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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270화 (270/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16화

무턱대고 접근하는 건 위험하기에, 무전기를 들고 일행을 불렀다.

“완수야 들려?”

치지직- 치직-

-얘기해.

“살수차 찾았어?”

-방금 찾았어. 지금 간다.

“도착하면 무전 쳐. 먼저 공격하지 말고.”

-오케이.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거대식물을 감시했다.

* * *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어느 고층건물의 전망대.

그곳에서 안구가 보랏빛인 대장 좀비와 여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받아, 무전기야.”

여자가 건네는 무전기 하나.

대장 좀비는 덤덤한 표정으로 무전기를 받았다.

대장 좀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여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여기 오는 일은 없을 거야.”

“들킨 거야?”

“들키진 않았어. 다만 변종이 날뛰기 시작해서 말이야.”

“오는 길은 내가 정리하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지?”

“파티원들 생각은 달라. 좀비들도 4배 강해진 마당에, 여의도에서 잠실까지 오는 걸 반기는 사람은 없다고.”

“…….”

“네가 장소를 옮기면 안 돼? 굳이 여기 있으려고 하는 이유가 뭐야?”

여자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대장 좀비는 싱겁게 웃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뒤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예전엔…… 여기 사는 게 소원이었지.”

“지금 감성팔이나 할 때야?”

여자가 눈살을 찌푸리자, 대장 좀비는 조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어차피 죽은 몸인데 말이야.”

“…….”

“세상이 망했는데, 여기 사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기도 해.”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고집부리지 말고 여의도 근처로 와.”

“명령이야?”

창밖을 바라보던 대장 좀비는 보랏빛 안광을 번뜩이며 여자를 쳐다봤다.

여자는 움찔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대장 좀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지만, 기세에 밀리지 않기 위해 양손에 힘을 주었다.

대장 좀비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여의도 아크에 있는 생존자가 1만 명이라고 했나?”

“맞아.”

“마지막으로 생존자를 받은 게 언제였지?”

“한 달 정도 됐지.”

여자의 대답에 대장 좀비는 옹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것도 내가 길을 뚫어준 덕이었지?”

“…….”

“너희 공격대 규모로 생존자 구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해? 3개의 파티가 있는데, 플레이어는 고작 14명이잖아?”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라스트아크는…… 애초에 플레이어에게 불리한 게임이었어. 그런 너희가 누구 덕에 숨 쉬고 살아 있는지 잊지 마.”

“…….”

“그러니 명령할 생각하지 마.”

대장 좀비가 덤덤하게 얘기하자, 여자는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었다.

뒤이어 사진첩을 열고, 대장 좀비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거래조건을 잊은 건 아니겠지?”

“…….”

사진 속에는 두 명의 아이가 해맑게 웃고 있었다.

10살 정도로 보이는 여아와 8살 정도로 보이는 남아.

대장 좀비는 사진을 유심히 살피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너…… 당돌해졌구나.”

“내가 없으면 이 애들 챙겨주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

“망각하지 마. 네가 아이들을 챙겨주는 게 아니라, 내가 모두를 챙기는 거니까.”

“거만하네? 아크에 네 존재를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거 잊지 마.”

“…….”

“너도 알잖아? 아크에 있는 사람들, 좀비만 보면 못 죽여서 안달이라는 거.”

대장 좀비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를 쳐다봤다.

이번엔 여자도 물러서지 않았다.

날카로운 시선이 오가고, 결국 한발 물러서는 건 대장 좀비였다.

“여의도 아크 내부 상황은?”

“막막하지. 서대문구에서 온 생존자들이 가장 반발이 심해.”

“하! 이제 살 만하다 이건가? 원하는 게 뭐래?”

“원하는 게 없어. 그것들은 그냥…… 플레이어를 신뢰하지 않아.”

“벽만 없으면 진즉에 죽었을 놈들이 입만 살아서는.”

대장 좀비는 인상을 찌푸리며 세차게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70일 뒤에 다 죽을 운명이라고 얘기해도, 사람들이 안 믿어. 나를 종말론자 취급하고 있어.”

“이미 종말이 시작됐는데 종말론자 취급이라고? 그것도 웃기네.”

