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88화
에스파디아의 말에 고개를 들고 섬광을 응시했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강한 자와 나약한 자의 차이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무한한 힘.”
“틀렸다.”
에스파디아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이에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그럼 뭡니까.”
“나약한 자가 할 수 있는 건 원망뿐이지. 세상을 향한 원망, 누군가를 향한 원망. 평생을 원망 속에 살며 타인과 본인을 비교 대조하고 깎아내리기 바쁘다.”
“…….”
“강한 자는 원망하지 않아. 탓하지도 않아. 상황을 바꾸기 위해 처절하게 발악하고, 묵묵히 나아간다.”
“…….”
“죽음을 눈앞에 둔 인간에게 질문을 건네면, 대답에 따라 그들이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
“나약한 자와 강한 자의 차이요?”
눈부신 섬광이 한 차례 점멸하더니, 에스파디아의 말이 이어졌다.
“나약한 자는 죽는 순간까지 누군가를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한다. 혹은 빨리 좀 데려가 달라고 난리를 치지.”
“…….”
“반면에 강한 자는 단 한 마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얘기하지.”
“…….”
“오늘은 아니야.”
에스파디아의 말을 듣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살려달라는 애원이 아니야. 그들의 눈은…… 죽음마저 초월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
“넌 아직 완성되지 않았어. 나약함과 강함의 어딘가. 그러니 멈추지 말고 나아가라. 네가 정한 신념을 따라가.”
“…….”
“게다가 넌…… 너를 도와줄 동료도 있지 않느냐?”
“동료…….”
“내게도 동료가 있었다.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목소리조차 희미한 동료들이.”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처음의 눈부시던 빛이, 조금은 옅어졌다.
에스파디아와 같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어서 그런가?
내게도 아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뒤이어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야. 플레이어 역시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열쇠이자, 파멸의 열쇠이지.”
플레이어는 인간의 편에 설 수도, 좀비의 편에 설 수도 있다.
나아가 변종이 될 수도 있다.
에스파디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나는 인간, 좀비, 변종, 누가 승리하든 관심이 없다. 다만, 소리 없이 자네의 길을 응원하겠네.”
“…….”
“난 질문을 던졌으니, 스스로 선택하고 결과를 만들어보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네 선택을 존중할 테니.”
뒤이어 눈부신 섬광이 내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부유감이 사라지고, 거스를 수 없는 중력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 * *
박재형의 자아가 사라지자, 에스파디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읊조렸다.
“끝까지 발악하거라. 네가 어떠한 형태든, 네가 마주할 미래의 결과는 변함이 없으니 부디…… 최대한…….”
눈부신 섬광이 사라지고, 무형의 공간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찾았다!”
30분이나 이어진 추격 끝에, 설여원은 알파 변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쏜살같이 변종의 머리를 도려내고, 뇌를 파괴했다.
설여원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무전기를 들었다.
“시체 끌고 간 변종 하나 처리했습니다. 다들 어디에요?”
치지직- 치직.
-우리도 처리 완료.
-나도!
무전기로 들려오는 이정우와 전완수의 목소리.
설여원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시체를 끌고 간 모든 변종을 처리했으니, 이제 남은 건 박재형의 안부.
설여원은 다시금 무전기를 들며 얘기했다.
“상황 종료됐으니, 저는 재형이 지원 가겠습니다.”
-1층에서 기다려. 우리도 간다.
-우리도 금방 갈 테니 기다려.
이정우와 전완수의 대답을 듣고 설여원은 뒤에 있는 박재우와 황덕록에게 얘기했다.
“재우랑 덕록이는 위에 가서 다른 사람들이랑 같이 있어줘.”
“우리도 싸울 수 있어.”
박재우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자, 설여원은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야. 올라가는 길에 아직 숨이 붙은 알파 변종 있으면 처리해 줘.”
“…….”
“혜리랑 희연이만 5층에 두는 것도 걱정이고.”
“무슨 일 생기면 무전 쳐.”
박재우와 황덕록이 5층으로 향하고, 설여원은 황급히 1층으로 향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전완수와 최현, 이정우와 정진영이 도착했다.
이정우와 정진영은 상당히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강화제 알약의 지속 시간이 끝나며 신체에 쌓인 충격이 몰려오는 것으로 보였다.
