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25화
생각해 보니 버스를 타고 들어갈 때도, 삼각뿔을 밀어내는 불투명한 막이 생성되었다.
그 불투명한 막이 전파를 차단하는 건가?
마른침을 삼키며 출입구를 향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또다시 불투명한 막이 생성되며 작은 빈틈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따끔거리는 통증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마치 공상과학영화처럼, 만화에서 나오는 AT 필드 같다.
어디, 한번 억지로 뚫어볼까?
카타나를 말아쥐고, 있는 힘껏 자기장을 가격했다.
파지지직-! 지지직!
칼끝으로 불똥이 튀더니,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카타나 내구도: 92%, 86%, 62%, 38%…….]
눈 깜박할 새에 줄어드는 카타나의 내구도를 보고,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그동안 흠집도 생기지 않던 카타나의 칼날이, 시큼한 냄새를 풍기며 녹아내린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칼끝에서 연거푸 스파크가 튀었다.
멍한 표정으로 한참을 바라보자, 5분이 지난 뒤에야 정전기가 사라지고 내구도가 복구되기 시작했다.
자기장을 힘으로 뚫으려고 하면 더욱 강한 전류를 방출하는 건가?
아니, 이건 전류도 아니다.
지구상의 기술이 아니니, 이걸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블랙홀에 닿은 물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일그러지고 사라지는 것처럼, 마치 카타나를 흡수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즈즈즈즈즈-
뒤이어 좌우로 활짝 열려 있던 문이 다시금 닫히기 시작했다.
열려 있어도 들어갈 수 없는데, 굳이 여닫을 필요가 있나?
별다른 수가 없으니, 지금은 일행이 나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그렇게 1시간 30분 정도 밖에서 기다렸을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다시금 열리고, 불투명한 막을 지나 이정우와 곽찬혁이 걸어 나왔다.
난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람들은 어때요. 안은 안전해요?”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자, 이정우는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사람들은 안전해. 내부 상황도 예상보다 훨씬 괜찮고.”
“아크 내부는 어때요? 게임에서도 아크 내부는 확인한 적이 없어서…….”
“재형아.”
이정우는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양손을 들며 얘기했다.
“진정해. 너 지금 너무 흥분했어.”
티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흥분한 모습을 보였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내가 아크에 들어가지 못해서 불안한 게 아니었다.
내부로 들어간 일행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혹여나 텃새가 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정우의 옆에 있던 곽찬혁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너희들은 내가 보증할 수 있어.”
곽찬혁의 말에 조금은 안도감이 들었다.
곽찬혁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을 이었다.
“아 참, 그보다 재형이 너 보고 싶다고 난리인 사람들이 있어.”
곽착현이 아크 내부를 향해 손을 흔들자, 박성훈과 이병훈, 김석원이 걸어 나왔다.
이병훈과 김석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시울을 붉히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오랜만이에요. 건강해서 다행입니다.”
이병훈과 김석원.
실개천 너머에서 생포한 탈영병들이었다.
부모님의 안부를 걱정하며 탈영한 이들.
박성훈과 함께 부산으로 보내며 내심 걱정이 많았다.
혹여나 탈영했다는 사유로 두 사람을 내칠까 봐 말이다.
다행히 박성훈이 두 사람을 포용한 모양이다.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두 분도 건강해서 다행입니다.”
그러자 뒤에 있던 박성훈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아크에 있는 사람들이 박재형 씨 보고 싶다고 난리에요.”
“저를요?”
“제가 얘기 많이 했거든요. 경산에 있는 파티 소리결에 대해서.”
“아…….”
“플레이어들은 파티 목록을 볼 수 있다면서요? 왜 얘기 안 해줬어요? 소리결이 랭킹 1위라는 거.”
랭킹 1위, 파티 소리결.
그들이 왔다는 소식에 아크에 있던 플레이어들은 부푼 기대와 궁금증을 안고 있다고 한다.
또한 파티 황금동이 소리결과 공격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소식에, 황금동 쉘터의 생존자들도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한다.
멋쩍은 마음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때는 저희도 시스템을 잘 몰라서, 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소리결이 왔다는 말에 다들 들떴어요. 그런데…… 하필 박재형 씨가 못 들어오네요.”