“처음엔 1천 명이 반발하더니, 지금은 그 숫자가 더 많아졌어.”

“몇 명.”

“3천 명이 플레이어 반대 시위에 참여하고 있어. 나흘 만에 3배나 늘어난 거지.”

플레이어 반대 시위라는 말에 대장 좀비는 호쾌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살려달라고 매달려도 모자랄 판에, 플레이어를 반대한다고?”

“…….”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네가 신뢰를 못 쌓은 거야? 아니면 사람들 시야가 근시안적인 건가?”

“부산 아크가 탈출에 성공하면서 알약 자판기의 남은 시간이 초기화됐잖아.”

“그래서, 이번에도 70일이 지나면 또 초기화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맞아. 그것 때문에 시위대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어. 바깥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아크에 숨어지내면 평생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플레이어가 필요 없고, 플레이어들이 쇼를 하는 거다?”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 좀비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터뜨렸다.

곧 여자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그것들 밖으로 내보내.”

“나가란다고 나갈 것 같아? 밖에 나가면 죽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든 내보내야지, 안 그러면 속에서부터 곪아.”

“하…… 마음 같아서는 죽여 버리고 싶어.”

“그럼 네가 직접 죽이든가.”

“그 사람들 죽이면 나머지 7천 명이 내 말에 잘도 따르겠다? 가뜩이나 갈팡질팡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

“소수 인원이면 몰라도, 사람들 규모가 1만이야. 관리가 될 것 같아?”

“네가 균형을 못 잡으면 내부에서부터 썩어 들어갈 거다. 썩은 뒤에 네가 설 자리는 없어.”

대장 좀비가 덤덤하게 얘기하자, 여자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아크를 버리겠다는 거냐?”

“내 사람들만 데리고 나와야지. 물론…… 거기엔 네 자식도 포함되어 있을 거고. 그래야 나도 안전하잖아?”

여자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대장 좀비는 씁쓸한 표정으로 지으며 물었다.

“방랑자 생활이 가능할 것 같아?”

“70일 뒤에 아크에 남은 사람들은 알아서 자멸할 거야.”

“아크가 자멸하면 70일 뒤에도 돌아갈 곳은 없어.”

“너도 못 버텨? 넌 변종도 이기잖아.”

“4성 변종은 나도 버거워. 심지어 변종 에덤은 3성부터 버겁고. 나도 계속 강해지는 중이지만…… 다수의 변종이 달려들면 위험해.”

여자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긁적였다.

대장 좀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위협이 다가오고 있어.”

“저번에 얘기했던 거? 에스파디아인가 뭔가 하는 거? 그거 꿈이라며.”

“요즘 들어 계속 같은 꿈을 꾸고 있어. 그냥 넘길 일이 아닌 것 같아.”

“꿈 내용이 뭔데.”

“하늘에 구멍이 열려.”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장 좀비를 쳐다봤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 좀비는 여자의 표정을 살피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미쳤다고 생각해?”

“미친놈이 자식 걱정하진 않을 테고, 자세히 말해봐. 하늘에 구멍이라니? 독 안개처럼 뭐가 더 남은 거야?”

“라스트아크 얘기가 아니야.”

“그럼?”

“하늘에 구멍이 열리고, 그곳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나와.”

“좀비랑 변종, 감염된 동식물보다 더한 괴물이 있다고?”

“그건…… 마치 외계의 군대 같았어.”

여자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뜩이나 머릿속이 복잡하기에, 지금은 대장 좀비의 말에 귀 기울일 여력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곧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눈빛이 보라색으로 변한 뒤로 이상한 꿈 얘기만 하는 거 알아? 그럴 시간에 변종이나 더 잡아.”

여자의 가시 돋은 말에, 대장 좀비는 반박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도 확신이 없기에,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함묵을 택했다.

대장 좀비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여자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당장 눈앞의 근심 덩어리부터 해결해야지?”

“분란 일으키는 생존자들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죽이기 어려우면 줏대 없는 놈들 골라서 밖으로 쫓아내고. 그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사람 구하고 죽이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여자의 표정만 봐도, 지금의 암담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대장 좀비는 씁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늦었다, 이만 돌아가라.”

