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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32화
황덕록은 헛기침하며 얘기했다.
“대충 빨고 업그레이드할게요. 신발 상태가 심각하네요.”
좀비들의 혈흔과 감염된 식물의 액체가 뒤섞여 꼴이 말이 아니었다.
심지어 냄새도 지독했다.
황덕록은 회수한 신발을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박재우와 윤혜리도 덩달아 화장실로 들어가 황덕록을 도왔다.
설여원은 현재 시각을 살피며 얘기했다.
“다들 쉬어요. 식사는 저랑 오혜선 씨, 한민욱 씨가 준비할게요.”
“……그래.”
이정우는 가볍게 목례하며 설여원의 표정을 살폈다.
이전보다 진정된 것 같지만, 여전히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이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여원을 불렀다.
“여원아.”
“네?”
“네가 무슨 걱정하는지 아는데, 내일은 네 본가부터 확인할 거야. 반대할 생각하지 마.”
설여원은 입술을 달싹이며 시선을 회피했다.
설여원의 표정으로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엿보였다.
이정우는 애써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포기가 익숙한 세상인 건 아는데, 그런 부분까지 양보할 필요 없어. 각자 본가 확인하는 건 안개 퍼진 초기에 한 약속이잖아.”
“…….”
“네가 우리 생각해 주는 것만큼, 우리도 네 생각하는 거 잊지 마. 너랑 재형이가 지금껏 양보하고 있었다는 것도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알아.”
“…….”
“너도 느꼈겠지만, 우린 멍청할 정도로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거 알지?”
“알죠, 너무 과할 정도라서 그렇지.”
“결인이잖아.”
이정우의 말에 설여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정우는 설여원의 얼굴을 지그시 쳐다보더니,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그러니 본가 건너뛰겠다는 생각하지 마. 그게 더 서운해.”
이정우의 말에, 설여원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코를 훌쩍였다.
뒤이어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네.”
* * *
점심 식사를 마치고, 박재우와 황덕록은 3층에 프린트를 설치한 후 신발 제작과 업그레이드에 돌입했다.
연이은 전투로 결인들의 코인은 대폭 증가한 상태였다.
황덕록과 박재우는 60,787코인을 보유 중이었고, 이정우는 51,187, 정진영은 81,187코인이 있었다.
설여원 전완수는 142,587코인, 김희연 127,587코인, 최현과 윤혜리는 180,587코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코인은 많이 얻었지만, 전투에 나설 때마다 강화제 알약을 10개씩 섭취하는 상황.
부산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70알씩 배분했지만, 벌써 절반이나 줄었다.
“강화제 알약 더 구매할까?”
정진영은 매표소 중앙에 놓인 소파에 앉아서 홀로그램을 살피며 물었다.
그러자 이정우는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아니야,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기다리자. 당장 부족한 건 아니니까.”
맞은편에서 인벤토리를 확인하던 이정우의 대답에, 정진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다들 어디 갔어?”
“각자 쉬는 시간 가지라고 했어. 하고 싶은 거 하라고.”
간만에 즐기는 휴식이었다.
결인들은 그동안 하지 못한 여가 활동에 집중했다.
책도 읽고, 매표소 옆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오혜선과 한민욱은 장군이와 친해지기 위해 스타필드 내에서 산책을 즐겼다.
뒤이어 전완수가 소파로 다가오며 물었다.
“형들은 뭐 안 해요?”
“뭐?”
“간만에 휴식인데, 즐겨야죠.”
전완수의 말에 이정우는 정진영을 쳐다봤다.
정진영은 가만히 턱을 매만지더니, 인벤토리를 열고 기타를 꺼냈다.
전완수는 그 모습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아니, 얼마 만의 휴식인데 기타를 치겠다고요?”
“간만에 여유로운 시간이니, 나도 좋아하는 거 해야지.”
이정우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전완수는 혀를 끌끌 차며 최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최현은 매표소 옆에 있는 카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테이블에 놓인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그의 편안한 심리를 대변하고 있었다.
“뭐 보냐?”
전완수가 묻자, 최현은 책장을 넘기며 대답했다.
“네가 싫어하는 거.”
