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98화
일행은 얼빠진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전완수는 눈꼬리를 씰룩이며 내게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바이러스를 치료하면서 끝나는 영화나 드라마가 같은 게 아니라, 무언가를 준비하는 전조 단계 같아.”
“뭘 준비한다는 거야?”
“에스파디아가 그랬거든. 플레이어든, 좀비든, 변종이든,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고. 결국은 모두가 소중한 자산이라고.”
“자산?”
“생명체가 자산이 되는 상황은 딱 하나뿐이잖아.”
전완수를 쳐다보며 얘기하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전쟁을 말하는 거야?”
“맞아.”
“아니 그럼…… 누구랑?”
“좀비, 변종, 플레이어,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건…… 셋 중에 가장 강한 존재가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 같아.”
“가장 강한 존재가 살아남으면? 살아남은 존재와 외부의 무언가를 싸움 붙인다는 건가?”
“난 그렇게 생각해.”
“그게 뭔지는 아직 모르는 거고?”
“알 방도가 없지. 얘기를 안 해주니까.”
전완수가 뚱한 표정을 짓자, 이번엔 설여원이 입을 열었다.
“에스파디아가 자연의 순리에 개입하면서까지 전쟁을 준비하는 이유가 뭐지?”
설여원의 물음에 가만히 있던 정진영이 입을 열었다.
“다가올 위협으로부터 기존의 인류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거 아니야? 그러니 순리를 거스르면서까지 좀비를 만든 거지.”
“그럼 좀비만 만들면 되지, 변종은 왜 만들고, 플레이어는 왜 만든 거예요?”
설여원이 되묻자, 정진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불안하니까, 확신이 없는 거지. 좀비랑 변종을 만들었지만, 다가올 위협을 이길 자신이 없는 거야.”
정진영의 설명에 전완수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얘기했다.
“플레이어는 변수 정도로 생각하면 되는 건가? 그래서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는 거야? 이기는 쪽이 최선이니까?”
일행의 대화를 귀담아듣다가 문득, 머릿속으로 반짝이는 빗금이 스치는 걸 느꼈다.
에스파디아는 분명 균형을 원한다고 했고, 또한 에스파디아가 말하는 균형은 지구의 개념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외계의 무언가가 지구를 침공할 것이고, 지구가 파괴될 것이라 생각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외계의 무언가와 싸울 수 있는 ‘자산’이 필요한 거고?
역시 여럿이 머리를 맞대면 답이 나온다더니.
내가 생각한 가설을 일행에게 들려주자, 다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설여원은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얘기했다.
“라스트아크는…… 진짜 튜토리얼이었던 거네?”
“어쩌면 지금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있어. 아직 다가올 위협을 마주하지도 않았으니.”
덤덤하게 대답하자, 다들 암울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씩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의 가설이 맞다면…… 우린 출발선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자 가만히 있던 최현이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에이씨, 됐어! 퍼즐 조각이 부족한데 퍼즐을 어떻게 완성해? 지금은 전쟁이든 뭐든, 당장 해야 할 일이나 생각하자고.”
최현의 말에 다들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정진영이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아까 광란을 10번 사용하면 인간으로 못 돌아온다는 건 뭐야?”
아차, 저 얘기를 하다가 여기까지 왔구나.
난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말 그대로예요. 광란은 최소한의 방파제 같은 거고, 10번 사용하면 좀비화가 풀리지 않아요.”
“그럼…… 재형이 네가 완전히 좀비가 된다는 거야?”
“광란 상태의 좀비가 되는 거죠.”
덤덤하게 대답하자, 정진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지금, 지금 몇 번이나 발동됐지?”
“4번이요.”
숫자만 보면 아직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중첩 발동을 생각하면 결코 안전하지 않다.
정진영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긁적이더니,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그래서 그렇게 카운트에 목숨 걸었던 거야?”
“네.”
내가 무리하는 이유에 대해 알게 되어서 그런가?
더는 반박하는 사람이 없었다.
전완수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헛기침과 함께 내게 물었다.
“그럼…… 저 앞에 있는 좀비들도 너 혼자 처리한다는 거지? 아니지, 포항에 있는 좀비들을 너 혼자 처리한다고 봐야 하나?”
“그렇지.”
“네가 처리하는 건 좋은데, 대신 속도 좀 높이자.”
“속도?”
전완수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홀로그램을 켜며 얘기했다.
