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33화
불어오는 바람에 상체가 흔들릴 때마다 식은땀이 맺혔다.
살 떨린다는 말이 어떤 건지, 몸소 깨달을 수 있었다.
어깨너머로 뒤를 돌아보자, 설여원은 양팔을 좌우로 펼치고 균형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전완수는 게걸음을 하고 있었고, 최현은 개처럼 네 발로 기어오고 있었다.
크르르르…….
발밑에서 들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슬쩍 고개를 숙여 지면을 살피자, 곽찬혁의 수하들이 수성못을 향해 이동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수백 마리의 좀비가 일제히 이동하며 안개의 표면이 일렁이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다들 힘내.”
앞서가는 곽찬혁은 수성못역을 가리키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외나무다리를 걷는 기분으로 2㎞를 지난 끝에, 우린 수성못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역사에 들어서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난 허리에 묶어둔 밧줄을 풀고 곽찬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주변에 다른 움직임은 없나요?”
“나도 모르지.”
“아까 수하들 정찰병으로 보낸 거 아니었어요?”
“정찰병?”
곽찬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발밑으로 수하들 이동하던데, 그거 수성못 근처에 분포시키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따라오라고 지시한 건데.”
멋쩍은 마음에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수하들을 이용해서 변종의 위치를 파악하려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가 너무 앞 수를 보고 움직인 건가?
이에 곽찬혁을 쳐다보며 내가 생각한 계획을 들려주었다.
우리가 섣불리 들어가는 건 위험부담이 크니, 수하들을 먼저 들여보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곽찬혁은 이해가 되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들여보낸 뒤에 어디에 쓰려고? 호위병만 잃는 거 아니야?”
“대장 좀비는 수하들의 위치가 머릿속에 붉은 점으로 표시된다고 들었어요.”
“맞아.”
“수하들을 20마리 단위로 묶어서 정찰 보내세요. 만약 붉은 점이 단체로 사라지면 변종이 있다는 증거죠.”
“…….”
“사이코패스들도 결국은 인간이니, 20마리를 동시에 처리하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곽찬혁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네가 바깥 활동하는 이유가 있구나. 머리 좋네.”
“수하들 우르르 움직이는 거 보고 형이 저랑 같은 생각인 줄 알았어요.”
“전혀. 이전처럼 너희들 감싸는 형태로 움직일 생각이었어.”
“전부 보내는 건 위험의 소지가 있으니, 일단 60마리 정도만 세 방향으로 정찰 보내세요.”
수성못은 함정이 많고, 변종의 위치도 파악할 수 없었다.
단체로 움직이면 발각되기 쉽기에, 이전처럼 행동하면 기습당할 확률이 높다.
이러한 의견을 얘기하자, 설여원과 전완수도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곽찬혁은 다수의 의견에 따라 지면에 있는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크르르르…… 크어어어!”
곽찬혁이 목젖을 갈며 소리치자, 지면에 있던 수하들이 수성못으로 이동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동하는 좀비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옆에서 최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만.”
최현은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근심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만약 수성못에 대장 좀비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경계를 강화할지도 모르잖아.”
최현의 물음에 설여원과 전완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나도 그 생각을 못 한 건 아니다.
다만 내가 대장 좀비라면, 경계 강화 같은 건 꿈도 못 꿀 것이다.
변종의 압박도 감당하기 버거울 텐데, 적의 공격을 확인하고 달려드는 건 멍청한 짓이다.
오히려 변종의 시선이 곽찬혁의 수하들에게 집중된 순간을 이용해서 도주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최현의 말대로 공격을 선택할지도 모르기에, 일단 60마리만 보낸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힐 수도 있으니까.
이러한 생각을 들려주자, 더는 반박하지 않았다.
설여원은 가방에 넣어둔 망원경을 꺼내서 수성못을 응시하더니,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주변에 나무가 많아서 잘 안 보여.”
이에 곽찬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서 수성못까지 얼마나 걸려요?”
“저 앞에 두산오거리만 지나면 수성못 입구야. 입구에서 100m만 들어가면 함정이 있고.”
난 두산오거리 방면을 응시하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반복했다.
