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52화
이정우는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황덕록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갉아 먹는다면…… 정찰대를 계속 처리하자는 거야?”
“네, 계속 정찰대를 처리하면서 숫자부터 줄여야 돼요. 그럼 회장이란 놈이 직접 움직이는 순간이 올 거예요.”
“회장의 수하만 8000이라고 했어. 4번이나 진화했으니 평범한 사람은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고.”
이정우가 현실적으로 얘기하자, 황덕록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그래 봐야 좀비잖아요.”
“……뭐?”
“그놈들, 지금쯤 힘에 취해서 머리 쓰는 법 까먹었을 거예요. 때린다, 잡는다, 먹는다, 이런 단순한 생각만 할 겁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머리를 써서 잡자는 거죠.”
황덕록의 말에 괜히 내가 찔렸다.
전완수와 최현, 설여원도 내심 찔리는지, 헛기침과 함께 시선을 회피했다.
우리도 힘에 취한 나머지, 좀비들을 주먹으로 때려잡을 생각만 했다.
황덕록은 콧잔등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도 많던데, 거기서 휘발유부터 뽑죠?”
“휘발유?”
이정우가 눈꼬리를 치켜뜨며 묻자, 황덕록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세상이 이 지경 되고 남아도는 게 휘발유잖아요. 좀비가 아무리 강해져 봐야 불에 면역을 지니는 건 아니니까요.”
“적의 규모가 상당한데, 휘발유 좀 뽑는다고 상대가 되겠어?”
“수성못에 구덩이 많다면서요? 가서 구덩이 더 깊게 파고, 좀비들을 구덩이로 몰아서 태워 죽이면 할 만하지 않겠어요?”
황덕록의 의견에 다들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알파 변종과 미확인 변종은 워낙 신체 능력이 좋아서 화염병이든 땅굴이든 통하지 않겠지만, 좀비라면 다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덕록이 의견이 제일 괜찮은 거 같은데,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다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휘발유가 얼마나 모일지 모르겠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웅크리고 있을 바에 뭐라도 하는 게 옳다.
뒤이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전완수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만약 그놈들이 수성못으로 안 오고 곧장 황금동 쉘터로 오면 어떡해?”
“그럴 가능성은 없지. 주어진 단서는 수성못뿐인데, 뜬금없이 여길 왜 오겠어?”
이덕배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옆에 있던 정진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나도 덕배 아저씨 의견에 한 표. 그리고 덕록이 말대로 수성못에서 농성하면 대장 좀비들도 수성못에 집중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안건이 얼추 정리되자, 곽찬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얘기했다.
“그럼 지체하지 말고 움직이죠. 시간은 좀비들 편입니다.”
곽찬혁은 손목시계를 살피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벌써 15시간은 지났으니, 정찰대가 죽었다는 걸 대명동에 있는 놈들도 눈치챘을 겁니다.”
“…….”
“좀비들은 체력적 한계도 없으니 대명동에서 수성못까지 금방 도착할 거예요.”
퀘스트도 완료했으니 며칠 쉬면서 쉘터 안정화에 힘쓰고, 황덕록의 부모님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온 세상이 내게 죽으라는 듯이,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이정우에게 물었다.
“정우 형, 저희 코스트코에서 가져온 텐트 어디 있죠?”
“트럭에 있을 거야.”
“그럼 트럭이랑 중형차만 가져갈게요.”
“지금 출발하려고?”
“찬혁이 형 말대로 15시간이면 대장 좀비들 수성못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에요. 먼저 가서 베이스캠프 만들고, 시체들 정리하고 있을게요.”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도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저도 재형이 의견에 동감이에요. 만약 대장 좀비들 도착한 상태면 시선이라도 끌고 있을게요.”
“그럼 무기부터 정비하고 출발해. 우리도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갈 테니까.”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지만, 상황이 변하면 변화한 상황에 맞춰 움직일 수밖에 없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선발대는 완수랑 현이, 여원이, 진형이 형.”
“드디어 나도 가는 건가?”
정진영은 어깨를 빙빙 돌리며 입꼬리를 올렸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른 분들은 주차장에서 휘발유 확보하고 무전 주세요.”
그러자 구석에 있던 김희연이 오른손을 들며 물었다.
“오빠, 그럼 5단지에 있는 사람들은 어떡해요? 거기 관리할 사람이 없는데.”
5단지에 갇혀 있는 150명의 사람.
그 사람들도 쓰일 곳이 있다.
