꺾으며 이죽거렸다. ‘뭔 개소리야?’ 하는 느낌이다.
“아, 뭐 도긴개긴이죠.”
“오! 용호상박이시네. 그럼 아저씨들 중에 영어 좀 하시는 분 계세요?”
“여, 영어요?”
“예. 해외 출장 가능한 분이 계신가 싶어서요.”
“해외 출장요?”
“예. 뭐, 1년에 두세 번은 갔다 와야 하는데….”
“…….”
경호원들이 깜짝 놀란다. 이것도 인연이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 내 경호원이 한 명 필요하다. 미국에 다녀와야 하는데 나 혼자 가기엔 좀 무섭잖아. 거긴 총이 있다고.
“없어요?”
“아, 제가 카투사 출신이라 영어 좀 됩니다.”
“욕도 잘하시겠네. 오, 좋네요. 명함 좀 주세요.”
나는 날렵하게 생긴 사내의 명함을 받아 챙겼다. 이번엔 그가 어깨를 으쓱거려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한다. 입모양만으로 운전수에게 ‘해외 출장!’이라고 놀리는 것을 못 본 척 해 줬다.
내 말투가 심상찮은 걸 느꼈는지 양옆에 앉은 경호원들의 행동이 조심스러워진다. 문 쪽으로 어깨를 잔뜩 밀어 내 자리를 넓게 해 주는 배려가 느껴진다.
여하튼 나는 브라보콘을 쪽쪽 빨아 먹고 느긋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정 회장이 쓰는 사람들이라면 여러모로 검증된 인물들이다. 내가 굳이 사람 찾으러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서 좋다.
말마따나 정 회장의 후광 없이는 이런 사람 하나 끌어당기는 일도 어려울 거다. 대뜸 빡빡머리 고등학생이 ‘내 보디가드 좀 해요.’라고 하면 해 주겠나? 미친놈이라고 얻어맞기밖에 더하겠나.
스르륵. 끼이익.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경호원의 운전은 정말 조심스러웠다. 대현그룹 본사 사옥 앞에 미끄러지듯 정차했다. 이렇게 사람까지 보내서 날 데려오라고 할 정도면 작은 칼자루 하나쯤은 얻을 수 있어 보인다.
철컥!
“무당님, 이리로.”
“무당 아니라니까요.”
“아, 죄송합니다.”
나는 입고 있는 교복이 마치 정장이라도 되는 듯 옷깃을 가다듬고 정문으로 들어섰다. 이왕 얻을 칼자루라면 좀 큰 놈이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향하는 걸음이 이상하리만치 가벼웠다. 느낌이 좋았다.
- *
딸칵!
난 대현그룹 본사 사옥 꼭대기에 있는 회장실로 바로 안내되었다. 방문이 열리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정 회장이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아이고! 우리 꼬마 무당 왔누! 마이 기다리따 아이라.”
“아, 저 오늘 시험 마쳤는데. 내일쯤 부르지 그러셨어요.”
“어허! 할 일이 태산인데 젊은 놈이 뭔데 쉰다고 그라누. 쉬는 건 죽은 뒤에 하는기라.”
‘전 이미 한 번 죽었거든요.’
불만이 목구멍을 통과할 뻔했다.
여하튼 짧은 시간이었지만 정 회장과는 꽤나 통하는 면이 생겨 버렸다. 삼국지에서 주인을 찾는 모사가 어떤 마음일지 알 것 같다.
지금까지 정 회장은 합격이다. 흙수저 주제에 금수저를 평가하다니 우습다.
“왜 부르셨어요?”
“이것부터 읽어 보이라.”
툭!
「대현자동차, 위기를 기회로 만들다.」
제목부터가 꽤나 멋진 신문 기사였다. 경제면 헤드라인을 장식했는데 미국 공항에 비장한 표정으로 입국하는 수백 명의 엔지니어들을 찍은 사진이 같이 실려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진의 출처가 국내 신문사가 아니고 LA타임즈다.
기사의 요지는 대현자동차가 1988년부터 대미 수출한 액셀 자동차에 대해 전량 리콜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자발적인 리콜이었으며, 서비스 센터가 미흡한 대현자동차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내 엔지니어들이 트럭으로 미주 전역을 돌며 수리를 해 준다. 싸구려 자동차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서비스라며 미국 내에서도 꽤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단다.
“우와! 잘하셨네요. 국내 소비자나 리콜을 나쁜 일로 여기지 미국은 안 그래요. 외려 서비스를 잘하고 있다고 여긴다니까요.”
“흐흐, 맞다, 맞아. 헌데 그거보다 더 대단한 기 있다.”
“뭔데요?”
“니도 예상 못 했을기라. 직원들이 미국 애들 쓰면 즈그들 보너스 줄어든다고 직접 나간 거 말이다. 트럭에서 먹고 잔다고 호텔비도 안 받고 말이누. 이대로라면 리콜하는 데 수백억도 안 들기다. 수십억은 아낀 기지.”
“오오! 회삿돈이 자기 돈인 줄 알게 된 거네요.”
“바로 그거다, 그거!”
“고생하는 사람들한테 좀 더 챙겨 주세요. 이참에 제대로 보여 주셔야죠.”
“안 그래도 그럴 기라. 양놈들은 그걸 인센티브라 카드마.”
“인센티브. 듣기 좋네요.”
“니한테도 좀 줄라꾸 불렀지. 꼬마 무당한테 주는 기니 복채라 해야 안 되겄누!”
“복채라뇨? 얼마나 주시려고요?”
“여깄다!”
정 회장이 손에 쥐여 준 것은 작은 플라스틱 상자였다. 불투명한 플라스틱 안에 대현그룹의 마크가 보인다. 명함이다.
뚜껑을 열어 봤더니 ‘유수한 비서과장’이라고 되어 있다.
오호, 아무리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정 회장이지만 기껏해야 대학교에 갓 입학한 애한테 주는 직급치고는 파격적이다.
솔직히 탐이 났지만 명함을 책상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정 회장이 당신 곁에 두고 싶어 비서라는 직책을 주는 것이겠지만, 내 입지가 매우 협소해질뿐더러 비서실이면 신입사원 때부터 사내 정치질을 해야 하는 곳이다. 난 내 뜻대로 움직일 자유가 필요하다.
“아직 저에겐 과분한 선물이네요.”
“뭐루? 니는 그냥 내 밑에서 말만 해 주면 된다. 사내 정치에 낄 이유도 없으. 괜찮다이.”
정 회장도 뻔히 알고 있다. 나를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 무리수를 두고 있는 거다. 짧은 시간이지만 내가 새긴 이미지가 아주 강력했나 보다.
“이런 복채 대신 저에게도 인센티브 좀 주세요. 제 집안은 이미 조사해 보셨을 테니 일단 그 돈으로 집안부터 정리하고요, 저는 미국에 좀 갔다 올게요.”
“뭐이라? 인센티브를 달라고?”
“예.”
“그리고 미국? 미역국도 아니고 미국?”
