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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86화
뭐?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데.
김명석의 말을 듣고 무의식적으로 결인들을 쳐다봤다.
다들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헛기침과 함께 물었다.
“갑자기…… 왜요?”
“여러분이 그랬잖아요. 일주일 뒤에 게이트가 열린다고. 그리고 아크도 버티지 못할 거라고.”
어젯밤, 모닥불에 둘러앉아 우리가 시드볼트를 가려는 이유와 함께 외계 침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땐 아무런 말도 없더니, 이제 와서 갑자기 이러면…….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곤란한 마음에 이마를 문지르자, 안드레스가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알았답니다. 그런 여러분이 외계 침공을 가공할 위협이라 하니, 아크에 있는 144명을 지켜낼 자신이 없대요.”
“…….”
“무리한 부탁이라는 것도 알고, 본인이 무능력하다는 것도 안답니다. 하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을 버릴 수 없대요.”
“아무리 그래도…….”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 부디 생존자들 데려가 달라고 하네요. 그게 안 되면 아이들만이라도.”
“아니, 아니 잠시만요. 아이들 문제가 아니에요. 가는 길에 비행기가 추락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몰라요.”
“…….”
“심지어 눈보라 때문에 기한을 맞출 수 있을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런 부탁을 하시면 지금 당장 저희도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말끝을 흐리며 일행을 쳐다봤다.
다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인간으로서 도리라면 이들을 데려가는 게 맞지만, 가는 길에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인륜을 저버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우리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마당에 144명의 생존자를 비행기에 태우는 건 더욱 무책임한 일이었다.
위급한 순간에 모두를 구할 자신이 없다.
그러자 뒤에 있던 정진영이 입을 열었다.
“데려가자.”
“네?”
“데려가자고.”
“형, 이착륙할 때 얼마나 위험한지 알잖아요.”
“어차피 여기 두고 가면 게이트 열리고 전멸하는 거 아니야?”
정진영의 의견에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대답 대신 시선을 회피하자, 정진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가는 길에 추락해서 죽든, 여기서 죽는 날만 기다리든, 결과는 똑같잖아.”
“그건 그렇지만…….”
“한 가지 조건만 걸어.”
“조건이요? 어떤 조건요.”
“가는 길에 우리 발목 잡는 상황 발생하면, 인륜이고 뭐고 전부 버리고 간다고.”
정진영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냉정했다.
죽든 말든 상관없으면 따라오라는 식이었다.
이에 아무런 대답도 못 하자, 옆에 있던 김명석이 그대로 전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잠깐, 잠깐만요 김명석 씨!”
“이미 뱉은 말이잖아요. 말이 안 통한다고 해서 뱉은 말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김명석의 표정도 이전과 달랐다.
기다려봐야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라는 걸 느꼈는지, 선택을 안드레스에게 맡기는 것으로 보였다.
안드레스와 파티원들은 덤덤한 표정으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우리를 향한 원망은 엿보이지 않았다.
최대한 이성적으로, 상황을 직시하는 모습이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자, 뒤이어 안드레스가 수염을 매만지며 얘기했다.
결인들의 시선은 김명석에게 쏠렸고,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정도 부담은 본인들이 지겠답니다.”
“부담을 어떻게 감당하겠다는 거예요. 자그마치 144명이라고요.”
“…….”
“그 사람들이 다 죽어도 지금처럼 태연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기생충 같은 놈들이면 100명이든 1000명이든 상관없지만, 아크에 있는 사람들은…….”
“박재형 씨.”
너무 열을 올렸나?
김명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다.
“그걸 안드레스가 모를까요?”
김명석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김명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박재형 씨는 따뜻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부담 느끼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이분들이 말하는 건 여러분에게 업혀 가겠다는 게 아니에요.”
“…….”
“그저 동행하겠다는 거지.”
“저승으로 가는 동행일지도 몰라요.”
“기꺼이 저승길 함께 가겠다는 겁니다.”
김명석의 표정도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한층 차분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계속 긴장 상태를 유지해서 그런지, 이전보다 태연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문득, 내게 라면 그릇을 건네며 해맑게 웃던 아이들의 표정이 떠올랐다.
생존자들을 비행기에 태우지 않으면…… 아이들의 미래는 창밖으로 펼쳐진 세상처럼 암흑천지일 것이다.
씁쓸한 표정을 짓자, 김명석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그새 노르웨이 생존자들에게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
“어차피 여러분과 함께 가지 않으면 노르웨이 아크는 못 버텨요. 정진영 씨 말이 맞습니다. 저도 동의하니까 통역한 거고요.”
“…….”
“그러니 못 본 체하고, 안드레스의 의견에 따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김명석까지 이렇게 얘기하니, 더는 반대할 수도 없었다.
일행을 쳐다보자, 다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정진영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얘기했다.
“너도 답을 알잖아.”
“…….”
“알면서 내버려 둘 거야? 단순히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언제나 뒤에서 묵묵히 따라주는 정진영.
하지만 중요한 순간에 핵심을 짚고 들어오는 힘이 있었다.
정진영이 이렇게까지 얘기한다면 그가 옳은 것이다.
이에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얘기했다.
“눈보라 그치면 새벽에라도 돌아갈 겁니다. 트롬쇠 공항 도착해서 저희가 비행기 점검하는 동안, 여러분은 생존자들 데리고 공항으로 오세요.”
* * *
“이 녀석 똑똑한데?”
안상진은 옆에 있는 장군이를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반면에 장군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웠다.
[좀비? 사람? 이 친구는 뭐야?]
뒤이어 떠오른 말풍선을 보고, 이정우는 후다닥 장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같은 편이야. 같은 편.”
[좀비 냄새나.]
“안 씻어서 그래. 사람이야 사람.”
[아? 물 싫어하는 사람!]
