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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작전이 필요해 (3/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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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작전이 필요해

다음 날, 나는 교무실에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으음, 수학올림피아드에 나가겠다고? 수학과학경시대회 예선이 아니고?”

“네. 경시대회는 딴 애들이 많이 나가잖아요. 저라도 올림피아드에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하긴, 누군가 출전하긴 해야지. 여하튼 올해는 참 이상해. 무슨 대회를 입시철에 맞춰서 개최해 가지고….”

“과기대(학국과학기술대, KAIST) 입시가 빠른 거죠.”

“후후, 그도 그러네.”

“해 주실 거죠?”

“그래, 알았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이런저런 경시대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군부 독재의 이미지를 벗기 위한 보여 주기식 엘리트 육성책의 일환으로, 정경 유착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기업들이 앞다퉈 경시대회를 주최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신성그룹 산하의 신문사가 주관한 수학과학경시대회다. 9월 달에 전국 예선을 실시하고 10월에 본선, 최종적으로 수상하면 대학교 4년 등록금을 전액 지원한다. 여기에 1989년은 1회 대회라 청와대에 초청해서 대통령과 다과회를 같이하는 이벤트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난 대학교 장학금을 노리고 경시대회에 출전해 화학 부문에서 금상을 차지했었다.

물론 좋았던 기억은 없다. KAIST 입시와 병행해서 경시대회를 준비하느라 무척 힘들었고, 입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커녕 아버지 장례식장을 지켜야 했으니까.

잡설은 이쯤 하자.

여하튼 신성이 경시대회를 열었다면 수학올림피아드는 전통적으로 대현그룹이 주관했다. 후한 상금은 물론, 입상자들이 세계수학올림피아드 출전까지 하도록 후원해 주었다.

특이한 것은 1989년엔 올림피아드 일정이 9월 말로 변경되었고, 대현그룹 회장이 수상자들과 점심을 같이하는 이벤트가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신성이 개최한 이벤트 때문이겠지.

내가 올림피아드에 나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입상하면 대현그룹 명예회장, 1987년 은퇴했기에 일명 왕회장이라고 불리는 정영주 회장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이번이 유일하다. 말마따나 내가 미래를 알고 있다고 편지를 보낸들 그가 나를 만나 줄 것 같은가?

올림피아드 입상 따위야 아무 문제 없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고등학생 때 나는 수학 천재로 불렸던 놈이다.

게다가 시험문제도 대충은 알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재훈이 녀석이 4등을 하거든.

녀석은 자신이 얼마나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는지, 얼마나 어려운 문제가 나왔는지 엄청나게 하소연을 해 댔으니까. 30년 전의 일인데 아직도 기억날 정도다.

운도 따라 주었다. 주최 측끼리 경쟁한 탓이겠지만 과학경시대회와 올림피아드가 겹쳐서, 수학 좀 한다는 과고생들이 올림피아드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말인즉슨 내가 이번 국내 올림피아드에서 금상을 차지할 가능성이 무척 높다는 의미다. 99.99%!

    • *

띠잉.

“10분 남았습니다. 답지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올림피아드 심사관이 탁상종을 치며 소리쳤지만 강당 안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모두들 초집중해서 답안지를 채워 나갈 뿐이었다.

솔직히 시간이 이쯤 되면 풀 수 있는 문제는 모두 풀었을 것이다. 남은 문제에서 1점이라도 더 받으려고 연필이 가는 대로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이다.

총 열 문제. 올림피아드에 출전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기하학 문제가 두 문제, 조금 어려운 미적분 문제가 세 문제, 매우 어려운 확률 통계 문제가 한 문제, 고등학교 수준을 넘어선 다차원 벡터 문제가 한 문제, 그리고 아예 풀지 말라고 내놓은 정수론 관련 문제가 세 문제다.

재훈이 녀석이 고스란히 놓쳤던 정수론 문제를 나는 무리 없이 풀었다.

