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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43화
설여원은 시체의 온기를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은 지 별로 안 됐어. 누가 죽인 거지?”
“내가 처리했어.”
덤덤하게 대답하자, 설여원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언제?”
“아파트 확인할 때. 정우형한테 미사역 정리한다고 얘기했는데 못 들었어?”
“아, 못 들었어.”
“정우형이랑 진영이 형이 너희 치료할 때 미사강변남로에서 몰려온 좀비들, 그것들 미사역 근방에 있던 놈들이야.”
“아, 네 체취 따라왔다고 그랬지.”
설여원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정리한 거야?”
“미사역 근방은 정리 끝났다고 봐야지. 저 앞에 미사호수공원 앞까지 정리됐어.”
“역사 내부도 확인했어?”
“매표소까지는 확인했는데 승강장은 확인 못 했어.”
옆에 있던 이정우는 설여원과 내 대화를 듣고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이건 뭐…… 우리가 할 게 없네.”
“어차피 이동 경로 확인하러 왔으니, 일단 저쪽 아파트 옥상으로 가보죠.”
미사호수공원 방면을 가리키자, 이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앞서 나아갔다.
전완수와 설여원이 뒤따르고, 주변에서 가장 높은 아파트 옥상으로 향했다.
대략 30층 높이의 아파트 옥상에 도착하자,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왔다.
물론 내게는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보일 뿐이지만, 설여원과 전완수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뒤이어 설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계가 500m밖에 안 돼서 공원 맞은편 아파트까지밖에 안 보여.”
“도로 상황도 알 수 없어?”
“대단지 아파트가 공원 맞은편에 있어서 시야를 가려.”
그러자 옆에 있던 전완수는 홀로그램을 열고 무언가를 조작하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전완수의 눈앞으로 이러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천리안 Lv.MAX]
-10분간 원하는 지점에 좌표를 찍어 지형을 살필 수 있습니다.
-천리안을 개방한 사용자가 이동 시, 천리안은 사라집니다.
-재사용 대기시간은 1시간입니다.
*‘좌표 이동’ 효과가 생성됩니다.
*천리안의 좌표지점을 기준으로 반경 1㎞를 이동할 수 있습니다.
“뭐한 거야?”
전완수를 쳐다보며 묻자, 그는 홀로그램을 살피며 대답했다.
“천리안 레벨 높였지. 지금껏 계속 1레벨이었거든.”
“코인 얼마나 썼어.”
“2만 코인. 각성하자마자 배운 스킬이라서 별로 안 비싸.”
2만 코인이 결코 저렴한 가격은 아니지만, 스킬 효과는 확실했다.
영혼 이동이라는 효과가 생성되며 좌표지점에서 1㎞ 반경을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좌표를 찍을 수 있는 최대 사거리는 1㎞.
즉, 이곳에서 2㎞ 거리까지 확인할 수 있다.
설여원은 덩달아 천리안의 레벨을 높이더니, 전완수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내가 북쪽 방향 확인할 테니, 완수 네가 남쪽 확인해.”
“어디를 기준으로 남쪽?”
“당연히 정면 기준이지.”
“오케이.”
전완수와 설여원이 천리안을 사용하자, 두 사람의 안구가 새하얗게 변하며 영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천리안을 사용한 상태에서도 대화는 가능하기에, 설여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보이는 거 있어?”
그러자 미동도 하지 않던 설여원이 입을 열었다.
“대로로 이동하는 건…… 위험할 것 같아.”
“왜.”
“4단계가 있어.”
“무슨 4단계.”
“8m 크기에 팔다리 6개. 알파 맞지?”
8m 크기에 팔다리 6개면 알파4다.
뒤이어 옆에 있던 전완수도 입을 열었다.
“와…… 씨, 베타4도 있어. 와…… 뭐야, 워우 씨, 저거 뭐야.”
전완수는 혼자 놀라고 감탄하며 연거푸 탄성을 뱉었다.
마치 난생처음 VR기기를 착용한 사람처럼, 변종을 마주할 때마다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왜, 뭔데.”
“베타4도 7m에서 8m는 될 것 같고, 혓바닥에 물집 같은 게 보여. 몸집도 커서 완전히 탱크 같은데? 아니지, 탱크보다 더 커.”
혓바닥 전체에 수포가 있다면, 베타4는 혓바닥 전체에 산성 물질이 있는 건가?
“다른 변종은 없어?”
“어…… 잠깐만, 저 앞에 강일역이라고 보여.”
미사역 다음이 강일역이었다.
