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99화
최현과 전완수는 계단을 뚫고 1층까지 내려가더니, 단지 내의 좀비들까지 모조리 처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꼭대기까지 확인한 설여원과 정진영도 다시금 1층으로 내려와 옆동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결인들은 좀비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에 두려움이나 공포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박재형의 속도에 맞추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일 뿐이었다.
* * *
카타나로 싸우는 게 효율적이지만, 무기를 사용할 때면 스스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억지로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좋을까?
반면에 건틀릿을 착용하고 싸울 때면 익숙한 소파에 앉은 것처럼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게 맞는, 나만의 맞춤형 정장을 입은 기분.
건틀릿을 착용하고 싸우는 이상, 길거리의 좀비들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다만 물량으로 인해 체력적인 소모가 상당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벌써 600마리는 잡은 것 같은데, 소란을 듣고 골목에서 튀어나오는 좀비들로 인해 잠시도 쉴 수 없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얼추 70마리의 인영.
난 가빠진 숨을 가다듬으며 가볍게 양팔을 털었다.
뒤이어 하체를 숙이며 읊조렸다.
“가속.”
쾅!!
지면을 박차며 놈들의 안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좀비와의 거리.
그와 동시에 바로 앞의 좀비에게 돌려차기를 가했다.
펑-!!
관자놀이를 맞은 좀비는 눈알이 빠지며 두개골이 터져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좀비들의 머리, 가슴, 목을 향해 쉴 새 없이 발길질을 가했다.
양팔에 충격이 쌓인 상태기에, 남은 70마리는 발차기로 처리했다.
그렇게 모든 좀비를 처리한 뒤,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센트럴 아파트 방면을 살폈다.
어제보다 좀비들이 많이 적은 것 같은데…….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는 있지만, 어제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준이 아니라서 그런가?
난 무전기를 들고 일행을 불렀다.
“다들 어디야. 호진이 부모님 찾았어?”
치지직- 치직-
-형? 재형이 형!
“호진이? 너 무전기 가져왔었어?”
-아니요, 이거 여원이 누나 무전기에요.
“너 어디야. 설여원은 어디 있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무전기를 타인에게 넘기고 이동할 정도면…… 설마 다수의 좀비에게 둘러싸인 건가?
뒤이어 천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1202호에 숨어 있고, 다른 분들은 좀비 잡으러 나갔어요.
“……사냥하러 갔다고?”
-네, 형 올 때까지 주변 좀비 처리한다고 나갔어요.
우려했던 상황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어제오늘 구경만 해서 몸이 근질근질했나?
“기다려, 지금 갈게.”
-네!
안개 때문에 주변 지형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었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야 센트럴 아파트였나?
그러다 문득, 안개 속에서 홀로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의 외관이 두 눈에 들어왔다.
햇빛을 가려 은은한 빛이 굴절되고 있었다.
센트럴 아파트가 30층이 넘는다고 했지?
저기다.
* * *
“더 없나?”
전완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설여원은 혹여나 사각이 존재할지도 모르기에, 단지 내 조경까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다 처리한 거 같은데.”
결인들이 처리한 좀비도 족히 500마리에 달했다.
이미 인간 병기 수준의 결인들에게, 길거리 좀비 500마리는 그리 어렵지 않은 상대였다.
타탓- 탓!
뒤이어 최현의 귓가로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최현은 빠르게 접근하는 발소리에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황급히 카타나를 휘둘렀다.
훙-!
“워워! 야!”
간발의 차로 빗나가는 칼끝.
동시에 최현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재형이었다.
최현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어? 야, 괜찮아?”
“너 진짜 일부러 이러는 거냐?”
“아니 안 보이는 걸 어떡해.”
“그렇다고 무작정 칼부터 휘두르냐?”
“조금 전까지 좀비들 처리하면서 예민해진 상태니까 당연하지. 무전이라도 치고 오지 그랬어.”
“호진이 말고 대답하는 사람도 없드만.”
“아, 좀비랑 싸우느라 못 들었나 보다.”
최현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남겼다.
* * *
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좀비를 혼자 처리하겠다고 한 이유.
