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34화
경계 범위를 넓히기 위해 설여원과 전완수가 선두에 섰다.
두 사람이 선두에서 좌우를 살피고, 후방은 최현과 곽찬혁이 담당했다.
난 중앙에서 설여원과 전완수의 브리핑을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2차선 도로를 따라 50m 정도 들어가자, 왼쪽으로 비스듬히 휘어지는 길이 나타났다.
그러자 앞서가던 설여원이 오른손을 들며 정지신호를 보냈다.
반사적으로 상체부터 숙이며 설여원의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내겐 자욱한 안개밖에 보이지 않지만, 설여원은 무언가를 눈으로 좇는 모습을 보였다.
설여원은 마른침을 삼키며 두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있다.”
전완수는 인기척을 발견하지 못했는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설여원은 전완수의 팔을 잡으며 진정하라는 손짓을 보이더니, 어느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완수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설여원의 손끝을 직시하더니,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상황을 지켜보던 최현은 발소리를 죽인 채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설여원과 전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전방 50m 앞에 변종.”
“차도 위에 있어?”
“아니, 오른쪽 도로변 나무 위에.”
설여원의 말에 최현은 카타나를 고쳐 쥐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나도 청각을 곤두세우며 좌측의 동산을 살폈다.
우리가 있는 2차선 도로의 좌측은 나무들이 빼곡하게 심긴 언덕이 존재했다.
나무 위에 변종이 있다면, 좌측 언덕에도 변종이 숨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다른 대책을 마련한 뒤에 다시 오는 게 좋을까?
지금껏 지형을 통한 이점을 이용하며 싸워왔는데, 여긴 변종에게 유리한 지형이었다.
가뜩이나 시계도 짧은데, 5m 높이의 나무가 엄폐물 역할까지 했다.
설여원은 변종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학교에서 봤던 놈이랑 비슷해.”
“뭐가.”
“먹잇감이 시야에 포착될 때까지 미동도 안 해. 재형아, 변종은 시야 범위가 얼마나 되지?”
“변종의 시계는 나도 몰라. 시각적 자극에 강하게 반응하는 것만 알지.”
“그럼 어떡해? 대벌레처럼 미동도 안 하는데.”
“시야에 발각되지 않도록 빠져나갈 방법 있어?”
“없어. 삼거리 바로 앞에 있는 나무라서……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난 찰나의 고민 끝에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주변에 다른 변종은 없어?”
“없는 거 같아.”
“여원이 빼고 다들 20m 뒤로 가.”
“어쩌려고?”
“우리가 들어갈 수 없으면 끌고 와야지.”
어떤 게임이든, 어려운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선 풀링이 필수였다.
좀비들은 먹잇감을 발견하면 시끄럽게 울지만, 변종은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특성을 이용하면 충분히 풀링할 수 있을 것이다.
일행은 쇠뇌를 견착한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설여원은 일행의 위치를 확인한 뒤,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어떻게 끌고 오려고? 쇠뇌를 쏘면 비명부터 지를지도 몰라.”
“아까 네가 그랬잖아. 변종의 시계를 모른다고.”
“너 설마…….”
“저놈이 우리를 볼 때까지 접근하면 그만이야.”
난 두 주먹을 말아쥐며 걸음을 옮겼다.
발소리를 죽이지도 않고, 자신감 넘치는 걸음으로 나아갔다.
키리릭-
열 걸음 정도 나아갔을까?
귓바퀴를 간질이는 낡은 수레바퀴 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걸음을 멈추고 설여원을 쳐다보자, 설여원은 불안한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입을 열었다.
“봤다. 움직이고 있어.”
키리릭- 키릭-
은은한 소리는 들리는데, 눈에 보이는 건 새하얀 안개뿐이었다.
아무리 신체를 강화해도,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들리는 이질적인 소리는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전신을 팽팽하게 조이는 긴장감에 집중하며, 천천히 가드를 올리고 설여원에게 얘기했다.
“너도 완수랑 현이 쪽으로 붙어.”
“뭐? 너 혼자 싸우려고?”
“일격에 잡아야 돼. 시끄럽게 울기 시작하면 우리만 곤란해.”
“저걸 일격에 어떻게 잡아?”
“할 수 있어. 그러니 쇠뇌 쏘지 말고 뒤로 가.”