“이거 봐봐.”
그는 홀로그램에 적힌 공격대 목록을 보여주었다.
공격대 랭킹 1위의 파티.
파티명 홍런, 파티장 위저홍.
그의 파티가 아크에 도착했다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에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물었다.
“뭐야, 아크에 도착했다고? 이거 언제 떴어?”
“20분 전에.”
공격대 목록을 유심히 살피자, 톈진 아크에 도착했다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여전히 각성하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이에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안개가 퍼진 초기에, 대한민국의 아크는 서울과 부산에 있다고 표시되었다.
굳이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사용했다는 건…… 다른 국가에도 아크가 있다는 건가?
국가마다 아크가 2개씩 있는 거야?
뒤이어 전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위저홍의 파티가 아크의 비밀을 알아내면…… 두 번째 에피소드 끝나는 거야.”
“…….”
중국의 공격대가 두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면, 우린 독 안개 속에서 두 번째 에피소드를 진행해야 한다.
세상은 선두 그룹의 진행도에 따라 변화하니 말이다.
그 예로 우리가 두 번째 에피소드를 진행할 무렵, 황금동 쉘터는 첫 번째 에피소드도 클리어하지 못해서 파티도 형성하지 못한 상태였다.
첫 번째 에피소드와 두 번째 에피소드 사이에는 격차가 크지 않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다르다.
지금 상태에서 독 안개가 퍼진다면…… 아크에 있는 사람들, 혹은 각성 파티가 아니면 전멸이다.
난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근처 좀비들 전부 불러모아서 반대편 대로에서 처리할 테니까, 너희는 호진이 데리고 본가부터 확인해.”
내가 길거리의 좀비들을 처리하는 동안, 일행은 실내에 있는 좀비를 처리하며 본가를 확인하는 것.
안전성은 떨어지지만 속도를 높이고, 카운트도 높이는 최선의 방안이었다.
다들 수긍하는 모습을 보이기에, 들고 있던 카타나를 전완수에게 건네주며 얘기했다.
“호진이 잘 지켜줘.”
“걱정 마.”
난 심호흡과 함께 안개에 잠식된 대로를 응시했다.
좀비들의 시선을 끄는 방법이라면…… 역시 시끄러운 게 최고지.
조수석에 내려둔 건틀릿을 착용하고, 대뜸 안개 속으로 달려나갔다.
크르르르…… 카하악!
200m가량 나아가자, 인기척을 느낀 좀비들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야 이 새끼들아!!”
대놓고 소리를 지르자, 좀비들의 포효와 함께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어어!!
두두두두두두두두-
말발굽 소리를 닮은 좀비들의 발소리.
소리의 크기로 보아, 족히 400마리 이상.
400마리 정도라면…… 분명 공명 좀비도 있을 것이다.
그어어어어…… 어어어…….
뒤이어 기다렸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에 다급히 무전기를 들며 얘기했다.
“좀비들 나한테 몰리면 곧장 아파트로 들어가.”
치지직- 치직.
-몸 조심해라.
전완수의 대답을 듣고, 들고 있던 무전기를 레그홀스터에 쑤셔 넣었다.
뒤이어 자욱한 안개 속에서 달려드는 좀비들의 인영이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대한 벽처럼 보이는 인영을 보고, 가드를 올리며 읊조렸다.
“가속, 감지.”
끝이 보이지 않는 푸른색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확인해야 하는 동네가 많으니, 좀비화는 최대한 아껴둘 것이다.
다른 동네에 더 많은 좀비가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난 좀비들의 측면으로 이동하며 모서리부터 갉아먹었다.
* * *
센트럴 아파트 실내로 들어간 천호진과 일행은 황급히 계단을 뛰어올랐다.
카하아악!
계단에서 달려드는 좀비를 보고, 설여원은 재빨리 카타나를 뽑아 들었다.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성대를 그어버리자, 머리가 잘려나간 좀비는 힘없이 난간 밑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완수는 후방을 살피며 얘기했다.
“좀비들 따라온다! 먼저 올라가!”
“넌 어쩌려고!”
“계단에서 정리하는 게 안전해!”
전완수가 계단 수비로 남고, 남은 일행은 황급히 위로 올랐다.
길거리의 좀비들은 전부 박재형을 따라갔지만, 단지 내부에도 좀비들이 남아 있는 상황.
