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73화
박재우는 프린트의 상태를 확인하며 얘기했다.
“내가 신기한 거 알려줄까?”
“뭐?”
“고도로 발달한 첨단기술 물건 같은데, 이것도 220v야.”
박재우는 싱겁게 웃으며 저 뒤에 있는 배터리를 가리켰다.
잡다한 선들이 프린트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동안 태양광 패널을 4단지 옥상에 설치하고 계속해서 전력을 모은 덕에, 프린트 가동에 지장이 없었다.
용해, 단조, 압연 과정을 전기만 있으면 할 수 있다니.
프린트 내부를 뜯어서 하나하나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였다.
박재우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얘기했다.
“내일이면 라스트아크 무기 생기는 거야.”
이용권 상점에서 판매하는 무기.
이용권 2장, 혹은 3장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무기들은 대부분 검과 방패였다.
이를 이용권 없이 제작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다들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박재우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이, 공책을 펼치며 얘기했다.
“카타나 만든 뒤에 보호대도 만들어야 하니, 설계도는 내가 열심히 만들어 볼게.”
“그…… 나는 지현 언니한테 부탁해도 될까?”
뒤에 있던 설여원이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며 물었다.
박재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설여원은 헛기침과 함께 얘기했다.
“아무리 그래도 재우 네가 내 사이즈 재는 건 좀…….”
“어어, 그래.”
박재우는 곽찬혁의 옆에 있는 한지현을 쳐다봤다.
한지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박재우가 건네는 줄자를 들고 저 멀리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설여원이 그 뒤를 따라가자, 전완수는 혀를 끌끌 차며 얘기했다.
“우리가 하루 이틀 붙어 지낸 것도 아닌데 뭐 그런 걸 부끄러워하냐.”
그러자 옆에 있던 최현이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네가 그래서 여자 친구가 없는 거야.”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응 상관 있어.”
“응 없어.”
“응 있어. 네가 솔로인 게 그 증거.”
최현이 팩트로 때리자, 전완수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 * *
설여원이 돌아오고, 우린 무기를 들고 바리케이드 밖으로 나섰다.
도보로 달성공원까지 이동하려면 얼마나 걸릴까?
대략 8㎞는 넘으니, 평범한 인간이라면 2시간 이상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인간의 범주.
설여원과 전완수가 선두에 서고, 그 뒤에 내가 붙었다.
최현과 정진영, 황덕록이 후방을 담당하며 속도를 높였다.
현재 시각은 12시 10분.
5시간 이내에 달성공원 주변 탐색을 마치고 돌아올 것이다.
우린 빠른 경보로 황금네거리를 지나 북쪽으로 이동했다.
크르르르르…….
가장 먼저 어린이회관역 근처에 다다르자,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스치기 시작했다.
설여원은 좀비들의 위치를 살피더니, 빠르게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좌측에 셋, 우측에 다섯, 정면에 열둘.”
“정면에 있는 좀비들 거리는.”
“대략 40m. 우리 체취 맡았을 거야.”
“좌측은 여원이가 맡아줘. 우측은 완수가 담당하고. 현이, 덕록이, 진영이 형은 상황 봐서 움직여줘요.”
간략하게 지시를 내리며 40m 전방으로 달려나갔다.
크어어어어!
거리를 거닐던 좀비들은 인기척을 느끼고 일제히 이곳을 쳐다봤다.
이번 여정의 목표는 황덕록의 부모님 구출.
하지만 달성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또 다른 목표도 포함되어 있었다.
각 캐릭터의 스킬 확인.
안개 너머로 나타나는 좀비들의 인영을 확인하고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속.”
쾅!
지면을 박차며 쏜살같이 좀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크어어어!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좀비.
난 두 주먹을 말아쥐며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놈의 흉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팡!!!
공기가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좀비의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었다.
아니, 몸통이 터졌다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이건…… 가히 폭탄을 체내에서 터뜨린 것과 비슷한 효과였다.
스킬 급가속의 레벨이 5에 도달하면서 생성된 옵션.
-‘일격’ 효과가 생성됩니다.
-‘일격’은 급가속 발동 중에 처음 공격하는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스킬 사용자에게 피해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치명적인 피해.
반면에 내게는 아무런 타격도 오지 않았다.
좀비의 흉부에 주먹이 닿는 순간 무언가가 손끝으로 방출되는 느낌이 들었을 뿐, 타격감이나 저릿한 진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스킬의 힘인가?