모든 정수는 소수의 합으로 이루어진다는 가정하에 다항식의 나머지 정리를 이용한다든지, 정수론처럼 꼬아 놓은 테일러급수 형태의 문제는 오일러 상수(e) 정의를 인용해 미적분 그래프 문제로 변형하여 해결했다.

대학 공업 수학을 이수했던 나로선 무난하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내 40년짜리 지식이 팔팔한 고등학생인 나의 뇌에 얹히니 시너지는 엄청났다.

우습게도 마지막 문제는 진짜 풀지 말라는 의미였는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증명하라고 적혀 있었다.

‘n이 3 이상의 정수일 때, Xn+Yn=Zn을 만족하는 양의 정수 X, Y, Z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수백 년 묵은 난제 말이다.

설마 했는데, 재훈이 녀석이 구라를 친 게 아니었다.

아마 이 문제를 낸 수학 교수는 학계에서 한창 이슈가 되고 있는 테마에 대해 고등학생의 신선한 발상이라도 듣고 싶었나 보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수백 년간 아무도 증명하지 못했는데, 1980년대에 들어서 해법에 급격한 진전이 있었고 결국 1993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수였던 앤드류 와일즈가 증명해 낸다.

나는 남은 10분을 이용해 해답을 서술해 보기로 했다. 20세기 최고의 수학 천재께서 증명해 낸 문제를 내가 서술한다는 것이 웃기지만, 그분을 도와주는 셈 치기로 했다. 1993년 그분께서 친히 적었던 논문 서론 부분을 적으면 그만이다.

역사가 바뀌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21세기에 들어서도 그분의 증명을 100% 이해하는 수학자는 없으니까.

모든 유리수는 유한개의 유리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으며, 군(群)연산에 닫혀 있으므로 x, y로 대변되는 2차원적 함수를 구성할 수 있다. 유리수의 부분 집합으로 x와 y를 정수로 가정한다면 A, B라는 정수 계수와 C라는 정수를 나머지로 갖는 합동방정식 수립이 가능하며, 이는 지극히 참이다.

방정식 1: y2≡x3+Ax2+Bx+C

이때 an+bn=cn을 만족하는, 즉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만족하는 a, b, c 정수가 존재한다면 나머지 정수 C는 0이라는 의미와 동등하므로 방정식 1번은 아래와 같이 곱 연산만 가지는 방정식으로 치환이 가능하다.

y2 = x(x−an)(x−bn)

이런 형태의 타원 방정식은 모듈러 곡선으로 변화할 수 없으므로 해가 없다. 따라서 모든 타원방정식은 모듈러 곡선으로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 참이라면 가정 1은 거짓이 된다. 즉,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참이 되는 것이다.

사실 나도 이해하고 적은 말은 아니다. 논리 전개조차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1994년 대학 졸업 당시 한창 유행했던 앤드류 와일즈 교수의 논문 서론을 기억나는 대로 적었을 뿐이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으니 아마도 틀렸을 것이다. 틀려도 상관없다. 내가 수학자가 될 것도 아니고, 나는 이 답안지로 관심만 끌면 된다. 10점짜리 문제에 이 서술로 2~3점만 얻어도 금상은 내 차지다.

띠잉.

“시험 끝났습니다. 모두 연필 내려놓으시고 손 머리 위로 올리세요.”

“으아아아!”

내가 답안지 작성을 끝내자마자 종이 울렸다. 다들 머리를 감싸 쥐며 신음 소리를 냈다. 문제가 유독 어려워서인지 모든 학생들이 울상이다.

애들아, 상관없다! 이따위 시험으로 너희 인생이 달라지거나 하지는 않는다니까!

하지만 나한테는 아니지. 난 목적이 다르거든. 그러니 금상은 내가 가져갈게.

    • *

시간이 흘러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내가 금상을 받았고, 다른 입상자와 함께 서울 한복판에 있는 대현 호텔의 스카이라운지에 초대되었다.

