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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115화
언제나 앞만 보고 살아온 결인들이기에, 뒷일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목동 전투가 끝나고, 박재형과 에스파디아의 대화를 통해 모두가 알게 되었다.
용병처럼 사용되고, 언노운의 공습이 끝나면 결국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죽음이란 단어의 무게 때문에, 다들 쉬쉬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의도 상공에 게이트가 열렸을 때, 싸움이 끝나면 예전처럼 동아리방에 모여서 기타치고 노래하자던 정진영.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행이 해맑게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결인들.
절망적인 상황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결인들을 보고, 이정우는 차마 비관적인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이정우는 앞으로 다가올 결과를 최현도 잊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하며 애써 엷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최현의 입장은 그게 아니었다.
박재형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그 누구도 죽지 않을 것이다.
단 한 사람, 박재형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지구를 떠나게 된다.
“가자 현아.”
“……네.”
최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목동으로 향했다.
* * *
흔들리는 버스 안.
차창 너머로 보이는 자욱한 안개.
하지만 불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마치 여행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장면, 이 감정, 내게 낯설지 않았다.
지난날의 기억이 꿈으로 나타난 건가?
“아저씨.”
아저씨라고 했는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기억 속에 선명한 아이의 얼굴이 두 눈에 들어왔다.
“소, 소희?”
구미에서 구출한 아이.
수색대로 활동하는 소희의 부모님을 구출하고, 함께 쉘터에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이거.”
소희는 양손에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사과 모양의 자그마한 구슬.
“이거 내가 아끼는 건데요, 이거 아저씨 줄게요.”
“…….”
“아저씨가 우리 엄마랑 아빠랑 삼촌 데리고 왔으니까, 이제 이거 없어도 돼요.”
소희가 건네주는 사과 모양의 구슬을 받아들고, 멍하니 구슬을 쳐다봤다.
손때가 묻은 사과 구슬.
뒤이어 소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엄마랑 아빠가 그랬는데요, 그거 소원을 들어주는 구슬이라고 했어요.”
“소원이라면…….
“난 이제 그거 없어도 되니까 아저씨 줄게요. 아저씨도 소원 있으면 그거 꼭 쥐고 기도하면 돼요.”
“…….”
“아저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죽지 않고 꼭 살아남으라고 저도 기도할게요.”
소희는 내게 사과 구슬을 건네주고, 배시시 웃으며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띠링-!
뒤이어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사과 구슬]
-아이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구슬.
-귀하의 노고로 아이의 부모님이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구슬을 선물한 아이의 마지막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아이의 소망: 박재형의 생존.
-박재형의 소망: 모두의 생존.
-사과 구슬이 활성화됩니다.
메시지를 끝으로 손에 쥐고 있던 사과 구슬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그와 동시에 온 세상이 하얗게 물들더니, 심장의 고동이 선명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가슴을 쓸어내리자, 10㎝ 크기의 구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장의 힘찬 박동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어?”
‘고개 들어.’
귓가로 들리는 에스파디아의 목소리.
이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고개를 들자, 새하얀 빛이 사라지며 폐허로 변한 롱아일랜드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얼떨떨한 마음에 내 전신을 더듬고, 눈으로 훑었다.
쾅!!!
뒤이어 잔해에 깔려 있던 인비디아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 얼굴을 보고 말까지 더듬으며 얘기했다.
“마, 말도 안 된다. 이건 불가능해!!”
인비디아는 얼마 남지 않은 마력을 끌어올리며 갑주를 착용했다.
시간을 주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곧장 대검을 치켜들고 내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에스파디아!!”
침착함을 유지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패운이 짙은 악신의 모습만이 남았다.
‘광란을 써라.’
귓가로 들리는 에스파디아의 목소리.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째서 에스파디아의 말이 메시지가 아닌 환청으로 들리는 거야?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지만, 지금은 하나하나 캐묻고 있을 여유가 없다.
이에 심박을 끌어올리려는 찰나.
츠으으으-!!
눈부신 섬광과 함께 전신에서 증기가 피어나고, 흑백의 갑주가 전신을 휘감았다.
뭐지?
심박을 증가시키지도 않았는데 마력이 방출되었다.
이건 마치…… 내 몸이 마력으로 이루어진 느낌이라고 해야 좋을까?
코앞으로 다다른 인비디아를 보고 황급히 흑도 명월을 말아쥐자, 월광을 번뜩이며 마력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떵-!!!!!
