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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인생 2회 차 첫날 (2/104)

제2장 인생 2회 차 첫날

딩동댕, 딩동댕.

“어?”

“수한아, 뭐 하네? 종 울렸다! 들어온나.”

“…….”

“문 닫으라! 벌레 들어온다!”

나는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교실 안에서 옹기종기 앉아 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얼굴을 더듬더듬 만져 보니 코밑에 솜털이 느껴지고, 바짝 깎은 스포츠머리에 닿은 손바닥이 간지럽다. 분명히 나는 죽었는데?

드르륵. 탁!

멍청히 서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재훈이 녀석이 다가와 교실 문을 닫았다.

“뭐, 뭐네? 니 왜 우네?”

“으… 으….”

“와 그라네? 니, 어디 아프네?”

재훈이 녀석은 내 이마를 짚어 보더니 무척 당황했다.

그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나다.

“손 치아라.”

나는 녀석의 손을 걷어 내고는 비어 있는 자리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내가 미친 건가? 야자 시간에 꿈이라도 꾼 거야? 정신병자가 되어 버린 건가? 신내림이라도 받은 건가?

교실 뒤쪽에 D-24일이라고 적힌 패널이 뚜렷이 보인다. 달력은 1989년 9월, 시계는 저녁 7시를 가리키고 있다. 방금 전 종소리는 야자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과거? 고등학교 시절? 어떻게… 된 거지?’

꿈이 아닌 것 같다. 증거는 여러 가지다. 내 뺨에 흘러내린 눈물이 느껴지고, ‘…네’로 끝나는 재훈이 녀석의 진주 사투리는 꿈에서도 흉내 낼 수 없으며, 내가 30년 전 과기대 입시 날짜를 기억해 낼 리 없다.

교실 안은 어느새 조용해졌다. 책장 넘기는 소리와 갱지에 영단어와 수학 공식을 반복적으로 써 재끼는 소리만 들려온다.

입시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고등학생들의 긴장감이 느껴진다. 1분 1초가 아까운 때이니 누가 찡찡 눈물을 흘린다고 신경 쓸 여력 따위는 없다.

‘대체…. 여기가 내 책상?’

나는 책상을 쓰다듬어 보았다. 영어 단어를 빼곡히 적어 둔 책상, 딱딱하지만 허리엔 쿠션이 느껴지는 하이팩 의자다. 벽에는 선풍기가 달려 있고, 천장에는 형광등이 촘촘히 박혀 있는 곳. 나름 시대에 비해 럭셔리했던 교실. 30년 전 내가 공부했던 교실의 풍경이다.

나의 모교, 경남과학고등학교.

경남 전체를 통틀어 한 해 60명만 입학할 수 있으며 최고의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곳이다.

30년 뒤에야 이런 과학고등학교가 수도 없이 생겨나지만, 그 당시에 과학고등학교는 전국에 다섯 곳에 불과했다.

자연스레 이곳에 모인 애들은 아이큐 140은 기본이며, 중학교 때 전교 1등은 밥 먹듯 했고, KAIST 입시를 앞두고 대학 일반 물리책까지 섭렵하는 경쟁을 당연시했다.

겉으론 경쟁적이고 이기적일지 모르겠지만 나름 동료애도 있고, 게으른 놈은 단 한 명도 없는 집단이었다.

속칭 상위 0.1%에 속하는 수재들답게 대부분 10년 이내에 KAIST 석박사 타이틀을 얻지만, 사는 것은 그럭저럭이다.

30년 후엔 네 명 정도가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둘 정도가 중소기업 사장이 되었고, 한 명이 대기업 임원이 된다.

이들 중 내가 유일하게 연 매출 300억대 중형 기업 사장이 된다. 물론 바지사장이지만 말이다.

일부 동기가 학원 강사로 대박 쳤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내가 볼 땐 그냥 평범한 중산층이다. 모자랄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대박도 없는. 공부로 승부하면 딱 그 정도가 한계다.

“휴우.”

심호흡을 해 봐도 이놈의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살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때문이겠지만 40대 후반의 아저씨가 찔찔거리고 있자니 여간 민망한 게 아니다.

회귀한 게 사실이라면 다행 정도가 아니라 초대박인데 어째서 눈물이 멈추질 않나?

룸메이트이자 단짝인 재훈이가 손가락으로 까딱거리던 연필을 멈추고 그런 나를 쳐다보았다.

“와 자꾸 찔찔거리네? 아버지께서 뭐라 하시디가?”

불쑥 재훈이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내 뒤통수를 거칠게 가격했다.

“뭐라꼬?”

“으이그, 추석에 집에 안 간 놈이 니 혼자가 아이라 카면 되지. 시험이 코앞인데 우얄끼네.”

“아니! 니 방금 뭐라캤노! 아버지?”

“이기 미치뿟나? 왜 소리 지르고 지랄이네!”

놀랍다. 내 입에서 잊고 있던 경상도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내 아버지에 대한 얘기다. 나는 달력을 쳐다보았다. X 자가 그어진 달력을 보니 오늘은 1989년 9월 22일. 벌겋게 표시된 추석 다음 주 수요일. 내가 평생 후회했던 바로 그날이었다.