“자! 각자 냅킨은 무릎 위에 놓고, 음식이 나오면 접시 옆에 있는 포크와 나이프를 바깥쪽부터 순서대로 쓰면 돼요. 알겠죠?”

“어, 선생님, 12시 방향에 있는 거는요?”

“그건 샐러드용이에요.”

“샐러드요?”

“채소가 먼저 나오는데 그때 쓰면 돼요. 먹고 난 뒤엔 접시 위에 올려놓으면 우리가 치우니까 그리하면 돼요.”

“예에!”

호텔 지배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조곤조곤 우리에게 식사 예절을 가르쳐 주었다. 애들은 모범생답게 곧잘 질문도 해 대며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놓기를 반복했다.

나는 그 꼴을 보고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따위는 외국에 나가도 이런 식사 예절을 지켜야 할 상황이 오지 않는다. 있다 한들 백인들한테는 그냥 포크질 할 줄 아는 후진국 아시안일 뿐이다. 교양 있는 파트너로 대접받을 거라 생각하면 경기도 오산이다.

대현그룹에서 유독 이런 식사 예절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정영주 명예 회장 때문이다. 1970년대에 그가 차관을 얻기 위해 유럽을 돌아다닐 때 백인 바이어들에게 이따위 것들로 모욕에 가까운 비웃음을 받았거든.

1980~1990년대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국가로 찬사받으며 더 이상 미개인 취급을 받지 않게 된 것은 한국의 IT기술이 세계를 주름잡기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대접받는 시기를 조금 앞당겨 볼 생각이다. 게다가 IT 분야에서 신성이 독주하는 것에도 슬쩍 숟가락을 올려 볼 참이다.

신성전자 같은 회사가 우리나라에 두 개쯤 더 있다고 생각해 보자. 국민들의 삶이 좀 나아지지 않겠나… 하는 애국심 따윈 전혀 관심 없다. 그중 하나를 내가 가지고 싶기 때문이다.

난 아주 강한 놈, 귀족이 될 거다. 아무도 나와 내 가족을 건드릴 수 없게.

“회장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귀빈 여러분께서는 모두 박수로 환영해 주십시오.”

“우와!”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에 누군가 경쾌한 발걸음으로 스카이라운지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경우 누구나 앞에 마련된 단상에 올라 연설 한번 할 것 같지? 하지만 정 회장은 안 한다. 성격이 정말 급하거든. 손 한번 살짝 들어 올려 주는 것으로 끝이다. 옆에 따라붙은 수행원에게 뭔가 중얼거리는 것이 전부다.

‘애들 상장 주고, 상금 주는 거 다 끝났제? 내가 뭘 하면 되누?’라고 물었을 것이 분명하다.

봐라, 단상에서 누가 환영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곧바로 내가 있는 자리로 오잖나.

나는 금상 수상자로서 지도 교사인 담임선생님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왕회장님!”

“으음?”

“이번 수학 시험에서 대상을 차지한 유수한이라는 학생입니다.”

“으허.”

옆에 있는 수행원이 되는대로 말을 토해 낸다.

인간아, 수행원을 하려면 좀 배워라. 수학 시험이 아니라 수학올림피아드이자 세계수학올림피아드 국내 예선이고, 대상이 아니라 금상이다.

수행원은 다름 아닌 이박명 회장이다. 1989년에는 대현건설 회장을 맡고 있었지, 아마?

이따위 허접한 행사에 나타날 사람이 아닌데, 정 회장이 나섰으니 따라온 것인가?

사소한 것이지만 벌써부터 내가 알고 있던 미래와 다른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 시험 성적이 무슨 나비효과를 일으킨 거지? 여하튼 잘됐다.

“이런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어린 녀석이 말도 잘하누. 앉으이라.”

“예, 왕회장님.”

“후후. 콩알만 한 놈이 말끝마다 왕회장, 왕회장 허누.”