이에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혹시 역사로 들어갈 수 있어?”
“안 그래도 들어가는 중이야. 와 씨…… 이거 진짜 신기한데? 천리안 쓰니까 너무 잘 보여. 독 안개 속에서도 훤히 보여.”
본래 독 안개 속에서는 가브리엘도 시야 확보가 불가능하다.
독 안개 제거기가 작동하는 500m 범위를 확인하는 게 한계였다.
하지만 천리안을 사용하면 독 안개에 영향을 받지 않고 모든 것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모양이다.
두 번째 에피소드까지는 별로 쓸모없는 스킬이었지만, 세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되며 빛을 보기 시작했다.
전완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무언가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승강장에 뭔가가 있는 건가?
“왜 그래, 뭐 보여?”
“저거…… 나 쳐다보는 거 같은데.”
“뭐가.”
“델타 변종이 이쪽을…… 어? 어어어?”
전완수는 기겁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세차게 몸을 흔들었다.
이에 전완수를 진정시키자, 새하얗게 변했던 안구가 다시금 원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뒤이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야, 델타는 내가 보이나 봐.”
“어떻게 그래?”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델타2는 괜찮은데, 델타3은 갑자기 일어서더니 달려들더라고.”
천리안에 온기라도 있는 건가?
만약 존재한다면, 델타 변종의 열 감지 능력에 포착될 수 있다.
전완수는 상체를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확실한 건 철로는 안 돼. 델타 변종 소굴이야.”
그렇다면 지하철로 이동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델타3이 있다는 건 델타4도 존재한다는 뜻이고, 델타4가 있다면 지하철은 개미굴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어둠 속에서 델타4에게 공격당하면 싸우기도 어렵고, 대피하기도 어렵다.
“어?”
뒤이어 옆에 있던 설여원이 짧은 탄성을 뱉으며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왜 그래.”
“부화장. 부화장이야.”
설여원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설여원에게 쏠렸다.
“위치는?”
“강동…… 충전소? 버스 차고지처럼 생겼어. 서울 순환고속도로 앞에.”
설여원은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나도 천리안을 사용할 수 있으면 좋겠다.
설여원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않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8m 크기의 알집이 엄청 많아.”
“다른 특징은 없어?”
“어…… 어? 저게 뭐야.”
“왜, 뭔데.”
“깨진 알집이 있어. 그런데 좀…… 많이 커.”
“얼마나 되는데.”
“측정이 안 돼. 잠시만. 좀 더 가까이 가서 가늠해 볼게.”
설여원의 두 다리가 움찔거린다.
보폭으로 알집의 크기를 가늠하는 모양이다.
뒤이어 설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좀…… 말이 안 되는데?”
“왜.”
“15m는 될 것 같아.”
“알집이?”
“깨진 알집이라서 정확한 크기는 모르겠는데, 큰 보폭으로 열다섯 걸음…… 어? 허억!”
설여원의 안색이 사색으로 변하더니, 기겁하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새하얗게 변했던 안구가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VR기기를 갑자기 벗은 사람처럼,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서 정신이 혼미한 것으로 보였다.
“괜찮아?”
설여원을 부축하며 묻자, 그녀는 긴장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나, 나나, 나 봤어. 분명히 봤어.”
“뭘 봐. 뭘 본 거야.”
“오, 5단계 변종.”
5단계라는 말에 옥상에 있던 일행은 놀란 눈으로 설여원을 쳐다봤다.
설여원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말을 이었다.
“충전소 건물 외벽에 붙어 있었어. 아니, 붙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외벽을 감싸고 있었어.”
“알파야?”
“알파 같아. 팔다리는 8개나 되는데, 안구는 2개였어.”
“또 다른 특징은 없어?”
“거미보단…… 대벌레처럼 생겼어.”
대벌레라는 말에 예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대구 수성못에 진입하던 당시, 갈림길의 나무 위에 있던 알파 변종의 모습이었다.
마치 대벌레처럼 미동도 하지 않던 녀석.
진화를 거듭하면서 생김새도 대벌레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알파1도 거미처럼 기어다녀서 별명이 거미지, 배가 불룩하진 않았다.
아무튼 벌레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설여원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천리안은 왜 풀린 거야? 델타처럼 네 위치 들킨 거야?”
“아니 그게…… 너무 커서 압도당하는 느낌이었어. 놀라서 그만…….”
15m나 되는 놈이 건물 외벽을 감싸고 있으면 나도 기겁할 것 같다.
몸체의 길이만 15m라면, 팔다리는 9m 가까이 될 것이다.
