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첫 단추를 끼우다
대현자동차 울산 공장.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정 회장을 맞이했고, 작업복에 붉은 머리띠를 한 노조 간부들도 정 회장에게 인사를 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아서는 서로에게 욕설을 해 대며 싸운다 해도 정 회장에게만큼은 존경심을 표한다.
정영주 회장은 그런 존재다. 거대 재벌 총수이면서도 혼자 운전하며 돌아다니고, 5월 1일 노동절에는 씨름대회에 참여해 사원들과 샅바를 잡는 사람이다.
“임자들, 뭐한다고 나와 있누. 다들 들가자!”
“옙!”
“이쪽입니다, 회장님.”
“이 아이는….”
“뎃꼬 오이라. 귀한 놈이루.”
“귀한? 어이구!”
모두들 날 보고 회장님의 혼외 자식이라도 되나 하는 눈초리를 보낸다. 웃음부터 나온다.
나는 쫄래쫄래 정 회장 뒤에 붙어 협상 장소로 들어갔다. 누군가 나에게 요구르트를 가져다주기에 쫄쫄 빨아 대며 지켜보았다.
텅!
“이~ 뭐… 누가 적었누! 이래 가꼬 협상이 될 턱이 있누!”
“아… 예?”
정 회장은 노사 양측에서 제시한 협상안 초안 중에 사측에서 제시한 문서를 읽다 말고 책상을 크게 내리쳤다. 눈에 쌍심지를 켜고 호통을 치니 회의장 전체가 순간 얼어붙는다.
노조 측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는지 회장 앞에 들이밀려던 협상안을 책상 위로 올려놓지는 못했다.
잘하고 있다. 노조 측에서 제시하는 협상안을 읽으면 안 된다. 월급을 크게 올려 주는 것은 오로지 정 회장의 판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노조의 협상안을 받아들인 형태가 되면 절대 안 된다.
“으이그, 쪼잔하구로. 4.7% 인상안이 뭐라, 4.7%가! 10%는 돼야 안 하누! 그래야 직원들이 정상 복귀할 거 아니루!”
“허헉!”
“우와아아아!”
텅! 텅!
“그리고 10%가 전부 아니다. 다른 그룹들 월급 다 뒤져서 5% 이상 더 못 받는 거무 더 올리 주라. 우리 업계 최고다이! 알았누!”
“우아아아아!”
마치 판사가 판결을 내리듯 손바닥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를 질러 대니 사측의 신음 소리와 노조의 환호성이 마구 섞여 간다.
“공짜 아이다! 내 잘 적어 줄 테이까 확실하이 계산해라. 올해 말까지 매출 목표 대비 수익 난 거 따져서 최대 600%까지 보너스 주라. 인사고과 확실히 따져 갖꼬 잘한 놈은 많이 주고! 잘못한 놈은 내년 월급 깎아삐라! 알았누!”
“예, 옙!”
“우아아아아!”
“노조 느그들도 좋아할 끼 아닐 낀데. 느그들은 일 열심히 했누? 인사고과 좋누? 좋으면 그리 좋아해도 된데이.”
“어… 으… 예?”
정 회장은 양복을 입고 있는 사측 임원들에겐 으름장을 놓았고, 붉은 머리띠를 한 노조 대표에겐 느물거리며 웃어 주었다.
정 회장은 그들에게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았다. 협상안 초안에 줄을 쭉쭉 긋고 빈칸에 빼곡히 글자를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내가 적어 준 사항을 거의 모두 반영하는 것 같았다. 일단 확신이 서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그답다.
정영주 회장에 대한 세간의 판단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내가 볼 때 그는 능력 있는 기업가이자 일 중독자다. 그에게 회사는 영혼과도 같은 존재이며 회사의 발전은 삶의 목표이기에 개인의 영달 따위는 집어던져 버린 사람이다.
정 회장은 지금 자신의 손으로 마구 고치고 있는 저 임금 협상안이 회사를 발전시킬 거라는 확신에 차 있는 거다.
툭!
