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32화
전완수의 말에 설여원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답이 나올 때까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답이 없으니 몸으로 부딪치는 것.
그것이 한발 앞서가는 사람과 머무르는 사람의 차이였다.
설여원과 전완수 사이로 정적이 이어지는 찰나, 기숙사에 있던 박재우와 황덕록이 걸어 나왔다.
“왔나? 안 들어오고 뭐하노.”
박재우가 두 사람을 쳐다보며 묻자, 설여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 숙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황덕록은 눈살을 찌푸리며 전완수에게 물었다.
“설마, 전완수 니…….”
황덕록이 의심을 눈초리를 보이자, 옆에 있던 박재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원이한테 고백했나?”
“아니야 미친놈아!”
전완수가 대뜸 성을 내자, 박재우는 눈썹을 긁적이며 물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화를 내고 그러냐. 그럼…… 여원이 왜 똥 씹은 표정인데?”
“허허, 이 친구 말이 좀 심하네.”
“응?”
“설령 내가 고백했더라도, 그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되는 것처럼 얘기한다?”
“아, 미안. 너한테 고백받는 입장으로 감정 이입해 버렸네.”
박재우가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하자, 설여원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완수는 한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박재우의 의도는 알겠지만, 내심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덕록은 기숙사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됐고, 다들 들어와. 우리도 저녁 먹어야지.”
박재우와 황덕록은 설여원과 박재형이 돌아오면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둔 건 물론이고, 그들이 먹을 밥상까지 차려둔 상태였다.
설여원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전완수는 설여원의 얼굴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원래 배가 고프면 생각도 많아져. 밥부터 먹자.”
“…….”
“밥 먹고 나서 재형이한테 무전치고, 그 뒤에 광안리로 출발하자. 그럼 됐지?”
박재형을 걱정하느라 안색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전완수의 생각은 빗나갔지만, 설여원은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설여원은 한발 앞서 기숙사로 향하며 생각했다.
모두가 주인공의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명품 조연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설여원은 이러한 생각을 하며 기숙사로 향했다.
* * *
[남은 시간: 3분]
눈앞으로 떠오른 홀로그램을 확인하고, 한 차례 숨을 가다듬으며 주변을 살폈다.
끄어…… 어어…….
죽지 못한 좀비들의 질척한 울음소리가 광안리를 적시고 있었다.
오른쪽을 봐도, 왼쪽을 봐도, 온통 피범벅의 세상.
해안가에 철썩이는 파도 속에, 좀비들의 선혈이 뒤섞여 붉은 물결이 철썩이고 있었다.
난 몇 번이고 심호흡을 반복하며 폭주하는 아드레날린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신을 다잡기 위해 차디찬 바닷물에 들어가 이성의 끈을 붙잡기를 반복했다.
급가속을 쿨타임마다 사용한 탓인가?
아니면 좀비들을 학살해서?
그것도 아니면…… 광폭화의 효과가 2.5배로 증가한 탓일까?
정신력 수치가 330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광폭화를 사용한 상태에서 이성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았다.
싸움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희열이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그럴 때마다 싸움을 멈추고 이성을 다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40분이 넘어설 무렵에는 도저히 자의로 버티는 게 힘들어서, 바닷물에 몸을 던졌다.
11월의 바다는…… 좀비화를 사용한 상태에서도 온도를 느낄 수 있었다.
좀비화로 인해 비닐 옷을 입고 차가운 물 속에 들어온 느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통증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차갑다는 건 인지할 수 있었다.
발끝에서 시작된 차디찬 감촉은 정수리까지 닿아 이성을 붙잡도록 도와주었다.
키리리릭…… 키에엑!
해안가에서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알파2 한 마리.
일전에 수성 호텔 옥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좀비와 변종들은 물을 보면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신체에 해가 되는 요소는 없지만, 낯선 감촉에 당황하는 것으로 보였다.
난 알파2의 얼굴을 노려보며 얘기했다.
“빨리와 새끼야.”
좀비화의 남은 시간은 2분.
좀비화가 풀리기 전에 저놈을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물 밖으로 나가면…… 두근거리는 희열을 잠재울 자신이 없었다.
키에에에에엑!!
좀비화의 남은 시간이 1분에 접어든 순간, 놈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첨벙! 첨벙! 첨벙!
기다란 팔다리를 이용해 소금쟁이처럼 달려드는 알파2.