이러한 돌발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설여원과 전완수는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가능하니 괜찮아도, 다른 사람들은 청각에 의지하기에 작은 인기척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지금처럼 아군을 공격하는 사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혼자 처리하겠다고 나선 것도 있었다.
뒤이어 설여원이 최현의 등짝을 때렸다.
최현은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난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아무튼 됐고, 호진이 부모님은 찾았어?”
“아니, 대신 쪽지는 있더라.”
“쪽지?”
“호진이 부모님이 장량동에 있을 가능성이 있어.”
장량동이 어디야.
정진영을 쳐다보자, 그는 들고 있던 카타나를 칼집에 넣으며 얘기했다.
“두호동 북쪽이 장량동이야. 일단 두호동부터 가고, 그 뒤에 장량동으로 올라가자.”
“장량동 갔다가 영일대 해수욕장 가는 거예요?”
“그래야지.”
“영일대 해수욕장이 두호동이잖아요. 그냥 두호동 확인하면서 영일대 해수욕장까지 확인하죠? 그 뒤에 장량동으로 올라가고.”
“…….”
정진영은 다른 일행의 표정을 살폈다.
전완수와 최현은 상관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반면에 설여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내가 지리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진영이 오빠 본가에서 해수욕장까지 멀어요?”
“엄청 가까워.”
“그럼 재형이 말대로 하죠.”
설여원도 찬성하자, 정진영은 입술을 깨물며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정진영의 모호한 표정이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왜요? 장량동부터 확인하고 싶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두호동이 좀 아파트가 많아.”
정진영은 두호동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최소한 용흥동의 2배는 된다고 한다.
심지어 용흥동처럼 주변에 산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도심 한복판으로 들어가야 한다.
좀비들의 숫자를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에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이러려고 좀비화 아껴둔 거예요.”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요.”
“그냥…… 너한테 너무 부담 주는 거 같아서.”
“좀비화는 부담 없어요. 광폭화나 광란이 부담스러운 거지.”
정진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얘기했다.
“그럼, 이제 호진이 데리고 출발하죠.”
바쁜 하루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두호동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았다.
큰길을 따라 올라가면 바로 보이는 동네.
핸들을 잡고 있던 설여원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정면을 응시하더니, 서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얘기했다.
“저 앞이 두호동이야?”
설여원의 물음에 지도를 뚫어지게 살피며 얘기했다.
“맞는 거 같은데? 이미 두호동인가?”
“무전 쳐봐.”
나도 확신이 없기에, 무전기를 들고 정진영을 불렀다.
“진영이 형, 저 앞이 두호동이에요?”
치지직- 치직-
-이미 두호동이야.
“형 본가는 여기서 어떻게 가요?”
-여원이한테 파크뷰 아파트 보이냐고 물어봐봐.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앞 유리로 고개를 삐죽 내밀며 주변을 살폈다.
한참을 살피더니,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며 얘기했다.
“저긴가? 아, 저기다. 아파트 로고 보여.”
“진영이 형, 보인대요.”
-거기야. 거기 203동 4층.
설여원은 정진영의 대답을 듣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더 진입하는 건 위험한데…….”
“왜, 좀비들 많아?”
“더럽게 많아.”
“여태 안 보이다가 어디서 나타난 거지?”
“우리 오는 길에도 좀비들 많았어. 안 들키게 최대한 속도 줄여서 조용히 온 거야. 저 앞은 대로에 있는 좀비가 많아서 조용히 못 지나가는 거고.”
역시 도심인가?
난 무전기를 들고 얘기했다.
“진영이 형, 완수한테 아까 공원 있던 곳까지 후진하라고 해주세요.”
-공원? 어디 공원.
“오는 길에 표지판 보니까 학산근린공원인가? 공원 출발지점이라고 있던데 못 보셨어요?”
-응? 거기까지 후진으로 가라고? 몇백 미터는 되는데?
“유턴하면 좀비한테 발각되는 거리라, 후진으로 가야 될 거 같아요.”
-……일단 알았다.
무전을 마치기 직전, 전완수의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투덜거리기만 할 뿐, 전완수가 운전하는 승합차는 천천히 후진하기 시작했다.
