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60화
모든 수치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한계 돌파 1단계라는 새로운 스탯이 생성되었다.
각 스탯에 포인트를 배분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젠 세트처럼 묶어서 올릴 수 있는 건가?
모든 스탯의 1.3배 증가.
대장 좀비가 진화할 때마다 증가하는 수치와 동등했다.
그건 그렇고 인간의 신체가 지닌 한계에 도달했다니?
그럼 한계 돌파를 하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건가?
찝찝한 설명에 말문이 막혔다.
날 좀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무엇보다 첫 한계 돌파에 필요한 포인트가 무려 1천이었다.
모든 스탯을 1.3배 증가시키는 건 좋지만, 처음부터 1천이라면 그 뒤엔 얼마나 요구하려고?
‘잠깐, 혹시?’
망설일 필요 없이 스킬 강화권을 한계 돌파에 사용했다.
띠링.
-한계 돌파는 스킬이 아닙니다.
에이, 안 되네.
좀 해주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잠겼다.
포인트를 차곡차곡 모아서 한계 돌파를 하는 게 좋을까?
아니야, 공백에 비해 득이 너무 적어.
지금 능력치로도 좀비나 변종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한계 돌파를 통해 더는 높일 수 없던 정신력 스탯을 높일 수 있는 건 희소식이지만, 필요한 포인트가 너무 과하다.
지금은…… 현 상황에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스킬에 투자하는 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효율이라면 당연히 스킬 감지와 급가속.
급가속은 재사용 대기 시간이 10분이라서 사용에 부담이 없지만, 감지는 1시간이라서 부담이 컸다.
스킬 레벨업이 재사용 대기 시간 감소에 영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뭐든 해봐야 아는 법.
보유 중인 포인트를 감지에 투자했다.
-20포인트를 소모하여 감지의 레벨을 높입니다.
-40포인트를 소모하여 감지의 레벨을 높입니다.
-80포인트를 소모하여 감지의 레벨을 높입니다.
[감지 Lv.4]
-20초간 전방 80m 내의 좀비와 변종의 움직임을 감지합니다.
-움직임이 포착된 적은 감지의 지속 시간이 끝나도 10초간 위치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감지의 재사용 대기 시간은 45분입니다.
레벨업 하나에 지속 시간 5초 증가, 시계 10m 증가, 재사용 대기 시간 5분 감소가 적용되었다.
남은 포인트는 47포인트.
이젠 47포인트 가지고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47포인트는 나중을 위해 아껴둬야겠다.
“다들 충분히 쉬었으면 다시 움직일까?”
일행을 쳐다보며 묻자,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뻐근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전완수는 좀비들의 위치를 살피더니, 좌측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저쪽 120m 떨어진 거리에 140마리 정도 뭉쳐 있네.”
“얼마 안 남았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정리에 속도를 붙였다.
* * *
6시간 걸친 작업 끝에 수성못과 황금동, 상동네거리에 있던 모든 좀비를 정리할 수 있었다.
전완수에게 보유 중인 코인을 묻자, 벌써 443코인이 모였다고 한다.
멀게만 느껴지던 1000코인도, 점점 채워지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체를 황금네거리로 옮기고, 황금동 쉘터로 이어지는 길에 빈틈없이 깔았다.
또한 황금네거리에 있는 모든 주유소를 털었다.
황금동 쉘터에 있는 생존자들은 휘발유를 모아 좀비들의 시체 위에 뿌리고, 남은 시체들은 골목을 틀어막는 용도로 사용했다.
A구역과 B구역의 바리케이드 일부를 뜯어서 C 구역을 보강하고, 남은 철판은 좀비카를 수리하는 데 사용했다.
수성 호텔에 두고 온 밧줄과 여분의 밧줄을 이용해서 좁은 길목의 건물 사이에 덫을 만들었다.
중형 트럭은 쉘터로 옮겨서 안에 있는 짐을 모조리 내리고, 전투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시간은 무던히 흐르고, 하늘이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갈 무렵, 우린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설여원은 체력을 완전히 회복한 뒤로 상동네거리 팀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처음엔 다들 반대했지만, 전완수 혼자 모든 상황을 파악하는 것도 버거운 게 사실이었다.
결국 설여원도 상동네거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정우와 나, 설여원, 전완수, 최현은 상동네거리에 위치한 5층 건물 옥상에서 동태를 살폈다.