수성못은 동기들과 와본 게 전부였고, 그마저도 손꼽히는 정도라서 지형이 익숙하지 않았다.
한 가지 기억나는 건…… 4층 높이의 카페를 본 기억이 있었다.
난 곽찬혁을 쳐다보며 물었다.
“수하들 어디까지 갔어요?”
“지금 입구 지나고 있어.”
“입구 지나서 수성못 보일 때까지 변종의 공격이 없으면 우리도 들어가죠. 수성못이 한눈에 보이는 카페를 알아요. 거기에 자리 잡는 게 좋겠어요.”
곽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하들의 위치에 집중했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수하들의 위치를 파악하더니, 뒤이어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있다.”
“몇 마리요.”
“두 마리에서 세 마리.”
“60마리 전부 당했어요?”
“입구 지나서 100m 정도 들어가면 수성못이 보여. 거기서 삼거리가 나오는데…… 흩어진 지 얼마 안 돼서 전부 사라졌어.”
60마리가 동시에 증발했다면 변종일 가능성이 높다.
난 뒤에 있는 일행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수류탄 얼마나 있지?”
“수류탄은 한 사람당 2개씩. 소총은 나랑 완수가 하나씩. 탄알집은 각 3개.”
“쇠뇌랑 볼트는.”
“쇠뇌도 완수랑 나만 챙겼고, 볼트는 충분해.”
뒤에 있는 최현을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난 앞도 안 보이는데 총이랑 쇠뇌 챙겨서 뭐해.”
최현은 시야 확보가 어려운 탓에 소총은 챙기지 않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권총과 수류탄, 카타나만 챙겼다고 한다.
하긴, 나도 앞이 안 보이는 탓에 소총과 쇠뇌를 사용하지 않으니, 최현도 카타나를 사용하는 게 현명할 수도 있겠다.
곽찬혁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더니, 목덜미를 긁적이며 물었다.
“사실 계속 물어볼까 말까 했는데, 너희 소총은 어디서 얻은 거야?”
“설명하려면 길어요. 여기 일 마무리되면 알려드릴게요.”
곽찬혁은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물었다.
“다음 계획은 뭐야? 일단 입구 근처에 못 해도 세 명은 있는 것 같은데. 재형이 너 혼자 처리할 수 있어?”
“일대일은 자신 있지만 동시에 세 마리를 상대하는 건 어려워요. 확인된 변종만 14마리는 되니, 세 마리 잡자고 좀비화를 사용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고요.”
“마리라고 하는 건 좀…… 그렇다.”
“아…… 죄송합니다. 명이라고 할게요.”
좀비와 변종에게 마리라고 표현하는 게 익숙해져서 그런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지금이야 얼굴도 알아볼 수 없는 변종이지만, 이전에는 곽찬혁의 동료들이었다.
기존 수색대는 곽찬혁까지 포함해서 플레이어만 15명이었다.
그럼 변종으로 변이된 플레이어만 14명이란 말이 되니, 세 마리를 잡기 위해 좀비화를 사용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일단 수성못 입구까지 이동한 뒤에 각성 퀘스트 생성되는지부터 확인하자. 그 뒤에 변종을 잡든, 다른 방안을 마련하든, 결정하면 될 것 같아.”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곽찬혁도 슬슬 긴장되는지, 뻐근한 어깨를 풀며 물었다.
“내가 변종이랑 싸우면…… 많이 밀릴까?”
“형님도 수하들을 부리는 것 말고는 일반 좀비와 다르지 않아요. 변종이 보이면 싸우지 말고 저희한테 얘기하세요.”
“……알았어.”
* * *
이동 경로를 확보하기 위해, 곽찬혁이 먼저 내려가서 두산오거리를 정리했다.
오거리를 거니는 좀비들을 수하로 받아들이며 잃은 60마리의 수하를 채우고, 모든 수하를 좌측 대로에 대기시켰다.
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곽찬혁을 보고, 설여원과 내가 한발 앞서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도로 폭이 넓으면 넓을수록 내겐 불리하게 작용한다.
안개 너머로 건물의 윤곽이라도 보여야 기점을 잡고 움직일 텐데, 두산오거리에 들어서자 안개를 제외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그어진 차선으로 방향을 잡으려 해도, 오거리에 그려진 점선이 많아서 방향감을 상실하기 일쑤였다.
