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72화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황덕록을 구타했다.
물론 심하게 때린 건 아니고, 팔뚝과 등짝에 선명한 손바닥 자국을 안겨주었다.
황덕록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맞으면서도 연신 헤벌쭉거렸다.
정진영은 혀를 끌끌 차며 얘기했다.
“우리 여태 뭐한 거야?”
“뭐하긴요. 대명동 좀비들 깨끗하게 정리한 거죠.”
싱겁게 웃으며 대답하자, 설여원은 황덕록의 볼을 꼬집으며 얘기했다.
“이이이놈! 걱정했잖아!”
“미안, 진짜 다들 너무 미안해요. 아니 창고에 엄마랑 똑같은 작업복 입은 시신이 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황덕록은 울상을 지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전완수는 황덕록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더니, 대뜸 그의 정수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황덕록이 양손으로 정수리를 문지르자, 전완수는 눈물을 글썽이며 먼저 차량에 올라탔다.
진심으로 황덕록을 걱정했던 모양이다.
또한 억누르고 있던 부모님 생각에, 마음의 동요가 있는 모양이다.
이젠…… 전완수에게 위로가 필요해 보였다.
최현은 쓴웃음을 지으며 전완수를 따라 차에 탑승하고, 난 황덕록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돌아가면 완수한테 진심으로 사과해.”
“……응.”
“어휴…… 그러게 홀로그램부터 확인하지.”
“작업복 보고 잠깐 미쳤었나 봐.”
그래, 부모님의 옷을 입은 시신을 봤다면 나라도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황덕록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섣불리 행동했다.
괜스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지난날의 나를 지켜보는 설여원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쉘터로 돌아가는 길 내내, 이번엔 황덕록이 아닌 전완수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 * *
우리의 무사 귀환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이정우와 곽찬혁은, 쉘터로 들어서는 승합차를 보고 한걸음에 달려 나왔다.
대명동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전완수는 들고 있던 무기를 반납하고 피곤해서 먼저 쉬겠다는 말을 남기고 4단지로 향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살피던 이정우가 물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완수 표정이 안 좋은데.”
“그게…… 얘기하면 길어요.”
승합차에서 정진영의 치료를 받았기에, 전완수와 황덕록의 상처는 사라졌다.
때문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욱 파악하기 어려울 것이다.
길거리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설명하자, 이정우는 황덕록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덕록이 너, 내일 해 뜨면 사과해.”
“지금 가서 사과하려고요.”
“아니야, 지금은 혼자 있게 둬.”
“예?”
“완수가 저래 보여도 엄청 감성적이야. 지금은 혼자 있고 싶을 거야.”
이정우의 말이 맞다.
혁신도시에서 코스트코를 정리할 때도, 전완수는 캠핑 장비들을 보고 예전 기억을 신나서 얘기하던 친구였다.
황덕록 싸우며 부모님의 얼굴이 빛바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하나둘 떠오른 모양이다.
그러자 이정우의 뒤에 있던 전수연이 후다닥 전완수를 따라갔다.
항상 서로를 험담하는 남매지만,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고 생각한다는 걸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이정우는 손뼉을 치며 얘기했다.
“다들 샤워부터 하고, 더 늦기 전에 자자. 더 있으면 해 뜨겠다.”
이정우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나긴 하루였다.
우린 헬스장으로 걸어가 샤워부터 하고, 곧장 숙소로 향했다.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감성에 취할 새도 없이, 금세 곯아떨어졌다.
* * *
짹짹, 짹짹짹.
창밖에서 들리는 참새들의 울음소리에, 묵직한 눈꺼풀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워서 창문을 살짝 열어둔 탓에,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초가을의 색바람을 맞으며 정신을 다 잡고, 하품을 하며 거실로 나왔다.
“일어났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설여원.
난 두 눈을 게슴츠레 뜨며 설여원에게 물었다.
“지금 몇 시야?”
“오전 11시.”
“11시?”
평소 6시면 눈을 뜨는데, 어제 무리한 탓인지 숙면을 취했다.
놀란 표정으로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나도 방금 일어났어. 혜리가 아침 가져다준다고 그랬어. 슬슬 다른 애들도 깨우자.”
“어…… 그래.”
각 방을 돌며 남자애들을 깨웠다.
다들 피로가 가시지 않았는지, 퉁퉁 부은 눈으로 거실에 모였다.
정진영은 헝클어진 머리를 양손으로 빗질하며 거실 바닥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전완수와 최현, 황덕록도 금방 거실로 나왔다.
