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11화
긴장하지 말자.
아무리 좀비들이 많아도, 지형 때문에 내게 동시에 달려들지 못한다.
난 그 자리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좀비를 쉴 새 없이 일도양단 냈다.
아무리 강한 파도가 들이쳐도 굳건히 버티는 등대처럼, 사방에서 세차게 밀려드는 좀비 웨이브를 버텨냈다.
하지만 시간은 좀비들의 편이었다.
50분간 잠시도 쉬지 않고 카타나를 휘두르자, 오른팔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어깨가 뻐근하고, 팔꿈치와 손목의 뼈마디가 녹슨 쇠처럼 삐거덕거렸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숨도 거칠고, 무엇보다 근육경련이 문제였다.
이에 황급히 자세를 바꿨다.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카타나를 왼손으로 쥐었다.
카하악! 하악!
정확히 성대를 노렸다고 생각했는데, 머리가 제대로 잘리지 않은 좀비가 배후에서 달려들었다.
왼손은 무기를 사용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 보니, 오른손만큼 원근감이 잡혀 있지 않았다.
이에 왼발을 축으로 재빨리 돌려차기를 가했다.
쩍!!
좀비의 덜렁거리던 머리가 일격에 떨어져 나갔다.
균형을 잡기 위해 다급히 하체를 낮추고, 접근하는 좀비들을 향해 계속해서 카타나를 휘둘렀다.
슬슬 한계에 다다른 숨.
폐활량이 부족해지자 시야가 아찔하게 흔들리고, 몸에서 열과 냉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이에 주머니에 넣어둔 전완수의 체력 회복제를 꺼냈다.
체력 회복제를 단숨에 목구멍 너머로 들이켜자, 폐부가 환기되며 두 눈이 번쩍 뜨였다.
효과 좋은데?
체력뿐만 아니라 근육의 피로도 풀어주는지, 오른팔의 뻐근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2차전 시작이다.
정신이 말아지니 시야도 맑아지는 기분.
두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시계가 대략 4m까지 늘어났다.
이에 버티기 싸움이 아니라, 이번엔 전진을 시도했다.
쉴 새 없이 좀비들의 목을 도려내며, 저 위에서 들리는 공명 소리를 따라갔다.
그어어…… 크어어어!
공명 좀비의 곁으로 다가가자, 허공을 향해 울부짖던 녀석은 목젖을 갈며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서걱!
눈앞의 공명 좀비를 처리하고, 황급히 무전기를 들었다.
“희연아! 공명 좀비 있는 곳으로 드론 옮겨!”
-네? 아, 네!
위이이이이잉-!
뒤이어 안개 밖의 드론이 어디론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어!!
뒤따라오는 좀비들을 무시하고, 은은한 빛을 따라 빠르게 산행을 감행했다.
뻑!!
얼마 가지 못해 오른발이 나무뿌리가 걸렸다.
아니, 걸렸다고 하는 게 옳은지, 내가 발로 차서 부러뜨렸다고 하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어서 그런지, 웬만큼 두꺼운 뿌리가 아니면 발길지에 부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모든 것을 밀어버리는 불도저처럼, 좀비와 수풀, 여러 장애물을 때려 부수며 공명 좀비에게 달려들었다.
그어어어…… 카학!!
드론이 있는 곳에 공명 좀비가 있었다.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안면에 주먹을 내질렀다.
뻑!!
왼손으로 공명 좀비의 두개골을 깨부숨과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던 카타나를 휘둘러 달려드는 좀비들의 성대를 그었다.
빨리, 더 빨리 움직여야 한다.
다른 공명 좀비가 빈자리를 대신하기 전에, 어서 경계선을 밀어내야 한다.
그어어어어…… 어어…….
좌측 100m 거리에서 들려오는 공명 소리.
감지를 사용해서 공명 좀비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공명 좀비들은 미동도 없이 허공을 쳐다보며 공명하기에, 감지에 발각되지 않았다.
기교가 통하지 않으면 정공법을 사용할 수밖에.
난 하체를 접으며 읊조렸다.
“가속.”
쾅!!
지면을 박차자, 진흙과 낙엽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뒤따라오던 좀비들은 움푹 파인 지면에 헛발질을 하며 넘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눈 깜박할 새에 100m를 돌파하고 눈앞의 공명 좀비를 카타나로 썰었다.
‘다음.’
청각을 예리하게 벼렸다.
귓가로 들리는 좀비들의 포효와 멧비둘기의 울음소리, 그 사이로 들리는 일정한 공명음.
