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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87화
현재 시각은 오후 11시 40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칠흑 같은 어둠이 천지를 뒤덮고 있었다.
시몬은 비행기의 모든 조명을 켜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외쳤다.
김명석은 시몬의 말을 듣고 격납고 있는 우리에게 손짓했다.
“빨리 와요! 탑승하랍니다!”
얼마 없는 항공유까지 탈탈 털어서 인벤토리에 챙기고, 서둘러 비행기에 탑승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괜찮겠습니까?”
김명석이 묻기에, 조종석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그건 시몬에게 물어봐야죠.”
김명석은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시몬을 불렀다.
두 사람은 대화를 주고받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시몬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Ingen fare!”
“뭐라는 겁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네요.”
시몬이 계속해서 얘기하자, 김명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5년 동안 지겹게 비행한 코스래요. 눈감고도 착륙할 수 있답니다.”
역시, 이래서 토박이가 있어야 돼.
트롬쇠로 돌아가는 건 시몬에게 전적으로 맡겨야겠다.
이윽고 모두가 탑승하자, 김명석은 손에 닿는 아무거나 붙잡으며 얘기했다.
“모두 꽉 잡아요! 출발합니다!”
거친 엔진소리와 함께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활주로를 나아가는 비행기.
이에 앞좌석을 붙잡고 창밖으로 보이는 스발바르 제도를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 * *
눈 감고도 착륙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시몬은 막상 트롬쇠 상공에 도착하자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하늘과 지면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착륙할 수 있는 것 맞죠?”
김명석을 쳐다보며 묻자, 그는 시몬을 쳐다보며 외쳤다.
둘이서 대화를 주고받더니, 김명석은 절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표정만 봐도 무슨 상황인지 알 것 같았다.
“트롬쇠 공항에도 눈보라가 쳤나 봐요.”
“활주로가 안 보이는 거예요?”
“활주로는 시몬이 감으로 맞출 수 있는데, 미끄러지는 게 문제래요.”
“……예?”
“잘못하면 비행기가 헛돌 수 있다고요. 그럼 바람 저항 때문에 기체가 기울고, 그대로 엎어지면 폭발할지도 모릅니다.”
어떡하지?
혼란스러운 상황에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방안이 떠올랐다.
트롬쇠위아는 섬이다.
우리가 지낸 호텔 바로 앞으로 바다가 있지 않았는가?
“바다에 착륙시킬 수 있습니까?”
“예에? 이 날씨에 바다 수영이라도 하자는 거예요? 얼어 죽고 싶어요?”
“그럼 맨땅에 헤딩하거나 바다로 가거나, 시몬이 자신 있는 거로 하자고 해요.”
김명석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시몬에게 얘기했다.
시몬은 잠시나마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방향을 틀어 아크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바다를 택한 모양이다.
시몬은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지, 격양된 목소리로 뭐라 뭐라 외쳤다.
김명석은 앞좌석을 붙잡고 시몬의 말을 듣더니,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김명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뭐래요?”
“여정이 우리를 기다린다나 뭐라나.”
“…….”
“수상비행기도 몰아본 적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는데요.”
“이게 수상비행기는 아니잖아요.”
“내 말이.”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마른침을 삼키며 일행을 쳐다봤다.
정진영은 이미 기도하고 있고, 전완수와 최현은 강화제 알약을 손에 쥔 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거 먹으려고?”
“신체 능력이라도 강화하면 충격이 덜하지 않을까?”
나도 좀비화라도 사용해야 하나?
부웅-!
그 순간, 비행기는 급격하게 수직 낙하하기 시작했다.
“어어어어어!!”
“오우…… 쓋!”
다들 창백해진 표정으로 조종석을 쳐다봤다.
정면으로 바다가 보인다.
아크의 독 안개 제거기로 인해 출렁이는 파도가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Hold deg fast!!”
시몬이 뭐라고 소리치는데, 김명석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통역조차 하지 않았다.
뒤이어 수직 낙하하던 비행기가 급격하게 기수를 들고, 마치 높새바람을 타고 춤을 추는 종이비행기처럼 나풀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시동을 끈 건가?
엔진 소리가 안 들리는데?
“꽉 잡아!!”
김명석의 입에서 단말마와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촤학! 촤아아아아!!
출렁이는 파도에 비행기 하부가 맞닿자,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좌측 날개가 부러지고, 유리가 깨지며 파편이 날아들었다.
두 눈 질끈 감고 양팔에 힘을 주어 앞 좌석을 붙잡았다.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의자가 악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서지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촤학- 촤아아아…….
