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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189화 (189/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89화

전완수와 설여원은 얼빠진 표정으로 최현을 쳐다봤다.

최현은 일렁이는 화염을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았잖아. 그럼 된 거지.”

“…….”

“지금은 그거에 만족하자고.”

“그건 그렇지만…… 대비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설여원이 묻자, 최현은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뒤이어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우리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여기까지 왔어?”

“했지. 했는데도 이렇게 위험했다는 건 대비가 부족한 거 아니야?”

“어떻게 더 대비해야 되는데?”

“그건…….”

설여원은 말끝을 흐리며 최현의 시선을 회피했다.

최현은 설여원과 전완수의 표정을 살피더니,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금호강 건너에 있을 때, 좀비 시신 태우면서 재형이가 그러더라.”

“…….”

“나한테 한 얘기는 아니고, 재형이가 정우 형한테 해준 얘기지만.”

“뭐라고 했는데?”

“목적지가 안 보이면 그냥 땅만 보고 걸어가래. 그럼 목적지에 도달해 있을 거라고.”

“…….”

“그땐 그게 무슨 말인가 했는데, 지금 보니 그게 맞아.”

최현이 입꼬리를 올리자, 전완수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맞긴 뭐가 맞아? 지금 알파3 상대할 방법 있어?”

“우리 학생회관에 있을 때 기억나?”

감정적으로 나오는 전완수와 달리, 최현은 태연하게 물었다.

전완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더니,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나지.”

“그땐 길거리의 좀비도 무서워서 덜덜 떨었잖아.”

“…….”

“알파 변종 처음 등장했을 때는 또 어떻고?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다들 죽었다고 생각했지?”

최현의 물음에 선뜻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알파 변종이 동아리방 외벽까지 접근했을 때, 모두가 죽음을 떠올렸다.

첫 번째 에피소드 초반에 등장한 알파 변종으로 인해, 다들 공황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최현은 당시를 회상하며 얘기했다.

“스탯 수치만 봐도 우리한테 승산은 없었어. 하지만 이겼잖아?”

“그건 재형이가 있었으니…….”

“재형이는 안 무서웠을까?”

“…….”

“그때는 재형이 신체 능력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어.”

최현의 말에 전완수와 설여원은 함묵하는 모습을 보였다.

생각해 보면 정말 위험천만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최현은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말을 이었다.

“우린 재형이한테 무리한다고 뭐라 하지만, 그게 아니야.”

“무리하는 게 아니면 뭔데.”

“재형이는 본인이 나서야 하는 순간을 아는 거야.”

“…….”

“지금 본인이 나서지 않으면, 여기 있는 사람들 겁에 질려서 아무것도 안 한다, 이걸 아는 거라고.”

최현의 말에 전완수와 설여원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설여원은 이마를 긁적이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현이 말이 맞는 거 같아.”

설여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재형이는 쓸데없이 나선 적이 없어. 최악의 순간에, 다들 공황에 빠졌을 때 제일 먼저 움직였지.”

“그거야.”

“……우리가 위선자네.”

“뭘 위선자까지 가냐.”

최현은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지만, 설여원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 숙였다.

지난 날을 회상하며, 박재형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박재형이 극단적이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막상 그 상황에 마땅한 방책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겁에 질려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을 때, 박재형이 먼저 나선 덕에 다들 움직이기 시작했다.

박재형의 행동은 결코 경솔함이 아니었다.

용기였지.

전완수는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최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야?”

“아무리 대비를 해도 변수 투성이의 세상에 완벽한 대비는 없다고. 이번처럼 버거운 상황이 또 생기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면 되는 거야. 박재형처럼.”

전완수와 설여원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문제를 풀기도 전에 정답지부터 찾으려 하니, 문제 자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비가 아니라, 문제에 봉착했을 때 맞서 싸울 힘이었다.

신체적인 힘이 아니라, 나서서 싸울 수 있는 정신적인 힘.

결국 주어진 현실에 머뭇거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최고의 대비였다.