“뭔데 그래. 소설? 다른 책 더 없어? 나도 소설 좋아하는데.”
“네가 소설을 좋아한다고? 21년 만에 처음 들어보는데?”
“아 진짜야 인마.”
전완수가 퉁명스러운 표정을 짓자, 최현은 좌측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저쪽 벽에 봐봐. 소설책 많더라.”
뒤이어 활짝 열린 카페 유리문 너머로 이정우와 정진영의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최현은 싱겁게 웃으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BGM 좋네.”
박재형이 무리하고 기절한 탓에 의도치 않은 휴식 시간을 얻었다.
스타필드로 돌아왔을 때만 해도 모두가 지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모두의 표정에 평온함이 맴돌았다.
전투 중에는 몰랐는데, 막상 휴식을 취한 뒤에야 깨달은 것이다.
이들에게 휴식이 절실했다는 것을.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전진하는 것도 좋지만, 결인들도 감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휴식을 취하지 않으면 정신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현은 테이블에 놓인 커피를 마시며 맞은편에 앉은 전완수에게 물었다.
“저거 제목이 뭐더라?”
“뭐, 정우 형이랑 진영이 형이 연주하는 곡?”
“어.”
“데파페페 곡이겠지. 정우 형이랑 진영이 형 별명이 소리결 데파페페였잖아. 저게…… 제목이 She였나?”
“저것도 오랜만에 듣네. 예전엔 주말마다 들었던 것 같은데.”
최현은 싱겁게 웃으며 지난날의 추억에 잠겼다.
전완수는 최현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더니,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우린 뭐한 거지?”
“뭐가.”
“어쿠스틱 통기타 동아리 들어왔는데, 1년 넘도록 칠 줄 아는 곡이 별로 없잖아.”
“우리야 뭐…… 만날 애들이랑 놀기 바빴지. 기타보단 보컬이었고.”
“하긴.”
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금 독서에 열중했다.
그 뒤로 이정우와 정진영은 연달아 4곡을 연주한 뒤, 들고 있던 기타를 옆에 내려두었다.
“이것도 연습 안 하니까 둔해지네.”
이정우가 싱겁게 웃으며 얘기하자, 정진영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게. 박자도 잘 안 맞아.”
“가끔이라도 이렇게 시간 내서 맞춰볼까? 하도 안 쳐서 악보도 가물가물해.”
“신기하지 않냐? 나도 악보는 기억도 안 나는데, 손가락이 알아서 움직여.”
“나도 그래. 이래서 연습이 중요하다고 하나 봐.”
두 사람이 기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 황덕록이 소파로 다가왔다.
“저기…… 정우 형.”
“어, 왜 덕록아.”
“저도 한 곡 연주해도 돼요?”
황덕록의 질문에 이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도 기타 칠 줄 알아?”
“좀 쳐요.”
“왜 그동안 안 보여줬어.”
“그야…… 민망해서요.”
그러자 박재우와 윤혜리도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박재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덕록이 기타 잘 쳐요.”
“그래? 보여줘.”
이정우가 기타를 건네자, 황덕록은 장난감은 선물 받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뒤이어 기타를 조율하더니, 헛기침과 함께 얘기했다.
“혹시 저스틴킹이라고 아세요?”
“저스틴킹? 너 Phunkdified 연주할 줄 알아?”
“네, 펑크디파이드랑 Knock on wood요.”
“와, 덕록이 인재였네?”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던 이정우마저 한껏 들뜬 모습을 보였다.
본인이 좋아하는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을 만나자 반가운 모양이다.
황덕록은 조율을 마치고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손가락을 풀었다.
뒤이어 기타의 바디를 타악기처럼 살살 두드리는 모습을 보였다.
본래 강하게 타격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기타가 부서질 것이다.
이에 힘 조절을 신경 쓰며 연주를 시작했다.
신명 나는 음률이 울려 퍼지고, 6개의 줄 위에서 황덕록의 손가락이 춤추기 시작했다.
이정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와…….”
윤혜리도 난생처음 보는 주법에 눈을 떼지 못했다.
곧 뿔뿔이 흩어져 있던 결인들이 소파로 모이기 시작했다.
