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208화
퉁! 퉁! 퉁!
“볼트 더 가져와!”
이덕배가 소리치자, 뒤에 있던 이민정은 커다란 통을 건네며 얘기했다.
“볼트 다 떨어졌어요! 대신 이거!”
휘발유가 가득 담긴 통이었다.
이덕배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담벼락 너머로 휘발유를 부었다.
크어어어어어!!!
카하아아악!! 하악!!
수천 마리의 좀비는 휘발유를 뒤집어쓰면서도 계속해서 담벼락에 달라붙었다.
좀비들의 시체가 쌓여 둔덕이 형성되고, 서서히 담벼락과 비슷한 높이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이덕배와 이현배, 최만석은 쉴 새 없이 휘발유를 들이붓더니, 주머니에 넣어둔 성냥에 불을 붙였다.
“다들 얼굴 가려!”
화르르르륵!!!
어둠이 내려앉은 세상으로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자, 생존자들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상체를 숙였다.
열기로 인해 고개조차 들 수 없는 상황.
“창!”
이덕배가 소리치자, 이민정과 이신혜, 황덕록의 어머니는 황급히 바닥에 널브러진 무기들 사이에서 기다란 창을 찾아 건네주었다.
한때 이정우가 애용하던 무기.
이덕배가 기다란 창을 쥐고 좀비들의 시체로 이루어진 둔덕을 밀치자, 상단에 있던 좀비들이 뒤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최만석과 이현배, 천호진도 기다란 도구를 이용해 담벼락 앞에 쌓인 시체들을 밀치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
그 순간, 전신에 불이 붙은 좀비 하나가 이덕배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덕배는 황급히 양손을 뻗어 좀비의 멱살을 붙잡았다.
하지만 자세가 불편한 탓에 좀비를 떨쳐내지 못했다.
“크으윽! 젠장!”
떡!
그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좀비의 경추가 부러졌다.
좀비가 쓰러지자, 그 너머로 도끼눈을 뜨고 있는 송하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송하윤은 이덕배를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아요?”
“고…… 고맙네.”
“찬물, 찬물!”
전신에 불이 붙은 좀비를 맨손으로 잡는 바람에, 이덕배의 양손은 화상을 입은 상태였다.
얼마나 상황이 급박하면, 본인이 화상을 입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덕배가 담벼락 밑으로 내려가자, 그 자리를 송하윤이 대신했다.
송하윤은 눈앞의 좀비들에게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옆에 있는 이진호를 불렀다.
“진호야! 화살 얼마나 남았어!”
“다 떨어졌습니다!”
크어어어어어!!
그어어어어…… 어어어…….
쉴 새 없이 들려오는 좀비들의 포효와 공명 소리.
좀비들은 끝도 없이 밀려드는데, 생존자들은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담벼락 밑에서 이덕배를 치료하던 정진영이 소리쳤다.
“다들 밑으로 내려와요!”
“안 돼! 담벼락을 내주면 좀비들한테 단지를 뺏기는 거야!”
이덕배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치자, 정진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오기 부리다간 다 죽어요! 벌써 시체들이 담벼락 높이까지 쌓였다고요!”
불과 5분 전만 해도 쇠뇌와 화살로 좀비들을 처리했지만, 어느새 육탄전이 된 상황.
이덕배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정진영은 사람들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전부 108동으로 이동해요! 담벼락 버립니다!”
그러자 담벼락을 사수하던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담벼락을 버리고 내려왔다.
최만석은 사람들을 데리고 108동으로 이동하고, 정진영은 이덕배를 부축해 일으켰다.
108동으로 이동하며 무전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기는 정진영! 담벼락 버린다! 다들 108동으로 돌아와!”
-뭐? 지금 지원 가고 있는데…….
이정우의 목소리가 무전기로 들려왔다.
옥상에서 전황을 살피던 김희연이 담벼락이 위험하다고 보고한 탓에, 이정우는 최현을 두고 담벼락 지원에 나선 상태였다.
그러자 정진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이미 넘어갔어! 전부 108동으로 튀어!”
-우린 108동까지 못 가요! 너무 멀어요!
-우리도!
단지의 정문과 후문을 담당하는 전완수와 박재우의 목소리에 정진영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이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제일 가까운 동으로 대피해! 현관에서 좀비들 막으면서 계속 상황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처음 쉘터를 공격한 좀비는 1,500마리.
하지만 좀비들의 공명이 근방의 모든 좀비를 불러모았다.
정진영은 이덕배를 데리고 108동으로 이동하며 생각했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예전엔 공명이 퍼져봐야 1㎞가 되지 않았는데, 지금은 더욱 먼 거리까지 퍼지고 있었다.
