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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82화
밤새 눈발이 날렸는지, 활주로에 엷게 쌓인 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르웨이 플레이어들은 익숙하게 눈을 치우고,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보였다.
시몬은 격납고로 이동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비행기를 끌고 활주로로 나왔다.
이에 김명석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분 비행기도 조종할 줄 알아요?”
“시드볼트에서 일도 하고, 스발바르 제도에 물자도 공급하던 친구예요.”
“아.”
“한국에서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하기도 힘들지만, 노르웨이는 여유롭거든요. 남는 시간에 취미처럼 다른 일 겸업하는 사람 많아요.”
시몬이 끌고 나온 비행기는 그리 크지 않았다.
흔히 아는 수륙양용기와 비슷한 크기라고 해야 좋을까?
눈으로 봤을 때 20인 이하로 탑승해야 할 것 같은 비행기.
우리에겐 더없이 안성맞춤이었다.
비행기가 활주로 끝에 멈춰 서고, 우린 순차적으로 탑승했다.
총 12명이 탑승하자 비행기는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조종석에 있던 시몬이 뭐라 뭐라 얘기하자, 김명석이 결인들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지금부터 스발바르 제도 스피츠베르겐섬에 있는 국제 종자 저장고로 갑니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자, 김명석은 계속해서 통역해 주었다.
“비행시간은 1시간 20분 정도를 예상하지만, 현재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서 자칫 잘못하면 돌아와야 하는 수가 있대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스발바르 제도.
기상악화든 뭐든 상관없다.
일주일 뒤 하늘에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씨앗을 챙겨서 서울에 도착해야 한다.
“추락하기 직전의 상태가 되어도 상관없으니, 어떻게든 오늘 도착해야 합니다.”
“……그것도 그대로 전해요?”
“네.”
김명석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조종석에 있는 시몬에게 얘기했다.
시몬도 긴장되는지, 손가락을 풀며 스로틀을 붙잡았다.
서서히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인류 최후의 종자 저장고, 노르웨이 시드볼트로 간다.
* * *
스발바르 제도로 이동하며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노르웨이 파티 오로라.
그들은 가브리엘이 둘, 데니가 한 명, 그리고 로즈로 구성된 파티였다.
레이첼이 없어서 상처 치료에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
안개가 퍼지고 두 달 만에 트롬쇠위아 섬의 정리가 끝났고, 나아가 생존자 수색을 시작했다고 한다.
다른 마을과 거리가 먼 탓에 아크는 안전했고, 주변 마을이 크지 않은 덕에 좀비들의 위협도 적었다.
다만 생존자 수색 과정에 인간 쓰레기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놈들 덕에 각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바깥 활동을 통해 얻은 물품은 아크에 있는 생존자들에게 배분했다고 한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물건은 당연히 식량과 생활용품이었다.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도 듣고, 노르웨이에 대한 설명도 간략하게 들었다.
본래 이맘때가 되면 오로라를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온다고 한다.
노르웨이에 오로라 관측소까지 있다고 하니, 이들의 파티명이 오로라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Kom og se nordlyset senere.”
안드레스는 내 얼굴을 쳐다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명석에게 통역을 부탁하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나중에 오로라 보러 오래요. 관광시켜주겠다고.”
이에 싱겁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안드레스의 질문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김명석을 쳐다보자, 그는 이마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한국은 어떤 나라냐고 묻네요.”
한국이라…… 탈도 많고 말도 많지만 유구한 전통과 문화, 역사, 사계절의 변화가 자랑 아닐까?
어깨를 으쓱이며 이러한 얘기를 들려주자, 김명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요즘에도 사계절 변화가 뚜렷해요?”
“봄이랑 가을이 많이 짧아지긴 했죠. 그래도 있긴 있으니까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그도 싱겁게 웃으며 안드레스에게 전했다.
안드레스는 사계절이란 말이 마음에 드는지, 죽기 전에 꼭 한 번 한국에 놀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언제든지 놀러 오라고, 동료들도 함께 데려오라고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스발바르 제도가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조종석에 있던 시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명석은 시몬의 말을 유심히 듣더니,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공항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시야 확보가 어려울 텐데, 저희 일행이 앞에서 같이…….”