“이대로 해라이! 토시 하나 틀리믄 느그들 다 모가지라. 알았누?”
“옙!”
“노조 느그들도 이 정도로 만족하래이. 어디 가서 이런 대접 못 받는데이. 알았누!”
“옙!”
정 회장이 직접 고친 문서를 돌려 보던 노사 측 대표들 모두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정 회장이 아니라면 이런 극적인 합의문은 결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얼굴에 욕망이 꿈틀거린다.
글자 그대로 읽으면 인사고과만 잘 받으면 보너스 600%, 연봉이 왕창 뛴다. 웃대가리한테 손바닥만 잘 비비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얄팍한 속셈도 느껴진다.
아서라. 그 시스템에선 1~2년만 지나면 자정 효과가 일어난다. 노조 전임자가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까지 하는 귀족 노조도 탄생하지 않고, 출근해서 밑의 애들 갈구는 것이 업무라 여기는 만년 부장들도 점차 물갈이가 된다고. 업무 실적이 자신의 연봉을 결정하는 회사 분위기가 자리 잡으면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애들의 기세를 게으른 놈들은 이기지 못하거든.
“회, 회장님, 그런데 이걸 실행하려면 예산이….”
“임자! 제대로 본 것 맞누? 돈이 왜 없누! 수익이 난 걸 기준으로 보너스 주라 안 했누! 지금 직원들이 말하는 기 뭐꼬! 그걸 해 달라는 거 아니가배! 어이!”
“아, 예. 그건 그런데, 내년에 임금 10%를 올리는 것은 무리입니다.”
퍽!
정 회장은 답답했는지 딴죽을 걸고 있는 임원의 뒤통수를 냅다 갈겼다. 아마도 재무 담당 임원이었을 것이다.
“으이그, 이해가 안 되면 그냥 해라카이! 어! 우리 회사 월급이 딴 회사 월급보다 적으면 우예! 글고 월급 올리 주가 적자 나믄 보너스 없는 거 아니누! 직원들한테 똑바로 교육해라! 월급 두둑하이 챙기가 마누라한테 대접받으랄 카므 미친 듯이 일하라꼬! 어이!”
“…!”
나는 정 회장의 등 뒤에서 피식 웃고 말았다. 똑똑한 양반이다. 차 안에서 서류 검토한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임금 협상안이 어찌 될지 뻔히 꿰뚫고 있었다.
올해 자동차 수출이 대호황이었던 이유는 88올림픽 후광 효과에 삼저효과(三低效果: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가 더해진 결과라는 것도 정확히 알고 있다.
올해야 직원들에게 수백 %에 가까운 보너스를 주겠지만, 내년에는 그러지 못하겠지? 적자는 면하겠지만 연말 보너스는 수십만 원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 어찌 될까? 또다시 노사 분규가 일어난다고? 크크크, 절대 아니다. 실적이 그래서 돈을 그렇게밖에 못 준다는데 어쩌리?
대박이 났으면 연말 보너스도 1989년 못지않은 대박이었을 거라는 아쉬움만 커진다.
그럼 직원들은 뭘 하기 시작하냐? 자연스레 보너스를 못 받게 만든 범인 잡기에 나선다.
제품 기획을 잘못했다느니, 개발팀이 원천적으로 경쟁력이 달리는 제품을 개발했다느니, 불량을 대량 유발한 생산팀이 문제니, 구매팀이 비싼 원부자재를 냅다 수입해 대서 외국 놈들 배만 불려 준 꼴이라느니. 직원들 각자가 이유를 생각하고 들춰내기 시작한다.
흑자가 나면 우리 팀이 잘해서 그런 거고 적자가 나면 저 새끼가 잘못한 거니까.
그때가 승부처다. 회사가 온갖 파벌로 쪼개지기 전에 오너가 직접 나서 그 목소리의 방향을 잘 이끌어 줘야 한다.
근거 없이 타 부서를 헐뜯는 놈들은 솎아 내고, 이렇게 했다면 더 잘됐을 거라고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이들에겐 예산을 왕창 안겨 주며 기회를 한 번 더 주면 충분하다. 그런 분위기를 타면 혁신이 전 방위적으로 일어난다.
