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7 ---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73화
모든 좀비를 처리하자, 어느새 좀비화의 남은 시간은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번엔 정신을 잃고 기절할 게 뻔하기에, 서둘러 여의도로 향했다.
“잠깐, 재형아.”
등 뒤로 안상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뒤를 돌아보자,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얘기했다.
“아크에 있는 생존자들은…… 내 존재를 모르는 거지?”
“네, 아직 얘기 안 했어요.”
“그럼 여기서 헤어지자.”
“……네?”
“근방에 시체 정리하는 사람도 있어야지. 내가 정리할 테니, 들어가서 쉬어.”
안상진이 수고를 덜어주겠다고 하니, 내 입장에선 고마운 일이었다.
애써 밝게 웃으며 얘기했다.
“기절하고 몇 시간 뒤에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일어나서 안상진 씨 이야기도 꺼낼게요.”
“억지로 할 필요 없어. 상황 봐서 해.”
“알겠습니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 싸움으로 조금은…… 생존자들과 신뢰가 두터워질 것 같아요.”
안상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그 길로 안상진은 금천구부터 목동까지 이어지는 시체 더미를 정리했다.
멀어지는 안상진을 뒤로한 채, 곧장 여의도로 향했다.
서울교로 돌아오자, 복구가 끝난 4번 게이트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온다.
그 앞에서 시체정리에 열중하는 결인들과 공격대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 이정우가 후다닥 달려왔다.
“기절할 것 같아?”
“네, 100%요.”
“부모님께는 어떻게, 비밀로 할까?”
내가 기절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명 걱정하실 것이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비밀로 해주세요. 그건 그렇고 생존자들은요?”
“아직 숙소에 있어. 조금 있다가 시체 정리하러 나올 거야.”
“다친 사람은 없죠?”
“한 명도 없어.”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다고 한다.
이번에 기절하면 몇 시간을 누워 있을지 알 수 없다.
정리해야 하는 일이 태산 같은데, 누워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씁쓸한 표정을 짓자, 이정우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이 얘기했다.
“뒷일은 나한테 맡겨. 걱정하지 말고.”
생존자들과 공격대원들 간에 화해도 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본인이 해결할 테니, 내게 마음 편히 쉬라고 한다.
이렇게 든든한 파티장이 있으니 내가 자유롭게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이정우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픽-!
뒤이어 고막을 관통하는 저릿한 기운에 눈살을 찌푸리며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이 울리고, 전신에 힘이 빠졌다.
-좀비화의 지속시간이 끝났습니다.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오르고,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리바운드 증상이 몰려오고 있었다.
좀비화를 2시간이나 유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패시브 스킬 재생도 몇 번이나 사용했다.
최소 8시간 이상 기절할 것이다.
난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 * *
이정우는 박재형을 부축하며 4번 게이트로 이동했다.
“무슨 일이에요? 박재형 씨 왜 그래요.”
한월이 놀란 눈으로 이정우와 박재형을 쳐다봤다.
이에 이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재형이가 고생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가끔 이렇게 기절해요.”
“아…… 이게 그 저번에 말씀하신 좀비화 후유증인가요?”
“네.”
물에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진 박재형을 보고, 한월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도착하자마자 참…… 여러모로 죄송합니다. 쉬지도 못하고.”
“괜찮아요. 저는 재형이 좀 눕히고 오겠습니다. 시체 정리 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이정우는 박재형을 등에 업고 숙소로 향했다.
뒤이어 4번 게이트로 모여드는 생존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좀비와 싸우는 건 버겁더라도, 뒷정리를 돕기 위해 모두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기절한 박재형을 보여주면 괜히 다른 말이 나올 수 있기에, 이정우는 그들을 피해 조용히 63빌딩 앞의 소리결 숙소로 향했다.
* * *
정신이 몽롱하다.
너른 우주를 떠다니는 묘한 느낌.
아무런 소음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 이질적인 감각에, 감았던 눈을 서서히 뜨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에스파디아.”
슈와악-!
그러자 저 끝에서 반짝이던 작은 불빛이 쏜살같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에스파디아?”
“오랜만이구나.”
“뭐야, 제가 왜 여기 있어요? 이번에도 제가 들어온 거예요?”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눈앞의 섬광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잠깐, 예전보다 빛의 세기가 많이 줄어들었다.