“괜찮아요. 시몬의 직업이 가브리엘입니다.”
아, 그래서 자신 있게 조종석에 앉은 거구나.
안전벨트를 매고 창밖을 살폈다.
독 안개의 표면이 다른 장소와 달리 연한 편이었다.
흰 눈이 수북하게 쌓여서 그런가?
바람도 다소 부는 것 같다.
눈발이 예상보다 거칠다.
“hold fast!”
앞에서 시몬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김명석이 앞 좌석을 붙잡으며 외쳤다.
“다들 꽉 잡아요!”
쿵!! 콰아아아아아!!
거친 바람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좌우로 기우뚱거렸다.
진동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몰라도, 비행기 날개가 위아래로 퍼덕거리는 것 같다.
전신에 힘을 주고 창밖을 살피자,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연착륙에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조종석에 있던 시몬도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Bodde.”
시몬이 뭐라고 한지 몰라도, 이제 안심하라는 말인 것 같다.
하지만 김명석의 표정을 보고 그 뜻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요, 시몬이 뭐라고 한 거예요?”
“예? 아…… 모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살았다, 라고…….”
살았다고?
그럼 조금 전까지 죽을 뻔했다는 거야?
내키지 않지만, 착륙은 성공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참…….
됐다, 지금은 씨앗만 생각하자.
롱패딩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귀마개와 후드를 착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날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다.
건틀릿은 인벤토리에 넣고 따뜻한 장갑을 착용했다.
우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스발바르 공항을 살폈다.
다른 공항과 달리, 굉장히 간소한 편이었다.
단층의 공항이었고, 특이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서울에서는 여기저기 어질더분한 광경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곳은 인적만 거짓말처럼 사라진 풍경이었다.
“Snøstormen blir verre! La oss komme raskt inn!”
선두에 있던 안드레스가 모자를 눌러쓰며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눈보라가 점점 심해지고 있답니다! 어서 들어가죠!”
김명석의 통역을 듣고 일행과 함께 공항으로 들어섰다.
“여원아, 독 안개 제거기는 문제없어?”
눈보라 때문에 고장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다.
설여원은 홀로그램을 통해 독 안개 제거기의 상태를 살피더니, 옅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뜬해. 눈보라에 고장 날 정도는 아닌 것 같아.”
“시몬은 어디 간 거야?”
조종석에 있던 시몬이 보이지 않았다.
김명석은 내 질문을 안드레스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안드레스는 바깥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격납고에 비행기 넣어두고 온답니다.”
하긴, 이런 날씨에 바깥에다 비행기를 두면 1시간도 되지 않아서 눈에 뒤덮일 것이다.
반면에 박재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최대한 빨리 씨앗 확보하고 나가야겠는데?”
“왜.”
“이런 날씨가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잖아. 앞으로 눈보라가 더 거세지면 비행기도 못 뜨고 귀찮은 일도 많아져.”
“귀찮은 일?”
“디 아이싱 작업까지 해야 된다고.”
디 아이싱은 또 뭐야.
멍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박재우는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비행기 제빙. 비행기 제설작업을 한다고.”
“많이 심각한 거야?”
“비행기 날개에 얼음이 생기면 양력을 얻지 못하고 추락할 수도 있어. 엔진이나 공기 흡입구가 결빙되면 엔진 내부 연소에 필요한 공기공급이 차단될 수도 있고.”
간단하게 말하면 디 아이싱 작업을 하지 않으면 추락한다는 건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뒤에 있던 황덕록이 입을 열었다.
“아까 출발할 때 디 아이싱 작업하고 안티 아이싱 작업도 한 거 아니야? 격납고에서 전부 준비하고 나온 것 같던데.”
안티 아이싱은 또 뭐야.
박재우와 황덕록은 로즈의 능력을 통해 비행기 조종에 필요한 지식뿐만 아니라 비행기 관리에 필요한 지식까지 얻은 모양이다.
박재우는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눈보라 앞에서는 못 버텨. 지금 눈보라 시작되는 단계 같은데, 저게 언제 끝날 줄 알고.”
“재우 네 가설대로면 아무리 빨라도 15분 내에 다시 떠야 돼. 그건 불가능이라고.”