“시키는 대로 해라마! 더 이상 말 보태므 그느마부터 짤라 버릴기루. 으이?”
“옙!”
“어… 옙!”
정 회장이 큰 덩치를 들썩이며 으르렁거리자 사위가 조용해진다. 목덜미를 주물럭거리던 그가 터벅터벅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우르르 몰려 나가는 인파 속에 내가 뒤로 처지자 정 회장은 ‘이놈 어디 갔누?’ 하며 뒤돌아 와서 내 머리통을 움켜쥐고 재차 길을 뚫고 나갔다.
협상이 이루어진 건물 밖에는 정 회장에 대한 의전이 어설펐던 것을 보상이라도 하겠다는 듯 양복을 차려입은 이들이 두 줄로 서서 승용차 앞까지 카펫을 깔아 놓고 있었다.
“형님, 노사 대표들과 같이 식사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가시지요.”
“치아라. 니가 뭐했다고? 내가 다 해결해 주고 왔구마는! 돈 아깝다.”
“으, 아무리 그래도….”
정 회장을 형님이라 부르는 걸 보니 정영세 대현자동차 사장이다. 여하튼 쩔쩔매는 중년 신사를 보고 있자니 우습다.
재벌가에서 정영주 회장은 형님 이상이다. 동생이 형님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을 어려워한다.
“사장님, 아버님 이런 거 싫어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버님, 차는 제가 몰겠습니다. 휴게소에서 우동 한 그릇 하고 올라가시렵까?”
“됐다. 내 혼자 갈끼라. 이 꼬마 무당하고!”
정 회장의 장남 정구몽 씨가 나섰다. 이때 정구몽은 대현자동차를 물려받지 못했다. 숙부가 사장을 하고 있었고, 그는 대현자동차 서비스라는 계열사 사장이었다.
‘어디 있다 이제 나타나셨어? 기다렸잖아.’
차기 사장을 노리는 그가 이런 자리에 빠질 리 없지. 그리고 현재 그의 회사는 고객 서비스 담당이니, 자동차 품질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양반을 끌고 들어가야 오늘 작전이 순조롭게 이뤄진다. 나는 목소리를 살짝 가다듬고 고등학생 코스프레를 시작했다.
“우아아아! 텔레비전에서 봤던 아저씨네요. 안녕하세요!”
“어?”
“대한민국 수출 1호 차의 주인공이시잖아요! 와우, 정말 멋졌어요. 좀 보여 주세요! 자동차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보고 싶어요. 제 꿈이에요!”
자동차를 어찌 만드는지는 1도 관심 없고, 이 사람 곁에서 성공할 생각도 전혀 없었지만 이런 기회를 놓칠 순 없다. 대현자동차는 조만간 미국으로부터 시작된 대규모 리콜 사태로 몸살을 앓는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엔지니어들 사이에선 꽤 유명한 일화였기에 나도 기억할 정도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아니라 원인이 너무도 어이없었기에 엔지니어들 입에서만 오르락내리락했다. 해결해 주고 가야지 싶다. 정 회장 눈에 들기 위한 화룡점정이 되시겠다.
“어, 아버님. 이 아이는….”
뒤에 생략된 말은 ‘또 배다른 동생인가요?’라는 말일 것이다.
정 회장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아들의 뒤통수를 때릴 수도 없고 인상만 슬쩍 구겼을 뿐이다.
“구경시켜 주라. 가자!”
정 회장의 말에 정구몽 이사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아무것도 준비 안 했는데 말이다.
내가 원하는 바다. 라인을 깨끗이 치워 버리면 리콜 사태를 일으킨 주범도 사라지거든.
“그럼 연구실부터….”
“우~ 그런 건 싫어요. 불꽃 번쩍번쩍 튀고 철길 따라 자동차 줄줄 흘러가는 거. 자동차 수백 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거! 텔레비전에서 나온 거 실제로 보고 싶어요.”