천호진은 쇠뇌를 견착한 채 잔뜩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이에 최현이 그의 등짝을 때리며 얘기했다.
“내려.”
“네?”
“괜히 여원이 등에 볼트 쏘지 말고 내리라고.”
최현의 말에 천호진은 들고 있던 쇠뇌를 어깨에 둘러메고, 손도끼를 손에 쥐었다.
한때 정진영이 사용하던 손도끼.
변종에겐 아무런 효력이 없지만, 길거리의 좀비는 처리할 수 있는 무기였다.
설여원은 선두에서 길을 뚫더니, 뒤에 있는 천호진을 쳐다보며 물었다.
“12층 1202호 맞아?”
“네!”
설여원은 굳게 닫힌 계단 문에 발길질을 가하며 공용 공간을 살폈다.
양옆으로 1201호와 1202호가 붙어있었다.
1201호의 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1202호는 굳게 닫힌 상태.
카하악! 크학!
1201호에 있던 좀비가 달려들자, 최현은 칼자루로 놈의 콧대를 찍으며 얘기했다.
“먼저 들어가! 난 여기 정리하고 따라갈게!”
최현이 1201호를 막는 동안, 천호진은 황급히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을 열었다.
설여원이 한발 앞서 신발장으로 들어서며 1202호의 내부를 살폈다.
다른 아파트와 달리 좀비의 혈흔은 보이지 않았고,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설여원과 정진영은 내부의 상태를 샅샅이 살피고, 그사이 천호진은 거실과 부엌을 살폈다.
“어어! 여기, 여기!”
그 순간, 부엌에서 천호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방과 화장실을 살피던 설여원과 정진영이 나오자, 천호진은 식탁에 놓인 A4용지를 흔들었다.
-여보, 나 오늘 영미네에서 자니까 저녁 알아서 차려 먹어요. 냉장고에 반찬 만들어놨어.
먼지가 내려앉은 종이.
넉 달 전, 안개가 퍼진 당시의 쪽지로 추측되었다.
설여원은 종이에 적힌 글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영미? 영미가 누구야.”
“저희 이모요.”
“이모네는 어디야.”
“장량동이요. 포항 북구 장량동.”
장량동이란 말에 설여원은 정진영을 쳐다봤다.
정진영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 닦으며 얘기했다.
“북쪽이야. 두호동 위에.”
“오빠네 집이 두호동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용흥동 위에 두호동, 두호동 위에 장량동.”
두호동에서 정진영의 본가를 확인하고 영일대 해수욕장으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목적지가 하나 더 늘었다.
설영원은 천호진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바닥에 발자국도 없고, 피가 굳은 흔적도 없는 거로 봐서는 안개가 퍼진 뒤로 아무도 안 들어온 거야. 너희 아버지도 장량동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럼…… 지금 두호동부터 갔다가 장량동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 일단 호진이 너는 이거 가지고 여기 있어.”
설여원은 본인의 무전기를 천호진에게 건네주었다.
천호진은 양손으로 무전기를 받으며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설여원은 정진영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오빠, 우린 재형이한테 무전 올 때까지 단지 내에 있는 좀비들 처리하죠.”
“재형이 올 때까지 버티자는 거야?”
“버티는 게 아니죠. 우리도 같이 코인 올리자는 거지.”
“여길 전부 확인하자고?”
현재 결인들의 위치는 103동 12층.
이곳은 30층이 넘는 고층 아파트이기에, 전부 확인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자 설여원은 양손을 털며 얘기했다.
“어차피 길거리 좀비들 정리 끝나야 나갈 수 있어요.”
“…….”
“그러니 재형이 돌아오면 바로 나갈 수 있도록 미리 정리하죠.”
정진영은 칼자루를 말아쥐며 한 발 앞서 1202호를 빠져나갔다.
곧 1201호를 정리한 최현이 얼굴에 묻은 좀비들의 혈흔을 털어내며 걸어 나왔다.
정진영은 최현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위층은 여원이랑 내가 확인할 테니, 현이 너는 완수랑 밑에 확인해.”
“좀비들 정리하자고요?”
“재형이 올 때까지 뭐라도 하면서 기다리자고.”
최현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예전의 결인들이라면 두려움에 떨며 살기 위해 억지로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간만에 몸을 쓰며 한껏 들뜬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정진영은 천호진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호진아, 우리가 무전 치기 전까지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