향유고래와 비슷한 덩치가 9m 길이의 팔다리를 8개나 달고 버둥거린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코즈믹 호러의 일종.
설여원은 상식의 범위를 아득히 초월한 존재에게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8m 크기의 알파4만 봐도 짓눌리는 느낌이 드는데, 15m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설여원은 전신을 파르르 떨며 얘기했다.
“말이 대벌레지. 팔다리, 몸통 두께도 상당해. 카타나로 찔러봐야 이쑤시개로 쑤시는 격이야.”
“정말 5단계 변종이라면, 그놈 신체 능력은 12000일 거야. 무조건 피해야 돼.”
“재형이 너도 상대하기 힘든 거 아니야?”
최현의 물음에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했다.
“스킬 전부 쓰고 때려잡으면 가능하겠지.”
“근력은 네가 우위에 있더라도, 그것도 때릴 수 있어야 효과가 있지. 5단계 변종이면 이동 속도도 상당할 텐데.”
“델타만 아니면 할 만해. 알파4만 봐도 알 수 있어.”
최현은 팔짱을 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파4 속도가 얼마나 되는데?”
“알파2에서 알파3으로 진화했을 때 신체 능력이 증가하면서 움직임도 빨라지잖아?”
“그렇지.”
“알파3에서 알파4로 진화해도 움직임이 빨리지긴 하지만, 2에서 3이 된 것보다 증가폭은 적어. 덩치가 커지면서 저항력도 커지는 거지.”
“그럼 델타만 아니면 된다는 건 무슨 말이야?”
“델타는 작용반작용 법칙을 무시하는 느낌이었어. 중력가속도가 붙은 상태에서 방향을 전환하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더라고.”
최현은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스타필드에서 봤던 델타3의 움직임을 복기하는 것으로 보였다.
볼트를 회피하는 움직임이나 한순간에 천장에 매달리던 모습까지,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모습을 보였다.
최현은 반박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델타가 햇빛을 싫어해서 다행이네.”
다들 서로 눈치만 볼 뿐,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지하철도 막히고, 대로로 진입하는 것도 막혔다.
그럼 우리가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한강 공원을 따라 이동하는 게 최선이었다.
이정우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얘기했다.
“선택지가 하나뿐인 것 같은데, 돌아가서 얘기하자.”
“네.”
깔끔하게 미련을 버리고 경정장으로 돌아갔다.
* * *
반쯤 무너진 경장장 건물은 위험하기에, 그 옆에 있는 자전거 대여소에 터를 잡았다.
책상 위에 지도를 펼치고 이동 경로를 다시 설정했다.
“제일 안전한 길이 한강 공원 따라서 이동하는 거지?”
이정우가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서울 하면 한강이고, 한강 하면 산책로예요. 자전거 전용도로만 따라가도 여의도까지 갈 수 있어요.”
“자전거도로로 이동하자는 거야?”
“카누는 전부 부서진 상태니, 자전거 전용도로가 그나마 가장 안전합니다.”
“가는 길에 좀비나 변종을 만날 가능성은?”
“거의 없어요. 하남에서 강동구로 진입할 때 올림픽 대로가 바로 옆에 보이긴 하는데, 도로보다 도심에 몰려있을 겁니다.”
“그럼 감염된 식물만 조심하면 되는 거야?”
“네.”
그러자 아랫입술을 삐죽 내민 채 가만히 턱을 매만지던 정진영이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감염된 식물도 별로 없을 것 같은데?”
“왜요?”
“여기 갈대밭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네?”
“감염된 식물은 버스 차고지에서 스타필드로 이동할 때 농원에서 본 게 전부야. 종종 아파트에 있는 놈들도 있었고.”
“기억나요.”
“감염된 식물도 도심 쪽에 많다는 거지. 한강 공원 쪽에는 감염된 식물이 별로 없다고.”
물 때문에 감염된 식물이 적다는 건가?
이것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러자 이정우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좀비든 감염된 식물이든 그건 내일 상황 봐서 처리하면 되고, 가는 길에 위험한 구역이 어디야.”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고덕수변생태공원부터 위험할 거예요.”
“이유는?”
“바로 옆에 올림픽대로가 있고, 그 옆에 고덕산이 있어요. 감염된 식물들이 고덕산에 있거나 자전거도로까지 내려왔을 가능성이 높죠.”
“그게 어디쯤이야? 지도에 찍어줘.”
“이 지도는 하남 전도라 고덕산까지는 안 보여요.”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전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재형이가 서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때가 온 건가?”
내가 길잡이 역할을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