놈은 어깨를 비틀더니, 내 얼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팔을 뻗었다.
3m에 달하는 알파2의 팔을 붙잡고, 있는 힘껏 물속으로 잡아당겼다.
첨벙!!
놈은 균형을 잃고 그대로 물속에 잠기는 모습을 보였다.
[남은 시간: 18, 17, 16…….]
눈앞의 남은 시간을 확인하고, 알파2의 뒤통수를 향해 쉴 새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퍼버버버버버벙!!
바닷물을 깨부순다는 생각으로 이 악물고 주먹을 내지르자, 오래 지나지 않아 알파2의 으깨진 뇌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변종을 처리했습니다. 카운트 100점이 주어집니다.
-좀비화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동시에 좀비화의 지속 시간이 끝났다는 문구가 떠오르고,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왼쪽 관자놀이에서 시작된 저릿한 통증이 오른쪽 관자놀이를 관통했다.
고막을 찌르는 이명과 아찔한 두통으로 인해 상체를 숙이는 찰나, 전신으로 퍼지는 오한에 털끝이 곤두섰다.
바닷물이 너무 차가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에 죽을힘을 다해 모래사장으로 달렸다.
전신이 오들오들 떨리고, 윗니와 아랫니가 부딪치며 절로 따다닥 소리가 나왔다.
좀비화가 풀리고 기절하지 않은 건 좋지만, 아무래도 저체온증에 걸린 것 같다.
도저히 숙소까지 돌아갈 힘이 없어서, 오른손을 덜덜 떨며 레그홀스터에 넣어둔 무전기를 꺼냈다.
“아…….”
바닷물이 잔뜩 들어간 무전기.
작동할 턱이 없었다.
집에 가야 하는데, 돌아갈 방법이 없다.
사지는 덜덜 떨리고, 동상이라도 걸렸는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쓰러지다시피 모래사장에 엎어졌다.
패시브 스킬 재생이 동상에도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다른 수가 없었다.
10분간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부러진 뼈는 잘만 붙더니, 근육통과 감기에는 효과가 없는 건가?
어떡하지?
숙소까지 굴러가야 하나?
갈등하고 있는 찰나, 우측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날아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날아드는 빛에, 난 하관을 덜덜 떨며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아!”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목소리.
고막에 문제가 생겼는지,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지 않았다.
누군지 몰라도, 좀비가 손전등을 들고 다니진 않을 터.
난 움직이지 않는 오른팔에 힘을 주어 바닥에 놓인 카타나를 간신히 붙잡았다.
문득, 타이타닉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디카프리오를 떠나보내고 호루라기를 향해 미친 듯이 헤엄치던 케이트 윈슬렛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불빛이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칠까 봐, 젖 먹던 힘을 다해 카타나를 흔들었다.
그러자 멀게만 느껴지던 불빛이 빠르게 가까워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재형아!”
두 눈에 들어오는 반가운 얼굴.
설여원이었다.
난 푸르죽죽한 입술을 간신히 움직였다.
“추…… 추…… 추워.”
“담요! 담요 가져와!”
곧 전완수와 박재우, 황덕록의 얼굴이 순차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전완수는 몇 겹의 담요를 내게 덮어준 뒤, 공주님 안기로 번쩍 들어 올렸다.
전완수가 갈팡질팡하자, 설여원은 박재우와 황덕록에게 얘기했다.
“시체들, 시체들 모아! 저체온증 걸리기 전에 불부터 지펴!”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시체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좀비들의 시체를 땔감으로, 커다란 모닥불을 만들었다.
* * *
따뜻한 불을 쬐며 1시간을 앉아 있었다.
서서히 온기가 돌기 시작하고,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두 팔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전완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물잔을 건네며 물었다.
“무전기는 폼이냐? 왜 연락을 안 받아?”
대답 대신 물에 젖은 무전기를 보여주었다.
황덕록은 무전기의 상태를 살피더니,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죽었네.”
“못 살려?”
“죽은 사람 살리는 의사 봤어? 기계도 똑같아. 완전히 맛이 가면 거기서 끝이야.”
전완수는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혀를 끌끌 차며 얘기했다.
“난장판이구먼.”
말 그대로 난장판.
