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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33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 숙였다.
이정우는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통기타를 건네며 얘기했다.
“재형이 너도 한 곡 뽑아.”
“……네?”
“자신 있는 거, 한 곡 들려줘.”
대화의 흐름을 모르겠지만, 얼떨결에 기타를 받아들었다.
멍한 표정으로 이정우를 쳐다보자, 그는 눈썹을 긁적이며 얘기했다.
“네가 자주 연주했던 곡 있잖아. 마사키키시베의 민들레.”
“아, 네.”
머쓱한 마음에 기타를 조율하며 일행의 표정을 살폈다.
다들 이정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연주하라고 하니, 손가락을 풀며 연주를 시작했다.
마사키키시베의 민들레는 감미로운 선율이 인상적인 곡이었다.
쓸쓸함이 느껴지면서도, 봄날의 따스함이 담긴 곡이었다.
집중해서 연주를 끝내자, 오혜선과 한민욱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옆에 있던 전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역시 재형이가 연주하는 민들레가 최고야. 거의 뭐 음원 튼 줄?”
쑥스러운 마음에 목덜미를 문지르자, 맞은편에 있던 이정우가 입을 열었다.
“네가 오늘 죽었다면, 이 곡이 추모곡이 될 수도 있었어.”
이정우의 진지한 말에 결인들은 박수를 멈추고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도 마른침이 넘어갔다.
말없이 고개 숙이자, 이정우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얘기했다.
“물론 네 몸은 네 거야. 개인의 의사까지 우리가 침해할 수는 없지.”
“형…….”
“하지만 여기 있는 사람 중 한 명이라도 빠지면 소리결이라고 할 수 있어? 아니, 우리가 소리결로 남을 수 있을까?”
그제야 이정우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에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좀비화 남은 시간에 카운트 못 올리는 거, 당연히 아깝지. 하지만 목숨보다 소중한 건 없잖아.”
“…….”
“강해지는 것도 좋지만, 앞으로 우리 생각도 해줘. 너한테 크게 도움 못 되는 건 알지만, 네가 너무 앞서가면 보조하는 것도 쉽지 않아.”
조곤조곤한 목소리지만, 그 안에 묵직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이에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며 대답했다.
“명심할게요. 그리고…… 구해줘서 고마워요, 형.”
“나 혼자 구했나? 다 같이 가서 구했지.”
이에 한 명 한 명,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정진영은 이정우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재형이한테 구해줘서 고맙다는 소리도 들어보고.”
민망한 마음에 이마를 긁적이자, 정진영은 손뼉을 치며 얘기했다.
“자! 그럼 재형이도 일어났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놀아볼까?”
“뭘 놀아요. 저녁 준비해야죠.”
윤혜리가 현재 시각을 살피며 얘기하자, 정진영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밖에 노을 지는 거 안 보여요?”
“역시 놀 때만 시간이 빠르지.”
서둘러 저녁 준비에 들어갔다.
* * *
식사를 마치고, 간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에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편안한 것 같으면서도 초조하고, 다급한 것 같지만 여유로웠다.
이걸 무슨 기분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바삐 살아온 나날 때문일까?
달콤한 휴식인데, 조금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쉬는 게 어색하다던 동아리 선배의 말이 와닿았다.
카페에 앉아 사색에 잠겨 있자, 곧 설여원이 다가오며 물었다.
“뭐해?”
“그냥, 쉬고 있었어.”
“표정은 전혀 아닌데? 근심 걱정 가득한 표정이면서.”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설여원은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다.
“내일은 우리 집 확인하고 잠실로 이동할 거야.”
“바로 이동하는 거야?”
“그럴 것 같아. 너 기절했을 때 이미 얘기 끝났어.”
얘기가 끝났다는 말에, 이마를 긁적이며 물었다.
“잠실로 어떻게 이동할 건지, 경로도 정했어?”
“그건 미사역 상황 봐서 정하기로 했어. 네가 저번에 얘기했던 조정경기장 상황도 확인해야 하고.”
“그럼 한강 공원 따라서 본가로 진입하고, 그 뒤에 미사역 상황 본다는 거네?”
“맞아. 상황보고 지하철로 이동할지, 한강으로 이동할지 정해질 것 같아.”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설여원은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이번에도 에스파디아 만났어?”
“기절했을 때? 아니, 이번엔 안 나타나더라고.”
“마지막으로 만난 게 부산이지? 대공습 때.”
“어, 그 후로 만난 적 없어.”
문득, 에스파디아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아. 놈들이 내 존재를 알아챘어.
-내가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에피소드를 완료하고 해금을 완료하거라.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고, 놈들이 본인의 존재를 알아챘다고 했다.
또한 본인이 사라지기 전에 에피소드를 완료하라고 했다.
그건 외계의 존재로부터 공격받고 있다는 뜻이고, 자신이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우리가 세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기 전에 에스파디아가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지구가 사라지는 걸까?
아니면…… 에피소드 진행도와 상관없이 외계 생명체들이 침공한다는 건가?
“무슨 생각해?”
맞은편에 있던 설여원이 묻기에, 내가 생각한 바를 들려주었다.
설여원은 모든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턱을 매만지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재형아,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미 네 번째랑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이미 의미 없는 거 아니야?”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은 기억이 있다.
부산 대공습을 앞두고, 대공습을 이겨내면 게임이 클리어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뒤이어 구석에 있던 전완수와 최현이 다가왔다.
“야, 세 번째 에피소드 클리어해야 한계 돌파 해금된다고 했지?”
구석에서 소설을 읽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귀는 열어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설여원과 내가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했던 건가?
전완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콧잔등을 긁적이며 물었다.