“예, 미국. 받은 만큼 돈값은 해야죠.”
“돈값? 무슨 일이누?”
“대현이 귀족 재벌 되는 데 힘 좀 보태려고요. 그 덕에 저도 귀족 한번 되어 보게요.”
“뭐? 귀족 재벌? 내 이미 재벌이다. 모르나?”
“글쎄요. 귀족과 재벌은 격이 다르죠.”
“잘 설명해 봐라. 맘에 안 들면 복채 없다이.”
정 회장은 농사꾼 출신인 자신의 집안 내력을 들먹인 줄 알고 인상을 좀 구겼다. 내가 기어오른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
상관없다. 이 정도를 품어 주지 못한다면 내 쪽에서 포기다. LK로 방향 선회하든지 그조차 안 되면 어렵더라도 혼자 가야 한다.
“지금 재벌이라고 해 봐야 대부분이 적산 불하받아서 성장한 기업들이잖아요. 예외가 있다면 대현그룹과 LK 정도죠. 대현이 재벌을 넘어 귀족 재벌이 되어야 하는 이유 아닐까요? 적산 기업이 대한민국의 대표 기업이면 좀 그렇잖아요. 후손들이 뭘 보고 배우겠어요?”
“이누마가 참 말을 희한하게 해.”
일단 듣기 좋으라고 적산 기업부터 들먹여 주었다.
재벌들이 적산 기업이라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걔들이 눈 하나 깜빡하나? 쓰잘데기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대현을 글로벌 기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1980~1990년대 우리나라 재계 1위라고 해 봐야 세계 시장에서 알아봐 주는 이들 하나 없다. 외려 1980~1990년대에 세계 시장을 바라보고 기술 개발에 전력을 쏟았던 신성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고.
신성 같은 회사가 서너 개만 되면 30년쯤 지나서 일본을 제치고 중국과도 경쟁해 볼 만하다. 중국이 일어나기 전까진 대충 20년이란 시간이 있다. 원래 역사에서 중국이 차지할 파이를 우리나라가 싹쓸이해야 한다.
그래도 되냐고? 말했잖나. 나는 알량한 도덕심 따위는 인생 1회 차에 고스란히 내버려 두고 온 사람이다.
“물론 개인적인 이유도 있어요. 회장님께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자수성가한 스토리는 저 같은 흙수저에겐 희망의 상징이죠. 그 이미지를 끝까지 지켜내 보고 싶어요. 모래성처럼 무너지지 않게.”
나름 진심이다. 토종 기업인 대현그룹이 우리나라 성공 신화의 첫손에 꼽혀야 한다.
정 회장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불쾌해했다가 흐뭇해했다가 이제는 쓴웃음마저 짓는다. 영험한 꼬마 무당이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불안한가 보다.
“흙수저? 모래성? 허허, 갈수록 태산이네. 내 회사가 망한다는 말이누? 점괘가 그렇디가? 왜 망하누? 말해 봐라!”
“점괘라뇨, 저 무당 아니에요.”
“혹시 내가 금방 죽나? 어디서 죽누! 뭐 하다 죽누!”
꽁!
정 회장은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 솥뚜껑만 한 주먹으로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에이, 죽기는 누가 죽는다고 그러세요? 정정하신데! 그냥 정치만 안 하시면 된다고요.”
“뭐이라? 정치?”
“계속 밑 빠진 독에 물 붓고 계시잖아요. 정경 유착은 이제 그만두세요.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커지면 된다고요.”
“제대로 말해라. 이번엔 대체 뭐가 보이누?”
“제 노력의 결과를 맨입으로 토하라 하시면 안 되죠. 인센티브!”
“들어 보고!”
“이리 말씀드리는 것도 회장님을 존경하기 때문이에요. 그걸 아셔야 해요.”
나는 정 회장에게 쓴웃음을 지어 주었다. 더 이상 대가 없이 정보를 주지 않을 거다. 싫으면 나도 관둔다. 정 회장은 ‘이놈이!’ 하는 표정을 짓더니 전화기를 들었다.
“내다. 큰 거 한 장 가져와라. 당장!”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는 툭 끊어 버린다. 5분도 채 안 되었는데, 누군가 헐레벌떡 문을 열고 들어와 10억짜리 수표가 놓인 쟁반을 내밀었다. 정 회장은 수표 뒷면에 직접 배서를 하고는 나에게 건네주었다.
‘헉! 10억?’
10억이면 1989년에는 엄청난 금액이다. 서울 근교에 5층짜리 빌딩을 사고도 남을 돈이다.
생각보다 큰 액수를 들이미니 내가 잠시 얼어붙었나 보다. 정 회장은 그런 내 이마를 쿡쿡 찔러 대며 말 안 하고 뭐하냐고 했다.
“이 정도면 되겄나? 말해 봐라. 뭐가 보이누?”
“일단 제2이동통신 건은 확실히 포기하셨겠죠? SJ한테 넘어간다고 말씀드렸으니까요.”
“그게 SJ였누?”
“아, 말씀 안 드렸나요?”
“뭐, 대충 감은 잡았다. SJ면 대통령 사돈 아이가. 빌어묵을 새끼들.”
“그런 특혜를 주기 위해서라도 4대 재벌을 제외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예요. 회장님께서는 지나간 버스에 열심히 손 흔드신 거예요. 깨끗하게 잊으세요.”
“크! 쪼그만 놈이 못 하는 말이 없누. 그래, 이번엔 알려 줄 게 뭐누? 10억짜리는 돼야 된데이.”
“쩝! 기사 보면서 말씀 나누시죠.”
나는 수표가 얹힌 쟁반을 옆으로 치워 놓고 탁자 위에 너부러진 신문을 뒤적거렸다. 경제면 한쪽 구석에 부동산 관련 기사가 있었다.
한창 분당이 개발되고 있을 무렵이니 신문에선 연일 아파트 분양권 불법 전매니 뭐니 투기 과열 양상이 보인다며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이 기사가 의미하는 바는 아주 간단해요. 공영 주택 200만 호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분당처럼 적당한 땅이 당장 없거든요. 그래서 회장님은 또 줄을 대셨죠? 아마 수서나 목동이 아닐까 하는데요?”
“으음, 우째 알았누?”
“제발 이제 그만 좀 물으세요. 제 눈에 다 보인다니까요. 뻔하잖아요. 서울 근방이어야 하는데 공영지구로 묶인 곳이 거기밖에 더 있어요?”
“그래서 우옜다는기고? 대현건설이 그 사업에는 적격이다. 제일 크다 아이가.”
“더 이상 공들이지 마세요. 수서 개발권은 오롯이 한부그룹이 가져갈 거예요.”
“뭐? 그게 말이 되누? 여태 쥐여 준 돈이 얼만데!”
“에이, 회장님 돈이야 가만있어도 주는 돈이고, 한부그룹이야 조건부로 돈을 건넸으니까 그런 거죠. 대통령은 한시직인데 돈 당길 수 있을 때 바짝 당겨야죠.”
“뭐라? 그게 말이 되나 말이누!”
