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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187화 (187/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87화

알파3은 붙잡힌 왼팔을 뽑아내려 했지만, 박재형의 악력을 떨쳐낼 수 없었다.

훅-!

뒤이어 붙잡힌 왼팔이 빨려 들어갔다.

박재형이 알파3의 왼팔을 있는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6m에 달하는 알파3.

박재형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공격하는 대신, 놈이 저자세를 취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알파3의 상체는 박재형의 힘에 이끌려 앞으로 기울었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놈은 다급히 오른팔을 휘둘러 박재형의 안면을 노렸다.

박재형은 알파3의 오른팔을 직시하며 황급히 가드를 올렸다.

뻑!!!

날카로운 낫 부분은 잘려나갔지만,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기다란 리치.

알파3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황급히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보였다.

피가 철철 흐르던 박재형의 복부가 서서히 재생되자, 알파3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르렁거렸다.

쉽지 않은 적이라는 걸 감지했는지, 섣부른 공격을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박재형의 행동도 이전과 달랐다.

난동을 부리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광란을 중첩 사용한 뒤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선뜻 달려들지 않고 수비적인 자세를 취했다.

알파3이 박재형의 주변을 빙빙 돌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박재형은 놈의 이동 경로를 살피지 않았다.

“으히히!”

알파3이 박재형의 배후를 노리자, 그는 돌아보지도 않고 돌려차기를 가했다.

떡!!

알파3의 왼팔이 부러지고, 동시에 박재형의 오른발이 부러졌다.

눈으로 알파3을 보지도 않고, 놈의 공격을 쳐냈다.

알파3은 잘리고 부러진 두 팔로 인해 절뚝이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에 박재형은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여전히 공허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내면이 텅 빈 것처럼.

육신의 고통에서 벗어나, 껍데기만 이곳에 두고 혼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생기를 찾아볼 수 없는 눈빛이었다.

* * *

‘여긴…….’

낯설지만 익숙한 장소.

칠흑 같은 공간에 나 홀로 뚝 떨어져 있다.

아무런 중력도, 무게도,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장소.

기억의 파편 속에서, 이곳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른다.

여기서 누군가를 만났던 것 같은데…….

뒤이어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섬광이 나타나고, 내게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오랜만이구나.”

낯설지만, 이유 모를 친근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이 목소리…… 기억난다.

“……관리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섬광 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곧 기억의 파편이 하나둘 완성되기 시작했다.

금호강 건너에서 알파2에게 아랫배를 물어뜯기고, 발밑에서 수류탄이 터질 무렵…… 이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당시 내 앞에 나타난 존재.

라스트아크를 제작한 신이자, 차원을 창조하는 존재라 얘기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금 섬광을 바라보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스파디아, 그게 내 이름이다.”

난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설마, 제가 죽은 겁니까?”

“살아 있어.”

“그럼…… 제가 왜 여기 있어요?”

“데려오지 않았다. 네가 찾아온 거지.”

내가 찾아왔다고?

전혀 그런 의도는 없었다.

얼빠진 표정으로 섬광을 바라보자, 곧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이곳에 왔다는 건…… 내가 준 힘을 무리하게 남용했다는 뜻이지.”

“…….”

“그 또한 너의 선택이겠지.”

“아니 난이도를 적당히 올려야죠. 무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놓고…….”

“인간의 편에서 얘기하는구나.”

“그럼 제가 좀비 편을 들까요?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따지듯이 묻자, 섬광 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난 누구의 편도 아니야.”

“…….”

“종의 균형을 바랄 뿐.”

“당신이 만든 세상에 밸런스 자체가 없는데 균형은 무슨 얼어 죽을 균형이요?”

진심을 담아 짜증 내자,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지나지 않아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네가 선택한 정의를 관철하면 돼. 네가 인간의 편에서 싸우겠다면 인간의 편에 서면 된다. 너를 나무라지 않아.”

“최종적으로 당신이 바라는 게 뭐예요? 저번에 그랬잖아요. 다음번에 만나면 얘기해 주겠다고.”

“너는…… 좀비가 나쁘다고 생각하나?”

그럼 좀비가 착해?