“그건 아무한테나 보여 주는 게 아니란다.”
“어, 정말 기대했는데…. 정말 보고 싶었는데….”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여간 실망한 게 아니라는 행동을 해 댔다. 그러곤 정 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진한 고등학생의 눈빛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라면 내 눈빛을 읽어 낼 것이다. 확신은 못 하더라도 직감할 것이다.
나의 모든 행동은 계산되어 있으며, 내가 선물 하나를 더 준비했음을 말이다. 그리고 그 선물을 통해 거래를 하고 싶다는 것도.
“뭐하누? 얼릉 앞장서라. 이놈이 보고 싶다 안 하누! 나도 보고 싶다!”
“아, 예. 아버님.”
“허이! 공석에서 그리 부르지 마라캐도.”
“네, 회장님.”
정 회장은 와글와글 몰려 있는 사람들을 헤치고 공장 앞에 쌓아 놓은 바리케이드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순간 작업이 딱 멈춰 버린 공장. 모든 증거가 고스란히 놓여 있다.
파업 중이라 공장 안에는 나를 포함해 십수 명의 사람들만 들어섰다.
정구몽 대현자동차 서비스 사장이 앞에 나서 자동차 조립 공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분명 정영세라는 대현자동차 사장이 옆에 있는데 상관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따위 파벌 싸움은 전혀 관심 밖이었다. 때문에 연신 딴 곳을 찾고 있었다. 어딘가 있을 텐데….
한참을 두리번거렸더니, 공장 뒤편 야적장에 차가 수십 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군데군데 뜯어 놓은 흔적이 있는 차다. 차번호가 알파벳으로 되어 있으니, 미국 차량이 분명했다. 빙고!
‘후후, 역시 이때쯤 불량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거야.’
나는 공장 뒷문으로 마구 달려갔다.
“우아아아! 차다! 미국 차군요! 와아아아!”
나는 차를 쓰다듬고 문도 열어 보고 여차하면 타 볼 것처럼 장난을 쳐 댔다. 회장이 데려온 아이였기에 다들 말리지도 못했다.
“어, 어! 학생! 아냐! 아니라고!”
“오~ 이거 미국 차 아니에요? 안 움직여요?”
“그게 아니고, 만지면 안 된다. 조사 중인 차다.”
“네에? 조사요?”
“뭔 소리누? 뭔 조사를 한다누?”
“아!”
정구몽 사장이 말실수를 했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정 회장이 더욱 인상을 찡그리자 후다닥 말을 이었다.
“별일 아닙니다. 유독 대미 수출 차량에서 브레이크 오일이 조금 새고, 배기부에 소리가 나거나, 매연이 좀 심하다는 자잘한 컴플레인이 있습니다. 미국 애들이 좀 까다로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국내에선 아무 문제 없는데 말입니다.”
“뭐? 미국 애들이 딴죽을 건단 말이누?”
“예. 출고 전에 모두 품질 기준을 만족하는 걸 확인하고 보내는데 딴죽을 걸고 있습니다. 일부 소비자들이긴 합니다만, 원인을 밝히고 리콜해 달라고 말입니다. 일본 놈들이 로비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뭐? 로비를 혀어?”
나는 속으로 웃겨 죽는 줄 알았다. 일본 애들이 로비를 해? 웃기는 소리다.
대현과 기술 협력을 핑계로 삼류 엔진 기술을 넘기며 고액의 로열티를 받고, 미국 내 일본 자동차 서비스 센터를 같이 이용하게 해 주는 조건으로 임대료까지 챙겨 가는데 로비를 왜 하나? 싼 자동차만 찾아 매출에 별 도움 안 되는 고객을 대현에 떠넘기는 용도로 쓰고 있는데. 기껏해야 자체 기술을 개발하지 못하게 견제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이 불량은 순전히 낙후된 대현자동차의 품질 검증 절차와 공정 관리에 있다. 괜히 미국 소비자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게 아니야.