‘위.’
다시금 지면을 박차며 가파른 경사를 뛰어올랐다.
쾅!!
갑작스레 눈앞으로 나타나는 거목.
다급히 방향을 틀었지만,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거목을 들이받았다.
땅은 질퍽하고, 시계는 짧고, 가속으로 인해 이동 속도만 대폭 증가하다 보니 장애물을 피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지끈 거리를 이마를 문지르며 눈앞을 살피자, 거목에 금이 간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문화재는 아니겠지.
나무와 씨름하고 있을 때가 아니니, 황급히 방향을 틀어 계속해서 위로 올라갔다.
그어어어…… 어어어…….
점점 가까워지는 공명 소리.
카타나를 말아쥐고, 있는 힘껏 공명 좀비를 향해 휘둘렀다.
공명 좀비가 고지대에 있다 보니, 머리가 잘리지 않고 허리가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어…… 카학! 하악!
놈은 뒤늦게 목젖을 갈며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오른발을 치켜들고 놈의 두개골을 짓밟았다.
퍽!!
안면이 함몰됐지만, 땅이 질어서 제대로 깨지지 않았다.
이에 카타나로 미간을 꿰뚫고, 후방을 살폈다.
뒤따라오는 좀비들의 발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육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좀비들이 내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치지직- 치직-
-오빠! 오른쪽 대각선 위에 공명 좀비요!
김희연의 목소리를 듣고 시선을 돌리자, 새까만 어둠 속으로 작은 점처럼 보이는 은은한 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드론의 불빛.
이에 황급히 우측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과정에 넘어지기도 하고, 굵직한 나뭇가지에 어깨와 복부, 가슴을 타격받기도 했다.
심지어 불룩 튀어나온 바위에 무릎을 부딪치기도 했다.
내 옷깃을 붙잡는 게 나뭇가지인지, 좀비의 손인지, 구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욕이 절로 나온다.
뭐가 보여야 제대로 뛰든 말든 하는데, 보이는 건 없고 장애물만 많으니 뛰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역시 이런 지형에선 먼저 나서서 처리하는 것보다 말뚝처럼 한 자리를 지키는 게 수월하다.
마음 같아서는 아까처럼 한 자리에 서서 좀비들이나 처리하고 싶다.
그어어어어…… 카하악!
드론의 밑에 있던 공명 좀비가 인기척을 느끼고 내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도끼눈을 뜨며 놈의 안면에 날아차기를 가했다.
빡!!
위압감은 사라지고, 불편한 지형으로 인해 짜증과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미사일이라도 한 발 떨어뜨리고 싶은 심정.
혹은 산불이라도 내고 싶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토록 많은 좀비들 단번에 처리하는 방법이.
두근-
그 순간, 심장에서 아찔한 충격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머리를 관통하는 저릿한 기운을 느꼈다.
동시에 귓가로 이명이 들리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난 헛숨을 토하며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 기분, 낯설지 않았다.
대구에 있을 무렵, 수성못을 정리하고 쉘터로 돌아가는 길에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두 눈을 껌벅이며 정면을 바라보자, 4m가 한계였던 시계가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했다.
설마.
띠링!
뒤이어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광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이게 무슨 말이야?
난 좀비화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놀란 눈으로 홀로그램을 살피자,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귀하는 강한 살인 욕구와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좀비화의 재사용 대기시간 동안 광란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단, 재사용 대기시간 중에는 광란이 중첩 발동되지 않습니다.
-사용 횟수 1회가 감소합니다.
눈앞으로 떠오른 홀로그램을 보고, 황급히 스킬 목록을 확인했다.
[광란]
-학살의 희열을 느낄 시 이성을 잃고 발동됩니다. 또는 사냥감을 향한 강한 집착을 보일 시 발동됩니다.
-정신력 스탯이 낮을수록 발동확률이 증가합니다.
-스킬이 발동되면 좀비화의 능력이 2배 증가합니다.
지금 다시 보니, 좀비화를 사용해야만 광란이 발동된다는 조건이 없었다.
그제야 광란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에스파디아가 내게 했던 말.
광란이 방파제라더니, 그 말의 의미를 알겠다.
버거운 순간에 발동되도록 만들어둔 방파제이자, 남용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스킬.
좀비화를 사용할 수 없는 재사용 대기시간 동안, 내가 목숨을 잃지 않도록 설정해 둔 스킬이었다.
그래서 재사용 대기시간 사이에도 광란을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해 둔 모양이다.