치지직- 치직-
-아직 별다른 움직임 없어?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정진영의 목소리.
“아직 조용합니다.”
-묘하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
정진영의 말대로였다.
성 이사가 죽은 지 벌써 10시간 이상 지났는데, 대명동의 좀비들은 공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폭풍전야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걸까?
지나치게 고요한 세상이, 우리에겐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혹시 완전히 해 떨어지고 공격하려는 거 아니야?
“생각이 있는 놈들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죠.”
-너희도 뭐, 횃불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근처 공사장에서 횃불로 쓸 만한 재료 좀 챙겼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공사장에서 철근도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상동네거리의 골목마다 철근을 대각선으로 세워서 좀비들의 접근을 저지하는 용도로 설치했다.
설여원과 전완수는 쇠뇌 대신 소총을 챙겼고, 이정우와 최현은 수류탄을 잔뜩 챙겼다.
전완수와 최현은 상동교를 바라보는 좌측 건물 옥상에서 대기하고, 설여원과 나, 이정우는 우측 건물의 옥상에서 동태를 살폈다.
“어?”
이윽고 망원경을 들고 있던 설여원이 무언가 발견한 듯, 한 지점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뭐 보여?”
“왔다.”
“대명동 좀비들?”
설여원은 망원경을 좌우로 움직이며 적의 숫자를 살피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미친…….”
“왜.”
“최현 이 자식, 다 틀렸잖아.”
설여원의 말에 반사적으로 눈꼬리가 올라갔다.
최현의 말이 다 틀려?
그게 무슨 말이야.
설여원은 망원경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대략 700m 거리. 숫자는…….”
설여원은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말끝을 흐렸다.
“숫자는 뭐.”
초조한 마음에 되묻자, 설여원은 떨리는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모르겠어. 사방에 좀비야.”
“홍 이사 패거리도 같이 온 거야?”
“그런 거 같아. 회장이랑 홍 이사 패거리는 사이가 안 좋다더니, 저게 어딜 봐서…….”
설여원의 말이 사실이라면, 좀비만 16,000마리라는 말이 된다.
홍 이사와 김 이사 중에 진화한 녀석이 있다면 18,000마리.
평범한 좀비도 아니고, 일반인의 2배에서 3배는 강한 좀비들이 저렇게 바글바글하다.
이길 수 있을까?
“어? 잠깐.”
설여원은 다시금 망원경을 살피더니, 떡하니 입을 벌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또 무슨 일인데 그래.”
“저것들 트럭도 끌고 왔는데?”
“트럭?”
“이삿짐 트럭. 엄청 큰 거 있잖아.”
“몇 대.”
“……3대.”
여기서 이삿짐 트럭이 왜 나와?
순간, 최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명동에 있다는 좀비 창고.
창고에 있는 좀비들을 트럭으로 옮겨서 여기까지 끌고 온 건가?
저놈들…… 제대로 준비하고 왔다.
우리와 전쟁을 하겠다는 마음가짐.
치지직- 치직.
-재형아, 보여?
무전기로 들려오는 전완수의 목소리.
난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방금 여원이한테 들었어.”
-야, 우리 X된 거 같은데?
* * *
“시작은 맛만 볼까?”
박 회장이 홍 이사를 쳐다보며 묻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김 이사.”
“네, 홍 이사님. 아, 아니지, 부회장님.”
“그냥 홍 이사라고 불러. 부회장님이랑 존칭이 똑같으면 헷갈리잖아.”
“아, 네. 홍 이사님.”
“나랑 적들 동태 살피고, 이상 징후 보이면 얘기해.”
“알겠습니다.”
김 이사와 홍 이사가 수하들을 이끌고 상동교로 나아가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회장이 박 회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저 둘만 보내도 되겠습니까?”
“왜, 걱정돼?”
“이미 성 이사가 당했다는 건 기정사실입니다. 이사를 죽인 쉘터는 지금껏 없었습니다.”
부회장의 의견에 박 회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홍 이사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겉으로 티 내지 않았지만, 박 회장은 알고 있었다.
홍 이사와 부회장이 인간이던 시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었다는 걸.
또한 부회장과 김 이사의 성이 똑같고, 이름에 돌림자가 있다는 걸.
심증뿐이지만, 부회장과 홍 이사가 서로 호감을 느끼는 관계였고, 부회장과 김 이사가 형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상황이 이렇다면 박 회장의 편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박 회장이 기대를 거는 부분이 있었다.