내 생각을 일행에게 얘기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생각만 해두는 게 옳은지, 그 기준이 모호해서 함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희연이 묻는 바람에, 모두의 관심이 내게 쏠렸다.
이에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5단지는…… 방파제로 쓸 거야.”
“방파제요?”
“아까 완수가 그랬잖아. 대장 좀비들이 곧장 황금동 쉘터로 올지도 모른다고.”
내 의도를 파악한 사람들은 아, 하는 짧은 탄성을 뱉었다.
대명동에서 황금동 쉘터로 오기 위해서는 황금네거리를 지나와야 한다.
그리고 황금네거리 방면의 바리케이드는 C 구역.
C 구역 바로 옆에 있는 단지가 5단지였다.
놈들은 가장 먼저 5단지를 수색할 것이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대장 좀비의 시선을 유도해 줄 것이다.
4단지, 3단지 생존자들은 5단지가 점령되는 동안 시간을 벌 수 있기에, 지금은 5단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살려두는 게 이롭다.
다들 선뜻 반박하지 못했다.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방안.
씁쓸한 마음에 일행의 시선을 회피하자, 이정우는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얘기했다.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 망설이지 말고 밀고 나가.”
“…….”
“여기서 너 욕할 수 있는 사람 없어.”
이정우의 말에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금세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망설이던 사람들도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마음가짐을 새롭게 다지는 것으로 보였다.
사람의 마음을 힘으로 얻으면 독재자가 되지만, 말로 얻으면 그 집단의 대표가 된다더니,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다.
이정우가 있기에 내가 있고, 내가 있기에 이정우가 있다.
그리고 이정우와 내가 굳건히 버티며 균형을 이루기에, 진실된 사람들이 우리 곁에 남아 있는 게 아닐까?
이정우는 내 등을 토닥이며 엷은 미소를 짓더니,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얘기했다.
“더 늦기 전에 움직입시다.”
* * *
트럭은 전완수가 운전하고, 중형차는 설여원이 핸들을 잡았다.
대명동의 좀비들이 수성못을 지나 쉘터 근방에 다다랐을지도 모르기에, 일부러 황금네거리를 지나 수성못으로 이동했다.
크르르르…… 카하악!!
황금네거리에 남아 있던 좀비들이 일제히 목젖을 갈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설여원은 선두에서 핸들을 조작하며 얘기했다.
“120마리는 되는 거 같은데?”
“대장은 보여?”
“모르겠어. 시야가 한정적이라서.”
“처리하지 말고 따라오도록 만들어.”
“좀비들이 따라오도록 속도 조절하라고?”
“어, 혹시라도 주변에 대장 좀비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좀비들이 시끄럽게 울면 시선 끌기도 좋아.”
설여원은 핸들을 말아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전방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꽉 잡아.”
텅!! 콰곽!! 덜컹!!
중형차의 정면에 부착한 철근 프레임에 받히며 좌우로 갈라지는 좀비들.
와이퍼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바퀴에 달아둔 칼날에 좀비들의 하체가 잘려 나갔다.
차량으로 충격이 느껴질 때마다 상체가 흔들렸다.
예전에는 좀비들의 선혈로 범벅이 되는 차창을 보고 두렵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더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상황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선명해지는 감각들이, 생존에 불필요한 감정을 배제해 버리는 느낌이었다.
난 무전기를 들고 뒤따라오는 전완수를 불렀다.
“완수야, 30m 거리 유지해.”
치지직- 치직- 삑.
-오케이. 여기 있는 좀비들은 안 죽이고 그냥 가는 거야?
“이대로 수성못까지 유인해서 처리하자. 근처에 대장 좀비 보이면 얘기하고.”
-대장 좀비? 오케이.
무전을 마치고 다시금 정면을 살피자, 정면에서 달려들던 좀비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설여원은 사이드미러를 살피며 좀비들의 숫자를 확인하더니,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좀비들이 계속해서 따라오도록 속도를 조절하고 있었다.
뒤이어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걸어서 움직일 때는 그렇게 멀게 느껴지더니, 차 타고 움직이니까 금방이네.”
“두산오거리 보여? 거긴 좀비들 정리 끝났는데.”
“이미 두산오거리야.”
그래서 달려드는 좀비가 없구나.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곧장 수성못으로 직진하고, 4층 카페 주차창에 차 세워.”
“차로 안 죽여?”
“차로 죽이면 어시스트 포인트밖에 안 들어와. 여유 있을 때 좀비 카운트를 높여야 돼.”
그러다 문득, 일행의 카운트 개념이 궁금해졌다.