“자, 증거를 대 볼게요. 여기 한부그룹 산하의 한부제철 주식 동향. 오호? 7일째 연속 상한가네요. 비서실에 지라시 한번 확인하라고 하세요. 대현에도 종합 제철소 허가를 안 준 이 정권이 한부제철엔 종합 제철소를 허가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을 테니까요. 헌데 제철소 지을 돈이 어디서 나올까요? 한부그룹이야 강남 은마아파트 지으면서 떼돈 번 졸부니까 수서 개발에 승부수를 던질 거예요. 대통령에게 몇백억을 투자하는 승부수!”
“니, 지금 소설 쓰누?”
정 회장은 말은 그리하면서도 신문 경제면을 챙겨서 가져갔다. 누가 그랬죠. 현실은 소설보다 더욱 소설 같다고. 우리나라엔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 엄청나게 일어났다니까요.
“믿으시든 말든 그건 회장님께 달린 일이에요. 여하튼 뒤통수 한 방이 또 남아 있네요. 여기 국제면에… 아! 여깄네! ‘미소 정상회담 어디서 열리나? 냉전을 끝내고 새로운 세계를 연다’. 이야! 제목 잘 뽑았네요.”
“으잉?”
내가 수서 개발권 로비는 휙 젖혀 버리고 신문의 국제면을 펼치니 정 회장의 눈이 번쩍거렸다.
1989년에는 대한민국과 소련 간에 수교를 맺는 문제로 물밑 접촉이 한창이었다. 소련이 88올림픽에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한 것이 시발점이었고, 올림픽 유치의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정영주 회장이었다.
자연스레 정 회장은 두 나라 간의 경협 실무를 담당하는 한소 경제협회장을 맡게 되었다. 소련과의 물밑 접촉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자! 이제 미국은 소련 봉쇄 정책을 종결할 거고, 소련은 핵무기 감축에다 개혁 개방정책을 강력히 실행하겠죠. 물론 우리에게도 기회죠. 예를 들어 시베리아 가스 개발 같은 거!”
“우째 알았…. 허허.”
“문제는 경협을 하기 전에 소련이 엄청난 차관을 요청한다는 거. 지금 대통령은 업적 하나 남기기 위해서라도 해 주고 싶을 거고, 나라에 돈은 없고 그러니 재벌들에게 손 벌렸을 테고. 대현은 얼마면 적당할지 주판 튕기고 있고.”
제6공화국은 구소련에 자그마치 30억 불이라는 어마어마한 차관을 상환 조건도 없이 준다. 대현그룹이 끼어들지 않았을 리가 없다. 문제는 그 돈에 이자를 받기는커녕 원금을 떼였다는 것이다.
정 회장이 1992년 대선에 출마한 것을 두고 혹자는 노망든 게 분명하다며 까 댔는데 내가 볼 땐 1989년에 이런 식으로 정치권에 연속 세 번 뒤통수를 얻어맞은 게 원인이다.
정치자금이든 로비자금이든 그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허공에 돈만 뿌려 댄 꼴이라 이빨만 부득부득 갈고 있었건만, 1992년에 또다시 여권에서 대선 자금을 요구하자 뚜껑이 열린 거다. 이왕 뜯길 돈으로 대통령 한번 노려 보겠다고 나선 거다.
그동안 정치 헌금으로 수천억이 들어갔다고 언론에 공개하는 것을 시작으로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이 그 증거다.
이성적으로 대선 출마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정 회장은 그걸 무시할 정도로 빡친 거다.
“우째… 아니, 그래서 우옛다는기누?”
“돈 날리죠. 소련이 망하거든요.”
“뭐이라? 소련이 망해?”
“세 번째로 뒤통수 맞는 건 좀 셀 것 같네요. 얼마 보태 주기로 하셨어요? 천억? 2천억?”
“다시 말해 봐라. 소련이 망한다꼬? 어이!”
“동독이 서독에 무너지는 것이 시작이 아닐까 하는데요. 늦어도 1년 안엔 그리될 것 같은데요? 여기 기사를 보세요. 대규모 반정부 시위 사태가 발생하고 있잖아요. 소련은 미국 눈치 보는지 더 이상 동구권 정치에 관련하지 않겠다고 하고.”
“…….”
소련이 동독 반정부 시위 진압에 힘을 보태지 않은 것은 패착이었지. 동구권 큰형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았는데 소련이 어찌 안 무너지겠나.
물론 결과론적인 해석이긴 하다. 누구도 이 정도 반정부 시위로 소련 해체가 본격화될 줄은 몰랐다.
나도 말해 놓고 보니 조금 어이가 없다. 1989년에 이토록 많은 일이 있었단 말인가.
세계정세도 그렇고 우리나라 정치도 참 개판이었다. 이렇게 미국이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데, 대한민국은 기회를 잡기는커녕 지역감정이나 조장하며 정치 싸움에 열중했으니 1997년에 IMF라는 초유의 국가부도사태를 맞이하는 거다.
IMF 사태를 막을 거냐고? 내 잘못이 아닌데 영웅 행세를 왜 해야 하나?
막으려 한들 가능할 것 같지도 않다. IMF로 망한 재벌들은 망할 만했던 놈들이다. 국민들이 한 푼 두 푼 모아서 은행 잔고 채워 주면, 자본금 대비 2,000%가 넘도록 대출받으며 재벌 행세한 거다.
절약해서 저축만이 살길이라고 공익 광고하잖아? 그거 다 저들끼리 양주 마시고 골프 치려고 그러는 거야. 그런 놈들은 한 방에 재편해야 돼. 내가 그런 놈들 회사 싸그리 다 처먹어 버릴 거다.
여하튼 소련 붕괴를 언급하니 정 회장은 자신의 이마를 꾹꾹 눌러 댔다. 믿을 수 없겠지. 믿고 싶지도 않을 거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대현그룹의 유동자금이 말라 버린다는 의미니까. 여태 현 정권에 빨려 나간 돈만 해도 천억은 족히 되는데 말이다.
“이동통신, 수서, 한소 경협까지. 모두 이박명이 껴 있죠. 그 양반부터 정리하세요.”
이박명은 한소 경협의 부회장이었지만, 소련에 가서 협회장 자격으로 활동했다. 차관 협의를 하면서 상환 조건도 챙기지 않은 멍청이다. 언제 어디에 콩고물이 떨어지나 하며 자기 재산 불리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다.
대현에서 자수성가한 이미지를 등에 업고 정치권 진입에 성공했으면서 정권을 잡고는 대현의 돈줄 빨아먹기에 열중했던 인간. 빠른 시간 내에 제거해야 한다.
“휴우…. 내 니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럼 잠시 지켜보세요. 시간 좀 있으니까.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마! 어디 가누!”
“후딱 투자해야죠. 수서 쪽에 땅 좀 사 놓고, 분당에 아파트 한 채 사 놔야죠. 돈은 5년 뒤에 갚을게요.”
“이누마, 그 머리 가지고 기껏 한다는 기 부동산 투기가!”
