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213화 (213/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13화

용흥동과 양학동 사이에 위치한 동지여자고등학교.

그곳으로 올라가는 언덕은 좀비들의 시체로 길목이 막힌 상태였다.

정진영은 보호대의 내구도를 확인하더니, 뒷좌석에 있는 결인들에게 얘기했다.

“걸어가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버스에서 내려 주변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설여원은 무전기부터 들더니, 초조한 목소리로 박재형을 불렀다.

“재형아, 재형아 들려?”

아무리 기다려 박재형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설여원은 들고 있던 무전기를 윤혜리에게 건네며 얘기했다.

“네가 가지고 있어. 재형이 대답 들리면 얘기하고.”

“네? 아, 네!”

설여원은 곧장 동지여자고등학교의 담벼락을 넘었다.

운동장에도 즐비한 좀비들의 시체.

뒤이어 정진영과 전완수, 최현, 윤혜리까지 담벼락을 넘어왔다.

설여원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더니, 세차게 혀를 차며 물었다.

“완수야, 좀비들 보여?”

“안 보여. 보이는 건 없는데 소리는 들리지 않아?”

은은하게 들리는 좀비들의 음성.

설여원은 뒤에 있는 정진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오빠, 여기 몸 숨길 수 있는 건물 없어요?”

“이 언덕 따라서 학교만 4개야. 언덕 끝에 있는 학교에서 좀비들 음성 들리는 것 같은데?”

“가죠.”

설여원은 망설임 없이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동지여자고등학교의 옆으로 동지여중이 있고, 그 너머로 동지고등학교와 동지중학교가 있었다.

정진영의 말대로 4개의 학교가 붙어 있는 구조.

동지고등학교에 다다르자, 산처럼 쌓인 좀비들의 시체 너머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설여원은 뒤에 있는 일행에게 정지 신호를 보내더니, 정면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천리안.”

-2분간 원하는 지점에 좌표를 찍어 지형을 살필 수 있습니다.

-천리안을 개방한 사용자가 이동 시, 천리안은 사라집니다.

-재사용 대기시간은 10시간입니다.

설여원의 동공이 하얗게 물들더니, 석고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대략 10초 정도 지났을까? 설여원은 두 눈을 껌벅이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찾았어?”

정진영이 묻자, 설여원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재형이는 안 보여요. 하지만 운동장에 있는 좀비들이 건물로 들어가고 있어요. 내부에 재형이 있는 거 같습니다.”

“몇 층?”

“거기까진 몰라요. 더 늦기 전에 들어가죠.”

설여원은 한발 앞서 동지중학교로 향했다.

결인들도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며 황급히 설여원의 뒤를 따랐다.

크어어어어!!

공명 좀비는 없지만,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물들이고 있었다.

운동장에 들어찬 좀비들만 족히 3,000마리.

혼자서는 상대하기 버거운 숫자지만, 지금은 플레이어만 5명이었다.

결인들은 노도와 같이 달려들어 좀비들의 숫자를 줄여 나가기 시작했다.

두개골을 깨뜨리고, 사지를 절단 내며 광기에 찬 들짐승처럼 가차 없이 좀비들을 처리했다.

가장 소극적인 윤혜리도, 지금은 양손에 손도끼를 쥐고 장작을 패듯이 좀비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이쪽!”

설여원이 동지중학교 입구에서 소리치자, 결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구로 달려왔다.

카하악!! 하악!!

그러자 입구에서 튀어나오는 좀비 한 마리.

쩍!

설여원은 도끼눈을 뜨며 좀비의 안면에 주먹을 내질렀다.

좀비의 안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일그러지더니, 그대로 고꾸라지는 모습을 보였다.

크어어어어!!

그러자 건물 계단에 들어찬 좀비들이 입구로 방향을 틀어 결인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앞뒤로 달려드는 좀비들.

두려울 법도 한데, 결인들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수십, 수백 번 겪어본 상황.

당황은커녕 상황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뒤!”

전완수가 소리치자, 너도나도 각자의 경계 방향을 얘기했다.

“내가 완수 옆에 볼게!”

“제가 내부 계단 확인할게요!”

“복도는 내가!”

결인들에게 달려드는 좀비들은 불나방이나 다름없었다.