오래 지나지 않아 서서히 진정되는 기체.
시몬은 재빨리 안전벨트를 풀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뭐, 뭐라는 거예요?”
김명석을 쳐다보자, 그는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외쳤다.
“빨리 나가! 가라앉는다!”
이에 안전벨트를 부술 기세로 뽑아버리고, 황급히 출입구로 향했다.
아니지, 지금 문을 개방하면 쏟아져 들어오는 바닷물을 막을 수 없다.
이에 천장으로 시선을 돌리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가속, 핀치.”
쾅-!!!!
찌그러지는 천장의 모습.
자세가 불편한 탓에 온전히 힘을 실을 수 없었다.
그래도 어떡해.
뚫어야지.
쾅!! 쾅!! 쾅!! 콰직- 떵!!
천장을 부수고, 그곳으로 빠져나갔다.
“잡아요! 빨리 올라와!”
손을 내밀고 일사불란하게 사람들을 밖으로 꺼냈다.
대략 50m 거리에 위치한 요트 선착장.
결인들은 단 한 번의 도약으로도 충분하지만, 노르웨이 플레이어와 김명석에겐 무리였다.
“업혀요.”
“예?”
“업히라고.”
황급히 김명석을 등에 업고, 옆에 있는 결인들에게 외쳤다.
“먼저 건너가!”
“우리도 업고 뛰면 돼!”
“사람들 업고 50m 뛸 수 있어?”
“강화제 알약 먹으면 가능해.”
“먹지 말고 빨리 뛰어! 내가 옮기면 되니까!”
여기까지 말을 마치고, 김명석을 등에 업은 채 단숨에 선착장을 향했다.
한 번의 도약으로 부족하면 두 번, 세 번 하면 그만이다.
내겐 3단 뛰기가 있으니까.
훙-!
공기를 박차며 재차 뛰어오른 뒤, 선착장에 김명석을 내렸다.
김명석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입을 벌렸다.
“바, 방금 뭐, 뭡니까.”
“혹시 모르니 따뜻한 담요라도 가져와요!”
“어떻게, 어떻게 사람이 하늘을 날았…….”
쾅-!!
하나하나 대답할 시간이 없기에, 황급히 비행기로 돌아가 노르웨이 플레이어들도 품에 안았다.
그들의 표정도 김명석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간발의 차로, 모든 사람을 선착장으로 옮길 수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추운 날씨에 급격하게 허리를 써서 그런지,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니면 추락의 여파를 온전히 허리로 감당해서 그런가?
띠링-!
허리를 두드리며 주변을 살피는 순간,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일치하지 않는 아크입니다.
-파티 소리결의 국적은 대한민국입니다.
-파티원이 한자리에 모여야 하며, 소속된 국적에 있는 아크에 도착해야 합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서 재차 확인하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얘기했다.
“여기도 아크는 아크잖아.”
세 번째 에피소드의 클리어 목표.
씨앗의 60% 이상을 확보한 뒤 아크로 진입하는 것.
우리가 노르웨이 아크에 들어와서 이런 홀로그램이 뜬 모양이다.
어차피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으니, 지금은 기분 나쁠 것도 없었다.
홀로그램을 닫고 옆에 있는 일행을 쳐다보자, 다들 가라앉는 비행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반면에 노르웨이 플레이어와 김명석은 여전히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뒤이어 소란을 들은 노르웨이 생존자들이 저마다 촛불을 들고 요트 선착장으로 나왔다.
현 상황을 보고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든 말든, 안드레스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읊조렸다.
김명석을 쳐다보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통역했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사람 맞아요?”
통역인지 본인 질문인지 모르겠지만,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사람이죠. 설명은 가면서 하죠.”
“지금 어디를 간다는…….”
“쉴 시간이 어디 있어요? 단번에 아크에 도착했으니 오히려 잘됐습니다. 생존자들 데리고 공항으로 이동하죠.”
김명석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 * *
붉게 물든 하늘과 메마른 대지.
모래바람이 흩날리는 이름 모를 행성의 절벽 위로, 한 남자가 뒷짐을 진 채 적막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령관이시여, 부르셨습니까.”
뒤이어 사령관의 뒤로 또 다른 존재가 나타났다.
부하로 보이는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묻자, 뒷짐을 지고 있던 존재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물었다.
“병력은.”
“예정대로 이곳에 집결하고 있습니다.”
“에스파디아의 움직임은 없었나?”
“아직 포착된 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놓치는 바람에…….”
