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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85화
김명석의 말을 듣고 묵념할 수밖에 없었다.
숭고하다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걸까?
마지막까지 시드볼트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한 남자의 소망이었다.
이에 김명석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우리가 챙긴 씨앗은 죽은 동료분의 바람대로 사용될 겁니다.”
김명석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을 시몬에게 전했다.
시몬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시선을 내리깔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김명석을 쳐다보자, 그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날을 기다리겠답니다.”
* * *
파티 오로라와 김명석이 시신을 정리하는 동안, 우린 한발 앞서 1층으로 올라왔다.
기다란 터널을 따라 이동하고 있는데, 뒤에 있던 정진영이 입을 열었다.
“여기 1층 아니야?”
“맞아요. 다 올라왔어요.”
“그런데 왜 빛이 없지?”
깨진 문틈으로 빛이 들어와야 정상인데, 정진영의 말대로 터널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귀곡성에 가까운 바람 소리만이, 이곳이 1층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얘기했다.
“11월 말이잖아요. 이맘때 스발바르 제도는 거의 온종일 밤이라고 들었어요.”
“대박이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
“지금은 눈보라까지 치고 있어서 더 어두울 거예요.”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4시밖에 안 됐는데 한밤중이라 해도 믿을 것 같다.
전완수는 양손으로 팔뚝을 비비며 얘기했다.
“아으…… 진짜 추워 죽겠는데 해도 없어?”
“빨리 나가자. 공항에 서류들 많던데, 그걸로 모닥불이라도 만들어야지.”
휘우우오오오- 후웁.
그 순간, 바람 소리가 사라지고 뚜껑을 닫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지?
킁-
뒤이어 코를 훌쩍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황급히 일행을 멈춰 세우고, 정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뭐해, 안 가?”
추위 때문에 감각이 무뎌진 모양이다.
전완수의 물음을 무시하고, 정면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감지.”
-8분 동안 500m 내의 좀비와 변종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터널의 끝에 동그란 무언가가 입구를 막고 있다.
자줏빛으로 보이는 형체.
“저게 뭐야.”
혼잣말을 읊조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물었다.
“왜, 뭔데.”
“엄청 커다란 뭔가가 입구에 있어.”
“커다란 뭔가? 그게 뭐야. 감마야?”
“아니야. 머리랑 팔다리가 안 보여. 처음 보는 놈이야. 동그랗게 생긴…….”
뒤이어 전방에 있던 자줏빛 덩어리가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한걸음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휘오오오오오-
그러자 막혔던 구멍이 열리며 다시금 귀곡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신 콧잔등을 킁킁거리는 낯선 존재.
뒤이어 상체를 꼿꼿이 세우는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저게 뭔지 알 것 같았다.
“곰……?”
“……뭐?”
“일어선 모습이 엄청 큰 곰처럼 생겼어.”
멍한 표정으로 자줏빛 형체를 응시하자, 이번엔 최현이 다가오며 물었다.
“스발바르 제도에 곰도 살아?”
“당연히 살지. 올 때 표지판 못 봤어? 북극곰 표지판.”
“그럼…… 입구에 감염된 북극곰이 있다는 거야?”
생긴 건 곰이 맞는데, 크기는 곰이 아니었다.
아무리 감염된 동물이라고 해도, 저건 지나치게 거대하다.
일어선 키가 10m는 될 것 같다.
그럼 조금 전 동그랗게 보인 이유는…… 입구에 코를 집어넣고 냄새를 맡은 건가?
“섰을 때 키가 10m는 될 것 같아. 지나치게 큰데?”
“원래 북극곰 몸 길이가 250㎝야. 일어서면 3m는 되고. 지금껏 감염된 동물들 크기 증가를 봤을 때 10m면 양반이지.”
설여원은 인벤토리를 열고 강화제 알약을 먹으며 얘기했다.
“재형이 넌 쉬어.”
“내가 쉬라고?”
“저거 하나 때문에 좀비화 쓰는 건 아까워. 이번엔 내가 처리한다.”
그건 그렇지만…….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자, 뒤에 있던 최현이 강화제 알약을 섭취하며 얘기했다.
“혹시 모르니 내가 같이 갈게.”
불안한 시선을 느꼈는지, 최현이 설여원을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최현은 전완수와 정진영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여원이 독 안개 제거기 파괴되면 완수도 지원해 줘. 그전까지 여기 있고.”
“오케이.”
“진영이 형도 저희 다치면 치료해 주셔야 하니 여기 계시고요.”