“에이, 10억 가지고 해 봐야 얼마나 하겠어요? 그냥 우리 식구 먹고살 정도만 할 거예요. 부동산 졸부 따위는 저도 싫어요.”
뭐, 사실이다. 적당히 할 거다. 정 회장은 날 시험하는 거니까. 이 돈을 부동산 투기에 쓰면 점수는 좀 깎이겠지만 식구들을 단칸방 월셋집에 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은가.
수서에서 마당 넓은 집 한 채 사 주면 부모님이 평생 먹고살 정도는 되지 않겠나. 딱 그 정도가 날 여기까지 키워 준 값이다. 분당에 내 집도 하나 사야지 싶다.
너무 큰 집을 사면 안 된다. 정 회장 눈 밖에 난다. 그리고 남은 돈은 잘 이용해 원금의 수십 배로 불려서 갚아야 한다.
“이누마! 연락처 주고 가라! 어이!”
“KAIST 기숙사요! 전화 없어요.”
“뭐이? 카이 뭐?”
“KAIST! 한국과학기술대학교요!”
“뭐이 시험 친다더이 기술 배우러 갔나! 이누마가 뭐한다꼬! 그 머리믄 서울대를 가야지!”
“어휴!”
철컥!
나는 그대로 회장실을 빠져나왔다. 굳이 공대 서열을 알려 준다고 말을 보탤 필요는 없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다.
내가 말한 바는 밑에 있는 양반들이 알아서 조사해 줄 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는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다.
- *
한 달은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갔다. 대학 합격자 발표가 났고, 부모님과 함께 수서 전역의 부동산을 뒤져서 가격 대비 제일 건평이 넓은 양옥집을 샀다.
부모님과 누이들은 방이 세 개라며 좋아라 했다. 화장실도 수세식이고, 기름보일러라 뜨거운 물도 콸콸 나온다고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걸 보며 나도 웃어 주었다.
아이를 좋아하는 큰누나에겐 유치원 보육 교사 자격증을 따라고 권유했고, 부산대 휴학 중인 작은누나에겐 4년 치 등록금과 자취방을 구해 줬으며, 남동생에겐 컴퓨터 한 대를 사 주며 게임이든 뭘 하든 맘껏 갖고 놀라고 했다.
내 집으로는 분당 구미동 쪽에 3층 양옥집을 구매했다. 차고가 딸려 있고 높은 담벼락 안에 작은 연못과 정원이 있는 붉은 벽돌집 말이다. 자그마치 3억이나 주고 샀지만 뭔 상관인가? 20년만 지나면 가격이 열 배로 뛸 텐데.
분당 집에 혼자 있기 뭐해서 가족들과 함께 수서 집에 머물렀다. 본격적으로 일이 시작되면 독립해서 살아갈 생각이다. 내 집은 내 집, 부모님 집은 부모님 집이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여보세요.”
-마! 이누마! 기숙사 있다무! 뭔 기숙사누!
전화를 받자마자 정 회장의 쩌렁쩌렁한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다. 비서실도 아니고 직접 전화하신 것을 보니 화가 단단히 나셨나 보다. 우리 집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지?
“아유, 아직 입학 전이잖아요. 제가 먼저 연락드린다고….”
-마! 뉴스 봤으면 당장 내한테 튀와야지! 뭐한다꼬 집에 있누!
“지금 가 봐야 제가 할 일도 없잖아요. 나중에….”
-이누마가! 죽고 잡나! 당장 안 튀오누! 어이!
“아, 예!”
-택시 타고 바로 튀오이라! 알았누?
“옙!”
전화기 너머에서 정 회장이 불같이 화를 냈다. 식구들이 뭔 일인가 하며 불안하게 쳐다봤지만 싱긋 웃어 주었다. 막 저녁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내 좀 나갔다 올게예. 급한 일이 생겨가꼬.”
“밥은 묵고 가라.”
이상하게 식구들과 같이 있으면 사투리가 나온다. 집에서의 시간과 밖에서의 시간이 달리 흘러가는 느낌이다.
“아입니더. 어른이 저리 부르는데 지금 가 봐야지예. 식사하이소.”
“그래? 알았다. 퍼뜩 갔다 온나.”
“며칠 못 들어와도 걱정 마이소. 대현그룹 본사에 가는 거이니까.”
“우야, 알았다.”
“내 안 본다고 술 먹지 말구예.”
“으이, 안 묵는다.”
아버지의 표정이 많이 밝아졌다. 조만간 직장도 알아보신다고 하니 예전의 모습으로 서서히 돌아올 것이다. 집안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으리라.
나는 식구들을 뒤로하고 청바지에 두툼한 외투 하나 걸치고 집을 나섰다. 구멍가게에 들러 빵과 우유를 사서 먹으며 택시에 올라탔다.
빵 부스러기 흘린다고 기분 나쁘게 쳐다보던 운전기사에게 ‘따블’이라고 말하니 대번에 표정이 상냥 모드로 변했다.
- *
총알처럼 달려 대현 본사 정문 앞에 다다르자 경호원들이 우르르 달려 나와 택시 문을 열어 줬다.
질질 끌려가듯 회장실까지 밀려 들어간 나는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엔 잘나가는 정 회장과 그의 아들 세 명이 같이 있었다. 정구몽, 정헌몽, 정준몽. 수많은 정 회장의 아들들 중에 인정받는 세 사람이다.
“와 이리 늦었누!”
“총알택시 타고 왔습니다.”
“이거 보이라, 이거! 독일이 통일됐다 안 하누!”
정 회장이 가리키는 쪽에선 커다란 TV가 벽장처럼 서 있었다. TV에서는 연신 베를린 장벽을 깨부수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정말 뜬금없었지. 통일 선언도 딱히 없었는데 베를린 장벽부터 무너져 내렸거든. 동독의 정치인이 TV 기자회견을 하다 ‘언제쯤 사람들이 동독과 서독을 자유롭게 올 갈 수 있느냐?’라는 기자의 질문에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다’라고 말한 직후 동독 국민들이 미친 듯이 몰려가 베를린 장벽을 부숴 버린 것이다.
“그러네요. 부럽네요.”
“니가 말한 대로 됐다. 그라므 그다음에는 소련이 무너지는 거누? 어이?”
“시작됐네요. 동유럽권이 우수수 떨어져 나갈 테니 그렇다고 봐야죠. 길어 봐야 2년?”
“들었제! 저놈 말 들었제?”
“아버님, 어린애 말을 그리 쉽게….”
“닥치라! 니 자동차 사업 건져 준 사람한테 뭔 소리누? 그리고 니 며칠 전에 뭐라캤는지 기억 안 나나? 독일이 1년 안에 통일되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안 했나 말이누! 어이!”
정구몽 사장은 정 회장이 주먹을 붕붕 휘두르자 찍소리 못 하고 몸을 움츠렸다.
정 회장은 모든 일을 경험론에 바탕을 두는 사람이다. 눈앞에 증거가 나타났다고 생각하면 절대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정헌몽, 정준몽 사장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학생이 그 무당인가요?”