바스락-
곧 나뭇잎을 지르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에서 내려온 게 틀림없다.
발소리가 없는 게 알파변종의 특징이지만, 나뭇잎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설여원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일격에 못 죽이기만 해봐. 조금이라도 위험해 보이면 쇠뇌든 소총이든 쏠 거야.”
“알겠어.”
설여원은 쇠뇌를 견착한 채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자욱한 안개 속에서 기이한 음성이 들려왔다.
“가…… 가?”
정확한 거리는 파악할 수 없지만, 대략 35m 거리.
이전에 경험한 변종은 엄마, 배고파, 이런 말을 하더니, 이번 변종은 다른 언어를 구사했다.
“죽어. 죽어? 가서…… 죽어.”
숨죽인 채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자, 발소리 대신 점점 선명해지는 음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난 살…… 거야? 살 거야. 살 거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설마, 인간이 죽기 전에 한 말을 기억하는 건가?
그래, 잡아먹은 인간이 죽기 전에 한 말을 기억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개체마다 사용하는 말이 다른 거야.
변종이 구사하는 말만 들어도, 이곳의 생존자들이 사이코패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위험에 처할 때마다 옆 사람을 미끼로 던졌다는 방증이었다.
“죽…….”
그 순간, 사포로 긁는 듯한 변종의 음성이 사라졌다.
숲길을 지나 2차선 도로로 올라왔는지, 변종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싸는 백색소음.
자욱한 안개 속으로 내 숨소리만이 귓가를 간질였다.
시야가 선명하지 않은 탓에 두 눈에 힘을 주며 청각을 곤두세웠다.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서 그런지, 눈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정면을 응시하며 눈을 깜박이는 찰나.
“죽어.”
좌측에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음성이 들려왔다.
좌측 30도 방향.
다급히 고개를 돌리는 찰나,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달려드는 변종의 인영이 두 눈에 들어왔다.
쏜살같이 접근하는 모습에 재빨리 자세를 잡고 리치를 계산했다.
찰나의 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고, 증가한 동체 시력 덕에 놈의 움직임을 낱낱이 살필 수 있었다.
찢어질 듯 올라간 입꼬리, 콧잔등부터 목젖까지 붉게 물든 혈흔, 산발이 된 머리와 먹잇감을 향한 집착의 눈빛까지.
예전이었으면 기겁하며 도망쳤겠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변종을 쉽게 잡는 방법은 단 하나.
학습능력을 깨우치기 전에, 일격에 처리해야 한다.
“가속.”
왼발로 아스팔트 바닥을 내딛고, 발목과 허리, 어깨를 비틀며 총구를 떠난 탄알처럼 쏜살같이 주먹을 내질렀다.
쩍!!!
손끝으로 느껴지는 묵직하고 저릿한 타격감에, 반사적으로 두 눈에 힘이 들어가고 이가 갈렸다.
찰나의 반작용이 오른팔로 느껴졌지만, 곧 바위를 뚫고 들어가는 정처럼 변종의 안면이 일그러졌다.
웃음기 가득하던 변종의 얼굴이 순식간에 함몰되며 경추까지 부러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변종을 처리했습니다. 카운트 50점이 주어집니다.
“윽!”
미간을 찌푸리며 왼손으로 오른쪽 어깻죽지를 부여잡았다.
급가속을 사용한 덕에 파괴력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지만, 어깨가 탈골됐다.
좀비들을 처리할 때는 가속을 사용해도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는데, 좀비들보다 몇 배는 단단한 변종의 두개골은 쉽지 않았다.
일전에 전완수가 운전하는 버스에서는 어떻게 변종을 처리했지?
그땐…… 깨부수는 게 아니라 부러뜨리는 방식으로 싸워서 그런가?
다행히 패시브 스킬 재생 덕에 빠졌던 뼈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뒤에 있던 일행도 내 곁으로 다가왔다.
전완수는 일격에 사망한 변종을 얼굴을 보고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제 변종도 주먹으로 때려잡을 수 있어? 좀비화도 안 쓰고?”
“지금처럼 싸우면 위험할 거 같아. 방식을 바꿔야겠어.”
최현은 내 어깻죽지를 쳐다보며 물었다.
“어깨 탈골된 거 같던데, 지금은 괜찮아?”