가브리엘의 능력을 지닌 설여원과 전완수가 없었다면 이상한 곳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설여원을 따라 안개 속을 나아가자, 서서히 길목이 좁아지며 2차선 도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도로의 양옆으로 이름 모를 나무들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좌측은 경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산이 있는 모양이다.
우측은 지면이 평평한 것으로 보아, 운동장이나 공원이 조성된 것으로 보였다.
몇 걸음 나아가자, 우측에 세워진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수성못길.
-입구부터 100m.
설여원도 팻말을 확인했는지,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얘기했다.
“어떻게, 일단 직진?”
“그래야지. 일단 직…….”
띠링.
뒤이어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눈앞으로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타락한 쉘터를 발견했습니다.
-100명 이상의 생존자를 학살한 쉘터입니다.
-각성 퀘스트를 수락할 시, 위 쉘터에 있는 생존자들을 전원 사살해야 합니다.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쉘터 카운트에서 제외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es or No.
긴급 퀘스트는 우리의 의사를 묻지 않고 자동으로 수락되더니, 각성 퀘스트는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두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3개의 쉘터를 찾아야 한다.
에피소드 진행에 속도를 높이느냐, 혹은 각성을 하겠느냐의 문제.
일행을 쳐다보자, 다들 콧방귀 뀌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여원은 퀘스트 내용을 살피며 얘기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는데?”
동감이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퀘스트를 수락했다.
-각성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각성 퀘스트: 난이도 S]
-수성못 쉘터는 살인을 유흥으로 즐기는 사이코패스 집단의 소굴입니다.
-클리어 보상: 캐릭터 각성
(에덤 화이트는 제외됩니다.)
-클리어 조건: 생존자가 40명 미만으로 내려가기 전에 먼저 처리해야 합니다.(0/47)
-제한 시간: 36시간
47명을 죽여야 하는 퀘스트.
하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이미 이곳에 있는 놈들을 생존자라 칭하는 것도 거부감이 들 정도였으니까.
그건 그렇고 에덤 화이트는 제외라니.
예상은 했지만, 대놓고 제외하니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라스트아크를 플레이할 때도 에덤은 각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끊임없이 좀비를 처리하며 신체를 강화하는 것 말고는 강해지는 방법이 없었다.
Hell 난이도로 올라갔으니 에덤의 각성을 내심 기대했는데, 아닌 건 아니었다.
설여원은 곧장 무전기를 들고 쉘터에 있는 일행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들에게 각성 퀘스트를 공유하자, 무전기 너머로 이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락했어. 36시간이면 아직 여유 있으니, 만약 문제 생기면 바로 얘기해. 좀비카 타고 바로 갈 테니까.
“알겠어요. 퀘스트는 다들 공유한 거죠?”
-어, 한지현 씨랑 강요한 씨도 공유할까?
이정우의 물음에 설여원은 내 얼굴을 쳐다봤다.
이에 곽찬혁을 쳐다보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각성하게 되면…… 단점은 없어?”
“게임에는 없었어요.”
“그럼…… 염치없지만 내 동료들도 공유 부탁할게.”
곽찬혁이 수긍하자, 설여원은 무전기에 입을 갖다 대며 얘기했다.
“공유하세요.”
-알았어.
각성 퀘스트 공유를 마치고, 수성못으로 향하는 2차선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100m만 들어가면 변종이 나타날 것이다.
평범한 좀비들과 달리 알파 변종은 나무에 매달려 있기도 하고, 건물 외벽에 밀착하여 사각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마음 같아서는 버스라도 끌고 와서 밀어버리고 싶지만, 길목이 좁은 탓에 버스의 회전반경이 제한적이었다.
또한 방지턱도 많아서 삼각뿔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고, 속도도 높일 수 없다.
다수의 변종과 싸울 생각에 반사적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한동안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전신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심호흡으로 긴장감을 떨쳐내고, 두 주먹을 쥐었다 펴며 뻐근한 어깨를 돌렸다.
상황에 집중하면 반사신경이 증가하기에, 두 눈 부릅뜨고 안개 속을 응시하며 얘기했다.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