예전 동아리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연주자 주변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연주를 감상했다.
연주가 끝나면 서로의 곡을 뽐내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가졌다.
오혜선은 결인들의 모습을 보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풋풋하다……. 그리운 모습이네.”
그러자 옆에 있던 한민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실장님도 저린 시절이 있었어요?”
“당연하지? 그리고 낭만은 나 대학생 때가 최고였어. 예전엔 잔디밭에 앉아서 동기들이랑 기타 치고 노래하고 그랬어.”
“아하…….”
“왜, 못 믿겠어?”
“아하하! 아닙니다.”
“뭐야 그 웃음은? 나도 대학생 때 잘나갔거든?”
“암요, 압니다.”
한민욱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짓자, 오혜선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입가로 번지는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 * *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바깥에서 들리는 기타 소리에 감겨 있던 두 눈을 천천히 떴다.
“윽…….”
두통이 몰려오고, 전신이 욱신거렸다.
힘겹게 오른팔을 들어 관자놀이를 누르고,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텐트 너머로 보이는 일행의 얼굴.
소파에 둘러앉아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모습.
예전 동아리방에서 자주 보던 풍경이, 지금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내가 헛것을 보는 건가?
아니면 설마…… 나 죽은 건가?
“어? 재형아!”
곧 소파 앞에 앉아 있던 설여원이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왔다.
설여원은 대뜸 내 두 볼을 붙잡더니, 좌우로 돌리며 물었다.
“괜찮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어…… 그냥 뻐근한 정도.”
설여원은 내 이마와 본인의 이마를 번갈아 짚으며 열은 없는지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떨떨한 마음에, 끊어진 기억의 조각을 하나하나 맞추었다.
베타2의 혓바닥에 붙잡힌 건 선명히 기억한다.
그러다 베타2의 혓바닥이 잘려나가고, 전완수의 얼굴을 봤던 기억이 있다.
꿈이 아니었어?
정신을 잃는 순간, 결인들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래서 헛것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구하러 왔던 모양이다.
멋쩍은 마음에 쓴웃음을 짓자, 설여원은 대뜸 내 등을 때렸다.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설여원은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다.
자다 일어나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입술을 벙긋거리자, 설여원은 연달아 내 등을 때리며 울먹였다.
“내가, 무리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세게 때리는 건 아니지만, 근육통으로 인해 전신으로 짜릿한 기운이 퍼졌다.
4대를 연달아 맞은 뒤, 멋쩍은 마음에 팔뚝과 등을 쓸어내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미안. 나는 그냥…….”
그 순간, 내 얼굴을 감싸는 설여원의 손길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석고상처럼 굳어있는데, 귓가로 설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야…….”
“…….”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소파에 앉아 있는 일행을 쳐다보자, 다들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야, 아무리 봐도 둘이 잘 어울리지 않아?”
정진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자 전완수와 최현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옆에 있던 이정우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난 두 사람 찬성.”
“나도.”
“저도요.”
조금 전까지 엷은 미소를 짓고 있던 일행의 표정이, 음흉스레 변하기 시작했다.
이에 헛기침과 함께 설여원을 진정시키고, 함께 텐트 밖으로 나갔다.
월! 월월!
[일어났다! 친구 일어났어!]
장군이가 달려와 내게 안겼다.
양손으로 느껴지는 장군이의 무게감에,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일행을 쳐다보며 묻자, 이정우는 소파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와서 앉아.”
소파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자, 전완수가 내 팔뚝을 가볍게 치며 얘기했다.
“너 구하느라 개고생했어 인마.”
나도 내 잘못을 알고 있다.
변명할 생각도 없다.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고, 일행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뿐만 아니라 모두의 목숨을 위험하게 만들었으니, 진심을 담아 사과부터 했다.
“다들 미안해. 정우 형, 진영이 형, 죄송합니다.”
“감마3이 폭발한 덕에 네 위치 찾은 거야. 아니었으면 못 구했어.”
최현의 말을 듣고, 옥상에서 감마3을 마주쳤던 찰나의 순간이 떠올랐다.
감마3 때문에 탈출에 실패했는데, 한편으로는 감마3 덕분에 구조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