* * *

이틀간 영화관의 수비를 강화하며 돌아오지 않은 식량 조달팀을 기다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는 없었다.

구미의 생존자들도 슬슬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살아 있는 조달팀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저기…….”

뒤이어 이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정우가 쳐다보자, 이규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재형이는 괜찮은 거 맞아?”

“네, 맥박도 정상이고 호흡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왜 안 일어나?”

“그건……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도 이런 적 있어?”

“과하게 몸을 쓰면 저렇게 기절하는 때가 있었는데, 이번엔 좀 오래 걸리네요.”

박재형은 이틀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양팔이 잘려나가고, 한쪽 다리가 못 쓸 정도로 휘어져 있던 모습이 이정우의 머릿속을 스쳤다.

정신을 잃고 기절하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24시간 동안 기절한 경우는 있어도, 이틀이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규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이 모든 상황이 본인의 탓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이규리는 조심스레 박재형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버스와 중형 트럭에서 가져온 라꾸라꾸와 텐트를 상영관 앞에 설치한 상태였다.

다들 박재형을 걱정하고 있었다.

또한 구미의 생존자들은…… 결인들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그들 때문에 결인들이 고생한 건 사실이니까.

이정우도 이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알고 있기에, 그들이 죄책감을 떨쳐내도록 도와주지 않았다.

본인이 위인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건…… 거만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니까.

용서를 한다면 박재형이 해야지, 본인이 나설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뒤이어 옆에 있던 이덕배가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경로는 정했나?”

“네, 여기.”

이정우는 책상 위에 펼쳐둔 지도를 가리켰다.

구미IC를 타고 대구를 지나 포항으로 이동하는 경로.

이덕배는 구레나룻을 긁적이며 물었다.

“다시 대구를 거쳐서 가는 길인데, 이게 최선이야?”

“국도로 가는 방법도 있는데, 고속도로 올리는 게 가장 안전하니까요.”

“흠…… 칠곡이랑도 가깝고, 대구 북구도 지나가는 길인데 위험하지 않겠어? 우리도 그쪽은 확인한 적이 없잖아.”

이덕배의 물음에 이정우는 손가락으로 지도를 짚으며 얘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국도로 이동하는 것보다 안전할 겁니다.”

“…….”

“고속도로를 타면 여기, 대구 북구IC를 지나갑니다. 주변에 함지산이 있어서 좀비나 변종이 있을 확률이 낮아요.”

“……그런가.”

“그리고 고속도로로 이동하면 휴게소에서 휘발유 구하기도 쉽고, 식량도 챙길 수 있습니다.”

이정우가 자신 있게 얘기하니, 이덕배는 더는 반대하지 않았다.

뒤이어 정진영이 다가오며 얘기했다.

“혜리 본가는 융흥동이래. 포항IC 근처니까, 혜리네부터 확인하자.”

“너는 집이 어딘데.”

“나는 두호동. 영일대 해수욕장 있는 곳.”

“우리 여름마다 놀러 갔던 거기?”

“맞아.”

결인들도 포항 지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바다를 보고 싶을 때마다 영일대 해수욕장을 종종 찾았다.

근처에 예쁜 카페도 많아서, 해안가를 따라 걸으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즐기고는 했다.

이정우는 박재형이 있는 텐트를 쳐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영일대 해수욕장을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박재형이었다.

틈만 나면 놀러 가자고 노래를 부르던 녀석.

여름이면 여름이라서, 겨울이면 겨울바다가 운치있다고, 계절에 상관없이 바다 가는 걸 좋아했다.

이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세상이 망해도 영일대 해수욕장은 가게 생겼네.”

* * *

밥 짓는 냄새가 코끝을 간질인다.

감았던 두 눈을 천천히 뜨며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윽…….”

지끈거리는 두통으로 인해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초점도 맞지 않았다.

몇 차례 눈을 껌벅이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폐부로 들어오는 산소는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 예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다.

학생회관에서 알파 변종을 처리하고, 온종일 기절하고 일어났을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그건 그렇고 여긴…….