“안 그래도 돌아갈 거야.”

여자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전망대 출구로 향했다.

“야, 잠깐.”

여자가 계단으로 향하자, 대장 좀비는 여자를 돌아보며 얘기했다.

“다음에는…… 사진 말고 동영상도 찍어줘. 목소리도 들리게.”

여자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밖으로 나갔다.

홀로 남은 대장 좀비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고심에 잠겼다.

10성이 되면서 꿈을 꾸기 시작했고, 꿈에서 만난 에스파디아는 이런 얘기를 했다.

-네 선택이 모두의 희망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처음엔 에스파디아가 말하는 희망이 본인이라 생각했다.

의도가 어떻든, 지금은 인간의 편에서 싸우고 있으니까.

하지만 반복되는 꿈을 꾸면서, 한 가지 의문을 지니게 되었다.

꿈 속에서 외계 생명체와 싸우는 남자는…… 분명 보호대를 착용하고 있었다.

플레이어만 착용할 수 있는 보호대를 말이다.

에스파디아가 그런 꿈을 반복적으로 보여준 이유가 뭘까.

대장 좀비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어쩌면 에스파디아가 말한 희망이, 본인이 아닐 수도 있다고.

“대체……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이미 좀비가 되어버린 본인에게, 무슨 이유로 그런 꿈을 보여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 * *

-준비됐어?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전완수의 목소리.

설여원과 시선을 주고받은 뒤, 무전기를 들고 대답했다.

“가자.”

쏴아아아아아!!

소방서에서 끌고 온 2대의 살수차.

두 대 모두 16톤 소방 살수차였다.

수목원 화재 발생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16톤급의 소방 살수차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일제히 물을 쏟아내자, 보랏빛의 대지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아아-!

수증기가 발생하며 가뜩이나 자욱한 안개가 더욱 짙어지고, 비릿한 악취가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설여원은 정체 모를 꽃을 관찰하며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아직 별다른 반응은 없어.”

“촉수 같은 줄기는?”

“암술대랑 수술대 모두 공격성은 안 보여.”

변종이나 좀비, 감염된 동식물처럼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고, 오직 수비에만 전념하는 식물이었다.

일종의 여왕개미 같은 건가?

“여원아, 방패 있어?”

“있지.”

“방패 들어.”

설여원은 인벤토리에 넣어둔 방패를 꺼내며 내 옆으로 붙었다.

방패를 앞세워 보랏빛 대지가 사라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육안으로 들어오는 꽃의 모습.

거대한 꽃의 10m 앞까지 접근하자, 기다란 그림자가 날아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온다! 왼쪽!”

설여원의 브리핑에 따라 카타나를 말아쥐며 휘둘렀다.

쯔득-!

감염된 식물의 줄기와는 비교도 안 되는 내구도.

거대식물의 수술대는 훨씬 두껍고, 단단했다.

일격에 끊어내는 건 실패했지만, 그래도 흠집이 생기며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액체의 색이 보랏빛이었다.

설여원은 황급히 방패를 들어 쏟아지는 액체를 막았다.

치이이익-!

방패의 표면에서 듣기 거북한 소리가 들리고, 설여원은 거대식물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외쳤다.

“오른쪽!”

황급히 시선을 돌리자, 또 다른 수술대가 빗자루로 쓸 듯이 날아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걸 잘라 버리면 설여원과 내 정강이로 염산이 쏟아질 것이다.

이에 카타나를 휘두르는 대신, 날아드는 수술대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뒤에 있는 일행에게 소리쳤다.

“방패 있는 사람들 앞으로 와!”

수술대의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지름 40㎝에 달하는 두께와 단단한 표면.

잘라내는 게 위험하다면 뽑아버리면 그만.

하체를 접으며 살수차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속.”

쾅-!!

방패 들고 달려오는 일행을 피해 직진하자, 얼마 못 가 수술대가 팽팽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꿈틀거리는 수술대.

“어딜……!”

수술대를 겨드랑이 넣은 채 양손으로 꽉 잡고, 있는 힘껏 뽑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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