스킬 급가속을 사용하면 공기의 저항이 사라지고 누군가가 전신을 밀어주는 느낌이 들더니, 일격도 이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느낌.
크어어어어!
놀랄 새도 없이 양옆에서 달려드는 좀비들로 인해, 재빨리 하체를 접으며 가드를 올렸다.
뻑! 퍽! 떠걱- 떡!
가볍게 주먹을 휘두르며 좀비들의 안면을 일사불란하게 깨뜨렸다.
확실히 느낌이 다르다.
지금은 좀비들의 뼈마디를 으그러뜨리며 뚫고 들어가는 느낌이라면, 일격은 폭발의 느낌에 가까웠다.
마치 손끝에서 발사되는 장풍처럼 말이다.
뒤이어 설여원이 내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방금 그 소리 뭐야?”
“새로 배운 스킬.”
“새로 배운 스킬? 에덤도 스킬 상점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스킬을 강화했더니 새로운 옵션이 생겼어.”
“방금 그게 옵션이라고?”
설여원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전완수가 다가오며 얘기했다.
“둘 다 얘기는 그만하고, 좀비들부터 처리하지?”
“아직도 다 못 죽였어?”
전완수를 쳐다보며 묻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방금 누가 쩌렁쩌렁한 소리 내서 골목에 있는 좀비들이 자극받았지?”
“아.”
크어어어어…….
멀찍이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육성에, 난 골목을 응시하며 가드를 올렸다.
설여원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좀비들의 숫자를 살피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못해도 200마리.”
“오른쪽 골목은 내가 담당할게. 큰길은 완수랑 진영이 형이 담당해 줘요.”
전완수와 정진영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큰길로 나아갔다.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얘기했다.
“좌측 골목은 나랑 현이, 덕록이가 맡을게.”
“부탁한다.”
“뭘 이 정도로.”
설여원은 두 주먹을 말아쥐며 좀비들에게 달려들었다.
이젠 헌팅 나이프가 불편한지, 설여원도 주먹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혹은 좀비들의 살점이 헌팅 나이프로 깨끗하게 잘리지 않아서, 무기 대신 주먹으로 잡는 것 같다.
전동 칼갈이로 몇 번이고 갈았지만, 헌팅 나이프는 예전만큼 예리하지 않았다.
두께도 많이 얇아지고, 좀비의 뼈에 칼날이 걸리면 잘 빠지지도 않았다.
추후 로그나이트를 더 얻으면, 설여원이 사용할 수 있는 헌팅 나이프도 하나 만들어달라고 해야겠다.
* * *
쉴 새 없이 좀비들을 처리하며 나아갔다.
대봉교를 건너 건들바위역을 지나고, 마침내 명덕역에 도달한 뒤에야 휴식 시간을 가졌다.
우린 사거리에 위치한 이름 모를 빌딩 7층에서 숨을 가다듬었다.
최현은 얼굴에 묻은 좀비들의 혈흔을 털어내며 지도를 펼쳤다.
“덕록아, 너희 부모님 가게 위치가 아니야?”
“달성공원역 앞에 오토바이 거리 있어. 그 근처야.”
“오토바이 거리?”
최현은 지도를 살피더니, 어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얘기했다.
“여기네. 오토바이 거리면.”
난 양손에 묻은 좀비들의 혈흔을 바지에 슥슥 문질러 닦으며 지도를 살폈다.
거의 다 왔다.
그러자 설여원은 손목 보호대의 내구도를 살피며 물었다.
“점점 좀비들이 많아지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가?”
“시내 근처라서 그래.”
전완수는 화장실에서 퍼온 물로 열기를 식히며 얘기했다.
설여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시내 근처?”
“명덕부터는 시내로 봐야지. 길 따라서 북쪽으로 가면 반월당이고, 그 위가 중앙로야.”
“중앙로면 부회장이 있던 곳 아니야? 이미 정리된 거 아니었어?”
“생존자만 정리하고 좀비는 내버려 뒀나 보지.”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최현에게 쏠렸다.
최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기억을 들여다본다고 그 지역 상황을 전부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상황을 지켜보던 정진영은 손목 보호대를 만지작거리며 얘기했다.
“일단 내구도부터 복구하고 이동하자. 재형이 빼고는 다들 바닥 아니야?”