사령관이 오른손을 들자, 부하는 황급히 고개 숙이며 입을 다물었다.
뒤이어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변명이나 듣자고 자넬 부른 것 같나?”
“……시정하겠습니다.”
“에스파디아가 본인 행성에 재밌는 짓거리를 한 것 같던데, 어디까지 파악했지?”
“자연적으로 파생된 마력을 스스로 차단했습니다.”
“그놈이 자연의 순리에 개입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사령관은 입꼬리를 올리더니,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그렇게 순리를 좋아하던 놈이 본인이 창조한 세계를 파멸로 이끌었다?”
“그렇습니다.”
“어지간히 초조했나 보구나.”
사령관이 싱겁게 웃자, 부하는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얘기했다.
“위대하신 인비디아 사령관께서 직접 병력을 움직였으니, 제아무리 에스파디아라도 두려웠을 겁니다.”
“내가 위대하다고? 아니, 오직 그분만이 위대하지.”
“…….”
“나를 실망시키는 건 그분을 실망시키는 거나 마찬가지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에스파디아의 모행성은 찾았나?”
“찾았습니다. 모든 병력이 집결하면 이동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습니다.”
인비디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등 뒤로 펼쳐진 세상을 바라봤다.
하늘에 열린 수십 개의 게이트와 지면을 가득 채운 온갖 마물들.
오직 힘에 굴복하고, 지성이란 존재하지 않는 하등 종족들이 인비디아의 부름에 모여들었다.
바퀴벌레처럼 득실거리는 온갖 마물들을 바라보며 인비디아는 두 눈을 번뜩였다.
그의 홍채에서 붉은빛이 번뜩이자, 모든 마물의 시선이 인비디아에게 쏠렸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여 들어라!”
마물들은 아무런 반발도 하지 않고, 목젖을 갈며 인비디아를 응시했다.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너희의 같잖은 목숨을 바쳐, 그분의 기쁨이 되어라!!”
크어어어어어-!!!
기괴하게 생긴 괴생명체들은 인비디아의 명령에 따라 함성을 내질렀다.
아니, 함성이란 말도 사치였다.
목적 없는 폭력성.
목적 없는 아우성.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존재들.
놈들의 포효와 함께, 그 뒤로 펼쳐진 세상이 두 눈에 들어온다.
끝을 헤아릴 수 없는 시신이 지면에 널브러져 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시신을 밟고 선 괴물들.
한때 문명이 번창한 행성이었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멀찍이 폐허로 변한 도시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생명이 꿈틀거리던 이곳은, 인비디아의 강림과 함께 더는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지옥도로 변했다.
인비디아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기대하거라 에스파디아. 네놈이 무슨 꿍꿍인지 몰라도, 네가 이룩한 모든 것을 깨끗하게 지워줄 테니.”
* * *
“전부 탑승했습니까?”
김명석을 쳐다보며 묻자, 그는 인원파악을 마치며 대답했다.
“144명 전원 탑승했습니다!”
김명석의 대답을 듣고 조종석으로 향했다.
조종석에는 박재우와 황덕록이 앉아 있고, 뒤편의 비상용 간이 의자에 시몬이 앉아 있었다.
“너희가 조종하게?”
“이렇게 큰 비행기는 시몬도 운항해 본 적 없대.”
“연료는?”
“충분해. 디 아이싱 작업고 끝났고 기체문제도 없어. 격납고에 넣어두길 잘했어.”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박재우와 황덕록의 어깨를 토닥였다.
“고생했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도착할 때까지 고생했다는 말은 아껴둬.”
“그럼…… 조금만 더 고생해 줘.”
싱겁게 웃으며 얘기하자, 박재우와 황덕록도 덩달아 입꼬리를 올렸다.
누구보다 부담감을 느끼고 있을 두 사람이다.
그들의 손에 144명의 생존자와 김명석, 소리결, 오로라의 운명이 달렸으니 말이다.
황덕록은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얘기했다.
“너도 어서 앉아. 바로 출발하게.”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기내로 이동했다.
자리에 앉기 전, 생존자들의 표정을 가볍게 훑었다.
그들의 표정으로 두려움이 엿보였다.
반강제적으로 아크를 떠나 비행기에 몸을 실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괜히 마음 약해질까 봐, 억지로 시선을 외면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앞자리에 있던 8살 정도로 보이는 여아가 고개를 슬쩍 틀어 내 얼굴을 쳐다봤다.
아이의 시무룩한 표정을 보고, 애써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don't worry. everything is 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