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67화
부회장의 왼손은 무언가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상황.
난 천천히 뒷걸음질 치며 최현의 옆으로 향했다.
그리고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서 마리오네트 쓸 수 있어?”
“안개 속이라서 안 보여.”
마리오네트를 사용하려면 적의 얼굴이 육안에 들어와야 하는 모양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허튼짓하면 부회장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그러자 뒤에 있던 전완수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안에서 움직여줄 거야.”
“안에서?”
“이신혜 씨가 안방에 있다고 그랬어.”
이신혜?
잊고 있던 얼굴이 떠올랐다.
황금동 쉘터에 처음 들어올 무렵, 퀭한 눈으로 신체검사를 하던 의사.
한슬기와 아기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이번 싸움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난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신혜 씨라고 별수 있어?”
“부회장 쫓아서 4단지로 들어올 때, 찬혁이 형이 쉘터 수비팀이랑 무전 쳤어.”
“그래서?”
“그때 무전 받은 사람이 이신혜 씨였고, 아직 권총 들고 있다고 그랬어.”
이신혜는 A구역 초소에서 챙긴 권총을 아직 반납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난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그럼 진즉에 쏠 것이지, 왜 아직도 안 쏘고 있어?”
“10세 미만 아이들 데리고 안방에 들어갔는데, 그때 부회장이 들어왔나 봐. 거실에 있던 10대 아이들이 인질로 잡힌 거 같아.”
“…….”
“방문 열면 거실에 있는 부회장이 못 들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함부로 나오지 못하고 있나 봐.”
그러니까, 권총은 들고 있는데 쏠 수가 없는 상황이라는 건가?
10세 미만의 아이들 때문에, 섣불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럼…… 여기서 큰 소리로 부회장의 시선을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난 훅, 하고 숨을 뱉으며 4단지 바리케이드 앞으로 걸어갔다.
“움직이지 마!”
3층에서 들려오는 부회장의 목소리.
이에 걸음을 멈추고, 3층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네가 가져오라는 시체도 가져왔잖아. 또 뭐가 필요한 거야?”
부회장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본인도 모를 것이다.
홍 이사와 김 이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들어왔고, 막상 차디찬 주검으로 변한 그들을 보니 혼란스러울 것이다.
난 뒤에 있는 최현을 쳐다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최현이 내 곁으로 다가오자, 곧 부회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어어어어어!!”
3층에서 들려오는 부회장의 포효.
마지막 경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난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이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악의는 없어. 네가 찾던 홍 이사랑 동생 맞는지 확인하라는 거니까.”
들고 온 시체를 바닥에 눕혔지만,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에 시체의 얼굴이 잘 보이도록 부회장 쪽으로 자세를 틀어주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최현에게 얘기했다.
“현아, 방향 돌리는 것 좀 도와줘.”
“응? 아, 어어.”
최현은 거드는 척, 은근슬쩍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곧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진심이냐는 듯이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다.
대답 대신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최현은 내 생각을 읽었을 것이다.
이신혜가 방문을 열면 부회장은 뒤를 돌아볼 것이다.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상태라서, 예상치 못한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 틈에 최현을 위로 던져서 마리오네트를 사용하게 할 생각이다.
난 부회장이 경계하지 않도록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외쳤다.
“자! 네가 찾던 동생 맞아?”
“…….”
부회장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창가에 바짝 다가서는 발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깨진 유리 파편을 지르밟는 소리.
덜컥!
그 순간, 3층에서 방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최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황급히 내 등을 밟았다.
그리고 난…… 있는 힘껏 상체를 일으키며 최현을 안개 밖으로 던졌다.
* * *
순식간에 안개 밖으로 날아간 최현.
박재형의 예상대로 부회장은 뒤에 있는 이신혜를 쳐다보고 있었다.
탕!!
단발의 총성이 들리자, 부회장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상체부터 숙였다.
덕분에 최현과 시선이 마주쳤다.
최현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부회장의 두 눈을 직시하며 읊조렸다.
“마리오네트.”
-5초 이내에 명령어를 말씀하세요.
-입력이 완료되면 대상은 10초간 명령에 복종합니다.