황덕록은 전완수를 보고 움찔거리더니, 대뜸 큰절을 올리며 얘기했다.
“완수야, 미안하다!”
“아침부터 왜 이래? 됐어 인마, 일어나.”
전완수는 싱겁게 웃으며 황덕록의 등을 토닥였다.
황덕록은 전완수의 눈치를 보더니, 슬쩍 설여원과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라는 턱짓을 보였다.
황덕록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그러자 설여원이 내 귀에 입술을 갖다 대며 속삭였다.
“어제 수연이랑 현이가 해 뜰 때까지 완수랑 얘기했대.”
“완수 기분은 풀린 거야?”
“화난 건 아니고, 옛날 생각나서 기분이 좀 처졌나 봐. 혜리한테 들었어.”
조심스레 전완수를 쳐다봤다.
전완수는 태연하게 하품이나 하며 입맛을 다셨다.
본인도 많이 힘들 텐데, 항상 강한 모습을 보여주는 전완수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뒤이어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윤혜리와 김희연, 최지혜와 전수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곧 점심도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늦은 아침을 차려주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자, 전수연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저희가 더 고맙죠. 이렇게라도 도움이 돼서 다행이에요.”
전수연이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얘기하자, 전완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말투 극혐. 목소리 변조한 줄.”
그러자 전수연은 은근슬쩍 전완수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표피강화 때문에 전완수의 허벅지가 집히지 않자, 전수연은 대놓고 전완수의 등짝을 때렸다.
시시덕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입가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어쩌면 전완수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건, 친동생 전수연 덕이 아닐까?
간단한 아침 식사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황금동 쉘터는 한동안 좀비카 제작에 집중할 예정이라고 들었다.
최현은 밥알을 씹으며 내게 물었다.
“우린 달성공원역으로 가면 되는 거야?”
“그래야지. 덕록이 부모님 생사부터 확인하고, 좀비카 수리 끝나면 구미로 이동하자.”
“어제 보니 승합차도 수리 좀 해야 할 거 같은데, 좀비카 두고 도보로 가?”
“처음 계획대로 3호선으로 이동하는 건 어때?”
그러자 옆에 있던 전완수가 얘기했다.
“지금은 각성도 했고, 길거리 좀비들은 위협적이지도 않잖아. 차라리 대로로 이동하면서 코인 늘리는 게 좋지 않겠어?”
“괜찮겠어?”
“당연히 괜찮지. 가는 길에 새로 배운 스킬도 실험하고.”
전완수의 의견에 다들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긴, 일행에게 위협이 되는 건 5성 이상의 대장 좀비, 혹은 미확인 변종이었다.
대명동의 좀비들이 중앙로까지 정리했으니, 가는 길에 다른 대장 좀비나 변종은 없을 것이다.
안전하게 코인을 얻을 기회였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좋아, 다들 뜻이 그렇다면 대로로 이동하자.”
“인원은 여기 있는 사람 그대로 가는 거야?”
정진영이 묻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게 좋지 않을까요? 황금동 쉘터 수비할 사람도 있어야 하니, 더 데려가는 건 무리 같아요.”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설여원과 나, 전완수, 최현, 정진영이면 웬만한 좀비 무리는 쉽게 사냥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어제 봤던 황덕록의 실력까지 더해진다면, 무서울 게 없었다.
설여원은 숟가락을 들며 얘기했다.
“다들 어서 먹어. 먹어야 힘쓰지.”
설여원의 말에 거실에 모인 사람들은 든든하게 배부터 채웠다.
* * *
모든 준비를 마치고 C구역 바리케이드로 향하자, 이곳으로 걸어오는 곽찬혁과 한지현, 이정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곽찬혁은 내 옆에 있는 일행을 눈으로 훑으며 물었다.
“지금 달성공원으로 출발하려고?”
“네. 어떻게 알았어요?”
“뻔하잖아. 재형이 넌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니까.”
곽찬혁의 말에 싱겁게 웃으며 이정우를 쳐다봤다.
이정우는 반박 대신, 내게 무전기를 챙겼냐고 물었다.
옆구리에 차고 있는 무전기를 보여주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이정우는 잊고 있던 것이 떠올랐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뒤이어 5단지 앞으로 보이는 흐릿한 인영을 불렀다.
“재우야!”
그러자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던 박재우가 후다닥 C구역 바리케이드 앞으로 달려왔다.
박재우는 내 얼굴을 보고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지금 출발하는 거야?”