흑도 명월과 인비디아의 대검이 맞닿자, 전신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대지가 으스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단 말이다!!!”
콰과과광-!!!!!!
광!!!!!
떵-!!! 콰직- 펑!!!!!!
인디비아는 광기에 휩싸인 들짐승처럼 무차별적인 공격을 강행했다.
반면에 내겐 여유가 있었다.
놈의 공격을 모조리 쳐내며 평정심을 유지했다.
평정심을 유지해?
아니, 자의로 유지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런 감정도 없는 인형이 된 느낌.
초조함도, 불안함도, 공포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모든 것을 초월한 존재처럼, 아무런 감흥 없이 인비디아를 마주할 수 있었다.
반면에 인비디아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분명 심장을 꿰뚫었단 말이다!”
괴성을 내지르며 대검을 내지르는 인비디아.
텅-!!
칼등으로 공격 궤도를 옆으로 흘리고, 그대로 돌려차기를 가했다.
쾅-!!!!!!
지면에 곤두박질치며 수백 미터를 나뒹구는 인비디아.
잠깐의 여유가 생겼으니, 황급히 에스파디아를 불렀다.
“에스파디아, 어떻게 된 거예요?”
‘무엇이 말이냐.’
“저 죽은 거 아니에요?”
‘죽긴 누가 죽어.’
차분하게 가라앉은 에스파디아의 목소리.
설마 여기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거야?
계속 무언가를 숨기는 것 같더니, 이걸 기다린 건가?
왜 얘기하지 않은 거야?
이에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제가 인비디아에게 당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아니, 왜 얘기하지 않은 거예요? 성물의 효과,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었지. 하지만 얘기할 수 없었다.’
“아니 왜? 우리 같은 편이잖아요!”
‘확인하고 싶었거든.’
“그게 무슨…….”
‘합격이다.’
합격이라니.
지금까지 날 시험했다고?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트롤리 딜레마.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할 수 있느냐는 질문.’
트롤리 딜레마라면 나도 잘 알고 있다.
양쪽 철로에 사람이 있고, 기관차의 브레이크가 고장 났을 때 소수가 있는 쪽으로 갈 것이냐, 다수가 있는 쪽으로 갈 것이냐는 질문.
내게 이런 시험을 한 이유가 뭐지?
직접 물어보려는 찰나,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마지막 순간까지 네가 소수를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는지 확인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위선자와 영웅의 차이는 본인의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 정해지는 법이지.’
“…….”
‘네가 지금껏 잘해주었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최악의 순간에, 네가 어떤 선택을 내리지는 알아야만 했어.’
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험했다고?
지금껏 죽을 만큼 굴리더니, 죽음을 경험한 뒤에야 모든 사실을 밝히는 에스파디아.
난 성물이 있다는 것조차 까맣게 있었단 말이다.
못마땅한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나 참, 저한테 모든 권한을 넘긴 마당에 실험해서 뭐하려고…….”
‘내가 정말 모든 권한을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전부 준 게 아니라고?
잠깐, 이전에는 계속 시스템 메시지로 얘기하더니, 지금은 목소리로 얘기하고 있잖아.
무슨 차이가 있는 거지?
당혹감에 머리를 긁적이자,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게 모든 권한을 주었다면, 내가 어떻게 네 마력을 차단했겠느냐.’
“그럼…… 저를 실험하려고 일부러 계속 결인들 파편 흡수하라고 보챈 거예요?”
‘맞아, 네 선택이 궁금했거든.’
“와…… 당신 진짜 쓰레기다. 어떻게 사람 목숨으로 장난을 칩니까?”
진심을 담아 욕했지만, 에스파디아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대답했다.
‘완전한 동화를 위해선 꼭 확인해야 했어.’
“완전한 동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의식에 한정되어 있던 너와 나의 연결고리가 의식세계로 나온 거야. 이제야 비로소…… 네게 완전히 흡수된 거다.’
그래서 에스파디아의 의견이 메시지가 아닌 환청으로 들리는 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자, 에스파디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심장이 찢어지면서 억눌린 근원도 완전히 개방되었다.
“네?”
‘이제 넌 파편이 없어도 근원을 100% 사용할 수 있어. 심장이라는 약점을 지닌 생명체가 아닌, 전신이 마력으로 이루어진 절대적인 신이 된 거야.’
