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부 5화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고, 눈치를 보던 전완수가 양손으로 허공을 저으며 얘기했다.
“에이 씨, 됐어! 생각해서 뭐해? 머리만 아프지.”
그래, 지금 당장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그래왔듯, 우린 최악의 상황을 머릿속에 넣어놓고 행동한다.
그거면 족하다.
고민을 반복하다 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최악의 상황을 인지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비를 갖추었다면 만족해야 한다.
이를 결인들도 알기에, 더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정우는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수색대는 식량 찾아보고, 수비대는 주유소 털자.”
“누가 수색대고 누가 수비대예요?”
이정우를 쳐다보며 묻자, 그는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우리 동아리방에 있을 때 정했잖아?”
“아.”
생존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학생회관에 갇혀 있을 무렵, 우린 수색대와 수비대를 나누어 행동했다.
수색대는 설여원과 나, 전완수, 최현이었다.
이정우는 멀어지는 정진영을 쳐다보더니, 손가락을 튕기며 얘기했다.
“진영아!”
“응?”
“너도 수색대랑 같이 움직여줘!”
정진영은 주유소로 이동하다 말고 내 곁으로 달려왔다.
곧 내 어깨에 팔을 얹으며 얘기했다.
“옛날 생각나고 좋네.”
“5개월도 안 됐는데, 엄청 옛날 일 같네요.”
“다사다난했잖아.”
학생회관에서 공대까지 오가던 기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고작 5개월도 안 되는 시간이지만, 정말 많은 게 변했다.
상황만 놓고 보면 당시보다 훨씬 악조건이지만, 일행의 표정은 활기로 가득했다.
* * *
아쉽게도 휴게소 내부에 남은 식량은 없었다.
이곳에 있던 변종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얼추 알 것 같았다.
휴게소에 있는 식량으로 버티다가, 결국 최후를 맞이한 모양이다.
별다른 수확은 없지만, 차량 주유는 이상 없이 진행되었다.
전완수는 가득 찬 연료를 보고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자, 다시 출발해 볼까?”
비상등을 점멸하자, 줄지어 선 차량도 연달아 비상등을 점멸했다.
전완수는 기어를 변속하며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다시금 안개 속을 나아가는 차량.
난 무전기를 들고 이정우를 불렀다.
“정우 형, 들리세요?”
치지직- 치직-
-얘기해.
“저희 어느 IC에서 내려야 돼요?”
-어…… 잠시만.
한참을 기다려도 이정우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리 경북 사람이라도, 모든 지형을 외우고 다니는 건 아니었다.
토박이의 중요성이 여실히 나타났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치지직- 치직-
-아아, 들려?
“말씀하세요.”
-혜리는 영주IC에서 나가라고 하고, 재우는 그 뒤에 나오는 풍기IC에서 나가래.
“영주 다음이 풍기예요?”
-어.
“상황보고 안전한 곳으로 나갈게요.”
-오케이, 확인.
무전을 마치고 전완수를 쳐다보자, 그는 표지판을 살피며 얘기했다.
“표지판 계속 보면서 가야겠네.”
“괜찮겠어?”
“반경 500m는 잘 보여. 혹시라도 놓치지 않게 집중해야지.”
전완수의 어깨를 토닥이며 부탁한다는 말을 전했다.
대구에서 봉화까지는 대략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사이의 거리.
지금은 과속카메라를 조심할 필요도 없으니, 좀비들만 나타나지 않으면 금방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전완수는 훅, 하고 숨을 내쉬며 운전에 집중했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어디를 봐도 똑같은 풍경.
정면은 안개, 좌우는 산과 들판.
중앙고속도로를 달리며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군위읍을 지날 때 고속도로 위에 올라선 몇몇 좀비들이 있었지만, 전완수는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밀어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확실히 좀비들의 상태가 예전과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버스에 받히면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던 좀비들이, 버티고 매달리며 창살을 뜯어내려는 모습을 보였다.
좀비들의 신체 능력이 4배 증가했다는 것은 예전 알파1의 신체 능력과 비등하다는 뜻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하지만 120㎞로 달리는 버스에 끝까지 매달리고 버티는 놈들은 없었다.
전완수는 사이드미러를 통해 차량의 외관을 살피며 얘기했다.
“좀비들 100마리 이상 뭉치면 못 뚫겠는데?”
“왜?”
“50마리 정도는 어떻게든 밀 수 있을 것 같은데, 100마리 넘어가면 버스가 전복될 거야.”
좀비들이 강해진 만큼, 좀비카의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반면에 최현은 눈앞의 홀로그램을 살피며 입맛을 다셨다.
“좀비들은 여전히 0.1코인 주네.”