우당탕!

나는 미친 듯이 자리를 박차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아까 교실 문으로 들어서며 울었던 이유는 내가 회귀해서가 아니었다. 정말로 그때 나는 울었었다. 억울하게 죽은 40대 남자로서가 아니라 어린 고등학생으로서 말이다.

나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헐레벌떡 학교 근처의 중국집으로 내달렸다. 오늘은 내 병신 같은 아버지가 아들과 마지막으로 같이 식사를 하려고 찾아온 날이었다.

나에게 볶음밥을 사 주고, 당신은 단무지 한 접시와 소주 한 병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그 당시 나는 거지꼴로 학교를 찾아온 것도 모자라 내 앞에서 술까지 마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밥 먹다 말고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고, 그게 내가 살아생전 본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해 10월 나는 서울 동두천 도금 공장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어 버린 아버지를 만났다. 독가스가 안 빠진 것도 모르고 도금조를 청소하러 들어갔다가 변을 당했다고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산재를 빙자한 자살이 분명했다. 아버지는 분명히 알고도 한 거다. 타이밍이 그렇다. 내가 대학에 합격하자마자 실행에 옮겼으니까.

죽긴 왜 죽어! 기껏해야 우리 가족이 손에 쥔 건 장례비 200만 원이 전부였어. 등록금에 보탤 돈 따위는 남지도 않았다고! 심지어 나는 장학생이었다고! 이 병신아!

벌컥!

“…어?”

“헉헉. 어우 씨, 다행이다. 헉헉. 아직 있었네.”

난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평생 처음으로 하늘에 감사 기도를 했다. 다행히도 이 빌어먹을 인간이 아직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딱 한 병이다. 내 안 취한다.”

“휴우.”

털썩.

나는 아직 치우지 않은 볶음밥 접시 앞에 앉아 남은 밥을 마구 입에다 욱여넣었다. 그러곤 소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워 입에 털어 넣었다.

크윽 소리가 절로 날 만큼 독하다. 역시 소주는 옛날 소주가 맛있다.

“뭐, 뭐꼬? 고등학생이 술을 먹고?”

“됐으예. 한 병 더 하입시더. 아줌마, 여기 소주 한 병 더 가져갑니더.”

“학생!”

“우리 아버집니더. 어른 앞에서 술 배우는 기라예. 괘않습니더.”

중국집 아줌마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 술을 마시려면 간이 생생한 고등학생 때 마셔야지.

눈앞의 아버지는 더욱 놀랐다.

“후…. 내가 술 먹는 게 그리 싫티가?”

“아부지, 됐다 안 했는교. 쓸데없이 죽을 생각일랑 말고 한 잔 하이소.”

꼴꼴꼴.

잔이 채워지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눈을 동그랗게 뜰 뿐 소주잔을 들지 못했다. 외려 내가 먼저 자작해서 술 한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탁!

“뭐, 뭔… 우째….”

“우째 알았냐고예? 아들을 뭐로 보는 깁니꺼? 천재 아닙니꺼, 천재!”

나는 피식 웃으며 아버지를 달랬다. 죽기 전에 난 이때의 아버지와 동갑이었다. 사회 경험으로 따지면 훨씬 노련할 거다. 위화감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니….”

“정 죽고 싶으므 자갈치 시장에 가서 회칼 하나 사 가지고 그 사기꾼 친구 있지예? 그 새끼 뱃대지 몇 번 쑤시고 죽으이소.”

“니 아버지한테 믄 소리를 그리하노? 그리고 그 새끼 개털이다. 그래 봐야….”

“훗! 아버지가 그라니까 당하는 기라예. 그 새끼 개털처럼 다니지예? 아입니더! 사기 친 돈은 저어기 시골 농협에 잘 꿍쳐 뒀을 낍니더. 뒈지면 자연스레 그 새끼 아들내미한데 유산으로 간다카이. 없던 돈이 떡하고 나타난다니까예. 흐흐.”

“뭐이라?”

꼴꼴꼴. 탁!

아버지의 표정이 달라진다. 죽을 때까지 사기꾼에게 속고 산 아버지. 내 인생에 하등의 도움이 안 되는 아버지지만 가슴에 그리 묻으면 평생 간다. 내가 싫다. 해결할 거다.

“크으, 그놈 뱃대지 쑤실 자신 없으므, 그냥 집에 가서 민사소송이나 제기하이소.”

“소송? 내, 내가 돈이 어디 있노?”

“안 어렵다카이. 돈도 많이 필요 없고 그냥 법무사한테 한 20만 원 쥐여 주고 가압류나 얹어 놓으면 된다 아이오. 그 새끼 법정에 안 나올 끼 뻔하니까 아부지는 그냥 법원이 오라 하면 오고, 가라 카면 집에 가믄 되는 기라예. 돈은 내가 다 회수해 줄 테이까 걱정 말고예. 몇 년만 참으이소.”