하지만 능력치 2배 효과는 좀비화를 사용해야만 적용되는 거 아닌가?
이러한 의문을 품자, 또다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좀비화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광란을 사용할 시, 신체 능력증가 효과는 받을 수 없습니다.
-단,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가능하며 통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패시브 스킬 재생의 효과가 대폭 증가합니다.
-좀비에게 물려도 감염되지 않습니다.
-좀비화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돌아올 때까지 광란이 유지됩니다.
양날의 검이나 다를 바 없는 스킬.
난 눈앞의 홀로그램을 닫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폐부에 들어찬 탁한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에스파디아의 배려는 고맙지만, 아무리 목이 말라도 바닷물을 마실 수는 없다.
수성못을 정리하고 황금동으로 돌아갈 때도, 분노를 느낀 순간에 안구가 검게 물들었다.
이번에도 분기를 억누르지 못하니 광란을 사용할 것이냐는 홀로그램이 떠오른 것이라 생각된다.
난 격해진 마음을 가라앉히며 카타나의 내구도를 살폈다.
[로그나이트 카타나: 42%, 43%]
자가 수리 기능이 있는 카타나.
들고 있던 카타나를 내려놓고 가방 속을 뒤적였다.
가방 깊숙한 곳에 넣어둔 체력 회복제.
추후 체력적 한계를 느끼면 내가 보유한 체력 회복제도 마시면 그만.
광란의 힘은 빌리지 않을 것이다.
가방에 있는 체력 회복제를 바지 주머니에 넣고, 다시금 카타나를 손에 쥐었다.
몇 시간이 걸리든, 이곳에 있는 좀비들은 내 힘으로 말살할 것이다.
치지직- 치직.
-오빠 뒤에 조심해요! 좀비들 그쪽으로 몰려가요!
크어어어어!!
무전기에서 김희연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좀비들의 포효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따라붙었다.
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한낱 길거리 좀비들.
아파트로 향하던 좀비들이 걸음을 돌려 내게 접근하고 있으니, 생존자들과 일행의 목숨은 안전하다.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고쳐먹었다.
좀비들은 위협이 아니라, 전부 카운트라고.
생각을 달리하자, 두근거리던 심장이 서서히 잠잠해지며 마음이 편해졌다.
초조하던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좀비들이 전부 포인트로 보이기 시작했다
여유는 생기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라는 말처럼, 마음에 여유를 되찾았다.
난 무전기를 들며 얘기했다.
“희연아, 여기서 좀비들 처리하고 있을 테니까 12시 되면 얘기해 줘.”
-네? 지금 오후 9시 50분밖에 안 됐는데요? 아직 2시간 10분이나 남았는데…….
“상관없어, 12시 되면 현이랑 혜리 데리고 양학동으로 넘어가.”
-아니 그게 무슨…….
치지직- 치직.
-12시 되면 양학동에서 인형극 쓰라는 거지?
무전기로 들려오는 최현의 목소리.
이에 덤덤하게 대답했다.
“어, 인형극은 하루 1회 사용이라고 적혀 있으니, 12시 기준으로 스킬 초기화 될 거야.”
-알았어. 넌 괜찮아?
“그때까지 카운트 좀 올려야겠어.”
-우리가 도와줄 일은?
“바리케이드 수리하고, 단지 내부에 살아 있는 좀비들 정리하고 있어. 111동에 완수랑 애들도 합류시키고.”
-알았어.
이젠 반박 대신 도와줄 일이 있느냐고 묻는 결인들.
일행이 보조를 맞춰준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모두가 내 의견에 따라주니, 복잡하던 머릿속도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난 카타나를 말아쥐며 마지막으로 김희연을 불렀다.
“희연아, 근처에 동굴이나 절벽 있으면 얘기해 줘.”
-동굴이나 절벽이요?
“사방이 뚫린 상태면 체력적으로 힘들어. 최대한 페이스 조절해야 돼.”
-아, 네! 드론 따라오세요!
위이이잉-!
머리 위의 드론은 양학산의 정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
어느새 발치까지 다다른 좀비들.
난 놈들을 처리하는 대신, 재빨리 방향을 틀어 드론을 따라 이동했다.
동화 속 피리 부는 소년처럼, 내 뒤로 수천 마리의 좀비가 목젖을 갈며 따라붙었다.
다만…… 이 동화 속 피리 부는 소년은 아름다운 연주로 사람을 홀리는 게 아니었다.
“따라와 이 개새끼들아!”
목청껏 욕설을 내뱉으며, 좀비들의 시선을 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