“참 잘생겼네, 하하.”
정헌몽 대현전자 사장은 국문학과 출신답게 차분하게 말을 걸어왔고, 정준몽 대현중공업 사장은 특유의 억양 없는 말투로 내 외모를 칭찬했다.
지금 정헌몽 사장이 마흔하나, 정준몽 사장이 서른여덟이니 사장치곤 꽤나 젊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금수저를 넘어선 사람들에게서 보이는 자신만만함이 느껴진다.
나와 눈을 맞추는 정헌몽 사장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외모는 정영주 회장을 빼다 박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아들과 달리 대현상선에 대현전자까지 두 곳의 사장직을 겸임했고, 왕자의 난에서 승리해 그룹 회장 자리를 이어받았다.
효자이긴 한데… 그리 명석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 회장의 유훈이라며 대북 사업에 그리도 매달렸다.
결국 회사 실적은 곤두박질쳤고, 대북 자금 불법 송금이라는 정치 문제까지 연루되어 2003년에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한다.
으이그! 당신이 자살한 건 안타깝긴 한데, 당신 때문에 망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대현전자 주식 폭락해서 자살한 사람들도 많아.
대현전자 직원이었던 나도 수천만 원이나 손해 봤다고!
대현전자에서 하청으로 빠져나갈 때 우리 사주 융자금 갚는다고 퇴직금까지 탈탈 털리고, 통장에 18만 원밖에 안 남았을 땐 말 그대로 참담했다. 내 마누라 하루 종일 방구석에서 펑펑 울었어. 마누라 적금도 헐었거든!
“학생, 왜 그리 쳐다보죠? 내 얼굴에서도 뭔가 보이나요?”
“저 무당 아닙니다. 그래도 도와 드리긴 할게요. 비키세요.”
나는 정헌몽 사장을 옆으로 젖히고 정 회장 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벌써부터 정헌몽 사장에게 허리를 굽힐 필요는 없다. 순전히 내 필요성에 따라 이 양반과 거래를 할지 말지 결정할 거다. 내 입지가 확보되기 전까지는 모든 일에 철없는 고등학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 이리 오이라. 니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사 놨다.”
“어린애 취급이시네요.”
“싫누?”
“아뇨, 좋아요.”
나는 고상한 접시 위에 놓인 고급 아이스크림을 찻숟갈로 떠서 쪽쪽 빨아 가며 정 회장과 눈을 맞췄다.
“들어 봐라. 니 말대로 이동통신이나 수서 개발 건은 물 건너갔드라. 돈줄은 끊어 버렸다. 미운털이 좀 박히겠다마는 그간 준 돈이 있으니까 뭐라카지는 않을 기고…. 문제는 소련인데, 우리 회사에서 투자키로 한 돈이 3,800억쯤 된다. 진짜 소련이 망하는 게 맞누? 그게 진짜면 뭐로 증명할 기라? 내 들어 보고 돈 회수할지 말지 고민해 볼란다. 내 복채는 두둑이 주꾸마.”
정 회장은 마치 준비를 한 것처럼 말을 줄줄 읊어 댔다. 평소 말이 극단적으로 짧은 걸 봤을 때 무척 특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3,800억이라…. 어마어마한 돈이다. 1989년이면 더욱 엄청난 액수다. 우리나라 GDP가 240조에 불과할 때다.
“회수하긴요, 한소 수교하는 조건으로 오가는 돈인데요.”
“뭔 소리누! 우리는 손해 보는 장사 안 한다. 수교는 무슨, 빨갱이들 아이가!”
“빨갱이는 무슨 빨갱이에요. 빨갱이라고 장사 안 하실 거예요? 10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긴 하지만 소련은 아직까지 GDP로 세계 2위인 초강대국이라고요. 시장 잠재력이 어마어마해요.”
“망한다무! 소련이 망한다미! 어이?”
“망하죠. 그러니까 기회죠. 돈 쥐여 주세요. 국채 말고 회사채로 전환해서! 대현이 주는 돈은 대한민국이 빌려 주는 돈이 아니라 대현이 빌려 주는 돈이라고 명확하게 하시라고요.”
“뭐이~ 이느무 무당 놈의 말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으. 이놈 뭐라카누? 느그들은 알아듣겄나?”
정 회장이 방 안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고, 아들들도 덩달아 표정이 심각해졌다.
“학생, 우리가 듣고 싶은 것은 소련이 정말 망하느냐, 망한다면 정확히 언제 망하느냐 하는 것이네. 차관을 회사채로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라고.”
“국가 부도가 확실하다면 차관에 돈을 보탤 수는 없어. 소련이 땅바닥에 드러누우면 받을 길이 없다고. 국채가 아니라 회사채라면 더욱더.”
난 찻숟갈을 탁 내려놓았다.
“아이, 답답하네. 증거가 널렸는데 그걸 굳이 설명해야 돼요? 그리고 엄청난 기회를 앞두고 쌈짓돈이 아깝다고 발을 빼요? 회사채라는 방법까지 알려 줬는데? 그래 가지고 사장님 소리 어찌 들으세요?”
“학생, 말이 좀 심하네.”
“정준몽 사장님 말대로 저는 학생이죠. 대현그룹 직원이 아니라고요. 제 말 듣기 싫으면 내쫓으시면 돼요.”
“학생!”
“여기까지! 여태 한 말도 공짜로 알려 드린 겁니다. 정 회장님 얼굴 봐서 말입니다.”
“준몽이, 니 뭐하누! 니 지금 꼬마 무당 윽박지르나!”
“에이, 나 갈래.”
“어디 간다카누!”
정 회장이 눈을 부라리며, 일어서는 나를 확 잡아채 소파에 다시 앉혔다. 그러곤 아들들에게 각 세우는 내가 미웠는지 머리를 마구 헝클어 댔다.
당연히 각 세워야지. 아무 대가 없이 좋게 좋게 말해 주면 꼬붕인 줄 안다니까.
내 눈빛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말 안 하고 뭐하냐는 사장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난 아직 늬들 꼬붕이 아니야! 대접 제대로 해!
“에이 씨, 누굴 꼬붕으로 알아요. 대현은 정말 이게 문제야. 뭐든 성급하게 밀어붙이고 뒷일은 생각을 안 해. 지금 와서 돈을 뺀다고? 누구 좋으라고? 다른 재벌들은 뭐 안 아까워서 돈 보태 준대요? 누구 하나 못 하겠다고 총대 메는 짓 할 수 없으니까 그런 거 아니에요! 한소 수교는 군바리 대통령이니 물통령이니 안 좋은 소리만 듣는 대통령의 거의 유일한 업적인데, 그걸 대현이 총대 메고 망친다고? 대통령이 좋아라 하겠네! 타 재벌들은 더 좋아하겠고! 돈도 아끼고, 대현만 찍히고! 회장님, 감당할 수 있겠어요? 해외 건설이며 선박 수주할 때 국가가 보증 안 서 주면 어쩌시려고요? 원자재 수입할 때 세관에서 안 풀어 주면? 정부랑 한판 붙으시게요? 누가 이기나 한번 해 보시게요?”