심지어 멀리까지 퍼진 공명이 봉화대처럼 연쇄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문득, 정진영의 머릿속으로 구미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알파1의 감각이 예전보다 증가했다는 얘기.
그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변종뿐만 아니라, 좀비들의 감각도 발달했다.
그동안 박재형이 눈 깜박할 새에 좀비들을 처리해서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 * *
이정우는 좀비들을 처리하며 황급히 108동으로 들어섰다.
뒤이어 108동 현관을 막아선 정진영과 최현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 사람들 어디 있어?”
“위에!”
상황이 다급한 탓에, 최현은 반말을 내뱉으며 계단을 가리켰다.
이정우는 다급히 계단을 뛰어올랐다.
7층까지 오르자, 계단에 모인 생존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 들어왔습니까? 못 온 사람, 못 온 사람 없어요?”
이정우의 물음에 뒤에 있던 천호진이 앞으로 걸어 나오며 얘기했다.
“완수형이랑 지혜, 수연이, 성하는 후문 앞에 있는 111동에 있대요. 재우 형이랑 덕록이 형, 혜리는 정문 앞에 있는 115동에 있고요.”
“쪽문에 있던 사람들은?”
“다 왔습니다.”
이정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어머니를 걱정한 모양이다.
이정우는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생존자들에게 얘기했다.
“일단…… 좀비들 숫자부터 줄여야 합니다.”
“형,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얘기 있어요.”
천호진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하자, 이정우는 숨을 돌리며 물었다.
“왜, 뭔데.”
“방금 희연이한테 연락 왔는데…… 아무래도 양학동이랑 죽도동, 대이동에 있는 좀비들까지 모여든 것 같아요.”
이정우가 눈꼬리를 치켜뜨자, 천호진은 지도를 펼치며 얘기했다.
“여기 보세요.”
양학동과 죽도동, 대이동은 용흥동의 남쪽과 동쪽에 위치한 동네였다.
양학동 좀비들이 용흥동으로 이동하며 공명이 발생했고, 그 과정에 바로 옆에 있는 대이동과 좌측의 죽도동 좀비들까지 반응한 것으로 보였다.
이정우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물었다.
“좀비들 숫자는 얼마나 되는데.”
“그게…… 희연이 말로는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힘든 수준이래요.”
“죽도동, 대이동, 양학동에도 아파트 많아?”
“양학동, 대이동은 학군이 좋아서 아파트가 많고, 죽도동은 도심에 위치해서 좀비들이 많은 것 같아요.”
천호진의 말에 생존자들의 탄식이 들려왔다.
이정우의 눈빛도 흔들리고 있었다.
양학동, 대이동, 죽도동의 좀비들이 전부 모여들었다면…… 최소한 5만 마리.
얘기만 들어도 절망스러운 상황.
그러다 문득, 이정우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재형이, 재형이는 어디 있어?”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장량동에서 좀비들 정리하고 들어온다고.”
“아니, 현 상황 모를 거 아니야.”
“어시스트 포인트 올라갈 테니 알지 않을까요?”
천호진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이정우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안 돼, 알려야 돼. 지금 들어오면 안 돼!”
“네?”
“재형이 좀비화도 없는 상태잖아. 아무리 재형이라도 못 버텨.”
이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더니, 주변 생존자들에게 물었다.
“지금 무기 들고 싸울 수 있는 사람 몇 명이나 됩니까.”
그러자 이덕배와 이현배, 최만석이 가장 먼저 걸어 나왔다.
상황을 지켜보던 영일만항의 생존자들도 빠르게 오른손을 들었다.
이정우는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얘기했다.
“다들 3층으로 이동해서 창문으로 들어오는 좀비들 처리해 주세요. 그리고 각호에 있는 책상, 침대, TV, 냉장고, 뭐든 계단 막을 수 있는 건 전부 뜯어와요.”
“그럼 우리가 여기 갇히는 거 아니에요?”
송하윤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이정우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얘기했다.
“기회는 옵니다. 아껴둔 수가 있어요.”
“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이정우는 알고 있었다.
최현과 윤혜리의 직업은 데니였고, 그들이 인형극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이정우는 생존자들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여자분들은 아이들 데리고 옥상으로 대피해 주세요. 아까 싸울 수 있다고 손 드신 분들은 저랑 같이 내려갑니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정우는 1층으로 내려가 최현을 불렀다.
“현아! 인형극으로 좀비들 숫자부터…….”
“쿨타임이에요!”
“뭐?”
“아까 썼다고요!”
“언제?”
예상의 밖의 상황이었다.
최현은 눈앞의 좀비들을 처리하며 장량동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이정우는 모든 상황을 듣고 지칠 대로 지친 정진영과 교대하며 외쳤다.