“해금하기 전에 광란 10회 채우지 말라고 그랬고?”
“맞아.”
“설마 그거 아니야?”
“뭐.”
“해금 완료하면 광란을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러니 해금하기 전에 광란 10회 채워서 정신 잃지 말아라, 이런 거 아닌가 해서.”
너무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서 대답을 회피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최현이 입을 열었다.
“나도 완수랑 같은 생각이야. 지금부턴 강해지는 일에 집중하기보다, 현상 유지에 신경 쓰라는 느낌이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전에는 에스파디아가 지속적으로 강해지는 구조를 만들어줬지만, 지금은 스킬 배우는 것 말고는 포인트 쓸 곳도 없잖아?”
“……그건 그렇지.”
“우리도 코인 사용할 곳이 없다는 게 이상해. 씨앗 저장에 필요한 코인이나, 알약 구매 외에 쓸 곳이 없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팔짱을 끼며 묻자, 최현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엔딩에 다다랐다는 거지. 에스파디아가 설정한 성장 루트가 끝났다는 거야.”
“너도 세 번째 에피소드가 마지막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네 번째 에피소드는 대공습으로 파괴된 아크를 발견하는 거고, 마지막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아크에 도착하면서 끝나잖아?”
“그렇지.”
“우린 이미 그걸 해냈어.”
“하지만 게임 클리어는 안 뜨고 세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됐잖아.”
“그건 필요에 의한 설정이 아닐까?”
“필요에 의한 설정?”
두 번째 에피소드와 세 번째 에피소드의 차이점을 말하고 싶은 건가?
최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자,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외계 생명체가 침공했을 때, 독 안개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세 번째 에피소드를 진행했을 가능성이 커.”
“사전연습 개념이 아니라, 외계 생명체를 상대하기 위함이라는 거야?”
“그렇지. 독 안개 덕에 변종이랑 좀비는 더 강해졌고, 동식물도 전투에 참여한 격이니까.”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독 안개로 인해 좀비와 변종, 동식물은 강화됐다.
또한 외계 생명체는 독 안개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을 잃을지도 모른다.
이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맞은편에 있던 설여원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좀비랑 변종, 동식물은 독 안개 덕에 강화됐지만, 인간에겐 치명적이잖아.”
“그건 인간의 입장에서만 그렇지.”
“응?”
“애초에 에스파디아는 좀비, 변종, 플레이어, 모든 게 자산이라고 했어. 기억나지?”
“그랬지.”
“에스파디아가 인류의 편에 서게 된 건 오로지 재형이 때문이라고.”
최현의 말에 설여원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나도 반박 대신 최현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에스파디아가 재형이 너한테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고 했잖아?”
“기억나.”
“하지만 광란이란 변수가 있고, 네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독 안개를 퍼뜨려서 좀비와 변종의 평균 능력을 향상시켰을 가능성이 커.”
“완성? 무슨 완성.”
“그건…… 나도 정확히 모르겠어. 세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고 한계 돌파가 해금되면 알겠지.”
정답은 알 수 없지만, 최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에스파디아는 모든 변수에 대응하기 위해 여러 방안을 만들었다.
처음엔 좀비와 변종에게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작은 기대를 걸었다.
이는 인류가 생존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고, 이 때문에 광란을 조심하라고 알려준 것이 아닐까?
맞은편에 있던 설여원은 최현의 가설을 듣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현이 말이 제일 정답에 가까운 것 같은데?”
“그럼…… 세 번째 에피소드가 끝이라는 거지?”
전완수가 되묻자, 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내 생각에는 그래. 그리고 아까 그랬지? 에스파디아가 적들에게 들켰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최현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서두르라고 한 건…… 세 번째 에피소드 클리어 전에 외계 생명체의 침공이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 같아.”
“그래서 서두르라고 한 건가? 해금 전에 공격당하면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렇지. 에스파디아가 했던 말 기억 나? 좀비랑 변종만으로는 승리를 확신할 수 없다고 그랬다며.”
“맞아.”
“그런데 4단계 변종도 간신히 잡는 입장에서, 외계 생명체를 이길 가능성은 더 희박하겠지?”
아직 아크에 있는 포만감 자판기의 남은 시간은 여유롭지만, 사실상 자판기의 남은 시간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우리가 싸우고 있는 적은 어디까지나 에스파디아가 만들어둔 설정일 뿐이다.
만약 세 번째 에피소드를 완료하기 전에 외계 생명체의 침공이 시작되면…… 우리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매표소 앞으로 모이라고 해줘. 지금 정리한 내용, 다들 알아야지.”
“오케이.”
전완수와 최현은 후다닥 카페를 빠져나갔다.
난 폐부에 들어찬 탁한 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에스파디아는 광란의 사용횟수를 조심하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조심할 때가 아닌 것 같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으로 조심조심 이동했다가는, 육지를 밟기 전에 얼음이 모두 녹아 다 같이 수장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얼음이 남아 있는 지금, 전속력으로 돌파하는 게 이로울 것이다.
* * *
“안상진!”
옆에서 들리는 까랑까랑한 목소리에, 대장 좀비 안상진은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가 서 있었다.
“내 말 안 들려?”
“……못 들었어. 뭐라고 했지?”
“정신을 어디 놓고 다니는 거야?”
안상진은 잠실 방면을 살피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는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수하들 신호가 끊어졌어.”
“무슨 수하.”
“4성 변종을 감시하도록 지시했는데, 하남으로 이동한 수하들의 신호가 끊겼어.”
“수하들이 죽었다는 거야?”
“아니, 감시 대상이 사라진 것 같아.”
안상진의 말에 여자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4성 변종이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냥 사라진 게 아니야. 4성 변종이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