“무이… 야 이, 어른한테 뭔 소리고!”
꽁!
정 회장이 내 머리통을 쥐어박았지만 아프지도 않다. 손에 힘이 들어갈 리 없지.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거든. ‘소련은 장차 망할 테니 차관에 돈 못 보태겠는데요.’라고 앞장서서 반대하면 뒷감당 못한다. 한마디로 대현은 미친놈 되는 거다.
“수한 군, 여기 아이스크림 녹기 전에 들어요.”
“아버님도 손찌검 그만하세요. 무당… 수한 군이 아파하지 않습니까.”
“내, 내 것도 들어요. 난 당뇨기가 있어서.”
내가 열변을 토하자 아들들의 말과 행동이 달라졌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거든. 그리고 여차하면 내가 자리를 박차고 나갈 듯하니 각자 앞에 있던 아이스크림 접시를 내게 밀어 주며 사과를 대신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마구 입에 퍼 넣으며 사장들을 쳐다보았다. 그들에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줘야 한다.
“대현은 고쳐야 해요. 힘 좋은 불도저가 밭으로 가면 대박이지만 벼랑 끝으로 가면 동반 자살이잖아요. 모든 일을 회장님 결정에 맡기는 것! 저 같은 조언을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 그게 최근 대현이 병살타만 치고 있는 이유라니까요.”
“병살타라. 으흠….”
“정헌몽 사장님, 대충 눈치채고 계셨죠? 상선 쪽이면 이런저런 얘기 많이 들으시잖아요.”
“…….”
정헌몽 사장은 대현전자 사장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대현상선의 사장이기도 하다. 업무를 제대로 했다면 세 아들 중에 가장 눈과 귀가 밝을 수밖에 없다.
“헌몽아, 말해 봐라. 이느마가 뭐라카는기고? 밖에서 뭔 소리를 들었누?”
내가 정헌몽 사장에게 의견을 묻자 정 회장도 재촉해 댔다.
내 추측을 근거로 스스로 상황 파악을 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내 가치를 제대로 알게 된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답을 보고 나면 아주 쉽게 느껴지는 법이다. 소련이 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정헌몽 사장님, 소련이 망한다는 가정하에 최근의 일을 떠올려 보세요. 새롭게 보일 거예요.”
내 말에 정헌몽 사장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으흠, 지난 몇 년간 곡물가가 급등세고, 유가는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선 수에즈운하를 통과하는 물동량도 급감하고 있고요. 선물 시장도 심상찮습니다.”
“그래서 그게 머 으옛다는기누?”
“미국이 곡물 수출을 의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말이며, 산유국도 미국의 저유가 정책에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소련의 경제는 동유럽에 가스와 기름을 팔아 식량을 수입하는 형태인데, 그게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는 거죠. 소련의 식량 사정은 최근 몇 년 사이 급속도로 나빠졌습니다. 배급제인 국가 체제의 근간이 타격을 받은 거죠. 수에즈운하 물동량 저하는 소련이 동유럽 국경에 행사하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유럽 국가들이 배로 제 3국을 거치지 않고 육로를 통해 다이렉트로 서유럽 물자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으로… 아마 그럴, 아니 그렇습니다. 그렇게밖에 해석이 안 됩니다.”
그래, 잘 읽었네.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상황을 보니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지? 그의 추측은 곧 확신으로 바뀔 거다.
“우와! 잘 읽으셨네요. 경제가 그렇다면, 소련의 정치는 어떻게 보시죠?”
“소련의 수장 고르바초프는 군부의 지배력을 잃었어요. 핵 동결도 모자라 핵 폐기에 동의했으니 군부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죠. 게다가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개방정책은 소련 내부에 극단적인 인플레를 일으키고 있어요. 군인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동유럽 국가들은 군부가 분열된 소련이 더 이상 무섭지 않은 겁니다. 아마 내부 연합국들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짝! 짝! 짝!
“오! 백 점짜리 답안지예요. 축하 축하!”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박수를 보냈다. 멍청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똑똑한 양반이다. 어째 이런 사람이 대북 사업에 그리 목을 매었을까? 북한에 불법 송금까지 하면서 말이다. 내가 모르는 가족사가 있나 보다.
“으음, 그라므 소련이 망하는 거는 수순이다 그 말이루? 소련이 페레 뭐시기로 자승자박했는데, 미국이 거기다 불을 붙였다는 거 아니누?”
“빙고!”
“그라무 왜 돈을 빼면 안 된다는기누? 대통령한테 알려서라도 돈 빼야 하지 않누!”
“말씀드렸잖아요. 기회라고요. 미래를 살 수 있다고요.”
“으잉?”
나는 정 회장에게 아이스크림을 권하면서 아들들을 쳐다보았다.
지금이라면 입 한번 거하게 털면서 이 세 명 중 한사람을 뒷배로 택할 수 있을 것 같다. 정헌몽 이 양반이 내 이력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긴 한데 너무 유약하단 말이야.
솔직히 갈등은 있었지만 그리 길지 않았다.
- *
나는 먼저 대현자동차를 언급했다.
“정구몽 사장님, 차압하면 뭘 가져오고 싶으세요?”
“차압?”
“빚잔치하면 차압 딱지 붙여서 경매 넘기잖아요. 우리 집이 당해 봐서 알아요.”
“어, 글치. 그렇지.”
“소련 애들 대륙 간 미사일 쏘는 애들이에요. 엔진 기술은 최고죠. 미국 애들처럼 돈을 안 쥐여 주니 일을 안 할 뿐.”
“아! 자동차 엔진. 기술자들.”
“정준몽 사장님, 중공업도 꽤나 도움 될 텐데요. 방위 사업은 애국심의 발로죠. 최신 전차나… 아! 자주포 같은 거 현물로 몇 대만 가져오면 대현중공업에서 더 잘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돈도 되고요.”
“어? 그게… 가능할까?”
“소련 망한다니까요. 군부 애들이 실제 주인인 회사에 직접 회사채를 빌려 줘요. 소련이 혼란기에 빠지면 돈 대신 현물 가져오면 된다니까요. 좋다고 할걸요. 핵무기도 팔라고 하면 팔 겁니다. 안 그래요?”
정구몽 사장, 정준몽 사장의 입이 귀에 걸린다. 생각해 보니 대박이죠? 탐나는 기술이 창고에 잔뜩 쌓여 있는 듯 보일 것이다. 기술자들도 마구 데려올 생각에 신이 나나 보다.
“이보게, 수한 군. 나는? 내가 먼저 학생 생각을 지지하지 않았나?”
가만히 있던 정헌몽 대현전자 사장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공으로 먹을 사업 아이템을 내놓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맨입으로요?”
“으잉? 왜 나만 그러나?”
“왜냐면 사장님 회사에 취직하고 싶거든요.”
“와! 오라고! 당장 와! 내가 비서실장으로 임명하겠네.”
