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15화
월! 월월! 월!
뒤이어 장군이가 짖기 시작했다.
[저거 위험해. 냄새도 안 좋아.]
웬만한 일로는 짖지 않는 장군이가, 낯선 환경에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머리 위의 말풍선에 지금의 불안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장군아 진정해. 워워.”
장군이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털끝이 곤두선 것으로 보아 쉽사리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경계-]
말풍선도 장군이의 생각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심리 상태로 변했다.
이에 김희연을 쳐다보며 물었다.
“다른 특이점은 없어?”
“이상한 꽃이 있어요.”
“꽃?”
“엄청나게 커요. 그 꽃에서 보라색 액체가 흘러나오고 있어요.”
“속도는?”
“속도는 그렇게 안 빨라요. 경보로 걷는 정도.”
김희연의 설명을 듣고, 옆에 있는 오혜선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문수로로 나가는 길은 저기뿐이에요?”
“길은 저기뿐이지만, 담을 넘어가는 방법도 있죠.”
무시하고 도망치거나, 저 괴생명체의 정체를 파악하거나.
생각을 정리하고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다들 오혜선 씨 따라서 담벼락 넘어가.”
“넌 어쩌려고.”
“서울에 저런 생명체가 없다는 보장이 없잖아. 정보는 얻어야지.”
“좀비나 변종이면 때려잡기라도 하지. 저 보라색 바닥이 뭔지 알고 접근하겠다는 거야?”
설여원이 묻기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뭔지 모르니까 확인해야지.”
“나도 같이 가자는 말이잖아.”
설여원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괜히 반대해 봐야 말씨름만 길어질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뒤에 있던 오혜선이 입을 열었다.
“저도 같이 가요.”
“안 됩니다. 위험해요.”
“이상하게 생긴 꽃이 있다면서요? 여기서 식물에 대해서 나보다 잘 아는 사람 있어요?”
겁이 없다고 해야 좋을지,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아니면 탐구심이 강한 편인가?
결국 모두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설여원과 오혜선을 데리고 정면으로 나아갔다.
대략 400m 정도 이동했을까?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보랏빛의 대지가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후, 냄새 미쳤는데?”
설여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코를 막았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지독한 악취였다.
폐가 썩어 들어가는 기분.
안개 때문에 명확하게 분간할 수 없지만, 보랏빛의 대지에서 증기 같은 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채 보랏빛의 대지를 살피자, 범위를 넓혀가던 보라색 대지가 멈추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여원은 땅의 경계면을 살피며 얘기했다.
“왜 멈춘 거지?”
“감염된 식물들은 땅의 울림으로 적을 감지하잖아.”
“우릴 공격할 생각이 없는 건가?”
“그건…… 지켜봐야지.”
설여원은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보라색 액체를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얘기했다.
“땅이 움직이는 게 아니었어. 이 보라색 액체 같은 게 땅을 덮은 거지.”
“아까 희연이가 이상한 꽃이 있다고 그랬는데, 여기서 보여?”
“100m 앞에 있어. 엄청 커.”
“크기가 얼마나 되는데.”
“높이는 3m, 좌우 길이는 못해도 7m.”
꽃의 길이가 7m나 된다고?
그걸 꽃이라고 불러도 되나?
설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을 응시하며 얘기했다.
“꽃을 중심으로 반경 100m는 전부 보라색이야.”
“꽃 색깔이나 생김새는?”
“알록달록해. 그런데 줄기도 안 보이고, 뿌리도 안 보여. 그냥 엄청 큰 꽃이야.”
그러자 뒤에 있던 오혜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얘기했다.
“줄기도 없고 뿌리도 없이 꽃만 커다랗게 있다고요?”
“네, 그리고 암술대랑 수술대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만 있어요.”
“그거 라플레시아 특징인데.”
“라플레시아요?”
“그렇게 생긴 꽃이라면 라플레시아밖에 없어요.”
“한국에 라플레시아가 살아요?”
“원래 열대지방이나 아열대 지방에 분포해요. 한국에 자연 서식하는 경우는 없지만, 지금은 게임이 배경이라면서요? 그럼 가능하겠죠.”
“라플레시아에 독성이 있나요?”
“지금은 확실하지 않죠? 여기 오는 길에 2m 크기의 사람 먹는 식물도 봤다면서요.”
오혜선의 말이 맞다.