설여원과 최현은 강화제 알약을 10개씩 섭취한 뒤, 서로 시선을 주고받으며 얘기했다.
“가자.”
쾅-!!!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두 사람.
쿠오오어어어-!!
동시에 북극곰의 포효가 들려왔다.
멸종 위기종을 처리해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지만…… 어쩌겠는가.
저놈을 처리하지 않으면 비행기든 배든, 우리는 이곳을 뜰 수 없다.
* * *
북극곰의 전투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신체 능력이 3000에 달하는 설여원과 최현이 동시에 덤벼들고 있는데, 호각으로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
설여원은 최현을 쳐다보며 외쳤다.
“내가 시선 유도할 테니 뒤를 노려!”
쿠오오오오오!!
북극곰이 앞발을 내지르자, 설여원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뒤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최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외쳤다.
“거리 벌리지 말고 안으로 파고들어! 네가 빠지면 빈틈이 안 생기잖아!”
“머리 뜯기게 생겼는데 어떻게 파고들어?!”
“너 방패 있잖아!”
최현이 외치자, 설여원은 황급히 인벤토리를 열고 목록을 살피기 시작했다.
뒤이어 방패를 꺼내 들며 날아드는 앞발을 방어했다.
꽝-!!
묵직한 압력과 함께 설여원의 디딤발이 미끄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북극곰의 신체 능력이 최소 3000 이상이라는 결과가 나온다.
설여원은 양손으로 방패를 붙잡고 버티더니, 두 눈 부릅뜨며 전류를 흘려보냈다.
파지지직-!
알파3도 정신 못 차리게 만드는 강한 전류였다.
하지만 북극곰은 정전기에 놀란 것처럼 뒤뚱거릴 뿐이었다.
최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면을 박차며 북극곰의 등에 올라탔다.
우람한 등 근육을 향해 쉴 새 없이 카타나를 내질렀다.
촤좌좌좌좌좍!
쉴 새 없이 난도질을 가하는데, 북극곰은 피를 흘리면서도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상체를 일으키며 더욱 거칠게 발악하기 시작했다.
공격력도 상당하고 방어력도 상당하다.
곰이라는 동물 자체가 기본적으로 깡패다 보니, 감염된 동물이 되면서 걷잡을 수 없게 강해졌다.
설여원은 재빨리 무기를 교체하더니, 쇠뇌를 견착하며 북극곰의 가슴을 향해 볼트를 발사했다.
퉁! 퉁퉁! 퉁!
정확히 북극곰의 가슴에 박히는 수십 발의 5레벨 볼트.
크오오오오오오-!!
북극곰의 포효를 내지르며 다시 한번 앞발을 휘둘렀다.
설여원은 황급히 카타나를 말아쥐며 북극곰의 앞발을 향해 내질렀다.
푹! 촤아아악-!!
앞발을 뚫고 들어간 칼날.
하지만 북극곰의 무게와 힘을 거스르지 못하고, 설여원은 빗자루에 쓸려나가는 낙엽처럼 눈밭으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였다.
북극곰이 거칠게 몸을 움직이자, 최현은 머리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목덜미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전완수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야, 가서 도와야 하는 거 아니야?”
“기다려.”
강화제 알약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지금은 북극곰 외에 이렇다 할 위협이 없기에, 추후 한국에 돌아갔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
아크에 도착하면 세 번째 에피소드가 완료될 것이고, 그럼 곧장 대공습을 시작할 예정이다.
새로 코인을 얻을 때까지 지금 보유하고 있는 알약으로 버텨야 하기에, 되도록 강화제 알약은 아껴야 한다.
그러니 여러 마리의 북극곰이 달려드는 상황이 아니라면, 최소한의 조건으로 처리하는 게 옳다.
최현과 설여원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유효타를 입거나 상처가 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인내심을 가지고, 두 사람을 믿어야 한다.
촤아악!!
뒤이어 붉은 선혈이 새하얀 눈밭에 흩뿌려지고, 발악하던 북극곰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최현이 북극곰의 목을 반쯤 잘라낸 것이다.
북극곰이 쓰러지자, 최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타나를 치켜드는 모습을 보였다.
“잠깐!!”
그러자 설여원이 그를 말렸다.
“왜.”
“마무리는 재형이 시켜.”
“이 와중에 그런 걸 따지고 있냐?”
“우린 코인 쓸 곳 없잖아. 재형이 아직 스킬 레벨업 하려면 많이 남았어.”
최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곳을 쳐다보며 외쳤다.
“박재형!!”
이에 칼자루를 말아쥐며 최현의 곁으로 달려갔다.
