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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176화 (176/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76화

이정우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 기능이 있다고요?”

“어, 내가 얘기 안 했나?”

“안 했어요.”

“진짜?”

이정우는 본인이 더욱 놀랐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모두가 이정우를 쳐다보자, 그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미안하다. 공격대 얘기할 때 한 줄 알았네.”

서운한 건 사실이지만 뭐, 이정우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다.

서로 20㎞ 이상 떨어진 적도 없으니, 지금껏 설명의 필요성을 못 느꼈을 것이다.

당장 생명에 지장이 가는 문제는 아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또한 예전의 나도 저런 실수를 종종 했기에, 그를 나무랄 수 없었다.

앞으로 조심하면 되지.

곽찬혁은 이정우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이제 이런 풍경도 한동안 안녕이네요.”

“잠시만요, 아직 할 일이 남았잖아요.”

그 순간, 부엌에 있던 설여원이 오른손을 번쩍 들며 얘기했다.

곽찬혁은 설여원을 쳐다보며 가벼운 턱짓과 함께 얘기했다.

“어 여원아, 얘기해.”

“기억 안 나요? 처음 수성못에서 찬혁 오빠가 했던 얘기.”

곽찬혁은 천장을 쳐다보며 기억의 강을 거슬러 올랐다.

하지만 기억이 가물가물한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뭐였지? 기억이 안 나.”

설여원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재형이 너도 기억 안 나?”

“어…… 음…….”

각성 퀘스트 완료하고 배 터질 때까지 맘껏 먹기?

아닌데, 그건 이미 했는데.

전완수와 최현을 쳐다보자, 둘은 불똥이 튀지 않도록 일찍이 시선을 회피한 상태였다.

그러자 설여원은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축가 부를 준비해야지.”

“아.”

그래,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여원의 입에서 나온 말에, 곽찬혁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한지현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곽찬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축가? 누구 축가.”

설여원은 세상 해맑게 웃으며 얘기했다.

“누구긴요. 언니랑 찬혁 오빠죠.”

* * *

다음 날, 쉘터 황금동은 결혼식 준비로 바빠졌다.

간만에 들려온 희소식에, 모든 생존자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식장은 수성 호텔의 예식장.

근방의 모든 좀비가 정리된 상태라서, 이동에 불편함이나 어려움은 없었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나는 덥수룩한 수염을 깎고 머리를 손질했다.

비록 세상은 망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예를 갖추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근처 양복점에서 몸에 맞는 정장을 입고, 긴장되는 마음을 심호흡으로 달랬다.

“삼촌! 우리는 이거 던지면 되는 거예요?”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다가왔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신부가 입장할 때 아이들이 꽃잎을 뿌려줄 것이다.

무슨 꽃인지 몰라도, 거리에 있는 형형색색의 꽃잎들이 바구니에 담겨 있었다.

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얘기했다.

“던지는 게 아니라, 살며시 놓고 온다는 느낌으로 뿌리는 거야.”

“이렇게요? 이렇게?”

“그렇지, 옳지 잘한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보며 덩달아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런 때 묻지 않은 미소를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재형아, 준비됐어?”

뒤이어 기타를 들고 들어오는 이정우와 정진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이정우는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얘기했다.

“아, 이거 긴장되네.”

“좀비도 잡는 사람이 이런 거로 긴장하면 쓰나.”

“이마에 땀이나 닦고 말해.”

“땀은 무슨, 엥? 땀이네?”

이정우와 정진영의 만담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래, 예전 동아리방에서 봤던 풍경.

오늘만큼은 좀비든 변종이든, 멸망이든 클리어든, 모든 것을 잊고 즐겨야겠다.

준비를 마치고 예식장 앞으로 향하자,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한지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 생존자들의 축하 인사를 받고 있었다.

한지현은 나를 발견하고 오른손을 흔들더니, 환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너희가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는 줄은 몰랐네. 고마워.”

“저희가 준비했나요. 찬혁이 형이 계획하고, 다 같이 준비한 거지.”

“그래도, 전부 너희 덕이야.”

한지현은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갑작스레 눈시울을 붉혔다.

“어우…… 주책이네.”

뒤이어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시작도 하기 전에 참…….

그러자 한지현의 뒤에 있는 설여원이 얘기했다.

“어허! 남자들 어서 가! 신부님을 울리면 쓰나!”