“뭐꼬! 이놈은 내 끼다. 내가 발견했으!”
정 회장이 발끈했다.
“에이, 저도 좀 커야죠. 저를 차세대 개발팀장으로 임명해 주세요. 인사권도 주시고요. 아! 임기 보장도 해 주셔야겠네요. 5년 정도로 하죠.”
“으잉? 대현상선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면 대현상선은 장사꾼 집단이며, 대현전자는 기술자 집단이다. 내가 대현전자를 집어 올리자 정헌몽 사장으로선 조금 의외였나 보다.
“에이, 상선은 무슨. 대현전자죠. 그리고 당장도 아니에요. 1~2년 뒤에 팀원 몇 명 데리고 입사할게요. 투자비는 걱정 마세요. 그때까지 돈은 충분히 벌어서 갈 테니까.”
“돈을 어찌 벌지 그것부터 말해 봐…요. 그래야….”
“각서 먼저.”
“으잉?”
“차세대 개발팀장! 인사권! 임기 5년 보장.”
“뭐하는 기누! 당장 쓰 주라! 볼펜 가져온나! 어이!”
정 회장이 고함을 지르자 큰아들이 나서 종이와 볼펜을 가져왔다.
역시 정 회장이다. 그의 촉이 발동한 거다. 내가 조금 쉽게 가려고 대현이라는 이름을 빌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직감한 듯하다.
단언컨대 대현전자에 입사하는 건 대현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나의 호의다.
쓱. 쓱. 쓱.
“자, 이렇게 적으면 되나. 본인 정헌몽은 대현상선 및 대현전자 대표 이사로서 유수한을 차세대 개발팀장으로 임명하고….”
희대의 날림 계약서가 작성되었고, 참석자 모두가 지장을 찍어 줬다. 왜냐고? 정준몽 사장은 넌지시 자신에게 오라며 계약 파기 시 대현중공업으로 옮길 수 있다는 항목을 손수 적어 넣었고, 정구몽 사장도 회사 이름만 바꿔 고스란히 그 문구를 따라 적었으니까.
사장들은 신내림받은 고등학생 하나 곁에 둔다는 식으로 쉽게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아무리 잘났어도 팀장은 아무나 하나?’ 하는 표정이 읽힌다. 인사권을 준들 팀원들이 밑으로 오겠느냐는 식이다.
상관없다. 실력으로 증명해 줄 테니까.
나는 지장 범벅인 계약서를 품에 넣고는 정헌몽 사장에게 설명을 시작했다.
“자, 대박이 남았죠. 완전히 날로 먹는 건데….”
“뭔데 그러나…요?”
“소련 지방정부를 돌아요. 독립할 가능성이 높은 곳 말이에요.”
“그, 그래서! 누구랑 뭘 계약하면 돼…앱니까?”
정헌몽 사장이 아무리 국문학과 출신이라고 해도 고등학생에게 존댓말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카자흐공화국과 광산 개발권을 계약하셔야 해요. 구리 매장량이 세계 4위, 코발트, 아연 등등 주요 비철 금속 매장량도 엄청나고요. 지정학적 특성상 석유가 매장되었을 가능성도 높죠.”
“그걸 어찌 아나?”
“역사책에 나오니까요. 원래 카자흐스탄의 구리 광산은 100년 전에 영국 애들이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게 러시아 혁명으로 소련에 넘어갔고, 지금까지 미국이나 서방 세력이 소련을 봉쇄하고 있었으니까 잊힌 거죠. 말 그대로 정말 잊힌 거예요.”
“그런데 밑도 끝도 없이 광산이라니? 그것도 철이 아니고 구리라니!”
“에이, 반도체 회사 사장님께서 왜 이러실까? 철의 시대가 가고 신석기(반도체를 비유) 시대가 오고 있다고 광고하시는 분께서 말이에요. 컴퓨터 부품에 구리가 얼마나 많이 쓰이는지 모르세요?”
“아무리 그래도 18세기도 아니고, 광산에 투자하다니….”
정헌몽 사장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전자 회사 사장이라는 양반도 컴퓨터 시장의 폭발적인 성장을 아직 가늠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몇 년만 지나면 컴퓨터 시장이 사장님이 예측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커질 거예요.”
“으응? 얼마나 커지기에?”
“얼마까지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거기에 곱하기 백? 아니다, 천쯤 하시죠. 물론 시장 규모가 커져서도 좋지만 구리라는 전략 자원을 안정적으로 수급한다는 측면에서 이 기회를 놓쳐선 안 돼요.”
“…….”
정헌몽 사장은 결국 입을 닫아 버렸다. 내 말이 일개 고등학생이 늘어놓았다고 하기엔 꽤나 묵직하겠지. 머리를 굴리는 느낌이 든다.
차관 손실을 벌충할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잘만 되면 대박인데! 하는 느낌이 들죠? 대박 맞아요.
“허허. 이누마, 말해 봐라. 얼마나 투자하믄 되누?”
생각에 잠긴 정헌몽 사장 대신 정영주 회장이 내 머리통을 마구 쓰다듬었다.
“에휴, 제 말을 그렇게 믿으셔도 돼요? 직접 조사를 해 보셔야죠.”
“뭐라카누? 니 지금 거짓부렁한 거이가?”
“거짓말은 아니지만….”
“내 눈은 돈 안 본다. 자고로 사람을 봐야 하는 기지. 물론 귀도 잘 열어야지. 알았나?”
정 회장이 확신에 찬 눈빛으로 느물거렸다. 정 회장은 내 말에 완전히 확신이 섰나 보다. 사기는 아니니까 걱정 마시고.
하긴, 소련이 망한다면 내다 버리는 돈일 테니 이러나저러나 내 말을 믿어 보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국채에 전혀 안 보태 주면 정치 보복이 들어올 테니 딱 절반만 회사채로 떼죠. 그럼 대충 1,900억쯤 되나요? 그중 25%는 엔진 사업체, 25%는 방위산업체, 50%는 지방정부로 돌리시죠. 최소 세 배 이상은 이득을 볼 거예요. 물론 몇 년만 견디면!”
“몇 년이 뭐누? 좀 더 정확히 말해 보이라. 2년쯤 되누? 그게 아이무 3년?”
“아, 저는 점쟁이가 아니에요. 거시적인 현상만 보는 거지. 저도 동독이 이렇게 빨리 무너질지 몰랐어요. 정확한 연도를 찍어 드릴 순 없다고요, 회장님.”
“그라므 당장 내년이라도 구릿값이 폭등할 수 있다는 얘기 아이가!”
“아, 그건 아니에요. 기술 발전은 그거와는 달라요. 최소 3년은 기다려야 해요.”
“최소 3년?”
이런, 내가 말실수를 했다. 이렇게 정확히 알려 주면 안 되는데. 정 회장의 화술은 정제되지 않은 술자리 대화처럼 들리지만 어느새 사람을 훅 잡아당겨 뭐든 털어놓게 만드는 마법 같다. 조심해야 한다.