“창밖으로 혼자 뛰어내려!”
-입력이 완료되었습니다.
-명령어: 창밖으로 홀로 탈출
* * *
바닥으로 떨어지는 최현을 밑에서 잡아둔 뒤, 창밖으로 추락하는 존재를 직시했다.
퍽!
부회장은 1층 바닥에 엎어지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재빨리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어 부회장의 양팔을 꺾고, 최현을 쳐다봤다.
최현은 착지 과정에 문제가 있었는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달려왔다.
곧 부회장의 뒤통수를 붙잡으며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죽여도 돼.”
최현의 말을 듣고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부회장의 뒤통수를 깨부수었다.
-대장 좀비를 처리했습니다. 카운트 25점이 주어집니다.
부회장을 처리하자, 3층에서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흐으윽, 현이 혀엉. 사랑해.”
박성하의 목소리였다.
옆에 있는 최현을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인질이 성하였어.”
10대 후반의 남학생 박성하.
항상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이지만, 이번만큼은 정말 무서웠던 모양이다.
상황이 정리되고, 난 바닥에 주저앉으며 폐부에 들어찬 숨을 내쉬었다.
안도감이 돌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을 느꼈다.
끝났다.
18,000마리의 좀비.
하나도 빠짐없이 모조리 처리했다.
* * *
모든 대장 좀비를 처리하고, 결인들은 상동교로 향했다.
상동교 건너에 있는 이삿짐 트럭.
거기에 갇혀 있는 300마리의 좀비를 처리하기 위해 떠났다.
그동안 생존자들은 무너진 바리케이드를 수리하고, 좀비들의 시체를 옮기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몇몇은 눈물을 흘리며 죽은 생존자들을 애도하고 있었다.
2팀이 전멸하고, 1팀과 3팀에도 사망자가 나왔다.
추후 상황이 정리되면, 그들의 장례식을 치르기로 약속했다.
난 좀비들의 혈흔을 뒤집어쓴 상태라서, 곽찬혁이 샤워부터 하라고 했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데, 홀로 쉬는 게 눈치 보였다.
하지만 곽찬혁은 이번 싸움에 가장 고생한 게 나라면서, 제발 좀 쉬라고 했다.
결국 헬스장 샤워실로 들어가서 몸에 묻은 좀비들의 혈흔을 닦아냈다.
수증기와 함께 뽀얗게 춤추는 티끌 먼지들.
바닥을 적시는 핏물을 바라보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언제나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실은 지쳐 있었다.
누구에게도 솔직하게 얘기한 적 없지만, 나는 항상 이유를 모르고 불안했다.
아직 두 번째 에피소드.
벌써 이렇게 지치는데,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들어가서 버틸 수 있을까?
방향은 확실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았다.
“하…….”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처지지 말자.
내가 이정우에게 뱉은 말이 있지 않은가.
끝이 보이지 않으면, 땅만 보고 걸어가는 거라고.
뜨거운 물에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머리에 굳은 혈흔을 씻어냈다.
번쩍, 번쩍.
계속 긴장하고 있다가 나른해져서 그런가?
시야의 우측 상단에서 점멸하는 노란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플레이어 정보를 확인하자, 600포인트가 들어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플레이어 정보]
-캐릭터 이름: 에덤 화이트
-능력: 강화
-한계 돌파 1단계
*인간의 신체가 지닌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한계를 돌파할 때마다 기존 모든 스탯이 1.3배 증가합니다.
*첫 한계 돌파에 필요한 포인트는 1000입니다.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2613/15000
-남은 포인트: 647
-스킬: 좀비화, 급가속 Lv3, 감지 Lv4, 하울링 Lv1, 광폭화 Lv1
-패시브 스킬: 재생, 광란
플레이어 정보를 확인하다 문득,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숫자를 보고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일행은 좀비 하나를 잡으면 0.1코인이 들어온다.
본인이 처리하든, 파티원이 처리하든 똑같이 0.1코인이 말이다.
반면에 난 좀비 하나를 잡으면 1카운트가 올라간다.
1카운트를 포인트로 환산하면 0.1포인트.