불나방의 날개가 찢어지고, 머리가 녹아내리고, 전신이 일그러지듯이, 좀비들은 머리가 터져 나가고, 사지가 잘려 나갔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지금의 결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근력 수치가 20이 넘는 괴물이니까.

그들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좀비들의 공세를 버텨냈다.

3,000의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대략 15분 만에 좀비들은 씨가 말랐다.

설여원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가에 묻은 좀비들의 혈흔을 옷소매로 닦아냈다.

뒤이어 정진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괜찮아?”

“네, 형은요?”

일행의 대답을 듣고, 정진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올라가자.”

중앙 계단에 널브러진 좀비들의 시체를 발로 밀치며 위로 올라갔다.

이윽고 3층에 다다르자, 저 멀리 미세하게 움직이는 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설여원은 카타나를 말아쥐며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재형아!”

저 멀리 3층 복도 끝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은 박재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박재형은 카타나를 손에서 놓은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설여원이 그의 앞으로 쓰러지듯 다가가자, 박재형은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설여원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이번엔…… 나도 반박 못 하겠다.”

“……뭐?”

“X나 무리한 거 인정.”

박재형은 실소를 터뜨리며 기침을 토했다.

얼마나 지쳤으면 양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농담할 기력이 남았는지, 히죽거리고 있었다.

설여원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대뜸 박재형의 팔뚝을 때리며 외쳤다.

“걱정했잖아! 청개구리 같은 놈아!”

“아아…… 아파.”

박재형은 허탈하게 웃으며 옆으로 눕는 모습을 보였다.

설여원은 연신 한숨을 내쉬고, 뒤따라온 일행도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전완수는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체력 회복제는? 효과 좀 봤냐?”

“2개로는 부족해. 이번엔 진짜 죽는 줄 알았다.”

“어휴…… 또 좀비 카운트 욕심내지 그러냐?”

“아 싫어. 너희 다 가져가.”

박재형의 애교 아닌 애교에 다들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정진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무전기를 들었다.

“상황 종료. 양학동 상황 종료.”

치지직- 치직.

-재형이는? 재형이 찾았어?

무전기로 들려오는 이정우의 목소리.

정진연은 박재형의 모습을 곁눈질로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찾았어. 욕조에 따뜻한 물 좀 받아줘. 가자마자 씻겨야 할 것 같다.”

정진영의 말에 옆에 있던 결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 * *

일행의 부축을 받아 간신히 버스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뒤이어 윤혜리는 울상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왜 대답 안 해요!”

“……뭐?”

“무전기요! 걱정했잖아요. 진짜!”

“아니…… 바로 앞에 좀비들 있는데, 대답할 시간이 어디 있어.”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하자, 윤혜리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울 필요까지는…….

어휴, 모르겠다.

지금은 너무 힘들다.

난 버스에 대(大)자로 누우며 정진영을 불렀다.

“진영이 형.”

“왜.”

“여기 동지여고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왜?”

“아니 그냥…… 형 본가에서 가까운 것도 아니고, 잘 보이는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고 있나 해서요.”

“이 상황에 그게 궁금하냐?”

정진영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사실…… 다들 내 걱정하는 게 부담스러워서, 은근슬쩍 화제를 돌린 것이다.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정진영을 쳐다보자, 그는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고등학생 때 소개받은 애가 이 학교 다녔다. 됐냐?”

“역시.”

엉큼한 눈으로 정진영을 쳐다보자,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이 녀석 표정 봐라? 이거 아직 농담할 체력이 남았구먼?”

그러자 버스에 탑승한 모든가 웃어젖혔다.

덩달아 나도 웃음이 터졌다.

사람의 감정은 옆 사람에게 전파된다고 한다.

이는 웃음도 마찬가지였다.

우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쉘터로 돌아갈 수 있었다.

* * *

저녁상을 차릴 체력도 없어서, 다들 통조림으로 허기만 달래고 잠자리에 들었다.

기존 생존자들은 영일만항의 생존자들과 동침이 어색할 법도 한데, 다들 기진맥진한 나머지 의구심조차 품지 않았다.

오늘은 푹 쉬고, 설명은 내일 들어도 될 것이다.

이윽고 태양이 밝아올 무렵, 난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눈을 뜰 수 있었다.

찢어지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켜자, 온몸이 뻐근한 것을 느꼈다.