박성훈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곽찬혁은 상황을 지켜보더니, 헛기침과 함께 얘기했다.
“일단 궁금한 게 많을 거야. 회포는 조금 있다가 풀고, 아크에 대해서 알려줄게.”
“아, 네.”
곽찬혁은 본인이 직접 경험한 아크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아크는 부산 남구에 생성되었다고 한다.
생성이란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곽찬혁은 이마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나도 부산 생존자들한테 들은 거야. 안개가 퍼진 새벽에, 부산 남구 신선로를 따라서 갑자기 이런 벽이 생성됐다고 하더라고.”
곽찬혁은 등 뒤에 있는 5m 높이의 벽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부산 남구, 신선로 밑에 위치한 용호동과 용당동 일부.
이곳을 삶의 터전으로 이룬 생존자들은 일생 최고의 특혜를 부여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크로 지정된 특권 지역이네요.”
덤덤하게 얘기하자, 곽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갑작스레 생성된 거대한 벽으로 인해, 초기에는 이곳의 생존자들도 당황했다고 한다.
하지만 바깥에서 일어난 좀비 사태를 보고, 상황파악에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난 곽찬혁의 설명을 듣고, 의구심이 들었다.
“용호동에는 플레이어가 없었어요?”
“지금 그 얘기하려고 했어. 용호동에 있던 일반 생존자는 몰라도, 용호동에서 시작한 플레이어들은…… 결과가 썩 좋지 않았던 것 같아.”
“왜요?”
“대부분 타 죽었어.”
“네?”
타 죽어?
카타나가 자기장에 닿자마자 녹아내린 것처럼, 플레이어가 아크 입장권을 소지하지 않은 상태로 들어서면…… 가루가 되는 모양이다.
곽찬혁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본가를 확인하는 메인 퀘스트를 받은 플레이어는 시작과 동시에 아크 입장권을 얻어서 괜찮았는데, 퀘스트 내용이 다른 사람이 있었나 봐.”
“그런 사람들은 타 죽은 거예요?”
“그렇지. 그리고…… 타 죽은 사람들의 특징이 좀 비슷하더라고.”
“특징이 뭡니까.”
“평소 배타적인 성향의 사람들이었대. 그런 사람들은 가족의 안부가 우선이 아니니, 다른 목적이 메인 퀘스트로 설정된 것 같아.”
“그럼…….”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살인이나 남에게 해를 가하는 게 삶의 목적인 사람도 있다는 거지.”
곽찬혁의 말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러니까…… 플레이어들에게 생성되는 메인 퀘스트의 내용이 전부 다르다는 말이 아닌가?
곽찬혁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인데, 전쟁이 발발한다면 재형이 넌 뭐가 가장 소중할 것 같아?”
“당연히 가족이죠.”
“그렇지, 그런 플레이어들은 부모님이나 본가를 확인하라는 메인 퀘스트가 생성되지만, 그게 아닌 사람들은 다른 퀘스트가 생성되는 것 같아.”
곽찬혁의 설명 덕에, 복잡하던 머릿속이 정리되었다.
난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얘기했다.
“제가 지금껏 만난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부모님의 안부를 확인하거나, 본가를 확인하라는 퀘스트를 받았어요.”
“운이 좋았던 거야. 그만큼 좋은 플레이어들을 많이 만났다는 거니까.”
“…….”
“반면에 대장 좀비나 변종의 숫자도 많았잖아? 그만큼 메인 퀘스트의 내용이 다른 플레이어도 많았다는 거지.”
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럼…… 지금 아크 내부에는 플레이어가 없어요?”
“있어. 생존한 플레이어들이 의기투합해서 생존자들을 하나로 모았다고 하더라고. 물론 생존자들 사이에도 쓰레기는 있었고, 그래서 내부 분열도 있었나 봐.”
“결과는 어떻게 된 거예요?”
“아크가 안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분열을 일으킨 쓰레기들은 전부 밖으로 쫓아냈다고 하더라고.”
“현재 생존자는 얼마나 됩니까?”
“용호동이랑 용당동의 생존자가 1,200명.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생존자들까지 전부 합치면 대략 2,000명 될 거야.”
