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97화
지도를 통해 좁은 골목이 많다는 것을 미리 파악했기에, 버스로 이동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승합차와 중형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승합차의 운전은 전완수가, 중형차의 운전은 설여원이 담당했다.
난 차량에 오르며 이정우에게 얘기했다.
“형, 형도 무슨 일 생기면 무전부터 쳐요.”
“알았어. 조심해서 다녀와.”
모두의 배웅을 받으며, 우린 대단지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전완수와 최현, 정진영이 승합차로, 설여원과 나, 천호진이 중형차로 이동했다.
중형차가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승합차가 따랐다.
천호진은 창밖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좀비 때문인지, 부모님 걱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괜찮을 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안개가 퍼진 지 넉 달 이상 지났다.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빈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빈말 대신, 천호진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호진아, 좀비들 접근하면 밖으로 나오지 말고 핸들 잡아.”
“네? 제가요?”
“좀비들이 차량 둘러싸면 우린 밖에 나가서 싸울 거니까, 네가 핸들 잡아.”
“……네.”
옆에 있던 설여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표정에서 굳이? 라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회피하자, 설여원은 백미러로 천호진의 표정을 살폈다.
근심에 잠겨 있던 천호진이, 상황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인이 해야 할 일이 생기니, 나른해진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설여원은 그제야 내 의도를 파악하고 싱겁게 웃었다.
조수석에 앉아 주변을 살피자, 어제는 보지 못한 지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쉘터로 사용하는 대단지 아파트의 뒤편으로 초, 중, 고가 붙어있었다.
아파트들이 왜 이리 다닥다닥 붙어있나 했더니, 학군이 좋은 동네였다.
설여원도 좌우를 살피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좀비 사태만 아니었으면…… 진짜 예쁜 동네였을 것 같은데.”
구불구불한 길도 그렇고, 언덕의 형태도 그대로 살아 있는 동네.
서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 나올 것 같은 동네였다.
좀비 사태가 발발하기 전에는…… 나도 이 분위기가 좋아서 포항에 자주 놀러 왔었다.
지금은 음산한 기운만 맴도는 멸망의 세계가 되었지만 말이다.
설여원은 정면을 주시하며 천천히 속도를 줄이더니, 핸들을 틀며 얘기했다.
“골목은 여기서 끝이야. 대로로 올라갈게.”
“좀비들 보이며 미리 얘기해.”
설여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핸들은 틀었다.
뒤이어 8차선 도로가 눈에 들어오고, 설여원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얘기했다.
“호진아.”
“네 누나.”
“계속 직진하다가 사거리 나오면 우회전이지?”
“네 맞아요.”
설여원은 천호진의 말에 따라 드넓은 대로를 달리더니, 어느 순간 속도를 줄이며 전방을 주시했다.
설여원의 표정을 보고 건틀릿을 끼며 물었다.
“좀비야?”
“사거리에 그득해.”
“거리는.”
“대략…… 500m?”
“여기서 기다려.”
“또 혼자 처리하게? 이럴 때 좀비카를 써야지, 이럴 거면 좀비카 만든 이유가 없잖아.”
설여원이 반박하기에,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카운트 쉽게 올릴 수 있을 때 올려야지.”
“그건 나도 아는데…… 어제도 무리했는데 오늘도 무리하는 건 좀…… 몸도 생각해야지.”
“좀비들 숫자는 얼마나 되는데.”
“못해도 300마리.”
“300마리면 금방이야. 걱정하지 말고 여기 있어.”
설여원은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결국 한숨을 내쉬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뒤따라오던 승합차도 정차하고, 전완수와 정진영이 내리며 이곳으로 걸어왔다.
내가 차에서 내리자, 전완수는 저 멀리 보이는 사거리를 응시하며 물었다.
“혼자 처리하려고?”
“어.”
“무전기는.”
“여기.”
전완수도 한숨을 내쉬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다녀오라는 말을 남겼다.
이동하기에 앞서, 전완수의 옆구리에 있는 카타나가 눈에 들어왔다.