우리가 알던 세상이 사라진 것처럼, 우리가 알던 식물도 더는 예전의 식물이 아니다.
또한 라스트아크의 설정에 존재하는 식물이라면, 지구상의 생명체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카타나를 손에 쥐고 옆에 있던 설여원에게 얘기했다.
“뒤로 물러서.”
“어쩌려고.”
“이것도 반응하는지 보려고.”
칼끝을 보랏빛 대지에 갖다 대자, 불판에 고기를 올린 것처럼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올라왔다.
산성 물질인가?
대략 10초 정도 갖다 대자, 카타나의 내구도가 1% 감소했다.
이 정도면 강산이다.
5레벨 카타나가 반응할 정도면, 평범한 인간의 피부는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결인들의 스탯이 아무리 높아도, 이 위에서 싸우는 건 위험할 것이다.
내겐 재생 능력이 있으니, 직접 실험이라도 해봐야겠다.
건틀릿을 벗고 조심스레 손끝을 갖다 대자, 묘한 촉감이 느껴졌다.
따끔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뜨거운 것 같기도 하다.
뒤이어 통증이 느껴졌다.
한 박자 늦게 느껴지는 통증에 황급히 손을 떼자, 검지가 빨갛게 익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설여원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미쳤어? 이런 걸 손으로 만지면 어떡해?”
“염산 같아.”
패시브 스킬 재생이 발동되며 빨갛게 익은 손가락이 서서히 치유되기 시작했다.
염산을 희석하려면…… 물을 뿌려야 하나?
설여원은 정체 모를 꽃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저런 게 있는 이유가 뭐지? 공격성도 없고, 움직임이 빠른 것도 아니고.”
“나도 모르지. 감염된 식물들에게 버프라고 주면 모를…….”
순간, 말을 하다말고 머릿속으로 반짝이는 빗금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버프.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오는 길에, 우린 감염된 식물로 가득한 숲을 지나왔다.
그때 벌목했던 나무들의 밑동이 다른 부위와 달리 색이 변한 모습을 보였다.
식물의 변이를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게 이놈인가?
“촉진제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하자, 설여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촉진제? 뭐가, 이게?”
“이 보라색 땅이 감염된 식물을 만드는 거라고.”
식물이 맹독을 뿜어내는 것은, 이미 DNA구조가 망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위에 지금의 보라색 액체가 얹어지면 감염된 식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얘기하자, 설여원은 손가락을 튕기며 얘기했다.
“아, 맞네. 모든 식물이 감염된 식물처럼 변하지 않은 건 아직 이놈을 만나지 않아서 그런 거네.”
“그렇지. 감염된 식물이 많은 지역은 이 꽃이 지나간 자리라는 거고.”
“그럼 이거 없애야 하는 거 아니야?”
“죽여야지. 쇠뇌 있어?”
설여원은 인벤토리에 넣어둔 쇠뇌를 챙기며 곧장 견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정면을 응시하며 물었다.
“어디가 약점이지?”
설여원의 물음에 대답 대신 오혜선을 쳐다봤다.
오혜선은 당화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말까지 더듬으며 얘기했다.
“쇠뇌로 7m 크기의 라플레시아를 잡겠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라플레시아는 약점 없어요?”
“라플레시아는 기생 식물이에요. 뿌리나 줄기가 없으니, 그나마 약점이라면 영양기관을 파괴하는 건데…… 쇠뇌로 영양기관을 잘라내는 건 무리죠.”
“…….”
“그리고 라플레시아를 모델로 만들어진 식물이라면…… 꽃잎처럼 생긴 게 잎이 아닐 거예요.”
“꽃잎이 아니면 뭐예요?”
“꽃받침이죠. 그것도 육질성의 꽃받침.
라플레시아가 기생식물이었어?
설여원은 꽃의 생김새를 유심히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기생식물 맞아요? 기생하는 나무가 없는데?”
“생김새가 지구상의 라플레시아랑 비슷하다는 거지, 저게 라플레시아는 아니잖아요. 게임에 존재하는 식물일 텐데.”
“그럼…… 어떻게 잡아요?”
“나도 모르죠. 외계 식물을 내가 어떻게 알아.”
설여원과 오혜선의 대화를 듣고, 인벤토리에서 생수를 꺼냈다.
그리고 보라색으로 보이는 바닥에 조심스레 생수를 부었다.