2,000명이나 된다고?
사람이 많아서 놀란 것보다, 식량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다.
이 부분을 묻자, 곽찬혁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라스트아크에 있던 알약 기억나?”
“알약이요? 포만감 알약 말씀하시는 거예요?”
“게임에서는 먹는 사람 거의 없었잖아? 그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
포만감 알약.
말 그대로 허기를 달래주고, 각종 영양성분이 담긴 알약이었다.
게임에서는 파티원의 정신건강과 체력 증대를 위해 식량을 구해서 섭취하는 게 훨씬 이득이었지만, 현실은 다르다.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상황에, 포만감 알약은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에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포만감 알약이 존재해요?”
“아크 내부에 있어. 남쪽 끝에 오륙도 선착장이라고 있는데, 그 앞에 알약 자판기가 있더라고.”
“구매 조건은 없어요? 그냥 막 뽑으며 계속 나와요?”
“계속 나와.”
미친?
그럼…… 여기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갈 필요가 없잖아?
흔히 말하는 존버(최대한 버티기)만 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말이 아닌가?
얼빠진 표정으로 곽찬혁을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물론 식수는 필요해. 그래서 밖에 나가서 식수를 구하거나, 바닷물을 담수화해서 마시고 있어.”
“아니 그럼…… 굳이 게임을 클리어할 필요가…….”
“물론 영원한 건 없어.”
“네?”
곽찬혁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알약은 무제한으로 나오지만, 자판기가 유지되는 게 무제한이 아니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설명을 바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곽찬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자판기 위에 남은 시간이 표시되더라고.”
“얼마나 남았어요?”
“앞으로 75시간.”
75시간?
그럼 3일 후에 자판기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닌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쳐다보자, 곽찬혁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부산 생존자들 말로는 첫 번째 에피소드 클리어할 때 유지시간이 추가됐다고 하더라고.”
“에피소드를 클리어하면 자판기 유지시간이 늘어난다는 말이에요? 얼마나요?”
“정확한 기간은 모르겠지만…… 두 달에서 석 달 사이로 주는 것 같아.”
자판기가 유지되는 시간은 길어봐야 두 달에서 석 달 사이.
안개가 퍼진지 다섯 달이 넘었으니, 대략 에피소드 하나에 석 달 가까운 시간이 주어지는 모양이다.
난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알약 자판기가 사라진다는 건…… 사실상 아크의 힘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선로를 따라 형성된 바리케이드의 힘도 사라질 가능성이 크다.
에피소드를 클리어하지 않으면, 결국 아크도 평범한 쉘터로 전락하는 것이다.
곽찬혁은 홀로그램을 확인하더니,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너희도 확인했지? 최근에 중국 파티 없어진 거.”
“네.”
“자판기 유지시간이 별로 안 남아서, 어쩔 수 없이 에피소드를 진행한 것 같아.”
곽찬혁의 말을 듣고 이정우를 쳐다봤다.
이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저번에 내가 했던 얘기 기억나?”
“아크의 비밀을 밝히면 대공습이 시작되는 거요?”
“맞아, 알약 자판기 옆에 지하로 내려가는 벙커 입구가 있더라고. 방금 내려갔다 오는 길이야.”
“거기에 아크의 비밀이 있어요?”
이정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입을 열었다.
“아크는 땅 위에 있는 쉘터가 아니야.”
“그럼 뭐예요.”
“아무래도…… 수중 도시 같아.”
수중 도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쳐다보자, 이정우는 눈썹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벙커 내부에 벽화가 있더라고.”
“하…… 들어가서 보고 싶은데.”
“그래서 머리를 썼지. 자.”
이정우는 들고 있는 휴대폰을 내게 건네주었다.
설마 하는 마음에 이정우를 쳐다보자, 그는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수신이 안 터져도 동영상은 찍을 수 있잖아?”
지체할 필요 없이 이정우가 찍어온 영상을 확인했다.
높이 4m에 달하는 돔 형태의 지하 벙커 입구.
그 내부에 빼곡하게 그려진 벽화를 보고,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눈부신 섬광처럼 그려진 존재가 있고, 그를 숭배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은 모르겠지만, 난 섬광이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에스파디아를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