사방에 좀비들이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창가에 널브러진 시체도 보이고, 찢어진 살점과 팔다리, 초점을 잃은 머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설여원은 마른침을 삼키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정말 10만이 넘는 좀비를 잡은 거야? 혼자?”
“광폭화까지 사용하니까 되더라.”
“광란 쓴 거 아니지?”
“간신히 참았어. 한계 돌파 한 번 더 해야 안전할 것 같아.”
한계 돌파 5단계에 접어들면 정신력이 430이 될 것이다.
그럼 바닷물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성을 붙잡을 수 있겠지.
그러자 설여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기 있는 좀비들 혼자 정리했으면…… 좀비 카운트 10만 넘은 거 아니야?”
“몸이 얼어서 홀로그램 확인할 겨를이 없었어.”
“아.”
“이제 확인해야지.”
전완수가 건네준 따뜻한 물을 마시고, 천천히 손을 뻗어 시야의 우측 상단에서 점멸하는 노란 불빛을 눌렀다.
[플레이어 정보]
-캐릭터 이름: 에덤 화이트
-능력: 강화
-한계 돌파 4단계
*한계를 돌파할 때마다 기존 모든 스탯이 1.3배 증가합니다.
*다음 한계 돌파에 필요한 포인트는 12000입니다.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114213/100000(환전 가능)
-남은 포인트: 2207
-스킬: 좀비화, 급가속 Lv.MAX, 감지 Lv.5, 하울링 Lv.5, 광폭화 Lv.MAX
-패시브 스킬: 재생, 광란(4/10)
-특수 스킬: 연격
눈앞으로 떠오른 플레이어 정보를 보고, 망설임 없이 한계 돌파를 시도했다.
-한계 돌파가 5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선택지가 제공됩니다.
-근력 50 증가 or 광란의 이성 유지.
그 순간, 눈앞으로 낯선 문구가 떠올랐다.
선택지를 제공한다고?
지금껏 이런 경우는 없었다.
근력 50과 광란의 이성 유지라니.
어떡하지?
둘 다 탐나는 조건이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홀로그램을 살피며 물었다.
“둘 중 선택해야 하는 거야?”
“어.”
“이건…… 당연히 광란의 이성 유지 아니야?”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전완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의. 근력 50이 아까운 건 사실이지만 시급한 건 광란이니까.”
나도 일행의 의견에 동의한다.
선택지처럼 보이지만,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성이 유지된다면, 광란의 중첩 발동을 막을 수 있다.
중첩 발동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구미에서 몸소 체험하지 않았는가?
언젠가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남은 6번을 한 번에 사용할지도 모를 일이다.
황덕록과 박재우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얘기했다.
“이건 선택이 아니네.”
“홀로그램 새끼, 답정너고.”
일행도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지체할 필요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플레이어 정보]
-캐릭터 이름: 에덤 화이트
-능력: 강화
-한계 돌파 5단계
*한계를 돌파할 때마다 기존 모든 스탯이 1.3배 증가합니다.
*다음 한계 돌파에 필요한 포인트는 24000입니다.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14213/100000
(좀비 카운트가 10만으로 고정됩니다.)
-남은 포인트: 207
-스킬: 좀비화, 급가속 Lv.MAX, 감지 Lv.5, 하울링 Lv.5, 광폭화 Lv.MAX
-패시브 스킬: 재생, 광란(4/10)
-특수 스킬: 연격
*좀비화의 능력치 반감 페널티 ‘과부하’가 사라집니다.
*광란 발동 시 이성이 유지됩니다.
한동안 큰 변화가 없더니, 플레이어 정보에 변화가 찾아왔다.
좀비 카운트의 최대 수치가 10만으로 고정되었다.
다음 한계 돌파에 필요한 포인트는 2만 4천.
10만 카운트를 3번이나 채워야 가능한 수치.
이는 스킬 레벨을 높일지, 기다렸다가 한계 돌파를 시도할지, 지금보다 유동적인 선택을 유도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한계 돌파의 결과는 유익하지만, 과정이 점점 어려워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무리 골머리를 앓아도 시스템은 뜯어고칠 수 없다.
의문을 품는 건 쉽지만, 해결하는 건 어렵다.
그러니 상황을 받아들이고, 지금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내리면 된다.
그러다 문득, 콧방귀가 절로 나왔다.
지금껏 최악의 선택만 피해가던 내가, 어느새 최선의 선택을 고민하는 입장이 되었다.
심적인 여유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