“우와! 못된 일본 새끼들. 당장 증거를 제출하세요! 문제없다는 보증서를 보여 주면 되잖아요.”
“애야,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어른들 얘기에 껴드는 건 무척 예의에 어긋나는 거야. 그것도 회장님 앞에서!”
내가 빽 소리를 지르자 정구몽 사장은 짜증 나는 표정을 애써 숨기면서 말했다. 머리를 쓰다듬는 척하는 손아귀에 꽤나 힘이 들어가서 아플 지경이었다. 어쭈? 좋은 말을 해 줘도!
“그래, 저놈 말이 안 맞나! 일본 놈들이 아니라 미국 애들한테 품질 보증서 보여 주라므. KS마크 딱 찍힌 걸로 보여 주란 말이누.”
“자동차에 KS마크가…. 여하튼 품질 보증서를 제출하긴 했습니다. 근데 여전히 저희 품질 보증서는 믿지 못하겠다며 몇몇 미국 소비자들이 반품 요청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 안 믿는 기누? 양놈들 중에 못된 놈들이 그리 많누!”
“보상금을 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시장 진입 초창기이니 이미지에 타격을 받으면 안 되는 걸 알고서 말입니다.”
갈수록 태산이다. 이미지 타격? 1989년에 누가 대현자동차를 알기라도 해? 망칠 이미지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냥 일본 옆에 있는 후진국에서 지극히 싼값에 자동차를 내놨다기에 몇 년 쓰다 버릴 셈 치고 샀는데 1년 안 돼서 오일이 새고, 머플러에서 대포 소리가 나고, 매연이 차량 내부로 흘러들어 오니까 항의하는 거잖아. 이래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면 문제를 제멋대로 해석한다니까.
“우리가 제대로 대응한 거 맞누! 품질 조사는 제대로 했누!”
“네, 문제없습니다. 출고 전에 전수 검사를 해도 배기부에 품질 문제 없었고, 차량 수십 대를 주행 시험에 투입해 몇만 킬로를 뛰어도 배기부에 가스가 새는 문제는 없었습니다. 이는 미국 애들이 장난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자료도 보여 줬을 거 아니누? 근데 왜 못 믿는다 하는기누?”
정 회장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미국에서 본사로 보내온 자동차가 이곳에 보이는 것만도 수십 대다. 반품을 불사하겠다는 소비자가 이 정도라면 잠재적인 불만 소비자들은 엄청나겠지. 빨리 해결해 줘야 한다.
짝!
“아! 저는 알 것 같아요. 여기에 배가 없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뭔 소리누? 자동차에 배가 왜 나오누!”
오키, 정 회장이 제일 먼저 내 말을 받아 주었다. 이로써 내 말을 끊을 자 없음이다.
“달리는 시험은 했는데, 배에 실어서 옮기는 시험은 안 했잖아요. 모의고사는 실제 고사와 똑같아야 문제가 없어요. 난이도는 물론 시험 절차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요.”
“으잉?”
“학생, 차를 배에 실어 나르는 실험을 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어. 그따위 실험을 왜 해?”
“에? 아무도 안 해요? 배에서 자동차끼리 서로 부딪치거나 바닷물에 젖거나 하진 않나요?”
“그런 일은 절대 없어!”
정구몽이 쓸데없는 소리를 해 대는 나에게 고함치기 시작했지만, 그 옆에 있는 개발 임원은 뭔가 싸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나는 살짝 비웃어 주었다.
“아, 그래요? 저는 배에서 내리면 차부터 씻어 주는 줄 알았어요.”
“뭔 소리야!”
“에엥? 그럼 비누칠은 왜 해요? 차를 헹궈 주려고 그러는 거 아니었어요?”
“뭐? 비누칠? 이 미친….”
난 알지. 이 리콜 사건은 엔지니어들 술자리에서 역대 가장 엉뚱했던 불량 문제로 회자되었으니까. 반도체 회사에 있던 나조차 몇 번이나 들었다.