오른팔을 천천히 돌려본 결과, 불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했다.
뒤에 있던 곽찬혁은 변종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변종이 입고 있는 옷을 유심히 살폈다.
옷깃을 붙잡으며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한때 수색대로 활동했던 동료인 모양이다.
곽찬혁의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에 수많은 감정이 담겨있었다.
위로의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괴물로 변한 동료를 목격했고, 동료의 안면이 함몰되는 걸 두 눈으로 확인했다.
곽찬혁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건 오만하기 짝이 없는 무책임한 말이기에, 쓸데없는 위로 대신 함묵하기로 했다.
지직- 지직-
그 순간, 귓가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신호가 불안정할 때 들리는 기계음처럼, 신경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이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행을 쳐다보자, 다들 한쪽 귀를 가리거나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띠링.
-시스템 에러.
뒤이어 눈앞으로 떠오르는 홀로그램.
시스템 에러?
이건 또 무슨 말이야.
멍한 표정으로 홀로그램에 적힌 문장을 살폈다.
지금껏 확인한 홀로그램과 달리, 홀로그램 테두리가 일그러지고 질척한 핏물에 젖은 것처럼 붉게 물든 상태였다.
-근방 10m 내의 좀비 플레이어에게 퀘스트가 생성…….
-일반 플레이어에게 퀘스트가 전송되지 않습니다.
-일반 플레이어에게 퀘스트가 전송되지 않습니다.
-일반 플레이어에게 퀘스트가 전송되지 않습니다.
…….
…….
이게 뭐야?
눈앞으로 쉴 새 없이 올라가는 오류 문구에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일행을 쳐다봤다.
일행의 앞에도 나와 똑같은 홀로그램이 생성된 상태였다.
설여원은 눈이 아픈지, 두 눈을 껌벅이며 고개를 저었다.
전완수는 홀로그램을 닫기 위해 열심히 손을 움직였지만 닫으면 생성되고, 또 닫으면 생성되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최현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다들 찬혁이 형 뒤로 떨어져. 10m 이상 거리 벌려.”
근방 10m 내에 좀비 플레이어가 있다고 적혀 있으니, 거리부터 벌리자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너도나도 수성못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략 15m 정도 거리를 벌리자, 그제야 눈앞으로 떠오르던 오류 문구가 사라졌다.
그건 그렇고 일반 플레이어와 좀비 플레이어?
분명 시스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대장 좀비를 플레이어로 분류한다는 건가?
우리가 메인 퀘스트를 지닌 것처럼, 대장 좀비는 진화 퀘스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대장 좀비에게도 긴급 퀘스트가 생성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 된다.
곽찬혁에게 긴급 퀘스트가 생성돼서 저런 문구가 떠오른 건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옆에 있던 전완수가 입을 열었다.
“야, 이거 혹시 베타 테스트 이전에 삭제된 데이터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거 있잖아. 게임 발매하기 전에 삭제된 데이터.”
“이스터에그 같은 거야?”
“약간 달라. 이스터에그는 제작자가 의도적으로 숨겨둔 거고, 이런 데이터는 플레이어가 정석으로 플레이하지 않으면 발현될 때가 있거든. 말 그대로 오류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전완수는 눈썹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주머니 괴물이라는 유명한 만화 알아? 노란색 전기 쥐 나오는 거.”
“알아.”
“그거 게임으로 나온 것도 다들 알지?”
“당연히 알지.”
“초기 버전에 이런 오류 많았거든. 갈 수 없는 길로 가거나, 해선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면 베타 테스트 이전에 데이터가 겹치는 일이 있었어.”
“그럼 어떻게 되는데?”
“정식 버전에 오류 데이터가 뜨면서 삭제된 데이터가 게임에 적용되지. 말 그대로 오류로.”
그렇다면…… 대장 좀비에게 긴급 퀘스트가 생성되는 건 삭제된 데이터지만, 우리가 오류를 건드려서 긴급 퀘스트 문구가 출력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건가?
대체 왜?
난 변종을 죽인 것 말고 한 게 없는데?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마를 긁적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반복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으로 한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곽찬혁은…… 변종으로 변한 동료의 죽음에 슬퍼했다.
시신을 뜯어먹으면 뜯어먹었지, 좀비가 변종의 죽음에 슬퍼하는 일은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하며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