“현아! 뒤로 가서 혜리한테 무전 보내! 인형극 스킬 레벨부터 높이고, 내가 신호하면 스킬 사용하라고!”
“네!”
최현이 뒤로 빠지자, 정진영은 가방에 넣어둔 체력 회복제를 마시며 빈자리를 채웠다.
“체력 회복제 이거 대박이네!”
구미에서 긴급 퀘스트를 완료하고, 그 보상으로 받은 체력 회복제.
조금 전까지 거친 숨을 몰아쉬던 정진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말짱해진 모습을 보였다.
정진영은 눈앞의 좀비들을 주먹으로 때려잡으며 얘기했다.
“정우야! 너도 회복제 빨고 와!”
이정우도 상당히 지친 상태였다.
이에 한걸음 물러서며 가방에 넣어둔 체력 회복제를 꺼냈다.
회복제를 단숨에 들이켜자, 한여름에 얼음물을 마신 것처럼 두 눈이 번쩍 뜨이고 시야가 맑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정우는 손도끼로 좀비들을 때려잡으며 외쳤다.
“안개 밖으로 나가야 돼! 3층으로 올라가서 막아!”
정진영과 이정우, 최현은 3층까지 뒷걸음질 치며 방어선을 구축했다.
최현은 3층에 올라서며 무전기를 들고 윤혜리를 불렀다.
“혜리야! 들려?”
치지직- 치직-
-얘기해요!
“너 인형극 스킬 배웠지?”
-당연히 배웠죠! 그거 지금 써요?
“아니, 지금 말고!”
윤혜리의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최현은 침착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윤혜리는 최현이 말에 따라 인형극의 레벨을 높이고, 스킬 설명을 읽으며 물었다.
-4레벨까지 올렸어요! 이제 써요?
“아직! 정우 형이 따로 신호 보낼 거야!”
-아, 네!
최현은 무전을 마치고 이정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형! 인형극 언제 써요?”
“재형이 도착하면 써야 돼.”
“재형이가 언제 올 줄 알고요?”
“어시스트 포인트 올라가는 거 확인했을 거야. 재형이 성격에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어?”
챙그랑!
크어어어어어!
좌측 유리를 뚫고 들어오는 좀비들.
어느새 서로를 짓밞고 둔덕을 형성한 좀비들이, 아파트 외벽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최현은 돌아볼 새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카타나를 사선으로 그었다.
그러자 반쯤 들어온 좀비의 머리가 깨끗하게 잘려 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최현은 외벽에 붙은 좀비들을 처리하며 물었다.
“재형이 올 때까지 버티면 된다는 거예요?”
“인형극으로 400m 범위의 모든 좀비를 조종할 수 있다면 재형이랑 여원이가 들어올 틈이 생길 거야.”
“그래서요?”
“재형이랑 여원이가 도착하면, 그때 재우랑 덕록이, 혜리까지 좀비카에 태워서 108동으로 오면 돼.”
“완수랑 애들은요?”
“그건 뒤에 생각하자. 좀비들이 108동에 집중하고 있으니, 거긴 아직 버틸 만할 거야.”
최현은 미간을 구기며 세차게 혀를 찼다.
전완수도 걱정이지만, 친동생 최지혜가 걱정이었다.
빠아아앙!! 빠아앙!!
그 순간, 이정우의 귓가로 자동자 경적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3층과 4층에서 좀비들의 진입을 저지하던 생존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치지직- 치직-
-정우 오빠! 북쪽 방향에 승합차 한 대 보여요! 우리 좀비카 같아요!
무전기로 들려오는 김희연의 목소리에, 이정우는 다급히 무전기를 쥐며 윤혜리를 불렀다.
“혜리야 지금!”
-명령어, 명령어 뭐라고 해요?
“서로 싸우라고 해!”
-인형극!
그러자 주변을 둘러싼 좀비들이 움직임을 멈추는 모습을 보였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상체를 부르르 떨며 머뭇거리는 모습.
크어어어어어!!
곧 허공을 향해 포효를 내지르더니, 서로 죽일 듯이 싸우기 시작했다.
아파트 정문을 기준으로, 반경 400m 이내의 좀비들이 서로의 살점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 * *
설여원은 액셀을 밟으며 내게 물었다.
“무전 내용 들었어?”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쉘터에 다다를 무렵, 무전기로 일행의 목소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우리가 안전하게 진입할 수 있도록 윤혜리가 인형극을 사용한 것 같다.
행동반경으로 보아, 최현과 비슷한 범위.
윤혜리도 인형극의 레벨을 4까지 올린 건가?
지금은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난 칼자루를 말아쥐며 상황에 집중했다.
그리고 정문 바리케이드를 직시하며 얘기했다.
“뚫고 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