부글부글-
그러자 액체의 표면으로 수포가 일어나고, 수포가 사라진 자리로 아스팔트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감염된 식물의 점액이 물에 씻겨나가는 것처럼, 보랏빛 대지도 물에 희석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여원은 인벤토리에서 생수통을 꺼내며 물었다.
“전부 부어?”
“아니야, 생수는 아껴.”
“그럼 어쩌려고.”
설여원의 물음에, 뒤에 있는 오혜선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 근처에 소방서 있어요?”
“당연히 있죠. 수목원 바로 앞에 있어요.”
“실장님은 소방서까지 결인들을 안내해 주세요. 완수한테 살수차 끌고 오라고 해줘요.”
오혜선은 황급히 결인들의 곁으로 달려갔다.
설여원은 들고 있던 생수통을 인벤토리에 넣으며 물었다.
“그냥 좀비화 쓰고 잡으면 안 돼?”
“오늘 경기도까지 올라가야 돼. 지금 좀비화 쓰면 변수에 대응할 수 없어.”
“신발도 제작했겠다, 그냥 밟고 들어가는 건 어때?”
“지금이야 저 꽃이 무반응이지만, 접근했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잖아. 신발이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도 모르고.”
“실험해 보면 되지.”
설여원은 거침없이 오른발을 내디뎠다.
치이이익-!
불판에 올라간 고기처럼 신발 밑창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덤프도 로그나이트처럼 자가복구기능이 있지만, 복구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설여원은 신발의 내구도를 유심히 살피더니, 오른발을 떼며 얘기했다.
“1레벨 신발이라 그런지 별로 못 버티네.”
“얼마나 줄었어?”
“1초에 1%씩 줄어.”
5레벨 카타나는 10초에 1%가 감소하는데, 1레벨 신발은 1초에 1%가 감소한다.
“여원이 넌 여기 있어.”
“또 뭐하려고?”
“100m 거리에 꽃이 있다고 했지?”
“너 설마…… 뛰어넘으려고?”
스킬 급가속을 사용하면 단숨에 100m를 뛸 수 있다.
굳이 바닥을 밟지 않아도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염산을 뿌리고 다니던 놈이 멈췄다는 건, 지금 수비에 집중하고 있다는 거 아니겠어?”
“…….”
“공격하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봐야겠어.”
“잠시만, 그럼 달려들기 전에 쇠뇌부터 쏘는 게 더 안전하지.”
하긴, 단숨에 접근해서 처리하는 건 욕심인지도 모른다.
설여원의 의견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전하게, 볼트를 이용해서 자극에 따른 반응부터 확인하는 게 좋겠다.
설여원은 쇠뇌를 견착하고 정면을 주시하더니, 내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얘기했다.
“간다?”
“잠깐, 몇 레벨 볼트야?”
“1레벨 볼트부터.”
고개를 끄덕이자, 설여원은 훅, 하고 숨을 뱉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퉁! 퉁퉁! 퉁!
네 발의 볼트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갔다.
치익- 치이익- 치익-
뒤이어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고기 굽는 소리.
“미친…….”
설여원의 입에서 욕설이 들려오고, 눈살을 찌푸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어떻게 됐는데?”
내겐 안개밖에 보이지 않기에, 적중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설여원은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대답했다.
“암술대랑 수술대가 있어야 하는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있다고 했지? 거기서 줄기 같은 게 나왔어. 암술대랑 수술대를 여태 숨겨둔 거야.”
“그게 볼트를 잡은 거야?”
“쳐냈어.”
날아가는 볼트를 쳐내?
2성 변종들도 제때 반응하지 못하는 게 볼트의 속도였다.
그렇다면…… 저 꽃의 반사신경이 변종 에덤과 비슷하다는 건가?
당황하는 것도 잠시, 설여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얘기했다.
“정중앙에 있는 줄기만 유독 두꺼워. 저게 암술대고 다른 게 수술대 같아.”
꽃의 생김새라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감지.”
그러자 100m 전방에 있는 거대한 꽃의 생김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설여원의 말대로 가로 7m, 세로 3m 크기의 거대한 꽃이 있고, 정중앙에서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암술대와 수술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100m 앞의 꽃은 푸른색으로 보이지 않았다.
내게 자주색으로 보였다.
이는 5성 이상의 대장 좀비, 혹은 변종으로 취급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