정영주 회장은 내게 싱긋 웃었지만 옆에 있던 이박명이 얼굴을 붉혔다.

“허어! 학생, 어디서 그런 말을 들어 가지고.”

“아! 죄송해요, 회장님. 회장님보다 높으신 분을 어찌 칭할지 몰라서요. 명예 회장님이라 부르면 회장님보다 아랫사람처럼 느껴지잖아요.”

“크허허허!”

당돌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지만 뭐 어떠랴? 이때의 이박명이 대현건설 회장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 아닌가.

이박명은 무척 당황했지만, 정영주 회장은 재밌는 농담을 들은 듯 호쾌하게 웃어 댔다.

일단 첫 번째 스텝은 잘된 것 같다. 나는 10여 분에 불과한 식사 시간을 이용해 정영주 회장의 눈에 들어야 한다. 철없는 고등학생 코스프레는 아주 강력한 무기다.

“여하튼 죄송합니다.”

“아이라, 아이라. 다들 밥 묵자. 뭐 허누!”

정 회장의 말을 시작으로 서빙이 이어졌다. 샐러드부터 시작해 버섯을 썰어 넣은 고급스러운 수프와 두툼한 스테이크, 포도 주스까지 전형적인 서구식 식사가 이어졌다.

2019년에 살다 온 40대 남성에게 이런 식사는 그다지 별스럽지 않다. 화려하게 꾸며 놓았지만 어딘지 천박하게 보이는 1980년대 호텔에서 먹고 있자니 더욱 그러하다.

“왜 그러누, 니는 맛이 없누?”

연신 스테이크를 썰던 정 회장이 깨작대고 있는 나를 보고 물었다.

“음! 맛있긴 한데요, 그래도 미역국이나 갈비탕에 밥 말아 먹는 게 나았을 것 같아요. 외국 놈들 흉내 내 봐야 입맛에도 안 맞고.”

“허허허! 이놈 이거 물건이누.”

“이 녀석! 회장님 앞에서 버르장머리 없이. 이게 얼마짜리….”

“임자 뭐 하누? 못 들었으? 미역국 먹고 싶다 안 허나! 퍼뜩 가져오이누!”

“아, 예. 회장님.”

난 정 회장의 식성을 알고 있다. 그는 급한 성격 탓인지 미역국이든 갈비탕이든 후다닥 밥 말아 먹는 걸 즐겨 했다. 대현전자에 그가 방문한 날이면 구내 특식으로 그 두 가지가 나왔거든.

이박명은 몰라도 대현전자의 정헌몽 사장은 정 회장의 식성을 제대로 알고 있었다. 아들이 아버지 식성을 모르겠나.

졸지에 이박명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옆에 앉은 담임선생님은 당황하다 못해 사레가 들렸는지 연신 물만 들이켜고 있다.

“할아버지, 저 양반 조심하세요. 우리 아버지가 사기꾼한테 속았는데 딱 인상이 저랬어요. 주인을 배신할 상이에요.”

푸웁!

“수한아!”

“선생님, 불편하시면 다른 테이블로 자리 옮기세요.”

거침없는 내 말에 담임선생님은 마시던 물을 뿜어낼 정도였다. 아무렴 어떤가? 이따위 강한 어조가 아니면 10분이라는 제한 시간 내에 정 회장의 시선을 끄는 것은 무리다.

“이놈이 뭐라 허누?”

봐라, 정 회장의 눈빛이 달라진다. 이미 은연중에 알고 있을걸. 사내 정치에 둔감한 사람이 그 큰 조직을 끌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신(家臣)이라 불리는 이들 중 여럿이 이미 나와 같은 조언을 했을 것이다.

“저 양반 말 듣고 위에 줄 대 봐야 소용없다니까요. 이동통신 사업권은 이미 물 건너갔어요. 4대 재벌가는 해당 사업에서 완전히 배제될 거거든요.”