확실히…… 이전과 느낌이 다르다.
이전에는 심박에 따라 발산하는 마력이 달라졌는데, 지금은 전신에서 마력이 느껴졌다.
심장을 통해야만 마력이 이동하는 게 아니라, 원하는 신체 부위에서 즉각적인 반응이 가능해진 것이다.
마력 그 자체가 된 느낌.
“잠깐, 파편 없이 근원을 100% 사용할 수 있으면…… 이제 파편 흡수할 필요 없지 않아요?”
‘내가 바라는 이상을 완성하려면 파편까지 흡수해야 한다. 추후 파편까지 흡수하면, 너는 예전의 나보다 강한 힘을 지니게 되는 거야.’
“이 상태에서 인비디아를 처리할 수 있다면 나머지 6명도 전부 처리할 수…….”
‘아니, 더욱 강해져야 한다. 언노운의 행성에서 태어난 7명의 아이가 끝이 아니야. 녀석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존재를 찾아서 없애야 한다.’
“거 참, 저한테 너무 많은 걸 바라시네.”
‘그것이 계승자의 운명이야.’
좋아, 어차피 에스파디아의 힘을 이어받는 순간부터 언노운과 싸워야 한다는 건 나도 예상한 범위였다.
한숨을 내쉬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뒤이어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파편까지 흡수해야만 내 계획이 완성된다. 그러니 꼭, 무슨 일이 있어도 흡수하거라.’
“계획이 뭔데요?”
‘언노운을 멸망으로 이끄는 힘. 마르지 않는 샘물이자 진정한 풍요의 그릇. 성배의 완성이다.’
“성배?”
‘신의 능력마저 초월한 절대자의 힘. 관리자도, 언노운도 넘볼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이지. 너는 성배가 되어야 한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자, 에스파디아가 말을 이었다.
‘아직 이해되지 않았느냐?’
“이해는 돼요. 그래도 정리 좀 하려고요.”
‘…….’
“그러니까…… 공기 같은 게 마력이고, 그걸 한데 뭉쳐서 강하게 만들기 위해선 육체가 필요한 거죠?”
‘맞아.’
“그 육체, 그릇을 만들기 위해 제가 마력에 적응하도록 라스트아크를 만들었고, 제가 성공적으로 수행한 덕에 저한테 흡수된 거고요?”
‘그래.’
“근원의 동기화를 끝내고, 방금 인비디아의 공격으로 당신과의 동화도 끝난 거죠?”
‘그렇지.’
“이 상태에서 파편까지 흡수하면…… 제가 성배가 된다고요?”
‘전부 이해했구나.’
그래, 이해는 했다.
하지만 의구심은 남았다.
“예전의 당신은 마력으로 육체도 만들 수 있었잖아요. 굳이 인간의 육체가 필요한 이유가 뭐예요?”
한 가지 의문을 꺼내 들자, 에스파디아는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있는 인비디아를 보고도 모르겠느냐?’
이에 인비디아를 쳐다보자, 그의 피부가 사라지고 검붉은 마력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형상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피부를 재생하는 것 같더니, 마침내 마력이 고갈된 모양이다.
“아아…… 안 돼, 안 돼……!”
인비디아의 입에서 공포에 질린 소리가 들려왔다.
흘러내리는 마력을 두 손으로 잡아보려 하지만, 이미 인간의 형체는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말없이 인비디아의 모습을 쳐다보자, 뒤이어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력으로 이루어진 육체는 마력의 소진과 함께 사라진다. 육체를 유지하는 데도 마력이 필요하니까. 하지만 너는 달라.’
“어떻게 달라요.”
‘존재와 허무의 차이다.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하기에, 마력이 아무리 부족해도 모습을 유지할 수 있지. 그럼 육체를 유지하기 위해 마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거야.’
“…….”
‘틀이 잡힌 조형물을 만드는 것과, 아무런 틀도 없는 상태에서 조형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면…… 무엇이 더 어렵겠느냐?’
“당연히 틀이 있어야 쉽겠죠. 틀이 없으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만들기도 어렵고…… 형태를 유지하기도 어렵죠.”
‘그거야.’
에스파디아 이 녀석…… 원래 이렇게 설명을 잘하는 사람이었어?
그동안 하도 어영부영, 흐지부지 설명해서 무슨 문제 있는 줄 알았는데.
시스템 구축도 지금처럼 깔끔하게 했으면 얼마나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