자동차 조립 초창기, 불량이라는 개념 차제가 희박했던 생산 작업자들이 빽빽한 부품 사이로 욱여넣기 곤란했던 각종 밸브 호스를 비눗물에 적셔 조립했다. 비눗물을 발라 밀어 넣으면 부품 사이로 쑥쑥 미끄러져 들어가니 쌈박한 조립 노하우라며 잘도 이용했었다.
국내에서는 별문제 없었다. 자동차는 차량 출고지에 놓아둘 새도 없이 미친 듯이 팔려 나갔고, 그러자마자 차주들이 연신 차를 몰아 댔으니 비눗물 성분들은 엔진룸 열기와 함께 훅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출하는 차들은 달랐다. 배에 실려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석 달 정도 바다를 건넌단 말이야. 밸브 근처에 남아 있던 비눗물의 염기성 성분이 바닷바람에 함유된 소금기와 결합해 급속도로 밸브의 접착제를 녹여 댔고, 특히나 배기부에 기어들어 간 소금기 먹은 비눗물은 머플러의 촉매를 작살내 버렸다.
“왜요? 저기 있잖아요. 공장 안에 비눗물 잔뜩 담아 뒀잖아요?”
내가 공장 안에 있는 드럼통을 가리키자 모든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개발팀 임원은 ‘이런 미친 생산팀 새끼들.’ 하며 눈알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품질팀 임원은 ‘시바, X 됐네.’ 하는 눈빛을 했으며, 생산팀 임원은 무슨 소리인지 도통 모르는 눈치다.
정구몽 사장은 나름 자동차에 빠삭한 사람이다. 자동차 부품팀 과장 출신으로 자동차 부품엔 페인트부터 접착제까지 절대 산화성 물질을 쓰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자동차 조립에 비눗물을 썼다고?
내 한마디로 대번에 눈이 휙 돌아갔다.
벌컥!
그는 대뜸 리콜 요청 차량의 보닛을 열어 보고 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 밸브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보기도 했다. 정 회장 못지않게 그도 성질 급한 대현 정씨 일가라는 것을 몸소 증명해 줬다.
“아아악! 이게 뭐야!”
쾅!
원인을 알고 보니 그제야 눈에 보였던 것이다.
그는 차체 아래서 기어 나오더니 차문을 향해 냅다 발길질을 해 댔고, 내가 가리킨 드럼통으로 달려가 비눗물 속에 호스가 담겨 있는 것을 확인하더니 그것을 걷어차 버렸다.
드럼통이 엎질러지자 비눗물에 적셔진 차량용 호스들이 순대처럼 바닥에 너부러졌다.
“이런 개노무 시끼들! 누가 이따위로 작업하라고 했어! 누구야, 누구!”
“어….”
“당신이야?”
“아닙니다.”
“그럼 당신이야? 회사 말아먹으려고 작정한 거야, 뭐야!”
“죄송합니다.”
“월급 받아먹고 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있었던 거야!”
퍽! 퍽!
정구몽은 완전히 눈이 뒤집혔다. 아버지 앞에서 나름 예를 갖춰야 하는 나이 많은 임원들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 댔다. 차후에 사과를 해야 할지언정 지금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게지. 자칫하면 이 일로 회사가 흔들흔들하게 생겼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와중에 개발팀장으로 보이는 임원만이 고개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했다.
나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이없어 하는 정 회장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귓속말부터 해 줬다.
“저기, 죄송하다고 하는 개발팀 임원이 차기 사장감이네요. 잘못은 생산팀에서 한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아, 여태 원인 파악도 못 한 품질팀 임원은 당장 경질하셔야겠어요.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가만히 있잖아요.”
정 회장은 드잡이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곤 몸을 숙여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니 누고?”
“저요? 유수한요.”
“무당이누?”
“무당은 아니고요, 천재쯤 되죠. 신문 기사 한 줄 읽고, 공장 한 번 견학하면 대충 상황 파악을 해내는 천재”
“여기 말해 줄 게 또 뭐가 있누?”
“음, 당장은 없어요. 현재로선.”
“그래? 진짜루?”