회장실에서 봤던 홍 이사의 모습.
홍 이사는 권력 욕심에 끝이 없는 여자였다.
욕심이 과하면 눈이 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부딪혀 있는 법.
반면에 부회장은 쓸데없이 성실하고, 순진무구한 녀석이었다.
홍 이사의 욕망을 이용해서, 새로운 판을 짤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박 회장은 부회장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다.
“부회장아. 너는 좀비냐, 사람이냐?”
“예?”
“주제를 알고, 정신 차리고 살아.”
박 회장의 말에 부회장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박 회장은 중의적 표현을 좋아했다.
말 속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면, 언젠가 뒤통수를 맞는 법이었다.
그리고 부회장은, 박 회장의 중의적 표현에 익숙해진 사람이었다.
인간처럼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좀비답게 본능에 충실하라는 뜻.
선봉대로 홍 이사를 보냈다는 건, 부회장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홍 이사를 버리라는 건가?’
하지만 부회장의 마음에 걸리는 존재는 따로 있었다.
홍 이사도 걱정이지만, 그보다 친동생인 김 이사가 걱정이었다.
* * *
전완수는 좀비들의 동태를 살피며 얘기했다.
-야, 움직인다. 어떡해? 저것들이랑 싸워?
“…….”
-도착하기 전에 튀어야 하는 거 아니야?
마음 같아서는 튀는 게 상책이다.
하지만 황금동 쉘터의 생존자들은?
다 같이 살아남기 위해 지금껏 만반의 준비를 마치지 않았는가?
100여 명의 생존자가 군말 없이 우리의 지시를 따라주었다.
길거리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보고 겁을 먹기는커녕 우리에게 고맙다고, 수고 많았다고, 돕고 싶다고 나선 사람들이다.
외지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우리 일행을 반겨주었고, 한슬기와 아기가 안정을 취하도록 도와주었다.
10세 미만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운영하고, 모두가 힘을 합쳐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바리케이드 밖으로 나오는 것도 두려웠을 텐데, 우리가 도움을 요청하자 너도나도 죽창을 들고나온 사람들이란 말이다.
남자들이 시체를 옮기는 동안 여자들은 식사를 배분하고, 묵직한 철판을 옮기는 것도 도왔다.
5단지에 있는 쓰레기들이야 죽든 말든 관심도 없지만, 이런 절망적인 세상에 인간성을 유지하면 살아가는 4단지와 3단지 생존자들.
이런 사람들을 외면하면…… 내가 무너질 것 같았다.
누구보다 인간적인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며 살아남는다면, 내가 사이코패스들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상황이 이렇게 되니, 머릿속으로 장병철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얼마나 용기 있는 사람이고, 이타적인 사람이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은 말한다.
장병철 같은 사람들을 호구라고, 개죽음당했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그런 사람이 있기에 이 세상이 아름다운 거라고, 아직 살만한 세상이라고.
난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가다듬고, 초심을 되새겼다.
사람다운 사람을 살린다.
그리고 게임을 클리어한다.
두 주먹을 말아쥐며 얘기했다.
“처음 계획대로 갑니다.”
-저, 저것들이랑 싸우자고?
전완수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에 덤덤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도망치고 싶은 사람은 가도 돼. 말리지 않을 거야, 원망하지도 않을 거고.”
-누가 도망친대? 그냥 쫄려서 그러지.
전완수의 투정에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선봉대 숫자는?”
-대략 3분의 1 정도 움직이는 거 같아.
“그럼 대기해.”
-대기? 쉘터에 있는 사람들이 5,000마리를 어떻게 상대해?
“할 수 있어. 우리가 준비한 걸 생각해. 5,000마리는 거뜬히 막을 수 있어. 그렇죠? 찬혁이 형?”
무전기로 곽찬혁을 부르자, 오래 지나지 않아 그의 대답이 들려왔다.
-황금동을 우습게 보지 마.
곽찬혁의 대답에 싱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진영이 형, 버스랑 트럭 상태는 어때요?”
-최상이야. 동대구로에서 대기 중.
“좀비들이 몰려들면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요. 황금네거리 지나서 시체 밭으로 진입하면 움직여야 합니다.”
-그만 말해. 귀에 딱지 앉겠다.
정진영의 대답까지 듣고, 난 마지막 무전을 보냈다.
“다들 살아서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