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9 ---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55화
안상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종종 했으니까.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아직 아니야, 아직은 아니야, 이런 말을 되뇌었다.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눈앞으로 보이는 잠실한강공원을 보고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운 모습이라고 해야 좋을지, 감회가 새롭다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 근처에 박재형 씨 본가가 있다고요?”
“네. 아,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럼…… 그러자.”
안상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본가의 위치를 물었다.
아파트의 이름을 얘기하자, 그는 좌측을 살피며 얘기했다.
“저기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 아니야?”
“네, 149동이요.”
“나도 저기 사는 게 로망이었는데. 초중고가 단지 내에 다 있잖아.”
역시 부모의 시선은 다른 모양이다.
다들 한강뷰를 먼저 얘기하지만, 그는 학품아(학교 품은 아파트)에 초점을 두었다.
뒤따라 오는 일행을 쳐다보자,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좀비 때문이 아니라, 내 메인 퀘스트 때문에 덩달아 긴장한 것으로 보였다.
압구정 파티도 한월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지, 다들 이전보다 한층 편해진 모습을 보였다.
한월이 본인의 잘못을 뉘우치고, 이를 압구정 플레이어들이 받아들인 모양이다.
혹여나 한월을 배제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한강공원을 가로질러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그 너머에 있는 지하도로 진입했다.
어두컴컴한 도로를 벗어나자, 바로 앞에 본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괜스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에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얘기했다.
“따라오세요.”
여기서부터는 눈을 감고도 집을 찾아갈 수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이곳으로 이사 왔고, 그 뒤로 쭉 이곳에서 살았다.
예전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149동 801호에 다다르자, 심장이 거세게 뜀박질 치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도어록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을 열었다.
중문을 지나 거실로 들어서자, 익숙한 체취 속에 퀴퀴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오랫동안 발길이 닿지 않아 먼지가 수북이 쌓인 상태였다.
그리운 풍경, 하지만 이전과 너무나도 상반되는 광경에 울컥하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다들 본가에 들어설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뒤이어 이정우가 다가오며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행이야.”
“……네.”
“퀘스트 완료 메시지 안 떴으니, 분명 아크에 계실 거야.”
“그래야죠. 그럴 겁니다.”
집을 나서기에 앞서, 모든 방문을 열고 내부를 확인했다.
안방 화장대에 놓인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고등학교 졸업식에 찍은 가족사진.
사진 속의 부모님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 사진처럼, 밝은 모습으로 살아계시면 좋겠다.
사진을 인벤토리에 넣고,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얘기했다.
“가죠.”
“곧장 아크로 가면 되는 거야?”
“그게 최선이지만, 한 곳만 더 확인하고 가도 될까요?”
이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일행의 표정을 살폈다.
모두의 본가를 확인했는데 또 어디를 확인하냐는 물음이 표정에서 느껴졌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제 기숙사 방형이 압구정에 살았거든요.”
“아 맞아. 성물이 있었지.”
아직 능력을 확인하지 못한 성물이 2개나 있었다.
[사과 구슬]
-아이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구슬.
-귀하의 노고로 아이의 부모님이 가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구슬을 선물한 아이의 마지막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추후 적합한 상황에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유서]
-은인을 기억합니다.
-유서에 적힌 물건을 그의 부모님께 전달하세요.
-전달 완료 시 특혜가 주어집니다.
목숨 바쳐 나를 구해준 장병철의 유서.
어떻게든 그의 부모님께 전달해야 한다.
그러자 현관 앞에 있던 정명석이 다가왔다.
“압구정 어디로 갑니까? 압구정 일대 생존자는 저희가 알아요. 위치만 얘기해도 압니다.”
“압구정로데오 앞에 압구정 1차 아파트라고 들었어요. 몇 동인지는 모르지만, 백화점이 바로 옆이라고 그랬어요.”
정명석은 파티원들과 대화를 나누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그럼 아크에 있을 겁니다. 아파트에 있던 생존자들은 전부 로데오로 모였거든요.”
장병철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상태라면 아크에 도착하더라도 성물의 효과가 해금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 있는 모두를 데리고 아파트 전체를 확인하는 것도 무리였다.
일단 아크부터 확인하고, 그 뒤에 차차 생각해야겠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앞서 밖으로 이동했다.
그리운 풍경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 곧장 여의도로 향했다.
* * *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 우린 노량진 야구장 뒤편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자 주변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 진입하며 아크의 독 안개 제거기가 작동하는 모양이다.
외벽에서 400m, 혹은 500m 거리까지 안개가 보이지 않았다.
독 안개뿐만 아니라, 안개 자체가 사라졌다.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둠이 내려앉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밝은 것처럼 느껴졌다.
김희연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여의도 방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얘기했다.
“저거! 저게 63빌딩이에요?”
“맞아.”
“우와, 저 처음 봐요.”
“롯데타워가 더 높은데, 저게 더 신기해?”
“롯데타워도 신기하지만, 63빌딩은 역사가 많잖아요. 오랫동안 명소였고.”
이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63빌딩을 쳐다봤다.
나 역시 어린 시절엔 63빌딩이 최고라 생각했다.
부모님과 함께 63빌딩에서 놀았던 기억이 있다.
층수는 이제 롯데타워가 더 높지만, 63빌딩의 향수는 내가 죽는 날까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안상진은 말없이 아크의 외벽을 응시하더니,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얘기했다.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겠지?”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수하들 보내야 할 때 얘기해.”
“네.”
안상진은 모두에게 가볍게 고개 숙인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한월은 무전기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정우에게 물었다.