“예. 회장님 아드님은 이거 잘 해결하실 거예요.”
“그래?”
“그럼요.”
난 안다. 정구몽 사장, 나중에 대현자동차 회장이 되는 저분은 리콜을 두려워하는 양반이 아니다. 외려 자발적인 리콜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 대현자동차의 이미지를 끌어올린 사람이다. 정면 돌파가 어쭙잖은 회피보다 백배 낫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내버려 둬도 된다.
- *
부우웅.
고성이 오가는 드잡이가 잦아들자 정구몽 사장이 눈이 시뻘게져서 비상 상태를 선포하는 광경을 뒤로하고 정 회장과 나는 회사를 빠져나왔다.
이미 정 회장의 의전은 망쳤다. 몇몇 사람들이 뛰쳐나와 살펴 가시라는 인사를 한 것이 전부였다.
“집이 어디라캤누?”
“진주예요. 학교 기숙사가 그기 있어요.”
“기숙사?”
“예, 기숙사가 제 집이에요. 내년이면 또 대전 기숙사에 있을 테죠. 대학이 거기 있거든요.”
“합격한 놈처럼 말하누. 하기사 뭐, 무당이 떨어지겠누. 흐흐.”
“무당 아니라니까요. 여하튼 버스터미널에 데려다주세요. 전 버스 타고 갈 테니 회장님께선 서울로 바로 가세요.”
“그냥 서울 같이 가자. 내 옆에 있으라. 잘 챙기 줄꾸마.”
“너무 일러요. 학벌은 소중하다니까요.”
“졸업장은 내가 챙기 주꾸마. 많이 해 봤다.”
“에이,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제겐 시간이 필요해요.”
“시간이 필요해? 흐흐.”
내가 하는 행동은 수많은 나비효과를 일으키게 될 거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마구잡이로 일을 시작하면 안 된다.
현재로선 정영주 회장의 눈에 들었으니, 그가 나를 어찌 대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그 결과에 따라 내가 대현을 이용할지 아니면 포기할지 결정지어야 한다.
부우웅. 끼이이익.
정 회장은 혼잣말로 뭔가를 중얼중얼하니 결국 나를 버스터미널로 데려다주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머리통을 쥐고 놔주질 않는다.
“살펴 가세요, 회장님.”
“그냥 가므 우야누. 차비는 있누?”
“있어요. 만 원!”
“푸우! 그거 가지고 되겠누. 택시 타고 가래이.”
정 회장이 지갑에 있는 돈을 뭉텅이로 빼내서 내게 줬다. 만 원짜리와 10만 원짜리 수표가 몇 장 끼어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정 회장에겐 껌값이나 다름없겠지.
“너무 많은데요?”
“복채 아니라. 시험 끝나므 내를 찾아오이라. 그때 복채 제대로 챙기 주꾸마. 으이?”
완전히 날 무당으로 취급하고 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가 없다.
“아, 예. 알겠습니다.”
“꼭이다이!”
“예. 회장님.”
“택시 타고 가래이.”
“예에.”
쓱쓱쓱.
정 회장은 내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곤 훌쩍 떠나 버렸다.
대기업 회장치곤 참으로 소탈한 양반이다. 큰 덩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활력도 대단하다. 저런 양반이 몇 년 뒤에 대통령 출마라는 희대의 미친 짓을 한다니 믿기질 않는다.
에휴, 내가 저 양반을 왜 걱정하나? 대현이라는 칼이 손에 쥐어진 것도 아닌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꼴이다.
일단 내 코가 석 자다. 대학 입시에서 어떤 문제가 나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글 한 자라도 더 봐서 어떤 유형의 문제가 나왔는지 기억해 내야 한다. 원래대로라면 무난히 합격하긴 하지만 맘을 놓아서는 안 된다. 지금의 나와 그때의 나는 전혀 다르다.
나는 길바닥에 버려진 시간을 잠을 줄여 벌충할 생각에 버스에 오르자마자 잠을 청했다.
여하튼 첫 번째 단추가 생각보다 잘 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