설여원은 두 사람을 쳐다보며 물었다.
“두 분 괜찮아요?”
“괜찮아, 그보다 재형이는?”
“저도 방금 와서 모르겠어요. 빨리 가죠.”
뒤이어 바깥 상황을 살피던 전완수가 입을 열었다.
“야 잠깐, 나가면 안 될 것 같아.”
“왜.”
“좀…… 느낌이 이상해.”
전완수의 대답에 설여원은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그의 옆으로 붙었다.
설여원은 바깥 상황을 확인하더니, 덩달아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아무리 가브리엘의 능력을 지녔어도, 어둠 속의 사물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저 멀리,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인간의 형체가 설여원의 두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옆으로 거대한 덩어리가 쓰러져 있었다.
설여원과 전완수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자, 이정우는 한발 앞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재형아!”
이정우가 목청껏 소리쳤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이정우는 두 주먹을 말아쥐며 뒤에 있는 일행에게 물었다.
“재형이 어디 있어.”
전완수가 박재형이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이정우는 세차게 혀를 차며 그곳으로 달려갔다.
두렵지만, 용기를 내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서서히 박재형의 모습이 나타나자, 이정우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양팔이 잘려 나가고, 다리 하나가 기이하게 꺾인 모습.
이미 빈사 상태나 마찬가지인데, 박재형은 쓰러지지 않고 꼿꼿이 서 있었다.
“재, 재형아.”
말까지 더듬으며 박재형을 부르자, 박재형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가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내면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함만이 느껴지는 표정.
“좀…… 비.”
살아 있다.
아직 살아 있다.
이정우가 박재형의 곁으로 다가서는 찰나, 그의 옷깃을 잡아끄는 손길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자, 그곳에는 잔뜩 겁에 질린 정진영이 서 있었다.
정진영은 박재형의 모습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정신 차려. 급한 건 알겠는데, 아직 좀비화 안 풀렸잖아.”
“…….”
“아직 가까이 가지 마.”
뒤이어 전완수와 설여원, 최현이 다가왔다.
그들도 정진영과 다를 바 없는 표정으로 박재형을 쳐다봤다.
설여원은 눈물을 글썽이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 어떡해, 어떡해…… 재형이 팔, 팔이…….”
“치료할 수 있어. 괜찮아.”
정진영이 침착하게 얘기하자, 이정우도 정신을 다잡으며 얘기했다.
“좀비화 풀리려면 얼마나 남았지?”
“좀비화만 쓴 게 아니에요. 광란도 쓴 거 같아요.”
전완수가 박재형의 모습을 주시하며 얘기하자, 옆에 있던 최현이 카타나를 손에 쥐며 얘기했다.
“다들 뒤로 가.”
최현의 돌발행동에 전완수가 그의 팔을 잡으며 얘기했다.
“미쳤어? 재형이 죽이려고 작정했냐?”
“재형이 뒤를 봐.”
박재형의 뒤에 있는 거대한 덩어리.
아직 죽지 않고,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일그러졌고, 사지는 부러지고 떨어져 나간 상태.
박재형과 마찬가지로, 빈사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행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생사가 오가는 혈투의 흔적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정진영은 박재형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옆에 있는 이정우의 팔을 툭툭 치며 얘기했다.
“정우야, 저기.”
정진영이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자, 박재형의 어깻죽지가 꿈틀거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떨어져 나간 팔이, 더디지만 재생되고 있었다.
뼈와 근육, 피부, 세포 단위까지 재생되고 있었다.
부러진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어? 풀린다, 풀린다!”
전완수의 목소리에 모두가 박재형의 눈을 쳐다봤다.
공허함으로 가득하던 두 눈에, 서서히 흰자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뒤이어 비바람에 쓰러지는 갈대처럼, 박재형은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이정우는 황급히 그의 곁으로 달려가 쓰러지는 박재형을 받았다.
뒤따라온 정진영은 박재형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더니,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얘기했다.
“죽은 거 아니지? 심장 뛰어?”
“뛰어. 그런데…… 맥이 약해. 빨리 치료부터 해야겠어.”
이정우의 대답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설여원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더니,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물었다.