“…….”
박재우는 손톱을 깨물며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옆에 있는 김명석을 불렀다.
“김명석 박사님, 여기 눈보라 휘몰아치면 평균적으로 몇 시간이나 지속되나요?”
“박사님? 허허, 웬일로 박사님이라 불러주는 분이 있네요.”
김명석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깥을 쳐다봤다.
뒤이어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몇 시간이 아니라 며칠이라고 봐야죠.”
“…….”
사실상 15분 이내에 수십 만에 달하는 씨앗을 모조리 인벤토리에 옮기고 이동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늘이 돕기를 기도하는 게 유일한 방법인가?
그것도 아니면…….
“여기 배는 없어요?”
“배요? 이 근처에 항구라고 부를 만한 장소가…….”
김명석은 가만히 턱을 매만지더니, 뒤이어 손가락을 튕기며 얘기했다.
“있습니다. 항구. 여기서 가까워요.”
“얼마나 걸려요?”
“차 타고 10분도 안 걸립니다. 대형화물선은 아니더라도, 물자를 내리는 선착장이 있어요. 이름이 뭐더라? 롱위에아르뷔엔이었나?”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좋아요, 거기 배는 있겠죠?”
“물자 들어오는 날짜가 정해져 있긴 한데, 6월 중순쯤 안개가 퍼졌으니…… 아마 몇 대 들어왔을 겁니다.”
좋아, 그럼 눈보라가 심해지더라도 이동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기에, 해가 떨어진 저녁 시간이 아니라면 한시도 나태하게 버려선 안 된다.
“배 타고 들어가면 도착까지 몇 시간 걸려요?”
“몇 시간? 하루는 꼬박 지나죠.”
“하, 하루요?”
놀란 나머지 말까지 더듬으며 되물었다.
그러자 김명석은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얘기했다.
“물론 24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지만, 못해도 반나절은 가야 할 겁니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비행기로 1시간 20분 걸리는 게 배로 이동하면 그 10배 이상 걸린다니.
평소 배를 탈 일이 없어서 이렇게 느린 줄 몰랐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얘기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해. 일단 시드볼트에서 씨앗 챙기고, 60% 달성 가능한지 확인하는 게 먼저야.”
설여원의 말이 맞다.
초조하다고 해서 당장 코앞에 놓인 문제를 망각해선 안 된다.
“Hey!”
뒤이어 격납고로 갔던 시몬이 돌아왔다.
“지금 바로 시드볼트로 안내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김명석이 내 말을 전하자, 시몬은 소총에 남은 탄알을 확인하며 얘기했다.
“Følg meg.”
“따라오랍니다.”
* * *
시몬을 따라 바깥으로 나가자, 안개와 눈보라가 뒤섞여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눈발이 날리는 수준이었는데, 5분도 되지 않아 눈보라는 귀곡성이 되었다.
우린 양손으로 이마에 챙을 만들어 앞서가는 시몬을 쫓았다.
구불구불한 경사로를 따라 이동하자, 저 멀리 건물의 형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에 뒤덮인 건물.
인류 최초의 시드볼트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씨앗을 저장하고 있는 노르웨이 종자 저장고의 모습이었다.
“……!”
선두에 있던 시몬이 뭐라고 소리치는데, 눈보라로 인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콧잔등이 찢어질 것 같은 추위로 인해 숨쉬기도 버거웠다.
시몬의 옆에 있던 김명석이 내 곁으로 다가오며 얘기했다.
“입구가 막혔다고 합니다!”
“입구가 막혀요?”
“눈이 너무 많이 쌓였고, 단단하게 얼어서 문을 못 여는 것 같아요!”
지난 5개월간 인간의 발자취가 끊긴 건물이다.
차곡차곡 쌓인 눈은 입구에 쌓여 단단한 바위처럼 굳어버렸다.
뒤에 있는 일행을 쳐다보자, 전완수는 카타나를 손에 쥐며 얘기했다.
“이걸로 파낼까?”
바위도 쪼갤 수 있는 카타나.
단단하게 굳은 눈 뭉치를 쪼개고, 차근차근 뚫고 들어가야 할 것 같다.
결인들은 너도나도 카타나를 손에 쥐며 입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