그만큼 에스파디아가 쇠약한 건가?
말없이 에스파디아를 쳐다보자, 곧 섬광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8일.”
“네?”
“내게 주어진 시간이자, 네게 주어진 시간이다.”
정신이 몽롱해서 머리가 제대로 회전하지 않았다.
주어진 시간이라면…….
혹시 외계 공습까지 8일 남았다는 건가?
장난해? 8일은 너무 빠르잖아.
알약 자판기의 남은 시간은 60일은 족히 될 텐데, 8일 뒤에 공습이라니?
얼떨떨한 정신을 다잡으며 재차 물었다.
“8일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설마 8일 뒤에 게이트가 열린다고요?”
“그래, 8일 뒤에 하늘의 군대가 지상을 뒤덮을 거야.”
“어떻게 안 됩니까? 8일은 너무 짧아요.”
억울한 마음을 호소했지만, 돌아오는 건 에스파디아의 담담한 목소리였다.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당신 차원의 관리자라면서요. 신 같은 존재잖아! 60일이나 남았는데, 빨라도 30일은 남았다고 생각했다고요!”
“어리광부리지 마.”
눈앞의 섬광이 한 차례 점멸했다.
지금껏 어떠한 상황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에스파디아가, 이번만큼은 달랐다.
형체가 없으니 내게 실망한 것인지, 부끄러운 것인지, 화가 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초조함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하늘의 군대?
행성을 파괴하는 외계 종족에게 너무 거창한 이름이다.
“쓸데없이 고귀한 이름 붙이지 말아요. 그래 봐야 사람 죽이는 쓰레기 집단인데.”
“고귀함의 기준이 뭐지?”
“……예?”
철학적인 얘기는 하지 말자.
가뜩이나 머리 아픈데 스무고개나 하고 있을 여유는 없다.
에스파디아에게 질문을 건넬 때는 언제나 직설적으로 해야 한다.
“당신이 말하는 하늘의 군대가 절대 악은 맞아요? 솔직히 지금은…… 좀 황당하네요. 어이가 없어서 그런가.”
“악의 기준이라…… 그 또한 무엇이 기준이냐에 따라 다르지.”
“장난합니까? 당신 목숨이랑 내 목숨,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목숨이 걸린 마당에 그딴 말장난이나…….”
“그만.”
촤악-!
눈부신 섬광이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자, 귀에서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뇌가 녹아내릴 것 같은 통증에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고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30초 정도 지났을까?
서서히 빛이 사그라들며 원래의 크기로 돌아왔다.
두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젓자, 한층 차분해진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동요하는 것도 이해한다.”
“…….”
“하지만 침착하거라. 동요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
“하…….”
지금의 답답한 심정을 한숨으로 토하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원망스러워도 신은 신이다.
에스파디아의 말대로 감정적으로 반응해 봐야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다.
이에 훅, 하고 숨을 뱉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당신 입장에서 하늘의 군대는…… 악입니까?”
“악이다.”
“이유는요.”
“세상을 파괴하니까.”
“그럼 제 입장에서는 당신이나 그들이나 똑같은 건 알아요?”
“…….”
에스파디아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할 말 없겠지.
마음에 안 들지만, 에스파디아가 인간을 버렸다면 나를 이곳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남은 시간을 알려준 것도, 아직 인간의 편이라는 걸 은연중에 비춘 것이리라.
그러니 지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한다.
“그들이 세상을 파괴하는 이유가 뭐예요?”
“균형.”
균형 때문에 파괴한다고?
이게 무슨 말이야.
에스파디아가 원하는 것도 균형이고 그들이 원하는 것도 균형이라고?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이 바라는 균형과 내가 바라는 균형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데요.”
“그들은 생명의 순환을 원치 않아.”
“무(無)를 원한다는 거예요?”
“맞아.”
“당신이 원하는 균형은 생명의 선순환이고?”
에스파디아의 대답 대신 눈앞의 섬광이 한 차례 점멸했다.
고개를 끄덕인 건가?
일단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건 알겠고, 그동안 궁금했던 점들을 모조리 물어야겠다.
“하늘의 군대는 많이 강해요?”
“우리가 쇠약해진 만큼, 그들은 강해졌어.”
“우리?”