정말 몇 년만 기다리면 된다. 지금에야 차명 계좌를 추적할 방법이 없지만 조금만 있으면 금융 실명제가 되거든. 평생 돈을 숨겨 놓을 게 아니라면 결국 사기꾼 놈이라도 한 번은 금융 거래를 하기 마련이다.

꼴꼴꼴. 탁!

“그만 마시라!”

“흐흐. 아들 술 취하는 꼴은 보기 싫은갑제?”

나는 소주를 연신 들이켰다. 안 그래도 목말랐는데 참 좋다.

퍽! 턱!

“흐흐. 왜 손을 올립니꺼? 내가 못 할 소리 했는교?”

“뭐 웃어샀노! 내가 그리 못났나!”

아버지가 내 머리통을 냅다 갈기려 했지만 팔을 턱 막았다. 내가 맞을 이유는 전혀 없거든.

벌겋게 달아오른 아버지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을 그리 천박하게 술독에 담가 봐야 삶이 나아지지 않아. 싸워야지!

이 양반을 보니 내가 인생 1회 차에 무슨 죄를 지었는지 번쩍하고 깨달았다.

약한 주제에 착하게 살아왔다고 자위했던 거다. 한 방 맞으면 견뎌 내지도 못하는 주제에 200명이나 되는 식구들을 거느렸어.

약한 놈은 당연히 사랑받을 자격이 없고, 사랑할 자격 따윈 더더욱 없다. 나 회귀한 게 맞네. 아주 똑똑해졌다.

“못났지예. 아주 못났으예. 그래서 평생 증오했다 아입니꺼. 근데 그게 더 상처가 깊더라고예. 그래서 이러는 겁니더. 내가 살려 줄 끼니까, 호강은 못 시켜 줘도 평생 양주 먹고 살게 해 줄 끼니까 집구석에 틀어박혀서 운동이나 하이소. 아들 앞길 막지 말고. 알겠습니꺼, 아버지!”

“이 새끼 뭐라카노!”

퍽!

나는 아버지 팔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이 들어가서일까? 아니면 본의 아니게 깨달음을 얻은 꼴이 되어 버려서 그랬을까? 수십 년간 찌꺼기처럼 남아 있던 내 감정이 훅 하니 씻겨 나갔다.

“아버지, 돌아갈 차비는 있지예?”

“있다!”

“이대로 서울 가면 평생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마이소. 이대로, 그 모습 그대로 부산 가서 목욕하고, 어머니 바가지 따윈 싹 무시하고! 그 개새끼한테 민사 소송 얹고! 그렇게 하이소! 알았습니꺼?”

“그래그래.”

“약속하이소.”

“알았다. 약속! 약속!”

“됐으예. 집으로 돌아가이소.”

아버지의 눈빛이 달라진 걸 확인했으니 문제없을 거다.

바닥에 엎어진 자는 작은 희망만 줘도 일어난다. 아버지가 불쌍했던 이유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고등학생이었던 나 또한 그런 희망을 줄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칫!”

나는 그렇게 중국집을 벗어났다. 취기 따윈 없었다. 튼실한 간이 알코올 따위는 단박에 해독해 버렸으니까.

덕분에 명확해졌다. 나는 미친 게 아니다. 꿈을 꾼 것도 아니야. 정말 회귀한 거다.

    • *

드르륵.

나는 교실 문을 열고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오늘따라 내 행동이 유별나니 모두들 한 번씩 쳐다봤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재훈이가 유독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놈은 내 가정사를 좀 안다. 원체 눈치가 빠른 놈인 데다 룸메이트였으니까.

내가 담요 한 장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을 지켜보곤 집에서 오리털 이불 한 채를 가져왔다. 입은 거칠지만 생각이 깊은 녀석이다.

퍽!

나도 모르게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라. 난 지금 대박을 맞았지 불쌍한 게 아니다.

“고맙다.”

“미친 새끼. 와 때리네!”

“이 은혜는 갚을게. 꽃길 걷게 해 주마.”

“뭐? 꽃길? 그기 뭔 개소리네?”

“공부나 해, 새꺄!”

“방해한 새끼는 니야, 마!”

“나 피곤해서 기숙사 들어가니까 깨우지 마라.”

“어쭈, 서울말은 왜 하고 지랄이네?”

“됐다, 마.”

굳이 술 퍼마신 것을 들킬 필요는 없었다. 그길로 책상을 정리하고는 기숙사로 들어와 버렸다.

기숙사 방바닥에 엎드려 기억나는 것을 무작위로 적어 가며 시간을 때웠다. 회귀할 줄 알았다면 로또번호나 기억해 두는 건데 싶었다.

하긴 그게 무슨 상관인가? 미래를 알고 있으니 기회는 차고 넘친다.

고등학생부터라. 지겨워서 그렇지, 인생 2회 차를 시작하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다. 외려 귀족이 되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잖은가.

평생 경쟁자였던 ‘시간’이라는 녀석이 나에게 가장 큰 우군이 되었다. 나는 드디어 시간마저 이겨 버린 놈이 된 것이다. 세상에 나보다 잘난 놈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 깡그리 밟아 줄 테니까.

난 강한 놈이 될 거다. 귀족이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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