설여원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한지현은 웃음을 터뜨리며 얘기했다.

“괜찮아, 괜찮아. 다들 고마워.”

한지현의 모습을 보고 나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행복해서 우는 모습은…… 보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었다.

난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제가 축의금은 없지만, 성심성의껏 노래하겠습니다.”

“축가도 불러주는데 무슨 축의금이야. 식권도 없는데.”

“아 맞네? 밥도 없네!”

일부러 멍청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하자, 한지현은 호쾌하게 웃으며 얘기했다.

“재형이 너 그런 표정도 있었니? 만날 미간에 힘주고 있어서 몰랐다 야.”

“오늘은 웃음만 가득해야죠.”

“…….”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고마워, 진심으로…… 아! 너희도 사진 찍어야지.”

“사진이요?”

카메라는 없을 텐데?

그러자 설여원이 앞으로 나오며 얘기했다.

“짜잔.”

폴라로이드 사진기.

저건 어디서 구한 거지?

하긴, 황금동 쉘터는 1000세대가 훌쩍 넘는 대단지 아파트였다.

어디든 폴라로이드 사진기 하나가 없을까.

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지현의 옆에 섰다.

그 뒤로 이정우와 정진영이 서자, 저 멀리서 결인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야! 우리 빼고 찍냐?”

전완수가 투정 부리기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어서 오라고 손짓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설여원이 셔터를 누르자, 흑백의 사진이 출력되었다.

2분 정도 기다리자, 환하게 웃는 한지현과 결인들의 얼굴이 사진으로 나타났다.

뒤이어 예식장 안에서 강요한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이 시작될 예정이니! 하객 여러분은! 자리에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는 강요한이, 주례는 이덕배가 서게 되었다.

설여원과 한지현, 이민정과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예식장 밖에 남고, 모든 생존자가 식장으로 들어갔다.

감빛의 하늘이 서서히 검푸른 색으로 물든 시각, 식장에 촛불이 켜지고 곽찬혁과 한지현의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한때 피아노 좀 쳤다는 윤혜리가 입장곡을 연주하자, 당찬 걸음의 곽찬혁이 들어왔다.

하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예식장을 가득 채웠다.

“신부, 입장.”

강요한의 말에 모든 생존자가 입구를 쳐다봤다.

문이 열리고,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한지현이 걸어 들어왔다.

이민정이 웨딩스레스의 하단을 잡아주고, 아이들이 꽃길을 깔아주었다.

설여원은 연신 사진을 찍으며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세상 그 어떤 결혼식보다 활기차고, 많은 사람의 진심 어린 축하가 쏟아진 결혼이었다.

* * *

식이 끝나고 단체 사진까지 찍은 뒤, 다 같이 버스와 이삿짐 트럭을 타고 황금동 쉘터로 돌아왔다.

결혼식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좀비카였지만, 지금의 모순된 그림마저 예뻐 보였다.

모든 사진이 폴라로이드 사진이지만, 한지현은 기뻐했다.

이 순간을 추억할 수 있는 사진을 남겼다는 사실에 만족하는 모습을 보였다.

모든 사진에 사람들의 생기가 담겨 있었다.

한지현은 폴라로이드 사진을 품에 꼭 안으며 얘기했다.

“내 보물 1호.”

“사진이 보물이에요? 전에는 뭐였어요?”

싱겁게 웃으며 묻자, 한지현은 왼손을 보여주며 얘기했다.

“이거.”

곽찬혁이 프러포즈하며 건넨 반지였다.

그러자 곽찬혁은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내 반지보다 사진이 더 좋아?”

“당연하지.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증거잖아.”

곽찬혁은 옹졸한 표정을 짓더니,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지현은 모든 생존자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여러분! 오늘은 즐기죠! 창고 대방출!”

“와아아아아!”

그래, 피로연은 즐겨야지.

그동안 아껴둔 냉동식품도 조리하고, 식당의 중앙에는 작은 무대도 만들었다.

먹고 마시고 즐기며, 어르신들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이 무대 위로 올라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정우와 정진영의 합주도 듣고, 설여원과 전완수의 듀엣곡도 들을 수 있었다.

매일이 오늘만 같기를.

월! 월!

장군이는 세차게 꼬리를 흔들며 헤벌쭉 웃었다.