“예전에 얘기했을 거야. 내게도 동료가 있었다고.”
에스파디아의 목소리에 아련함이 묻어났다.
말없이 섬광을 바라보자,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차원의 관리자는 나를 포함해서 총 3명이 존재했지. 우린 영겁의 세월을 균형을 이루며 살아왔다.”
“…….”
“한쪽이 지나치게 강한 힘을 지니지 못하도록 조율하며, 긴 세월을 서로 견제하고 의지하며 살아왔어.”
“경쟁사 같은 느낌이네요.”
에스파디아는 싱겁게 웃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말처럼, 육체를 잃은 차원의 관리자들은 점점 쇠약해졌지.”
“육체는 왜 없어진 거예요.”
“육체는 유한한 거야. 때가 되면 노화가 진행되고, 썩어 문드러지지.”
“…….”
“지금의 내 모습은 무한한 정신에 가깝지.”
무한한 정신?
쉽게 말해서 신의 권능을 지닌 영혼이라는 건가?
하긴, 형체도 없이 그저 빛으로 이루어져 있고, 현실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언제나 내가 잠든 순간에만 나타난다.
에스파디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힘을 잃으면 잃을수록 하늘의 군대는 점점 세력을 넓히고 힘을 키웠어.”
“…….”
“어느 순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말이야.”
“당신도 못 죽여요?”
“죽일 수 없기에 다른 차원에 가두려고 했어. 하지만 차원의 장막을 뚫고 결국 밖으로 나왔지.”
하긴, 상황이 이 지경이 됐다는 건 놈들을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이에 반박 대신 에스파디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린 각자의 차원에 녹아들어 몸을 숨기는 게 최선이었어.”
“지금은 들킨 상황이고요?”
“맞아, 놈들은 생명체의 에너지를 추적하는 능력이 있고, 결국 내가 관리하는 차원까지 들키고 말았다.”
“하늘의 군대 말고 다른 말은 없나요? 뭐, 차원의 관리자끼리 부르는 명칭 같은 거요. 하늘의 군대는 너무 거창해요.”
“언노운.”
“언노운?”
“그들의 핵심 차원과 행성이 어디인지, 전혀 파악할 수 없거든.”
왜지?
그들은 지구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데, 에스파디아는 왜 추적을 못하는 거야?
의구심 가득한 표정을 짓자, 에스파디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건 무(無)의 세계야.”
“그들의 차원이 없다는 거예요?”
“무언가를 추적하기 위해선 명확한 목표와 좌표가 있어야 돼. 하지만 놈들의 모행성은 좌표가 존재하지 않아. 추적할 수 없어.”
없지만 존재한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이야.
공기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존재는 한다, 뭐 이런 건가?
그런 놈들을 어떻게 처리해?
일단 외계 생명체를 언노운이라 부르는 건 알겠고, 그들의 힘이 얼마나 되고, 규모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한다.
이러한 부분을 묻자, 에스파디아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압도적이야.”
“당신이 만든 좀비와 변종으로도 상대가 안 돼요?”
“내가 만든 시스템도 역부족이라는 걸 최근에야 깨닫게 됐지. 놈들은…… 너무나 급격하게 세력을 넓히고 강해졌어.”
“그러게 좀비 말고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어야죠. 좀비로 뭘 어떻게 하겠다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놈들은 생명체의 에너지를 추적할 수 있어. 그 에너지는 지적 생명체가 지니는 힘이지.”
“…….”
“행성마다 부르는 명칭은 다르지만, 나와 내 동료들은 그걸 마력이라 불렀다.”
마력?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에스파디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언노운은 마력을 추적할 수 있어. 그래서 지구를 숨기기 위해 지적 생명체를 줄여야 했지.”
“그래서 인류를 멸종 직전까지 몰아붙이고, 들켰을 때를 대비해서 좀비랑 변종을 만들었다?”
“좀비는 인간에게도 친숙하니 대응책이 있는 줄 알았지. 이렇게 많은 사람이 희생될 줄은 나도 몰랐어.”
“하루 아침에 안개가 퍼지고 감염됐는데 대응책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래서 플레이어를 만든 거야.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서.”
다른 건 몰라도 에스파디아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는 확실해졌다.
이에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에스파디아 당신…… 좀비 영화 본 적 없죠?”
“…….”
그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