어이가 없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래,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자고.

에스파디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먹이사슬의 바깥에 있던 인간이 먹이사슬 피라미드에 들어왔을 뿐이다.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좀비와 변종에게 빼앗기고 밀려났을 뿐.

이걸…… 어떻게 긍정적으로 생각하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객관화가 안 되네. 왜 좀비를 만든 거예요? 인간의 생사는 관심도 없는 겁니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다.”

“……뭔데요.”

“아크를 찾는 것만이 끝이 아니야.”

에스파디아의 말에 마른침이 넘어갔다.

아크가 끝이 아니라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게임에서는 아크에 들어서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갔다.

하지만 지금은?

두 번째 에피소드의 클리어 조건만 봐도, 아크의 비밀을 확인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에스파디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가 플레이했던 라스트아크는 튜토리얼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당신…… 뭔가 있죠? 나한테 숨기는 거 있잖아요.”

“…….”

“균형을 그렇게 좋아하는 분이, 좀비랑 변종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돼요.”

“…….”

“관찰자 입장에 있던 당신이, 직접 자연의 순리에 개입하고 균형을 깨뜨린 거잖아.”

진지하게 묻자, 에스파디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내 말이 틀려요?”

“반박할 수 없구나. 그래, 좀비와 변종은 내가 직접 자연의 순리에 개입하여 창조한 존재.”

이렇게 순순히 인정한다고?

뒤이어 에스파디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인간이든 좀비든 변종이든, 내게는 소중한 자산이다.”

자산이라고?

인간과 좀비, 변종을 자산이라 부를만한 일이 뭐가 있지?

오직 폭력성만을 지닌 좀비와 변종이 무슨 자산…….

‘잠깐, 자산?’

폭력성이 자산이 되는 상황은 하나뿐이다.

전쟁.

문득, 에스파디아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크를 찾는 것만이 끝이 아니야.

내게 얘기하지 않은, 얘기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모양이다.

질문을 해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계속해서 대답을 회피하는 것만 봐도, 아직은 진실을 밝힐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럼 그 외의 것들이라도 알아내야지.

직설적으로 물으면 대답을 회피하니, 최대한 에둘러 물었다.

“그건 그렇고, 제가 여기 있다는 건…… 저는 지금 어떤 상태인 거예요?”

“네 육체는 또 다른 자아가 머무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또 다른 자아요?”

“나와 마주하고 있는 넌, 네가 지닌 자아 중 하나의 조각일 뿐이야.”

내 자아가 여러 조각이라고?

프로이드의 자아, 초자아, 원초아를 말하는 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에스파디아의 설명이 이어졌다.

“본능과 무질서, 폭력성을 지닌 자아가 자네의 육체에 남아 변종과 싸우고 있네.”

“원초아를 말하는 겁니까?”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그렇지.”

초조한 마음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가 알파3에게 지면 어떡해요. 제 원초아가 알파3에게 패배하면…… 저도 죽는 겁니까?”

“그럼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다니?”

에스파디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빨리 돌려 보내줘요.”

“못 돌려보내.”

“네?”

“지금 네 육체에, 네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이건 또 무슨 말이야?

어벙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에스파디아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만든 좀비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잠재된 폭력성과 파괴본능을 끌어냈을 뿐이야. 네가 말한 원초아를 발현시킨 거지.”

“…….”

“넌 그걸 좀비화라는 스킬을 통해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지만, 광란이 터지면 어떻게 됐지?”

“……이성을 잃었어요. 기억의 일부도 날아가고.”

“주체가 되는 자아가 무의식에 밀려, 의식과 무의식이 완전히 뒤바뀐 탓이지. 광란을 사용한 넌 원초아에게 몸을 내어준 거야.”

“…….”

“그리고 방금, 광란을 중첩 사용하면서 네 원초아가 의식과 무의식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어. 무의식마저 원초아가 자리 잡았으니, 지금의 네가 들어갈 공간은 없다.”

“그럼 어떡해요?”

“좀비화가 풀리길 기다려야지.”

“……여기서 마냥 기도나 하라고요?”

“맞아.”