“여원아, 너희는 차로 죽여도 코인 들어와?”
“어, 차로 죽여도 똑같아. 한 마리에 0.1코인.”
에덤 화이트는 직접 좀비를 죽이면 한 마리에 1카운트가 오르지만, 어시스트를 받으면 5마리에 1카운트가 올라갔다.
반면에 다른 캐릭터들은 직접 죽이든 아군이 죽이든, 한 마리에 0.1코인으로 고정인 모양이다.
같은 게임을 해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다니.
이렇게 보면…… 카운트 개념은 에덤이 좀 더 유리한 건가?
고개를 끄덕이며 보호대의 내구도를 살폈다.
전부 100프로 복구된 상태기에, 난 주먹을 말아쥐며 뻐근한 어깨를 풀었다.
이윽고 카페 주차장에 다다르자, 설여원은 주차선을 무시하고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은 뒤, 쇠뇌를 챙기며 얘기했다.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고 내리자, 바로 옆에 정차하는 트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깜짝이야.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트럭에서 내리는 전완수와 최현, 정진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진영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홀로그램을 켜고 본인의 스탯을 살피더니, 전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 정도면 좀비들 때려잡을 수 있다, 이거지?”
“네, 그래도 조심해요. 무리하면 재형이한테 혼나요.”
“하하! 알았어.”
정진영은 양팔을 빙글빙글 돌리며 몸을 풀었다.
이에 고개를 저으며 일행에게 얘기했다.
“다들 텐트랑 짐 들고 먼저 카페로 들어가요.”
“뭔 소리야?”
전완수가 눈꼬리를 치켜뜨며 묻기에, 난 두 주먹을 말아쥐며 얘기했다.
“어시스트 포인트만 받아서는 부족해.”
난 홀로그램을 열고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숫자를 살폈다.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1762/3000
미확인 변종 두 마리와 대장 좀비 둘, 그 밑에 있는 수하들까지 처리하면서 순식간에 1700카운트를 채웠다.
하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
회장이란 놈은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존재기에, 강해질 수 있을 때 강해져야 한다.
전완수는 내 곁으로 다가와 홀로그램에 적힌 글자를 살피더니,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또 무리하는 거 아니야? 120마리는 쉽지 않을 텐데.”
“지금이라면 충분해. 좀비화 안 쓰고 잡을 수 있어.”
코스트코 앞의 지하도에서 좀비들을 처리할 당시, 지금보다 체력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100마리 이상을 처리했다.
체력 스탯이 42에 다다른 지금이라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또한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도 월등히 증가했기에, 120마리도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전완수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최현이 얘기했다.
“나랑 진영이 형이 물건 옮길 테니까, 여원이랑 완수는 재형이 뒤에서 보조해 줘. 재형아, 이 이상은 양보 못 한다.”
최현의 의견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야 확보가 가능한 설여원과 전완수가 엄호해 준다면 나도 마음 편히 싸울 수 있다.
두두두두두두…….
크어어어어!
카하악! 하악!
저 멀리, 수성못 입구에서 좀비들의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속도를 조절하며 이동한 덕에, 길거리의 좀비들이 우릴 놓치지 않고 잘 따라왔다.
난 설여원과 전완수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가자.”
* * *
“성 이사님! 이쪽으로 와보셔야겠습니다.”
상동네거리에 도착한 대장 좀비들.
성 이사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세 구의 시신이 뇌를 파먹힌 상태로 차갑게 썩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성 이사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세차게 혀를 차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 새끼들…… 생존자 찾으면 창고로 끌고 와야지, 자기들끼리 먹었다 이거지?”
“여기 있는 세 명의 생존자를 섭취한 뒤에 수성못으로 이동한 모양입니다.”
성 이사는 수성못 방면을 살피며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옆에 있는 직원들에게 얘기했다.
“방 과장, 너는 대로 쪽으로 크게 돌아서 수성못 정면으로 들어가.”
“두산오거리 방면 말씀입니까?”
“그래, 생존자 발견하면 괜히 시비 걸지 말고 대기해.”
방 과장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하들을 이끌고 두산오거리 방면으로 향했다.
성 이사는 옆에 있는 직원들에게도 지시를 내렸다.
“홍 과장이랑 강 차장은 수성못 뒷길로 진입하고, 발각되지 않도록 조심해. 만약 생존자들 발견하면 싸우지 말고 나한테 보고부터 하고.”
“예!”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성 이사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다들 조심해라. 부장급을 죽인 쉘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