황덕록의 어머니를 구출하던 당시, 길거리의 좀비들은 기다란 무기로 때려잡는 게 더욱 효과적이라는 걸 느꼈다.
지금의 이동속도와 반사신경이면 좀비화를 사용하지 않아도 좀비에게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든 내 근력이 무기의 공격력을 대폭 증가시키니, 한번 카타나를 써볼까?
난 전완수의 옆구리를 가리키며 물었다.
“완수야, 그것 좀 빌려도 될까?”
“카타나?”
“써보고 괜찮으면 나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하게.”
전완수는 대수롭지 않게 카타나를 빌려주었다.
칼자루를 손에 쥐니 느낌이 새롭다.
예전엔 나도 헌팅 나이프로 좀비들을 처리했는데.
무기를 사용하던 기억이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갔다 올게.”
착용하고 있던 건틀릿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카타나를 들고 사거리로 향했다.
크르르르…… 카학!
450m가량 나아가자, 냄새를 맡은 좀비들이 목젖을 갈기 시작했다.
이에 가볍게 손목을 풀며 카타나를 뽑았다.
크어어어어어!
체취를 맡은 좀비들이 이곳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나타나는 인영을 보고, 난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가속.”
쾅!!
지면을 박차며 달려들자, 양팔을 휘저으며 접근하는 좀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카타나를 사선으로 그었다.
펑!!
그러자 좀비의 몸이 두 동강 나더니, 내장이 폭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일격 효과?’
스킬 급가속 발동 중에 처음 공격하는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는 일격 효과.
일격 효과가 무기에도 적용되었다.
크어어어어어!
고민하고 있을 새도 없이 수십 마리의 좀비가 주변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재빨리 사이트 스텝을 밟으며 주변을 둘러싸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좀비들이 옆으로 오지 못하도록 거리를 조절하며, 빠르게 놈들의 목젖을 그었다.
서걱!
헌팅 나이프를 사용할 때와 비교도 되지 않는 예리함.
성대만 끊으려고 했는데, 좀비들의 머리가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였다.
로그나이트 카타나의 힘인지, 내 근력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다.
이거 나도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다.
마치 절삭기에 들어간 종이처럼, 칼을 휘두를 때마다 좀비들의 머리가 잘려나갔다.
좀비들의 움직임은 내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기에, 쏜살같이 놈들의 팔과 다리, 머리를 잘라내며 길을 뚫었다.
알파3부터는 카타나가 통하지 않지만, 그 밑에 놈들과 싸울 때는 나도 카타나를 사용해야겠다.
* * *
멀찍이서 박재형의 싸움을 지켜보던 전완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저게 말이 돼?”
“검에 대한 이해도는 없는 것 같아. 주먹으로 싸울 때보다 자세가 불안정해.”
설여원이 덤덤하게 대답하자, 전완수는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아니 그러니까. 이해도도 없는데 저렇게 싸우는 게 말이 되냐는 거지.”
“…….”
“완전 힘빨이잖아.”
전완수의 말에 설여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뒤에 있던 최현이 다가오며 물었다.
“왜, 어떻게 싸우는데?”
“기본기도 없고, 그냥 마구잡이로 휘두르고 있어.”
그러자 최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 그럼 빈틈이 생길 텐데……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빈틈이 안 생기니까 이러지.”
최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전완수는 박재형의 모습을 유심히 살피며 얘기했다.
“코어랑 하체 근육이 얼마나 좋으면, 넘어져야 하는 상황에도 안 넘어져. 검을 도끼처럼 휘두르는데 막힘도 없고.”
“그렇게 휘두르는데 좀비 머리가 잘려?”
“엄청 잘 잘려.”
“헌팅 나이프로 좀비들 성대랑 관자놀이, 안구만 뚫던 녀석인데. 찌르기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힘빨이라는 거지.”
최현은 콧방귀 뀌며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못 당해내겠다는 표정.
아무리 힘이 좋아도, 하체 균형이 흐트러지면 검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하지만 권투를 배워서 그런지, 본능적으로 아는 건지, 박재형의 움직임에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예전부터 박재형의 운동신경이 좋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기의 이해도가 없어도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느끼는 감각.