“재형이 네가 마무리해.”
“이 와중에 카운트까지 챙겨주는 거야?”
“내가 아니라 설여원이 챙겨주는 거야.”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시드볼트 입구를 쳐다봤다.
그러자 정진영과 전완수가 달려왔다.
정진영은 설여원은 팔을 살피며 물었다.
“다친 곳은.”
“찢어지진 않았는데, 뼈가 이상해요. 틀어진 것 같아요.”
방패로 북극곰의 무게를 버틸 무렵, 뼈가 틀어진 모양이다.
설여원이 롱패딩을 벗고 보호대를 보여주자, 정진영은 설여원의 팔을 붙잡으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어으…… 빨리 치료해 줘요. 얼어 죽겠어요.”
뼈가 틀어진 것보다 추위가 더욱 고통스러운 모양이다.
전완수는 꿈틀거리는 북극곰을 쳐다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야, 이거 죽여도 돼?”
“죽여야지 어떡해.”
“멸종 위기종인데……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 없나?”
나도 내키지 않았다.
죽이지 않고 예전 모습을 되돌리는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하지만 방도가 없는 걸 어떡해.
이대로 내버려 두면 다른 북극곰이 피 냄새를 맡고 모여들 수도 있다.
그럼 더 많은 북극곰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내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최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그런 알량한 감상에 젖어 있을 거면 지금껏 우리가 죽인 좀비들부터 생각해.”
“…….”
“그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 이제 와서 멸종 위기종이니까 봐주자고?”
최현의 말이 옳다.
이건 이중잣대일 뿐이다.
이에 카타나를 말아쥐고, 북극곰의 미간을 향해 내질렀다.
뚝-!!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는 둔한 촉감과 함께,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감염된 동물(성체)를 처리했습니다. 카운트 13000점이 주어집니다.
13000카운트?
이건 4단계 변종과 동일한 수치였다.
신체 능력이 3000 이상이라 예상은 했지만, 4단계 변종과 동일한 카운트를 제공한다는 건 평균 신체 능력이 4000을 웃돈다는 뜻이다.
뒤이어 시드볼트에서 나오는 파티 오로라와 김명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시신을 한데 모아 끌고 나오고 있었다.
뒤늦게 사방이 피범벅인 것을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며 이곳을 쳐다봤다.
“무, 무슨 일입니까?”
김명석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뒤이어 우리 앞에 놓인 북극곰을 보고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는 노르웨이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였다.
멸종 위기종이고 뭐고, 10m 크기의 북극곰을 보고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 * *
시신 정리를 마치고, 모든 플레이어는 공항에 모였다.
모닥불을 피우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차갑게 식은 몸을 녹였다.
천지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았고, 휘날리는 눈보라는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배 타고 나갈까?”
담요를 덮고 있던 전완수가 묻자, 김명석이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이런 날씨에 항해는 불가능합니다. 밖에 파도 봐요.”
파고도 2m는 넘을 것 같다.
원래 날씨 변화가 이렇게 갑작스럽냐고 묻자, 김명석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스발바르 제도의 겨울은 인간이 감당하기 버거운 수준이에요. 워낙 변덕스럽고 지독해서.”
“여기 사는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사는 거예요?”
“대부분 연구 목적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에요. 스발바르 제도에 터를 잡은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2000명도 안 되죠.”
“…….”
“그마저도 동쪽이 아니라 대부분 서쪽에 몰려 있어요. 동쪽은 사람이 거의 살 수 없는 환경이거든요.”
“그럼 언제쯤 나갈 수 있는 겁니까?”
초조한 마음에 창밖을 바라보며 묻자, 김명석은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급한 건 알지만 오늘은 포기해요.”
“…….”
“지금은…… 내일 눈보라가 잦아들길 기도하는 게 최선입니다.”
기약 없는 기다림.
모든 건 하늘의 뜻이라는 말처럼,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진영은 홀로그램을 열고 포만감 알약을 구매하며 얘기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어. 다들 배부터 채워.”
안드레스는 정진영이 건네주는 포만감 알약을 파티원에게 배분하며 땡큐, 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
뒤이어 무언가를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노르웨이어는 알아들을 수 없기에, 덤덤하게 김명석을 쳐다봤다.
김명석은 안드레스의 말을 듣고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 눈치를 보여 얘기했다.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답니다.”
“말씀하세요.”
김명석은 안드레스의 말을 경청하더니,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명석은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입을 열었다.
“아크에 있는 사람들을…… 한국에 데려가고 싶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