묵직한 중력이 어깨를 짓누르는 느낌.

근육통인가?

정신은 몽롱하고, 라꾸라꾸에서 일어날 힘이 없었다.

“일어났어?”

그 순간,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자, 전완수가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전완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쌍꺼풀진 눈으로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너 내 옆에서 잤냐?”

“추워서.”

전완수와 딱 붙어서 잤다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자,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에 졸음이 달아났다.

“벌써 일어났어? 좀 더 자도 되는데.”

부엌에 들리는 이민정의 목소리.

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얘기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민정 이모.”

“좀 더 자. 밥 되면 깨워줄게.”

“괜찮아요. 제가 도울 일은 없어요?”

머리를 긁적이며 다가가자, 이번엔 부엌 바닥에 앉아 있던 김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리는 우리한테 맡겨요.”

“아…… 다들 일찍 일어났네.”

“평소 기상 시간 생각하면 일찍은 아니죠?”

“다들 어디 갔어? 안 보이네?”

“바깥 정리하고 있을 거예요.”

“영일만항 생존자들도?”

“네, 다 같이 친해질 겸?”

김희연의 대답을 듣고 찌뿌드드한 몸을 풀며 거실에 놓인 무전기를 들었다.

“아아, 들리십니까? 제 목소리 들리는 분?”

치지직- 치직.

-어이구, 재형 학생 일어났나?

무전기로 들려오는 이덕배의 목소리.

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허허, 피비린내가 진동하는데 좋은 아침인가?

좀비 시체를 치우고 있는 건가?

머리를 긁적이며 현 위치를 물었다.

“덕배 아저씨 어디에요?”

-아파트 단지. 단지 내에 있는 좀비 시체 수습하고 있어.

“혹시 정우 형은 어디 있는지 아세요?”

-아마 죽도동으로 갔을 거야. 거기 있는 좀비들 정리한다고 2시간 전에 이동했어.

2시간 전?

만약 살아 있는 좀비가 있으면 어쩌려고?

죽도동이란 말에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지금 정우 형이랑 연락돼요?”

-거리가 멀어서 신호가 안 터져. 잠시만 기다려봐.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기에, 소파에 앉아 바닥에 놓인 카타나와 건틀릿, 보호대의 상태를 확인했다.

치지직- 치직-

-아아, 재형 학생 들리나?

“네 말씀하세요.”

무전기로 들려오는 이덕배의 목소리.

-중간지점에 진영 학생이 있어서 건너 들었는데, 정우 학생 이제 돌아온다고 하네.

“왜 거기까지 간 거예요?”

-뭐라고 했더라? 좀비들 패시브 스킬? 그것들 시체 먹고 회복할 수 있다고 정리하러 간다고 나갔지.

아, 하긴.

좀비들의 패시브 스킬 시체 먹기.

인형극으로 다수의 좀비가 빈사 상태에 놓였으니, 살아남은 좀비들이 죽은 동료를 먹고 파괴된 신체를 회복할지도 모른다.

이정우는 이를 우려하여 아침 일찍 결인들과 함께 죽도동으로 이동한 모양이다.

뒤이어 입이 찢어지도록 하품하며 걸어 나오는 전완수.

그러자 부엌에 있던 김희연이 얘기했다.

“완수 오빠도 더 자요. 어제 불침번 서느라 4시간도 못 잤을 텐데.”

“슬슬 일어나야지. 박재형 잔소리 듣기 싫으면.”

아…… 불침번을 서고 누울 자리를 찾다가 내 옆으로 온 건가?

난 불침번 상의도 안 하고 오자마자 기절하듯 쓰러졌는데…….

멋쩍은 마음에 시선을 회피하자, 전완수는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이놈 또 눈치 보네. 그냥 좀 마음 편히 쉬어.”

“다들 움직이는데 어떻게 쉬어.”

“가만히 있으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냐?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서야 원.”

전완수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이민정이 얘기했다.

“완수 말이 맞아. 적당히 눈치 보면서 쉬는 것도 능력이야.”

“…….”

“아침 먹고 움직여도 되니까 쉬고 있어.”

이민정의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전히 휴식을 취하는 시간.

소파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그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움직여서 그런지, 쉬는 시간에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쉬는 게 일처럼 느껴지고, 일하는 게 쉬는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이런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 정말 열심히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