“뭐, 대충 그렇다는 의미죠. 1992년쯤 되면 컴퓨터가 대중화될 거예요. 그 뒤론 언제든지 시장이 폭발할 기반이 마련되었다고 봐야죠. 그 전에 소련이 망하면 대현에 천운이 따르는 거고요.”
“천운이 따르겠나? 점괘 한번 내 봐라.”
“…….”
정 회장은 눈을 반짝거리며 내 말을 기다려 주었다. 1분, 2분이 지나도 웃으며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에휴. 저보고 도박을 하라시면 그 전에 소련이 망한다에 걸겠어요.”
“하하, 조오타~ 좋아!”
정말 기분이 좋은지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 댔다.
나는 안다. 윈도우 3.0으로부터 불붙기 시작한 퍼스널 컴퓨터 시장은 1992년 윈도우 3.1이 출시되면서 PC 시장에 탄력이 붙기 시작한다.
접근성이 뛰어난 윈도우 O/S와 함께 IBM과 Mac으로 대변되던 컴퓨터 시장에 컴팩(Compaq) 같은 저가 PC 메이커가 대거 등장하면서 불에 기름을 끼얹은 듯 말 그대로 PC 시장이 폭발해 버린다.
덩달아 금, 구리, 텅스텐, 타이타늄, 폴리이미드 등등 반도체 관련 원부자재 또한 가격이 폭등한다.
“흐흠,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움직이는 게 좋겠다, 그거누?”
“예, 당연하죠. 대현은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돼요. 그럼 하늘이 돕겠죠.”
“후후. 말은 참 잘해. 그래, 니는 우얄기누? 나랑 같이 소련이나 휘익 돌아보자.”
“회장님, 학생은 공부를 해야죠. 제가 소련엘 어찌 갑니까?”
“무이~ 공부는 어디서든 할 수 있다. 호텔방 잡아 주꾸마. 그서 열심히 해라!”
“아유, 저도 바빠요. 회장님 따라다닐 시간 없다고요. 그리고 직접 뛰어드실 생각은 접어 두세요. 이번 기회에 사장님들 역량도 확인하셔야죠.”
“으음, 내보고 빠지라고? 이런 중요한 일을 쟤들한테 맡기라 그 말이누?”
그런 큰일에 아들들을 내세우라는 말에 정 회장이 어이없어 했다.
정영주 회장이 명예 회장으로 물러선 이유는 그룹의 자잘한 일은 사장들이 알아서 하지만 그룹에서 큰일은 자신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내가 볼 때 그건 패착이었다.
대현의 가장 큰 패착은 정 회장이 정정할 때 후계자 교육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이름 그대로 자본이며, 집중된 자본은 곧 권력을 의미한다. 후계자를 제대로 짚어 내서 그룹 자본을 집중시켜야만 그 후계자가 그룹을 좀 더 높은 자리로 올려놓을 수 있다.
이번에도 대현이 그걸 실패하면 내가 대현을 접수해 버릴 거다. 내가 대현에 머물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에고. 회장님은 그냥 걸어 다니는 신문이라고요. 기자들 끌고 다니는 건 당연하고, 수행원들도 엄청 데리고 다니실 거잖아요. 이 일에 파리가 끼면 말짱 꽝이에요!”
내가 인상을 팍 찡그리자 정 회장도 생각이 조금 달라진 듯 표정이 신중해졌다.
“아버님, 저한테 모두 맡기십시오. 잘할 수 있습니다.”
“오랜만에 큰 건 좀 맡겠네요.”
“카자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그에 반해 아들들은 이게 기회라고 여겼는지 출사표를 던져 댔다. 내가 역량 운운하자 그룹 승계자로서의 자격을 증명할 찬스라고 직감한 거다. 이런 경쟁은 참 좋은 거다.
사장들 눈을 살짝 밖으로 돌려 버리고, 그사이에 나는 정 회장 아래에서 좀 더 큼지막한 일을 수행할 거다. 그 일만 성공하면 대현에서 나의 입지는 아주 단단해질 거다.
“으흠….”
“맡기세요. 각자 팀도 꾸리게 하시고요. 공략 상대도 직접 선택하고요. 다른 건 몰라도 사장님들의 사람 보는 눈이 어떤지 확실히 검증할 수 있으실 거예요.”
“으흠, 사람 보는 눈?”
“나중에 회장님 소리 들으실 분들인데, 사람 보는 눈이 어두우면 안 되죠. 기술, 마케팅, 미래 전략. 모두 사람이 만들어요. 아시잖아요.”
“인사가 만사다 그기가? 그래, 정보 빼돌리는 놈을 곁에 둔다면 이 일은 절대 성공 못 하겄네.”
“그렇죠. 자고로 배신자를 가신으로 둔 군주는 결국 망하잖아요.”
정 회장은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거렸다. 프로젝트도 세 개씩이나 되고, 덩치도 비슷하니 아들들의 능력을 검증할 기회이기도 하다. 끝내 뒤로 빠지기로 마음을 정했나 보다.
한데 이어진 말은 조금 의외였다.
“니는 어뜬누? 니는 평생 배신 안 할 기제?”
“오! 제가 벌써 가신이에요?”
꽁!
느닷없이 꿀밤이 날아들었다.
“이런 정보를 다 알고 있다 아이누. 허허.”
“회장님이 정치만 안 하시면 등 돌릴 이유가 없죠.”
“정치하지 마라? 허허허, 니 가신 맞네! 쓴소리 잘하는 거 보이. 크하하하하하!”
정 회장은 소파 팔걸이를 쿵쿵 쳐 대며 호탕하게 웃어 댔다.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한 게 어디 가서 할아버지 소리는 듣지 않겠다.
20년만 견뎌 주십시오. 일본 넘고 중국 밟고 미국하고도 한번 견주어 보게. 그리되면 당신의 일생은 가히 전설이 되지 아니겠습니까? 그 덕분에 나는 귀족 한번 되어 보는 거고.
- *
그길로 사장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대현그룹 본사에 며칠 머물며 한소 경협의 실무 자료를 마음껏 읽어 가며 공략 대상을 추리고 이득을 가늠해 적당한 투자액 또한 정리했다.
30년 전 기억과 20년 차 직장인의 노하우를 모두 녹여 내서 보고서를 만들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정 회장에게 보고서를 넘겨주었고, 그룹 후계자의 자격 검증에 쓰시면 어떻겠냐고 조언까지 했다. 그 대가로 한두 달만 날 좀 내버려 달라고 했다.
나도 정말 바쁘거든. 1989년이 지나가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해.
내가 회장실을 떠나면서 챙긴 것은 꽤나 여러 가지였다. 대현그룹 마크가 선명한 명함과 정 회장의 신원 보증서가 포함된 미국 출장 서류, 그리고 미국 비자가 붙어 있는 여권, 외환은행에서 입출금이 가능한 수표책 등등.
아! 보너스로 칼잡이 사내를 내 보디가드로 데려왔다.
어서 미국 가자. 시간이 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