변종의 신체 능력이 2배 증가하면서 카운트도 동일하게 증가했다.
반면에 좀비 카운트는 이전과 다를 바 없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군위, 의성, 안동을 지나 계속해서 북쪽으로 이동했다.
최현은 창밖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방금 안동 표지판 있지 않았어?”
“맞아, 지금 안동이야. 왜?”
“우리 작년에 안동하회마을에서 공연한 거 기억나?”
최현의 말에 예전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공연을 끝내고 동기들과 웃고 떠들며 술을 진탕 마셨다.
안동 소주에 거나하게 취해서 결국 집에도 못 가고 방을 잡아야 했다.
최현은 싱겁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들 맛있다고 먹었는데, 다음 날 죽는 줄 알았잖아.”
“그랬지, 45도짜리 술인 줄도 모르고 마셨지. 이름은 안동 소주면서, 맛이랑 도수는 소주가 아니었어.”
최현은 아무런 말도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아련함에, 나도 창밖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게임 클리어하면, 다시 안동 소주 마시러 오자.”
“기타도 들고 올 거지?”
“당연하지. 기타도 치고, 노래도 불러야지.”
“좋지. 그래야 소리결이지.”
최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창밖을 바라봤다.
예전처럼 웃고 떠들며, 술과 음악이 있는 오붓한 저녁을 상상하는 것으로 보였다.
* * *
“재형아, 이쪽으로 와봐.”
핸들을 쥐고 있던 전완수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전완수의 옆으로 다가가자, 그는 정면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저긴 못 지나갈 것 같은데.”
“저기가 어딘데.”
“영주IC.”
창밖으로 노을이 내려앉을 무렵, 어느새 영주IC에 다다른 상태였다.
내겐 감빛으로 물든 안개밖에 보이지 않지만, 전완수는 출구 방향으로 좀비들이 가득하고 한다.
예전의 좀비들이라면 밀고 들어갈 수 있지만, 지금의 좀비들은 예전과 다르다.
근력만 높이진 게 아니라, 골밀도와 표피까지 강해졌다.
현재의 버스로는 뚫고 들어갈 수 없기에, 난 이마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그럼 풍기IC로 가자. 고속도로 위에는 좀비들 없어?”
“고속도로 위에도 몇 마리 있는데, 출구보다는 훨씬 적어.”
“밟아.”
“꽉 잡아.”
전완수는 훅, 하고 숨을 뱉으며 기어를 변속했다.
부웅- 부우웅! 부아앙!!
빠르게 올라가는 RPM과 고막을 때리는 엔진소리.
크어어어어!!
까각- 카하아아악!!
동시에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먹잇감을 발견하고 전력으로 달려들 때는 이전과 동일한 포효를 내질렀다.
“간다!”
전완수는 양손으로 핸들을 쥐고 있는 힘껏 액셀을 밟았다.
터덩! 텅! 쩌적! 쾅!!
삼각뿔에 갈려 나가는 좀비들.
하지만 몇몇 좀비들이 유리에 박치기를 가하며 내부로 들어오려는 모습을 보였다.
콰곽! 콱! 콰과곽!!
머리가 얼마나 단단하면, 유리를 뚫고 들어온 뒤에도 세차게 흔드는 모습을 보였다.
새 떼에게 버드스트라이크를 당한 것처럼, 수십 개의 머리가 앞 유리를 뚫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에 카타나를 손에 쥐고 놈들의 정수를 꿰뚫었다.
치지직- 치직-
-몰려온다! 밟아!
무전기로 들려오는 이정우의 목소리.
출구 방면에 있던 좀비들이 고속도로로 올라오는 모양이다.
전완수를 쳐다보자, 그는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앞 유리가 깨지는 바람에 시야 확보에 차질이 생겼다.
거미줄 모양으로 갈라진 앞 유리로 인해,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전완수는 정면을 확인하기 위해 이리저리 고개를 흔들더니, 대뜸 소리쳤다.
“박재형! 유리 뜯어내!”
“뭐?”
놀란 눈으로 전완수를 쳐다보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빨리!!”
결국 전완수가 시키는 대로 앞 유리에 발길질을 가했다.
현재 근력은 381.
맞바람이 불든 말든, 손쉽게 뜯어낼 수 있었다.
휘이이이이-!!
정면으로 불어오는 칼바람에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전완수를 쳐다봤다.
뭐라고 소리치는 것 같은데, 귀곡성처럼 들리는 칼바람으로 인해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이를 전완수도 느꼈는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운전에 집중했다.
크하아아악!!
뒤이어 쏜살같이 나타나는 인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정면에 있던 좀비 하나가 지면을 박차며 뛰어오르더니, 단숨에 차내로 들어왔다.
전완수가 운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재빠르게 처리하며 외쳤다.