임기응변이 항상 성공하는 이유.
그것이 박재형이 지닌 능력이자 강점이었다.
* * *
턱!
좀비의 어깻죽지를 향해 카타나를 휘두르는 순간, 날이 박히고 말았다.
칼날의 방향을 잘못 계산했다.
자세가 불편한 상태에서 억지로 휘두른 탓인가?
밖으로 휘두르지 않고, 안쪽으로 휘두른 칼날은 좀비의 팔을 잘라내지 못하고 뼈에 걸리는 모습을 보였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알게 된 게 있다면, 휘두른 방향으로 뽑으려고 하면 칼은 뽑히지 않는다.
잡아당겨야 깔끔하게 뽑히지.
그래도 뽑히지 않으면, 억지로 뽑으면 그만.
왼손 불끈 쥐고, 놈의 얼굴을 향해 내질렀다.
쩍!!
안면이 으스러지며 뒤로 엎어지는 좀비.
그와 동시에 카타나를 비틀어 뽑았다.
대략 10분 정도 싸웠을까?
8차선 도로는 좀비들의 시체로 가득 찼다.
300마리라더니, 족히 2배는 처리한 것 같다.
“후…….”
더는 접근하는 좀비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거칠어진 숨을 가다듬었다.
끼익!
뒤이어 내게 접근하는 두 대의 차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중형차와 승합차.
설여원은 내 옆에 차량을 정차하더니, 물병을 들고 내렸다.
말없이 물병을 건네주기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분을 보충했다.
옷소매로 입가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설여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좀비들은 더 없어?”
“아직 많아.”
“어디.”
“사거리 지나서 직진해도 있고, 아파트 방면에도 있고.”
“거리는.”
“전부 처리하려고?”
설여원이 묻기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뒤따라온 전완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우리가 여기 찾아온 목적이 뭐야.”
“뭐?”
“본가부터 확인할 생각을 해야지. 우리가 여기 좀비 잡으러 왔어?”
지금껏 가만히 있던 전완수가 화를 내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뒤이어 정진영이 입을 열었다.
“재형아, 왜 그리 집착해.”
“집착이라뇨.”
“너 알파3이랑 싸운 뒤로 과하게 카운트에 목숨 거는 거 같아.”
“당연히 그래야죠. 지금 알파3 나타나면 우리한테 승산 있어요? 없잖아요.”
“…….”
“한계 돌파 3번은 더 해야 알파3 수월하게 잡을 수 있어요.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아니, 어제오늘 너 혼자 너무 무리하니까 이러지.”
“마음은 고마운데, 한계 돌파가 시급한 것도 사실이에요.”
다들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들 내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에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앞으로는…… 광란의 힘을 빌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요.”
“광란? 당연히 우리도 광란이 발동되는 건 좀…….”
“아니, 결인들이 위험해질까 봐 불안해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광란이 10번 발동되면…… 인간으로 못 돌아올지도 몰라요.”
진지하게 얘기하자, 다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잇지 못했다.
뒤이어 최현이 다가오더니, 대뜸 내 손을 잡았다.
그는 내 기억을 들여다보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거 뭐야.”
“…….”
“이 기억 뭐냐고. 에스파디아는 누구야.”
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언젠가는 얘기하고, 상의해야 할 문제였다.
난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아크를 찾는 게 끝이 아닐지도 몰라요.”
* * *
에스파디아에게 들은 말을 모두에게 들려주었다.
다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내 기억을 들여다본 최현도, 에스파디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명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기에, 그동안 일행에게 숨기고 있었다.
최현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일단 데니의 능력으로 읽을 수 있는 기억이라면…… 재형이가 인지하는 상태에서 경험했다는 건데…….”
“맞아.”
“에스파디아가 라스트아크의 제작자이자 신이고, 그를 재형이 네가 만났다는 거지?”
“그렇지.”
최현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들 알파 변종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였다.
내가 신을 만나고 왔다는 말이나 다름없으니, 그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이야기를 풀어나갈 필요가 있기에, 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얘기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겪고 있는 좀비 사태는 평범한 바이러스의 개념이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