장군이는 안상진의 냄새를 맡으며 그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뒤이어 안상진의 얼굴을 쳐다보며 헤벌쭉 웃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안상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안 씻어서 좀비 냄새가 난다는 건 좀…… 그런데?”
안상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하자, 이정우도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죄송해요, 떠오르는 말이 없어서.”
“그래도 장군이 덕에 하나 건졌네.”
안상진은 좌측을 살피며 입꼬리를 올렸다.
크르르르르…….
목젖을 갈며 상체를 좌우로 흔드는 존재.
돌연변이로 변한 안상진의 수하였다.
E마트 부화장을 처리하는 과정에, 이정우는 한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돌연변이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안상진은 위험하다고 반대 의사를 표했지만, 이정우에게는 확신이 있었다.
알집 형태의 변종은 방어력이 현저히 떨어지기에, 다 같이 공격하면 5단계 알집도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각성 이전에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강화제 알약을 통해 근력을 3000까지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상진도 있기에, 5단계 변종이 발생하면 모든 스킬을 사용해서라도 알집을 터뜨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변종 알집을 처리하며 24시간을 꼬박 시도한 끝에, 돌연변이 수하 한 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과정에 장군이의 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지금껏 장군이는 모든 변종을 경험했기에, 각 개체의 냄새를 파악하고 있었다.
[3단계 알파! 4단계 베타!]
이런 식으로 각 알집의 냄새를 맡고 변종의 종류와 진화 단계까지 맞추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돌연변이가 발생하면 줄기에 매달린 좀비들을 보고 짖는 모습을 보였다.
한 번은 안상진의 수하가 아닌 길거리 좀비들 사이에서 돌연변이 알집이 나타나자, 장군이가 사전에 인지하고 짖는 모습을 보였다.
그 덕에 알집을 깨고 나오기 전에 처리할 수 있었다.
반면 윤혜리와 김희연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조금만 쉬었다가 하면 안 돼요?”
“맞아요, 벌써 24시간째 잠도 못 잤어요.”
부화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에, 이정우와 윤혜리, 김희연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에 안상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그럼 쉬었다가 다시 할까?”
“부화장은 계속 지키긴 지켜야 하는데…….”
“내가 지키고 있을게. 다른 변종이나 좀비들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럼 살수차 여기 두고 갈게요. 필요하면 사용하세요.”
“그래.”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 연락하시고요.”
24시간 내내 붙어 있어서 그런지, 이정우와 안상진도 꽤 친해진 모습을 보였다.
이정우는 안상진에게 꾸벅 인사하며 5시간 뒤에 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뒤이어 윤혜리와 김희연, 장군이를 데리고 아크로 돌아갔다.
아크는 보강공사로 정신이 없었다.
1만 명의 생존자가 너나 할 것 없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파티 압구정과 호수공원, 망원시장의 플레이어들은 일전에 획득한 코인으로 모든 장비를 5레벨까지 올린 뒤, 남은 코인으로 로그나이트를 구매했다.
벙커와 국회의사당 지하 통로를 로그나이트로 틀어막고 있었다.
평범한 철근이나 철판은 변종의 공격도 막을 수 없다면서, 외계 침공까지 생각하면 로그나이트로 공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생존자들은 로그나이트가 보이면 적이 쉽게 눈치챌 수 있다면서, 그 위에 각종 철근과 시멘트를 덧대고 있었다.
깡- 깡- 깡-!
뒤이어 국자로 냄비를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확성기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점심 먹고 해요!
“밥 시간이다!”
“자자, 다들 밥 먹고 합시다! 밥!”
추운 날씨지만, 생존자들의 표정에 활력이 돌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불평불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정우는 지친 몸을 끌고 돌아왔지만, 생존자들의 표정을 보고 생기가 도는 것을 느꼈다.
윤혜리는 이정우의 표정을 흘깃 쳐다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이제야 사람 사는 곳 같죠?”
“그러게.”
처음 여의도 아크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의 눈빛에 불신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하나로 똘똘 뭉친 모습을 보였다.
“이걸 재형 오빠도 봤어야 하는데.”
김희연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하자, 이정우는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며 얘기했다.
“볼 수 있을 거야. 늦지 않게 오기로 했으니까.”
“그럼…… 저희도 밥부터 먹을까요?”
“그래, 밥 먹고 잠깐 눈이라도 붙이자.”
“넵!”
노르웨이로 떠난 결인들 만큼, 한국에 남은 결인들도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 * *
모닥불 불씨가 죽었는지 오한이 드는 것을 느꼈다.
추위로 인해 전신을 떨며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쌍꺼풀진 눈을 비비며 담요 밖으로 고개를 내밀자, 적막감이 맴돌고 있었다.
담요를 목까지 덮으며 창밖을 살피자, 그토록 거세게 휘몰아치던 눈발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어? 어어! 다들 일어나!”
결인들을 흔들어 깨우고, 김명석과 노르웨이 플레이어들도 깨웠다.
불씨를 지키기로 했던 최현이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깜박 잠든 모양이다.
그 덕에 추위를 느꼈고, 눈보라가 그친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시몬은 대뜸 출입구를 열어젖혔다.
얼굴을 감싸는 싸늘한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Wake up! Everyone Move! Move! Move! Move!”
비몽사몽 간에 허우적거리는 일행을 시몬이 깨우고, 한발 앞서 격납고로 달려가는 모습을 보였다.
박재우와 황덕록도 졸린 눈을 비비며 시몬을 뒤따랐다.
이래서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라고 하는 건가?
하늘을 원망하며 잠들었는데, 잠에서 깨어나니 하늘이 돕고 있었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다.
거칠게 몰아치던 눈보라가 잠잠해진 지금, 서둘러 스발바르 제도를 떠날 채비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