“신체검사는 이미 완료했다고 할 겁니다. 들어가면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을 테니, 다른 말씀 말고 제 뒤만 따라오세요.”
“알겠습니다.”
한월을 선두로 여의도 아크 외벽으로 이동했다.
여의서로부터 여의동로까지, 도로를 따라 타원형의 외벽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산에서 봤던 외벽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얼추 비슷한 것 같지만, 눈으로 봐도 전류의 흐름이 이전과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호기심에 조심스레 오른손을 갖다 대자, 손끝으로 따끔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황급히 손을 떼자, 검지가 빨갛게 익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아크의 외벽도 강화됐다더니, 전류량이 이전보다 2배는 증가한 것 같다.
얼떨떨한 마음에 외벽을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한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여원 씨랑 박재형 씨는 메인 퀘스트 완료 안 된 거죠?”
“네.”
“잠시만 기다리세요. 두 분을 아는 분이 있으면 이리로 부를게요.”
“알겠습니다.”
한월은 훅, 하고 숨을 뱉으며 무전기를 들었다.
“여기는 파티 압구정, 호수공원 들리십니까?”
치지직- 치직-
-잘 들립니다.
“저희 도착했습니다. 노량진 수산시장 방면으로 진입합니다.”
-알겠습니다.
한월은 이정우를 쳐다보며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였다.
츠으으-
뒤이어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좌우로 열리고, 모든 일행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부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아크로 들어서는 일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문 앞에 앉아 얼마나 기다렸을까.
대략 50분 정도 지났을까?
굳게 닫혀 있던 아크의 문이 열리며 한월이 걸어 나왔다.
한월이 입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짓하자, 곧 중년 부부가 이곳을 쳐다보며 다가왔다.
옆에 있던 설여원은 중년의 부부를 보고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더니, 금세 눈시울을 붉히며 부부에게 달려갔다.
품에 와락 안긴 채, 엄마, 아빠를 부르며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는 설여원.
그리고 설여원의 부모님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언제나 강인한 모습을 보여오던 설여원도, 이 순간만큼은 어리광을 피우는 아이처럼 보였다.
뒤이어 입구에서 나오는 또 다른 부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 기억 속에 있는 부모님이 아니었다.
엄마 아빠가 아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에 부모님이 오지 않았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이유 없이 서러운 마음이 들고, 오지 않는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그런 기분.
낯선 부부는 내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옆에 있는 한월에게 물었다.
“우리, 우리 아들 아니에요. 우리 아들…….”
부부도 내심 기대가 컸는지, 내 얼굴을 보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중년 여성은 울먹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모습을 보였다.
한월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박재형 씨.”
“……네.”
먹먹한 마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뒤이어 한월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 계신 두 분은…… 압구정에서 저희와 함께 오신 분들입니다.”
그 말을 듣고 심장에서 쿵, 하는 아찔한 진동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두 분이…… 장병철의 부모님?
두 분의 옆으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남학생이 함께 있었다.
남학생의 얼굴을 보고 또다시 마음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장병철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난 아랫입술을 깨문 채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힘드시겠지만, 혹시 모르니 몇 가지만 확인하겠습니다. 두 분이 장병철 씨의 부모님 되십니까?”
“병철이, 우리 병철이를 알아요?”
“아드님인 장병철 씨의 학교와 나이, 학과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중년 여성이 울먹이며 대답하지 못하자, 옆에 있던 남편이 대신 입을 열었다.
모든 정보가 일치했다.
이분들이…… 장병철의 부모님이다.
장병철의 부모님을 찾았다는 기쁨보다, 함께 오지 못한 죄책감이 컸다.
“처음 뵙겠습니다. 병철이 형과 같은 방을 썼던…… 박재형입니다.”
“병철이, 우리 병철이, 우리 병철이는 어디 있어요?”
장병철의 어머니는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물었다.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하고, 나 역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고이 보관해 온 물품을 꺼내었다.
“병철이 형이 이걸 꼭…… 두 분께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는 쪽지와 손목시계, 그리고 유서를 전달했다.
죄스러운 마음에,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고개 숙였다.
차마 두 분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아들의 죽음에 억장이 무너질 텐데 내가 감히 어찌…….
눈물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두 분의 울음소리가 날카로운 채찍이 되어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은 느낌이었다.
띠링-
귓가로 들리는 라스트아크의 기계음마저 불쾌하게 느껴졌다.
성물이 해금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그에 따른 버프가 적혀있는데, 눈앞이 흐려서 글자가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이에 홀로그램을 닫아버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입술을 깨물었다.
툭-
뒤이어 설여원이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쳐다보자, 설여원도 울먹이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설여원의 마음이 느껴졌다.
본인도 눈물범벅이면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이에 설여원의 손등에 내 왼손을 포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재, 재형이니?”
그 순간, 귓가를 간질이는 음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21년을 들어온 목소리.
그 익숙한 음성에, 떨리는 마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입구에 서서 이곳을 쳐다보는 중년 여성과 남성.
“아…….”
심장이 격하게 뜀박질 치며 그동안 힘겹게 참아온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사지에 힘이 풀리고, 길에서 잃어버린 부모님을 다시 찾은 것처럼 모든 감정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엄마…… 아빠……!”
수문이 터진 듯, 두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재형이, 재형아! 우리 아들, 아이고 우리 아들……! 아이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감사합니다아!”
부모님도 양손을 덜덜 떨며 내게 달려왔다.
부모님을 품에 안고 한참을 울었다.
슬픔의 통곡이 아니었다.
그동안의 고생을 한꺼번에 보상받은 것 같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부모님을 부둥켜안은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