“이놈 이거 산수 천재라 허더만 요물이누.”

“더하기 빼기만 할 줄 알면 당연한 결론이죠.”

“후후, 나는 그것도 모르는 늙은인가배.”

“곱셈을 하시니 그렇죠. 0%짜리 일엔 아무리 큰 노력을 곱하셔도 0이에요.”

“허허.”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하는 정 회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선을 옮기지 않자 점차 웃음이 잦아들었다.

정 회장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깊어진다. 나 또한 눈매를 가다듬었다.

‘내 눈을 봐. 내가 고등학생으로 보이나? 내 눈에서 진심을 읽어 줘! 내 욕망도!’

나는 주문처럼 되뇌었다. 이대로 끝나면 다른 계획을 짜야 한다. 그 계획은 지금보다 몇 배는 난도가 높을 것이다.

나는 종잣돈 따위가 필요한 게 아니야. 귀족이 되려면 당신같이 강한 사람이 필요해!

    • *

“회장님, 미역국 가져왔습니다.”

내가 정 회장과 눈싸움을 하는 사이에 이박명이 돌아와 식탁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 미역국 그릇을 옮기기 시작했다. 명색이 대현건설 회장인데 이따위 음식 시중을 들어야 하나?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물론 그런 불쾌한 얼굴은 나를 향해 있지, 감히 정 회장을 쳐다보진 못했다.

“치아라. 내 이놈하고 따로 얘기 좀 해야쓰겄다.”

“회, 회장님….”

이박명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다. 기껏 미역국 차려 왔더니 이번엔 치우라고 하잖나.

정 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내 바쁘다. 니 안 바쁘제? 같이 가면서 얘기 좀 허자.”

“저 내일모레 대학 입시인데요. 바빠요.”

40년은 족히 묵은 눈빛, 비릿한 웃음, 쑥 하고 찔러보는 바늘을 팅 하고 쳐 내는 말까지. 이어지는 나의 모든 것에 정 회장이 호기심을 내보인다.

“허허! 집이 어디고? 내 데비다줄꾸마.”

오키, 두 번을 청했다. 최소한 10분은 더 할애받을 수 있을 거다. 첫 번째 손짓에 내가 몸을 움직였다면 그는 내 머리 한번 쓰다듬어 주는 걸로 끝났으리라.

“아, 예. 그럼 가시죠. 선생님, 저 오늘 기숙사 늦게 들어갑니다.”

“어, 어… 알겠다, 수한아.”

담임선생님도 얼이 빠진 표정이다. 나는 너무 기뻐 펄쩍펄쩍 뛰고 싶었다. 정 회장 이 양반, 내 눈빛 제대로 읽었다. 내게 뭔가 있다는 촉수가 발동한 거다.

정 회장과 나는 그길로 호텔을 빠져나갔다. 정 회장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1987년식 액셀 승용차를 타고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운전기사가 있지만 명목상 뒀을 뿐 언제나 스스로 운전하길 좋아하는 사람이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니 대현 계열사의 사장들이 주중에 골프 치러 가는 것은 꿈도 못 꾼다. 어딘가 떴다! 하면 그때부터 회장님 의전을 챙겨야 했거든.

의도한 바였는지 모르겠지만 정 회장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그룹 임원진의 기강 수립에 크게 기여하고 있었다.

내가 이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을 때 큼지막한 일부터 궤도 위에 올려놔야 하는 이유다.

부우우웅.

“니, 내 어디 가는 줄 아누?”

“울산 가시겠죠, 뭐. 노사분규 마무리 수순이잖아요.”

“흐흐흐! 이누마 진짜 걸물이네. 니 어찌 알았누?”

“대현자동차 마크가 있는 점퍼로 갈아입으셨잖아요. 세 살짜리 애도 알겠어요.”

“하하! 맞네, 맞아! 그라믄 이것도 맞차 봐라. 내가 니 왜 뎃꼬 왔겠누?”