“저기 있는 변종, 저건 어떡하죠?”
“접근해도 괜찮을까? 재형이가 이렇게 됐으면…… 우린 감당 못 할 거 같은데.”
전완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설여원의 곤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고 저렇게 내버려 두면…… 다른 변종이 와서 먹을지도 모르잖아.”
“기다려봐.”
전완수는 카타나를 손에 쥐고 아직 숨이 붙은 알파3의 곁으로 향했다.
간신히 숨이 붙어있는 알파3.
사지가 박살 나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복부와 가슴도 사정없이 찌그러진 상태.
얼굴도 하관이 돌아가고 광대뼈가 함몰됐으며, 치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눈도 잃어서 아무것도 못 보는 것으로 보였다.
전완수는 카타나를 말아쥐며 있는 힘껏 알파3의 머리에 칼끝을 내질렀다.
쯔득!
살점은 뚫고 들어갔지만, 두개골에 칼날이 박혔다.
뽑으려고 하자, 알파3의 상체가 꿈틀거렸다.
전완수는 화들짝 놀라며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설여원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조심스레 알파3의 곁으로 걸어가 두개골에 박힌 전완수의 카타나를 있는 힘껏 쑤셨다.
“흐…… 흐히…….”
알파3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쇳소리에, 설여원은 전신을 부르르 떨며 뒷걸음질 쳤다.
전신에 벌레라도 붙은 듯, 양손으로 팔뚝을 비비며 치를 떨었다.
듣기 거북한 음성을 내뱉으며 꿈틀거리는 알파3의 모습에,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설여원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인상을 찌푸렸다.
“저거 어떡해? 칼이 안 들어가.”
“로그나이트도 못 뚫으면 어떻게 죽이라는 거야?”
최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묻자, 전완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얘기했다.
“이, 이런 걸 주먹으로 때려잡은 재형이가 더 신기한 거 아니야?”
처리 곤란의 적을 두고, 설여원은 옆에 있는 일행에게 물었다.
“우리 휘발유 남은 거 있어?”
“휘발유는 있지.”
“태워보자.”
“탈까?”
“내가 어떻게 알아. 해봐야지.”
전완수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그동안 설여원과 최현은 건물 내에 있는 알파1의 시체를 주차장으로 모았다.
정진영도 뻐근한 몸을 풀며 거들었다.
물론 1관에 있는 일행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도왔다.
그동안 이정우는 박재형을 데리고 버스로 향했다.
생존자들에게 박재형의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아무리 라스트아크를 이해한 생존자라도, 지금의 박재형을 보면 살아 있는 인간이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 * *
수습작업은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주차장에 쌓인 알파1의 시체만 58구, 알파2의 시체는 4구였다.
그리고 시체 더미의 제일 하단에 깔린 알파3.
두개골에 박힌 카타나도 전완수와 최현, 설여원이 힘을 합쳐 간신히 뽑아낼 수 있었다.
불로 죽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화공 외에 없었다.
축시가 넘어선 시각이지만, 거대한 불길로 인해 세상은 환하게 밝아졌다.
설여원은 옷소매로 코를 가린 채 두 눈을 가늘게 뜨고 타들어 가는 시체들을 응시햇다.
제일 밑에 깔린 알파3이 꿈틀거리자, 그 위에 쌓인 시체들이 옆으로 굴러떨어지며 화염의 범위가 넓어졌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알파3.
설여원은 놈이 죽을 때까지 눈을 뗄 수 없었다.
30분이 넘도록 타고 있는데, 알파3이 죽었다는 홀로그램은 떠오르지 않았다.
“괜찮을까?”
뒤이어 전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여원이 돌아보자, 전완수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계속 저런 괴물이 나오겠지.”
“…….”
설여원은 대답 대신 함묵을 택했다.
전완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더니, 설여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가 재형이한테 부담을 주는 거 같아.”
“…….”
“도울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나도 몰라. 2차 각성 시스템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두 사람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마음만 심란해졌다.
뒤이어 발소리가 들려왔다.
전완수와 설여원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싱겁게 웃으며 다가오는 최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초상났어? 둘 다 표정이 왜 그래.”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설여원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최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웃어야지 어떡해. 질질 짜고 있을 수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