즉, 1,000코인과 1,000포인트는 똑같이 1만의 좀비를 처리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문제는 일행은 누가 잡든 1만 마리를 잡으면 되지만, 난 1만의 좀비를 혼자 잡아야 위의 결과가 나온다.
에덤 화이트의 어시스트 개념이 다른 탓이었다.
어시스트 포인트는 좀비 5마리에 1포인트가 아닌 1카운트가 올라간다.
이럴 거면 어시스트 카운트라고 적어놔야지, 왜 어시스트 포인트라고 적어서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이는 일행이 0.5코인을 받을 때, 난 0.1포인트를 받는 것과 같았다.
일행보다 5배는 덜 받는 것이다.
황금네거리와 상동네거리에서 처리한 좀비가 대략 12,000마리.
그럼 일행은 1,200코인을 얻은 것이고, 난 좀비 카운트 2,400을 얻은 게 된다.
이를 포인트로 환산하면 240포인트.
정확히 5배 차이.
어째서 에덤만 성장 기준을 따로 설정한 걸까.
에덤의 미친 듯한 성장을 견제한 신의 장난일까?
라스트아크를 클리어한 나를 보고, 에덤이 사기라는 걸 제작자도 눈치챈 걸까?
계속해서 제약을 걸고, 스킬이나 스탯의 한계점을 공개하지 않은 것도 에덤의 성장을 저지하기 위함인 것 같다.
대체 라스트아크의 제작자는…… 아니, 신이 바라는 게 뭘까.
정말 인류의 종말을 바라는 걸까?
“어휴, 몰라 X발.”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생각해 봐야 머리만 아프지.
난 욕설을 읊조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생긴 대로 사는 거라 배웠고, 원하든 원치 않든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최선을 다해 사는 거라 배웠다.
내가 처한 상황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2613/15000
다음 포인트를 받으려면 12,387카운트를 올려야 한다.
위의 카운트만 높여도 한계 돌파가 가능하니, 이번에 얻은 포인트는 스킬 급가속과 감지에 투자해야겠다.
-160포인트를 소모하여 감지의 레벨을 높입니다.
[감지 Lv.5]
-25초간 전방 90m 내의 좀비와 변종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움직임이 포착된 적은 감지의 지속 시간이 끝나도 10초간 위치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감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40분입니다.
*감지의 레벨이 5에 도달했습니다.
*5성 이상의 대장 좀비, 혹은 변종은 자주색으로 표시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
5성?
대장 좀비의 진화를 말하는 건가?
기본 대장 좀비를 1성이라 가정한다면…… 5성은 회장의 힘을 지닌 대장 좀비를 뜻한다.
그러고 보니 회장은 전투의 포효라는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스킬을 지닌 대장 좀비부터 푸른색이 아닌 자주색으로 표시해 주는 건가?
변종도 푸른색이 아닌 자주색으로 표시해 주고?
이건 좋은데?
스킬의 레벨이 5에 도달하면 특별 옵션이 붙는 모양이다.
어쩌면…… 광폭화도 5레벨까지 올리면 특별 옵션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광폭화를 사용해도 이성을 유지하기 쉽도록 조정해 줄지도 모른다.
문제는 광폭화의 레벨을 높이기 위해선 시작부터 150포인트가 필요하고, 레벨이 오를수록 요구 포인트가 2배씩 증가한다면 2,250포인트가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차라리 한계 돌파를 하고 말지.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스킬 급가속의 레벨을 높였다.
-80포인트를 소모하여 급가속의 레벨을 높입니다.
-160포인트를 소모하여 급가속의 레벨을 높입니다.
[급가속 Lv.5]
-25초간 이동 속도가 대폭 증가합니다.
-급가속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10분입니다.
*급가속의 레벨이 5에 도달했습니다.
*‘일격’ 효과가 생성됩니다.
*‘일격’은 급가속 발동 중에 처음 공격하는 대상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스킬 사용자에게 피해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치명적인 피해?
현재 내 근력은 모든 좀비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심지어 알파 변종도 일격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면…… 거의 가루로 만드는 거 아닌가?
남들보다 어시스트 포인트가 적든 말든, 억울하던 마음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스킬을 얻는 과정이 힘들었을 뿐, 지금부턴 무서울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