이제 성견이나 다름없는 크기.

웬만해서는 짖지 않는 장군이도, 신명 나는 분위기에 한껏 들뜬 모습을 보였다.

장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한 표정으로 일행을 바라보자, 뒤에 있던 여자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얘기했다.

“너도 한 곡 뽑아. 아까 축가 들어보니 노래 잘하던데.”

김희연의 친언니 김서연이었다.

이에 격하게 손사래 치며 얘기했다.

“어우 아니에요. 저는 장군이랑 있을게요.”

“장군이도 같이 가면 되지. 가자!”

김서연은 내 팔꿈치를 잡고 무대로 끌고 갔다.

결국 장군이와 함께 엉덩이를 씰룩이며 신명 나는 노래를 뽑았다.

부끄럽지만, 즐거웠다.

티끌의 근심 걱정도 없이, 광대가 아플 만큼 실컷 웃을 수 있었다.

* * *

행복이란 말로도 부족한 하루가 저물고, 마침내 이별의 아침이 밝았다.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는 생존자들이지만, 평소와 달리 말수가 많지 않았다.

다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과 같을 것이다.

박재우와 황덕록은 설치했던 프린트를 회수하고, 옥상에 설치한 태양광 패널도 전부 버스에 실었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식당에 있던 생존자들은 모든 식판과 식량을 이삿짐 트럭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쉘터에 있던 모든 사람이 대로로 모였다.

일찍이 달성공원의 생존자들은 곽찬혁을 따라가기로 했다.

다만 황덕록의 어머니는 우리와 함께하기로 했다.

또한 황금동 쉘터의 유일한 의사, 이신혜도 우리와 함께하기를 청했다.

-한슬기 씨랑 아기를 챙길 사람도 있어야죠.

이게 황덕록의 어머니와 이신혜가 합류한 이유였다.

이신혜는 레이첼의 존재로 인해 그동안 의사라는 직업에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새 생명을 받고, 한슬기와 아기를 돌보며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레이첼의 능력으로도 할 수 없는, 본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우리와 함께하기를 청했다.

이민정은 돌봐야 하는 아이들이 많기에, 혼자 한슬기와 아기, 아이들까지 돌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황덕록의 어머니, 그리고 이신혜의 합류를 찬성했다.

곽찬혁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중에 다시 만나요.”

애써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하자, 곽찬혁도 덩달아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꼭 살아서 다시 보자.”

우린 악수와 포옹을 나누며 잠깐의 이별을 고했다.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다.

다시 만나는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먼저 가라고 했지만, 황금동 생존자들은 우리가 떠나야 걸음이 떨어질 것 같다며 먼저 가라고 했다.

결국 우리가 먼저 차량에 탑승했다.

난 전완수와 함께 버스에 탑승하며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다 챙겼죠? 두고 오는 거 없죠?”

“하나도 빠짐없이 다 챙겼어.”

이덕배의 자신 있는 대답을 듣고, 난 전완수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가자.”

전완수는 비상등을 점멸하며 준비 완료 신호를 보냈다.

뒤이어 승합차와 중형 트럭, 중형차까지 비상등을 점멸하자, 전완수는 기어를 바꾸며 서서히 액셀을 밟았다.

“조심해서 가!”

“몸조심해요!”

“아크에서 다시 만나요!”

저 밖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드미러로 사람들의 모습을 살피자, 안개 속에서 서서히 흐려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0명이 넘는 사람이, 우리를 향해 양손을 흔들며 배웅해 주고 있었다.

흐려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내심 기도했다.

모두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기를.

* * *

“저기가 파동IC야?”

“그런 거 같은데?”

전완수는 C구역 바리케이드를 벗어나자마자 수성못 방면으로 핸들을 틀었다.

이정우의 본가는 구미 신평동이라고 했다.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가는 방법은 당연히 고속도로를 타는 것.

수성못 주변은 이미 좀비 정리가 끝났기에, 수성못 남서쪽에 있는 파동IC를 타기로 했다.

파동IC를 타고 고속도로로 올린 뒤, 구미IC에서 빠져나가는 게 현재 계획이었다.

구미톨게이트를 빠져나가면 바로 앞이 신평동이기에, 경산과 대구에 비해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으리라 예상된다.

부디 이정우의 부모님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또다시 기약 없는 여정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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