“어, 왜?”
“출발하기 전에 잠시만, 팔 벌려봐.”
시키는 대로 양팔을 벌리자, 박재우는 기다란 줄자를 꺼내어 내 가슴과 허리둘레를 측정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전완수와 최현, 정진영, 황덕록의 치수까지 확인했다.
반면에 설여원은 한 걸음 물러서며 물었다.
“가슴이랑 허리둘레는 왜?”
“너희 보호대 만들어주려고.”
“보호대?”
설여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박재우는 들고 온 공책에 사람들의 치수를 적으며 얘기했다.
“지금 보호대는 팔다리만 보호되잖아. 가슴이랑 배, 등을 보호할 수 있는 조끼를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
“만들 수 있어?”
“이번에 얻은 코인으로 가죽…… 아니, 덤프를 구매했거든. 한번 시도해 보려고.”
로그나이트와 덤프.
그러자 옆에 있던 황덕록이 물었다.
“잠깐만, 그럼 2,000코인으로 덤프만 구매한 거야?”
“어, 2,000코인에 2㎏. 2㎏밖에 안 되는데 양은 상당하더라고. 파티원 전원은 힘들어도, 대여섯 명은 전용 조끼를 제작할 수 있을 것 같아.”
황덕록은 박재우의 말을 듣고 곧장 홀로그램을 열었다.
2,356코인.
로그나이트는 500g에 1,000코인이니, 총 1㎏은 얻을 수 있었다.
황덕록은 보유 중인 코인을 클릭하며 혹여나 코인을 주고받을 수 있는지 확인했다.
-수행할 수 없는 기능입니다.
같은 파티원끼리도 코인은 공유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황덕록은 로그나이트 1㎏을 구매했다.
그러자 황덕록의 눈앞으로 가로 50㎝, 세로 30㎝, 높이 20㎝의 로그나이트가 생성되었다.
황덕록은 양손으로 로그나이트를 받더니, 신기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크기에 비해 엄청 가볍네?”
“1㎏이잖아.”
황덕록은 들고 있던 로그나이트를 박재우에게 건네주었다.
박재우가 손을 뻗자, 반짝이는 스파크가 발생하며 황덕록의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로그나이트(1㎏)를 파티원 ‘박재우’에게 전달하시겠습니까?
수락을 누르자, 그제야 박재우의 손에 로그나이트가 전달되었다.
박재우는 로그나이트를 전달받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신기하네. 도둑질 못 하게 이런 시스템을 도입한 건가?”
놀라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인이 플레이어의 보호대를 착용할 수 없는 것처럼, 상점에서 구매한 아이템은 플레이어 간에도 허락이 필요했다.
보호대는 파티원끼리 공유되더니, 이건 코인 상점에서 구매한 캐릭터 전용 물건이라서 그런가 보다.
박재우는 전완수의 옆구리에 있는 카타나를 쳐다보더니, 대뜸 달라고 손짓했다.
전완수가 카타나를 건네주자, 박재우는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5단지 앞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프린트가 설치된 상태였다.
로즈의 각성 스킬.
박재우는 전완수의 카타나를 프린트에 집어넣고 무언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프린트의 측면으로 글자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이템 스캔 중.
-설계도를 제작합니다.
-카타나.
-설계도 제작에 소모되는 시간: 10분
박재우는 설계도 제작 시간을 확인하더니, 뒤를 돌아보며 얘기했다.
“재형이 말대로 아이템을 넣으면 설계도를 제작하는 시스템이 있더라고.”
게임에서만 보던 물건을 실제로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모든 일행이 감탄을 터뜨리며 프린트의 모습을 살폈다.
마침내 10분이 지나자, 카타나가 들어갔던 공간의 뚜껑이 열렸다.
박재우는 카타나를 꺼내어 전완수에게 돌려주고, 입력된 설계도를 확인하며 로그나이트를 집어넣었다.
-제작에 필요한 로그나이트: 500g.
-제작 시간: 22시간.
-제작하시겠습니까?
박재우는 눈앞의 홀로그램을 확인하며 내게 물었다.
“카타나 두 자루 만들까? 1㎏으로 딱 두 자루 만들 수 있는데.”
박재우의 물음에 전완수와 최현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로그나이트로 만든 무기는 변종의 피부도 쉽게 뚫을 수 있다며? 그럼 당연히 만들어야지.”
“그럼 두 자루 만든다.”
박재우가 제작 버튼을 누르자, 프린트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용해, 단조, 압연 과정을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