“사람들 기죽이려고 하시는 거겠죠. 제가 산수 좀 하잖아요.”

“허허….”

“합의문 초안은 이미 보셨죠? 대학 교수들 잔뜩 데려다 놓고 계산하라 시켰는데, 어이없으셨던 거겠죠.”

“…….”

“적당한 대사를 예측해 본다면, ‘봐라! 이 어린 고등학생도 계산이 틀렸다고 안 하나! 네놈들 눈까리는 동태 눈까리가! 어이?’ 이렇게 말씀하시려고요. 맞나요?”

정 회장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알고 있지. 1989년 울산 자동차 공장에서 그가 사인해야 했던 합의문은 어이없는 숫자로 가득했다.

정 회장은 그룹 회장으로서 사측과 노조 측 계산법 모두를 믿을 수 없다며 사외에서 교수들을 잔뜩 불러다 놓고 최적의 임금 인상안을 도출하라고 했는데 결과는 엉망이었다.

하긴, 대학교수 중에 누가 그 숫자들을 책임지려고 하겠어? 마치 전쟁이라도 하듯 사측과 노조 측이 0.1%를 두고 으르렁거렸는데 말이다.

결국 정 회장은 노사 양측이 전혀 다른 숫자로 작성한 각각의 임금 인상안을 찢어 버리고 회의장을 박차고 나왔고, 그길로 대현자동차는 엄청난 노사분규에 휘말린다.

단순한 파업 수준이었던 노사분규는 폭력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정부는 경찰을 투입시키는 초강수를 두고, 노조원 수십 명이 다치고 체포되고 난리가 났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고? 누가 이겼냐고? 누가 이겼는지 모르겠지만, 진 사람은 확실히 정영주 회장이었다.

정 회장은 정권의 외면과 여론의 압박에 밀려 끝내 임금 협상안에 서명하게 된다. 노조 전임자에게도 임금 지불을 해야 한다는 굴욕적인 협상안에 말이다.

“그걸 어찌…. 허 참! 어찌 알았냐고 묻는 것도 귀찮구만. 놈아, 그리하면 안 된다는 기가? 말투가 어찌 그러누.”

“당연하죠. 애가 아프면 약을 먹여서 낫게 해야지, 두들겨 패서 병신 만들면 안 되잖아요.”

“믄 소리누.”

“맨입으로요? 후식이나 드시고 가요. 전 브라보콘요.”

“참말로… 확 마!”

꽁!

정 회장은 내 머리통을 꾹 찍어 대면서도 차를 휴게소로 들이밀었다.

만 원짜리 한 장 꺼내 주기에 쪼르륵 달려가 브라보콘 두 개를 사 와서 거스름돈을 돌려주었다.

“이제 말해 봐라. 니라면 우예 할 기누?”

“그냥 사인하세요. 외려 인상안에 적힌 숫자를 더 올려서 말이에요.”

“뭐이라! 뭔 개소리누!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단 말이누!”

정 회장은 커다란 덩치를 으쓱거리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 댔다. 내가 대현그룹에 입사한 사원이었다면 한 대 쥐어박았을 것이다.

이때 분위기는 다 이랬지. 맘에 안 들면 재떨이 날아다니고 머리통 쥐어박는 것은 예사였다.

“아이~ 어른들은 참 이상해요. 서로 요구하는 걸 들어주면 해결될 일을 비비 꼬아대니 일이 해결이 안 되잖아요. 그냥 있는 속내를 협상안에 반영하면 되는데.”

“으잉?”

“그렇잖아요. 노조는 차별해 달라는 속내는 숨기고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자는 타이틀로 사람들 선동이나 하고, 사측은 임금 따먹기 같은 저급한 전략을 핵심 경쟁력이라고 헛소리를 해 대잖아요.”

“차별? 다 같이 잘 먹고 잘 살어? 임금 따묵기? 경쟁력?”