일행의 보호대는 대부분 30% 미만으로 내려간 상태였다.
1레벨 보호대의 내구도를 전부 복구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전완수는 습득한 코인을 확인하며 얘기했다.
“와…… 오는 길에 360코인이나 획득했는데?”
360코인이면 좀비만 3,600마리를 잡았다는 말이 된다.
한 번에 3,600마리를 상대하는 건 무리지만, 순차적으로 상대했기에 일행도 내구도를 확인하며 싸울 수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주변 정찰 좀 하고 올게요.”
“무슨 정찰이야. 그냥 있어.”
정진영이 오른손을 휘휘 저으며 얘기하기에, 난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3호선 따라서 이동하는 게 안전한지, 반월당 쪽으로 가는 게 안전한지 알아보고 올게요.”
그러자 최현이 입을 열었다.
“지도로 보면 반월당으로 가는 게 빠르긴 해.”
“그건 나도 알아. 문제는 반월당부터 진짜 시내잖아. 좀비들이 바글바글할지도 몰라.”
“혼자 가려고?”
“괜찮아, 아직 팔팔하니까. 다들 쉬고 있어.”
현재 내 체력 스탯을 수치로 환산하면 42.
일행보다 2배 가까이 높다.
보호대의 내구도도 여유 있고, 길목만 확인하고 돌아오면 큰 위협은 없을 것이다.
크어어어어…….
그 순간, 창밖에서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좀비의 울음소리를 들었는지, 창밖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여원은 창문을 열고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어느 한 지점을 응시하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까지 더듬으며 얘기했다.
“야, 저, 저기.”
설여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3호선 레일을 따라 이곳으로 달려오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족히 400m는 떨어진 거리.
생존자만 20명은 넘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들을 뒤쫓는 좀비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황덕록은 창밖의 상황을 응시하더니, 곧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외쳤다.
“자, 작업복!”
“뭐?”
“제일 뒤에 있는 사람 우리 엄마 작업복이라고!”
황덕록의 말을 듣고 7층에 있던 일행은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난 가장 먼저 계단으로 내려가며 외쳤다.
“따라와!”
* * *
크어어어어어!!
좀비들의 육성이 발치에서 들려오자, 생존자들은 기겁하며 뒤를 돌아봤다.
끝을 알 수 없는 좀비들이 남산역을 통해 3호선 레일로 올라오고 있었다.
“엄마, 엄마아!”
“괜찮아, 괜찮아 아가.”
아이들은 부모님의 품에 안긴 채 울음을 터뜨렸다.
생존자들의 대표로 보이는 40대 후반의 여자는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접근하는 좀비들을 레일 밖으로 떨어뜨렸다.
“다들 속도 높여! 이러다 잡혀!”
여자의 외침에 앞서가던 생존자들은 이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좁은 폭의 레일 위에서 전속력으로 달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아이들까지 품에 안고 달리는 건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러자 흰머리가 가득한 어르신들이 걸음을 멈추며 외쳤다.
“자네들 먼저가!”
“아버님!”
앞서가던 여자가 흰머리 가득한 할아버지에게 외치자, 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우리 손주 잘 챙겨! 손 꼭 잡고!”
“아버님 그냥 와요! 빨리!”
“황가네 얘기 못 들었어? 이러다간 다 잡힌다잖아!”
할아버지들은 들고 온 철근을 쭉 뻗으며 레일을 따라 달려오는 좀비들을 저지했다.
그어어…… 그어어어…….
뒤이어 지면에서부터 좀비들의 공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맞은편 명덕역에서도 좀비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생존자들은 주저앉고 말았다.
진퇴양난의 상황.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인도하는 대로, 두 눈을 지그시 감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부모님들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뒤이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괜찮아,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크어어어어어!!
명덕역에 들어찬 좀비들은 생존자들이 있는 곳으로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레일 위에서 균형을 잃고 떨어지는 좀비들도 있고, 서로 먼저 가겠다고 아등바등 몸싸움하는 놈들도 있었다.
이윽고 명덕역에서 접근하는 좀비들과 생존자들의 거리가 10m 안팎으로 줄어드는 찰나.
훙-
쾅!!
레일 위로 떨어지는 무언가.
아이를 품에 안고 있던 여자는 놀란 눈으로 눈앞의 존재를 응시했다.
눈앞의 남자는 좀비들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가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