에스파디아의 대답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왜 그런 시스템을 도입한 겁니까? 광란의 중첩사용, 그런 걸 왜 만든 거예요?”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억울한 마음에 호소하자, 에스파디아는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넌…… 내가 만든 가상의 게임, 라스트아크를 클리어한 플레이어니까.”

“……예?”

“클리어한 사람에게 특전은 줘야지. 네가 죽는 건 나도 아쉬우니까.”

“광란이 특전이라고요?”

“네 성장보다 시스템의 성장이 지나치게 빠르면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마련한 방파제라고 생각하게.”

“만약 연달아 중첩사용을 남발하고, 10회를 채우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럼 지구상에 인류는 사라지겠지.”

인류가 사라져?

나 하나 없다고 인류가 사라질 수 있나?

다른 플레이어들이 클리어할 수도 있는 거잖아.

이 부분을 묻자, 에스파디아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들이 클리어하지 못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야. 네가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중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거지.”

“…….”

“인류를 지키고 싶다면 꾸준히 강해지게. 네가 나태하게 행동하면 강한 적이 나타날 때마다 광란은 중첩 발현될 것이고, 그 결과는 종말이네.”

즉 광란이 10회 발동되면…… 나도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 아닌가?“

광란은 나와 내 일행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자,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스킬이라는 거야?

그리고 강한 적?

알파3보다 강한 놈이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잠깐, 그렇다면…… 좀비들의 상태는 뭐지?

원초아가 육체를 지배하고, 자아는 무의식에 갇혀 있는 건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인 거야?

이 부분을 에스파디아에게 묻자, 그는 고개를 저으며 얘기했다.

“너와 달라.”

“네?”

“내가 자연의 순리에 개입하고, 인간의 원초아를 자극하는 안개를 만들었을 때, 그들의 생은 거기서 끝났네.”

“본래 상태로 돌아갈 방법도 없어요?”

“그건 죽은 사람을 살리라는 말이나 다름없지. 그들의 자아는 이미 파괴됐어.”

눈부신 빛이 한 차례 일렁이더니, 에스파디아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인간을 살리기 위해 안개를 퍼뜨린 게 아니야.”

“그럼 다른 게임도 많은데, 굳이 좀비 괴수물을 기반으로 게임을 제작한 이유가 뭐예요?”

“접근성을 높이기 위함이지.”

접근성?

인간에게 좀비라는 설정은 익숙하니까?

아니야, 그런 단순한 문제가 아닐 거야.

난 에스파디아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 접근성이라는 말, 다른 의미가 있는 거죠? 단순히 인간에게 좀비가 친숙해서 그런 게 아니죠?”

“…….”

“당신이 말하는 접근성이 친숙함이라면, 변종은 나올 필요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넌…….”

에스파디아는 말끝을 흐렸다.

대답을 망설이는 건가?

뒤이어 눈부신 섬광 속에서 경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아직 준비가 안 됐다.”

에스파디아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지금의 좀비 사태는 제가 감당할 준비가 된 줄 알아요?”

“게임으로 튜토리얼을 만들어주지 않았느냐.”

“그게 무슨 도움이 된다고요? 난이도부터 설정까지 전부 바꿨으면서!”

“이겨내지 못한다면, 그 종은 살아남을 자격이 없는 거지. 고작 내면의 폭력성에 지배되는 종족이 아닌가?”

“…….”

“너희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기 위해 튜토리얼을 만들어 준 것에 감사하거라.”

열 받는다.

본인이 망쳐놓고 감사하라고?

죽을병을 주고, 실낱같은 희망의 약을 주면 우리가 좋아할 것 같아?

하지만 이러한 속내를 드러낼 수 없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존재는 신이니까.

내가 아무리 화를 내도, 변하는 건 없다.

난 시선을 회피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그래도 너무하잖아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놓고.”

“사람이 상황을 만드는가, 아니면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가?”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를 묻는 거면 됐습니다. 그걸 누가 알아요.”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섬광 속에서 인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억겁의 세월 동안 인간을 관찰했다네. 그리고 깨달은 것은 하나.”

“…….”

“강한 자가 상황을 만들고, 나약한 자는 복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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