라꾸라꾸에서 일어나 천천히 텐트를 열고 나갔다.

그러자 한창 식사 중인 일행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 나 살아 있구나.

찌뿌드드한 몸을 기지개로 풀고, 찢어지게 하품하며 일행의 곁으로 향했다.

“재형아!”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 설여원은 들고 있던 국그릇을 내려놓고 후다닥 달려왔다.

내 전신을 위아래로 훑더니,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모든 일행이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고 내 곁으로 달려왔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 아픈 곳은?”

“팔 안 아파? 제대로 움직여?”

“머리는, 열은 없어?”

꽉 막혀 있던 수문이 열린 듯, 일행의 걱정이 쏟아졌다.

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진정시켰다.

“괜찮아, 괜찮아요. 다들 밥 먹어. 괜찮아.”

손사래 치며 얘기하자,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구미 생존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표정만 봐도, 그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미안함과 죄책감, 고마움, 걱정,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그들의 표정과 몸짓에 묻어났다.

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식사하세요.”

이규리는 눈물을 글썽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인동에서 왔다는 식량 조달팀도, 내게 허리 숙여 인사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 사이로 8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있었다.

이에 고개를 까닥이며 웃어 보였다.

아이도 건강하고, 부모님도 무사하다면 그걸로 됐다.

방현우는 내 곁으로 걸어오더니, 양손으로 내 오른손을 덥석 잡으며 얘기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방현우의 눈가에 고이는 눈물.

오른손으로 느껴지는 온기.

화재 속에서 생명을 구출한 소방관의 마음이 이럴까?

이거면 족하다.

마음이 풍족해지는 지금의 이 느낌.

나를 살아 있게 만든다.

30분 정도 지나자, 다들 격해진 마음이 진정되었다.

일행과 둘러앉아 내가 기절한 동안의 일을 보고받았다.

지난 이틀간 수비를 강화하고, 시체 정리와 청소에 집중했다고 한다.

알파 변종의 뇌는 변수가 많기에, 따로 모아서 깨끗하게 태웠다고 한다.

내가 잠든 새에, 모두가 바삐 움직인 모양이다.

뒤이어 이민정이 다가오며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안 먹어도 괜찮겠어?”

여전히 걱정 가득한 표정.

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요. 지금 정신이 몽롱해서 밥이 안 들어가요.”

그러자 이민정은 계란국을 듬뿍 퍼서 내게 건네주었다.

“밥은 안 먹더라도, 국이라도 마셔.”

“괜찮은데…….”

“이럴수록 뭐라도 먹어야 돼. 억지로라도 먹어.”

이민정에게 감사인사를 전하자, 곧 10대 미만의 아이들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삼촌 괜찮아?”

“아이고, 삼촌 걱정했어?”

“너무 많이 자서 걱정했어.”

내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울상을 지으며 품에 안기는 아이들.

예상치 못한 아이들의 행동에 절로 아빠 미소가 번졌다.

이렇게까지 걱정해 줄 줄이야.

뒤이어 몇몇 아이들이 내게 물었다.

“삼촌, 슈퍼맨은 원래 많이 자?”

“하하! 슈퍼맨은 별로 안 자는데, 삼촌 같은 미남은 잠이 많아.”

함박웃음을 지으며 대답하자, 옆에 있던 전완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혐오감을 담아 내 얼굴을 쳐다봤다.

최현은 눈꼬리를 치켜뜨더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뇌가 아직 재생 안 된 것 같은데?”

“머리는 안 다쳤어.”

“아니야, 너 머리 다쳤어. 지금 뇌세포가 죽어가고 있잖아.”

“…….”

“왕자병 그거 이거 아주 위험한 거야. 상태가 오늘내일하잖아.”

거참, 농담도 못 하나.

하지만 최현과 전완수의 반응 덕에, 관내의 분위기는 금세 밝아졌다.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지금의 따스한 분위기에 녹아들었다.

그래, 나를 버티게 만드는 사람들.

이 사람들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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