“이 상태로 어떻게 운전하겠다고 그래!”
“가드레일 받고 전복되는 것보단 낫지!”
자리에 앉아있던 최현도 카타나를 쥐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내가 우측 막을 테니까! 재형이 네가 운전석 쪽 막아!”
“알았어!”
전완수는 운전을, 최현과 나는 달려드는 좀비들 처리했다.
포탄처럼 날아드는 좀비들을 일도양단 내며 풍기IC로 이동했다.
치지직- 치직-
뒤이어 무전기에서 신호가 들어왔다.
-……! ……춰!
뭐라고 하는지 안 들린다.
이에 귓가에 갖다 대며 물었다.
“다시 얘기해! 뭐라고?”
-앞에 차량 전복! 멈춰!
무전기에서 들리는 설여원의 말을 듣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전완수에게 외쳤다.
“브레이크 밟아!!”
끼이이이익-!!
“어?”
전완수가 대뜸 브레이크를 밟는 바람에, 난 앞 유리 너머로 날아가고 말았다.
중앙고속도로를 나뒹굴고 빠르게 상체를 일으켰다.
다친 곳은 없지만, 시야가 일렁이고 초점이 제대로 맞춰지지 않았다.
구르는 와중에 카타나를 잃어버렸기에, 하는 수 없이 건틀릿을 말아쥐며 감각을 끌어올렸다.
카하아아악!!
‘왼쪽.’
좌측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돌아볼 새도 없이 돌려차기를 가했다.
뻑-!!!
일격에 좀비의 안면이 으스러지며 뒤로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박재형! 괜찮아?”
운전석에서 들리는 전완수의 목소리.
얼마나 바닥을 나뒹굴었으면, 버스가 30m 거리에 있다.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어지러운 시야를 붙잡았다.
동시에 전완수와 최현에게 외쳤다.
“뒤에 차량 전복! 가서 도와!”
두 사람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뒤로 달려갔다.
설여원이 앞에 차가 전복됐다고 했으니, 이는 버스 바로 뒤에 있던 승합차가 전복된 것이다.
승합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정우와 박재우, 윤혜리.
부디 무사하기를 바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카하아아아악!!
크어어어어!!
사방에서 들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이에 달려드는 좀비들의 안면에 주먹을 내지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좀비카를 버릴 때가 온 것 같다고.
두 번째 에피소드까지는 좀비카가 효과적이었지만, 이제 한계가 보인다.
모든 좀비의 신체 능력이 예전 알파1과 동일하기에, 일반 차량으론 감당할 수 없다.
곧 5m 거리에 놓인 카타나가 두 눈에 들어오기에, 황급히 카타나부터 손에 쥐었다.
달려드는 좀비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곧장 일행의 곁으로 달려갔다.
훙-!
“엇?”
스킬 급가속을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밀어주는 것처럼 갑작스레 이동속도가 증가했다.
이에 당황한 나머지, 다급히 두 다리에 제동을 걸며 균형을 잡았다.
뒤늦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인벤토리에 있는 성물.
[끊어진 에코백]
-반경 50㎞ 이내의 아군에게 이동할 시, 이동 속도가 1.5배 증가합니다.
지속 시간도, 재사용 대기시간도 없는 무한 버프 아이템.
이에 카타나를 말아쥐며 다시 한번 박차를 가했다.
쾅-!!
스킬 급가속을 사용하지 않아도, 일행에게 달려갈 때는 급가속을 사용한 것과 비슷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크어어어어어!!
곧 승합차를 둘러싼 좀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전완수와 최현이 측면을 방어하고 있지만, 옆으로 새는 좀비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양손으로 카타나를 쥐고, 지면을 박차며 좀비들의 목을 도려냈다.
촤학-!!
단 한 번의 칼질로 10개의 머리가 떨어져 나갔다.
전복된 차량을 쳐다보자, 차량에서 기어 나오는 이정우와 윤혜리, 박재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120㎞로 달리는 차량이 전복됐는데, 다들 멀쩡한 것으로 보였다.
이에 차량에서 나온 일행을 부축하며 물었다.
“다들 안 다쳤어?!”
“뒤따라오던 사람들은?”
이정우는 차량 밖으로 나오자마자 일행의 안부부터 물었다.
이런 와중에도 다른 사람부터 걱정하고 있다.
멀쩡한 것 같아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뒤에서 좀비들 처리하고 있어요.”
“빨리 가서 돕…….”
그 순간, 감빛으로 물든 안개가 검게 물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림자?’
설마 하는 마음에 스킬 감지를 사용하며 허공을 쳐다봤다.
“감지.”
저 멀리, 자주색으로 보이는 거대한 무언가.
감마 변종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