정 회장은 머리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반대말이나 다름없는 단어들이 묘하게 얽혀 있거든.

“노조 쪽 주장은 아주 간단해요. 제대로 차별해 달라고 하는 거예요. 책상에 앉아 거드름만 피워 대는 사무실 부장보다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자기가 더 고생했으니 돈 더 달라는 거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합당한 대접만 해 주면 돼요. 근태 좋고, 제품 불량 줄이고, 일에 효율을 더하는 공돌이들 골라내서 돈 더 줘요. 임금 총량은 비슷해요. 게으르고, 팀 분위기 망치고, 사고 치는 새끼들 월급 깎아서 그 돈으로 주면 돼요. 그러면 된다고요.”

“더 말해 봐라.”

“화이트칼라도 매한가지. 철저하게 차별해 줘요. 제품 마진 깎아 가며 시장에 밀어내기로 매출 실적만 부풀리는 놈들 월급부터 깎아요. 고객서비스 신경 쓰고, 불량 해결하려고 개발자들과 같이 머리 싸매는 사람들, 고객들 설득한다고 밤잠 아끼는 사람들에게 돈 더 주시라니까요. 노사분규의 핵심은 그거예요. 내 노고를 돈으로 보상해 달라! 그것도 매우 차별적으로! 저 게으른 놈과 똑같은 월급 받는 거 못 참겠다!”

“차별이라….”

“에이, 뻔히 아시잖아요. 회사 이익은 학벌이나 직급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자기 시간 갈아 넣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한테서 나오잖아요. 그 노력을 제대로 대접 안 하니까 노사분규가 그렇게 전 방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 거라고요.”

“내 미치겠누. 허허허. 이누마 이거 진짜 능구렁이네!”

정 회장은 내 어깨를 쥐고 마구 흔들어 댔다. 능구렁이라. 오랜만에 듣는 말이다. 들어서 기분 좋은 말은 아니지만 최소한 산전수전 다 겪은 경험치는 인정해 주는 말이었다. 나 같은 고등학생이 듣기엔 칭찬에 가깝다.

“제가 준비한 거예요. 가시면서 검토하세요.”

“뭐이라?”

정 회장이 몇 번째 놀라는 걸까? 내가 안주머니에서 꺼내 든 종이를 받아 들곤 대뜸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느새 눈빛이 진중하게 바뀌더니 집중해서 내용을 읽어 나갔다.

나는 제대로 된 차별을 논리 정연하게 적어 두었다. 대현그룹 임직원의 월급을 동종 업계의 평균보다 5%이상 높게 보장해 주며, 연말에 매출 계획을 상회하는 실적을 거둘 경우 최대 600%에 해당되는 보너스를 지급하라는 내용이었다.

계획 대비 실적을 30% 초과 달성하면 월급의 600%를 일시불로 받을 수 있으니, 연봉의 50%가 뻥튀기되는 기적을 맞이하는 것이다. 신성이 2000년대에 들어서 썼던 방법이다.

신성의 아이디어를 가져오면 뭐 어때? 누가 손해 본다고.

나는 도덕책처럼 착한 놈이 아니라, 사회책에 나오는 강한 놈이 될 거다.

차별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부서별 특성에 맞게 목표치를 가져감으로써 실적에 따라 차등적으로 등급을 매기고, 개별 임직원들도 인사고과에 따라 차등적으로 점수를 매긴다.

즉, ‘매출 실적×부서 실적×개인 실적’의 형태로 연말 보너스가 결정되고, 그 등급은 고스란히 다음 해 월급을 결정하는 근거로 쓰인다.

제대로 된다고만 하면 생산 실적을 초과달성한 생산부서 A급 사원이 실적 미달한 영업부서의 D급 부장보다 연봉이 많을 수도 있다.

30년 뒤에는 대기업에서 꽤나 일반적으로 쓰는 연봉 협상안의 기본 개념이지만 1980년대 평생직장 개념이 있던 때에는 생각도 못 한 시스템이다.