설여원도 좌우를 살피며 천천히 후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후진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설여원의 앙다문 입술에서 집중하고 있다는 걸 엿볼 수 있었다.
설여원은 천천히 핸들을 조작하며 얘기했다.
“바닥에 쓰레기가 많아서 쉽지가 않네.”
“캔이나 페트병만 아니면 돼.”
“그게 많으니까 이러지.”
그렇군.
헛기침과 함께 좌우를 살폈다.
안개 때문에 보이는 건 없지만, 조심스레 핸들을 조작하는 설여원의 모습에 나까지 긴장하게 되었다.
혹여나 페트병이라도 밟으면 주변의 좀비들이 일제히 달려들 것이다.
두 손에 땀이 고이고, 부디 공원까지 안전하게 돌아가기를 내심 빌었다.
그렇게 얼마나 이동했을까.
대략 150m는 후진한 것 같은데, 설여원의 핸들 조작이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후진만 하다 보면 공감각이 멍해지는 때가 있는데, 아직 초보 운전인 설여원에겐 더욱 심할 것이다.
설여원은 두 눈을 껌벅이며 몇 차례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보였다.
그 순간.
빠드드득- 뜩!
페트병을 담아둔 녹색 그물을 지르밟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놀란 눈으로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도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마름모꼴로 벌어진 입술에 지금의 당혹감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설여원은 말까지 더듬으며 얘기했다.
“미, 미안. 못 봤어.”
크어어어어어어어!!
그와 동시에 좀비들의 포효이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문을 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을 더듬는 질척한 울음소리에 생각할 겨를도 없이 외쳤다.
“밟아!”
부아아아앙!
설여원은 대뜸 액셀을 밟았다.
후진으로 40km 이상 올라가는 속도.
살짝만 핸들을 틀어도 전신이 좌우로 쏠렸다.
뒤에 있던 천호진은 양손으로 의자 등받이를 붙잡으며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다.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자, 승합차도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뒤이어 전완수가 운전하는 승합차가 기다란 스키드 자국을 남기며 회전하더니, 순식간에 180도 회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승합차로 저게 돼?
좀비카로 개조하며 무게중심을 낮춰서 가능한 건가?
설여원은 쳐다보자, 그녀는 격하게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난 저런 거 못해.”
이에 설여원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세워.”
“뭐?”
“세우라고!”
끼이이익!
설여원은 대뜸 브레이크를 밟으며 내게 물었다.
“어쩌려고?”
난 설여원의 카타나를 들고 황급히 조수석 문을 열고 내렸다.
“차 돌려서 공원까지 곧장 가! 도착하면 방어진영 구축하고 기다려!”
“야! 야 잠깐……!”
텅!
차량 문을 닫고 정면을 응시했다.
뒤이어 사방에서 달려드는 좀비들의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발소리만 들어도 규모가 보통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어어어…… 어어어어……!
뒤이어 공명 좀비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망설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
정진영의 말이 사실이라면…… 두호동은 용흥동보다 아파트가 2배 이상 많은 주거지역.
족히 20,000의 좀비가 이곳에 있을 것이다.
모조리 쓸어버린다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
좀비화를 사용하더라도 20,000의 군사를 1시간 이내에 처리하는 건 역부족이다.
그러니 최대한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사냥하고, 체력이 바닥을 치면 좀비화를 사용해야 한다.
치지직- 치직-
-야 인마! 그냥 와! 너무 많아! 거기 좀비 밭이라고!
무전기로 들려오는 전완수의 외침.
난 무전기의 전원을 끄고, 칼자루를 말아쥐었다.
우리가 언제부터 상황 봐가면서 싸웠다고?
안 되면 되게 해야지.
어차피 여기 있는 좀비들을 처리하지 않으면 정진영의 메인 퀘스트를 확인할 수 없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노도와 같이 달려드는 좀비들을 보고, 칼자루를 말아쥐며 읊조렸다.
“가속.”
쾅!!
지면을 박차며 좀비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차량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모든 시선이 내게 쏠리도록.
홍해를 가르는 모세처럼, 칼자루 불끈 쥐고 좀비들의 목을 도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