“무어… 이게 될 것 같누?”

“사람들이 싫어할 것 같아요? 저만 잘났으면 월급 더 받는다는데? 욕망은 모든 것을 앞서요. 제가 회장님 만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세요? 읽은 신문을 쌓으면 어후, 언덕 하나는 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우리나라에 저 같은 놈이 부지기수예요. 대현그룹엔 저 이상 가는 놈이 수두룩할 거고요.”

“이누마 지 욕도 잘허누.”

“무엇보다 회장님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월급 올려 주는 게 대세라는 거 말이에요. 노사 협의 아무리 기다려 봐야 절대로 회장님이 원하는 숫자 안 나와요. 이왕 올려 줄 거 화끈하게 올려 줘야 사람이 고마운 줄 안다고요.”

회사 생활 좀 했다면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회식비 찔끔찔끔 보태 줘 봐야 돈만 나가고 자세는 안 나온다.

이왕 돈 쓸 거면 화끈하게 세 번에 한 번 정도 회식비 통째로 지불해야 ‘팀장님, 만세!’라는 소리 듣는 거다.

“허… 내가 할 말이 음다, 이눔아.”

“차 키나 주세요. 가면서 천천히 기억하세요. 합의문에 일필휘지로 적어 넣으셔야죠. 그래야 자세 나오죠!”

“니 차도 몰 줄 아누?”

“에이, 저 천재예요. 보면 모르세요?”

나는 건네받은 키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차로 향했다. 문도 열어 드리고, 보조석을 뒤로 밀어 드리고, 안전벨트도 매어 드리고는 보닛을 휙 돌아 나가 운전석에 앉았다.

부릉부릉.

“딱지 떼면 대신 물어 주세요. 크흐!”

“출발해 보이라.”

쓔우우웅.

나는 거침없이 달려갔다. 수동 기어라 좀 그렇지만, 난 1종 운전면허증 보유자로 그것도 20년 무사고를 자랑하는 베스트 드라이버다. 최초의 사고가 최후의 사고가 되어 버렸지만.

어쨌든 외길이나 다름없는 1989년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 정 회장은 잠시 불안해했을 뿐, 그의 눈은 내가 준 갱지 두 장에 꽂혀 버렸다. 3시간을 그렇게 아무 말도 없이 달리기만 했다.

‘휴우.’

내 아이디어를 들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했다. 나는 막고 싶었다. 원래 역사에서 정 회장이 노사 협의장을 박차고 나온 것은 최악의 선택이었으니까.

정 회장이 실수한 게 있다면 바뀌어 가는 사회 분위기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거다. 1989년은 군부 독재를 벗어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결실을 맺어 가고 있을 때거든.

결국 경찰까지 동원되어 노사 투쟁을 무력 진압한 것은 패착 중의 패착이 되었다. 안 그래도 군부 출신인 대통령은 또다시 군부 독재자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언론의 뭇매를 견딜 수 없었다. 때문에 정 회장을 악의 축으로 만들어야 했다.

결국 정 회장은 회사를 혁신시킬 절호의 기회를 날린 것도 모자라 평생 노조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협상안에 서명했다. 그렇게 귀족 노조가 탄생하였고, 정 회장은 대통령 이미지 메이킹의 희생양이 되었다.

나에게도 이건 기로에 선 문제다. 대현이 이번 기회에 한 단계 올라서지 못한다면 나는 다른 방식으로 귀족이 되어야 한다. 부동산으로 종잣돈을 만들어야 하고, 사업체를 세워야 하며, 완전히 클 때까지 온갖 견제를 견뎌 내야 할 것이다.

‘정영주 회장님, 그 정도 선물을 줬으니 나 좀 화끈하게 밀어줘요. 쉽게 갑시다.’

나는 옆 좌석을 힐끗거리며 속으로 주문을 읊어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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