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29화
각자의 역할이 있다.
애초에 C 구역은 황금네거리와 연결되는 대로라서 좀비들의 공격이 가장 많은 구역이었다.
좀비들의 공세를 막느라 바리케이드를 높이 쌓을 시간도 부족할 지경이었으니, 더는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동안 4단지와 3단지의 생존자들이 목숨 걸고 C 구역 바리케이드를 사수할 때, A 구역과 B 구역의 생존자들은 모른 체하기 바빴다.
필요할 때만 찾고, 타인의 고통에는 이 악물고 모른 체하던 사람들.
그런 성김공 측의 생존자들에게 4단지, 3단지 사람들은 경멸감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곽 대표가 사라진 뒤로 차별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새겨진 상처는 곪고 문드러져서 더는 아물지 않는 불치병이 되었다.
그런데 성 대표가 당했다는 소리에 너도나도 달려와서 구해달라고 하니, 그들을 위해 손 내밀어주는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심지어 도와달라는 것도 아니고, 지켜달라는 뻔뻔한 소리나 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쩜 사람이 저리도 못났을까.
어쩜 저리도 염치가 없을까.
한지현은 이러한 생각을 하며 뒤에 있는 4단지 생존자들에게 얘기했다.
“절대로 문 열어주지 말고, 만약 기어오르는 사람이 있으면 공격해요.”
“고, 공격이요?”
“좀비보다 못한 놈들인데 뭐하러 살려둡니까! 다 죽여도 좋습…….”
쾅!!!
그 순간, 자욱한 안개 속에서 철판을 때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모든 사람이 숨죽인 채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B, B 구역 아니야?”
“마, 맞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찰나.
크어어어어어어!!
쾅!!!
좀비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또다시 B 구역 바리케이드를 가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4단지 바리케이드 앞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아우성과 내부로 들어가려는 사람들로 아비규환에 빠졌다.
그동안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이정우는 다급히 무전기를 들고 어린이 놀이터로 이동했다.
주변 생존자들이 무전 내용을 엿들을지도 모르기에, 안전을 기하는 모습이었다.
“재형아, 재형아 내 말 들려?”
치지직- 치직- 삑.
-네 형, 말씀하세요.
“거기 어떻게 됐어? 여원이한테 곽 대표 만났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지금 곽 대표가 그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4단지, 3단지 밖으로 나오지 마세요.
“여기 성김공 쪽 사람들 와서 난리야!”
-네? B 구역에 그럼…… 아무도 없어요?
“전부 여기 와서 들어오겠다고 난린데 지키는 사람이 있겠어?”
-곽 대표가 4단지랑 3단지는 건드리지 않을 겁니다. 바리케이드 밖에 있는 사람들 정리될 때까지만 버텨주세요.
박재형의 말에 이정우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너희는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저희 걱정하지 말고 바리케이드 안 무너지게 잘 지키셔야 돼요.
“……알았다.”
이정우는 무전을 마치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상황은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정우는 뻐근한 어깨를 풀며 바리케이드로 달려갔다.
4단지 출입구에 설치된 3m 높이의 바리케이드.
사람들은 4단지 내부로 들어오기 위해 서로 밀치고, 짓밟고,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덕배는 한지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한 대표, 저 사람들은 바리케이드 없어?”
“B 구역 바리케이드 말씀입니까?”
“아니, 저 사람들이 지내는 아파트 말이야.”
“있습니다.”
“있는데 왜 여기 와서 난리야?”
한지현은 착잡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말씀대로…… 진즉에 쳐내지 못한 제 불찰이죠.”
한지현의 대답에 이덕배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생충 같은 존재라는 걸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다.
크어어어어어!!
“좀비, 좀비다!”
뒤이어 4단지로 초입까지 접근한 좀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4단지 앞에 있던 사람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 치기 시작했고, 바리케이드 내부에 있던 생존자들은 벽 뒤로 몸을 숨긴 채 좀비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들려오는 절규와 단말마, 삶을 갈망하는 처절한 몸부림까지.
바리케이드 내부의 생존자들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두 눈을 감았다.
벽 너머의 사람들이 지금껏 그랬듯이, 타인의 죽음을 외면했다.
사람들의 비명은 거센 파도에 휩쓸린 돛단배처럼, 4단지 초입을 지나 골목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더는 바리케이드 앞에서 비명이 들리지 않자, 한지현과 이정우는 조심스레 바리케이드 위로 올라갔다.
벽 너머의 지옥을 목도하고,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로 바글바글하던 골목은, 흩뿌려진 선혈과 싸늘한 주검으로 비릿한 냄새만을 풍기고 있었다.
이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한 대표님, 오늘은 생존자들 외출 금지시키고, 최소한의 인원으로 보초를 서는 게 좋겠습니다.”
“이정우라고 하셨죠?”
“네.”
“이 상황…… 설명해 주셔야겠습니다.”
이정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한지현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좀비들이…… 어째서 여길 공격하지 않은 거죠?”
한지현의 물음에 이정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그야…… 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좀비들의 시선을 유도하니 그렇죠.”
“지금껏 이런 경우는 없었습니다.”
“예?”
“최소한 몇 마리는 시신을 뜯어먹어야 정상인데, 지금은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일제히 떠났어요.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한지현의 물음에 이정우는 대답을 망설였다.
한지현이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자, 이정우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한지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대표실로 가서 얘기하시죠.”
“그 말은…… 밖에 있는 좀비들이 여길 공격할 가능성은 없다는 겁니까?”
이정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한지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한발 앞서 바리케이드 밑으로 내려가며 얘기했다.
“따라오세요. 들어가서 얘기하죠.”
한지현은 이정우를 데리고 대표실로 향했다.
* * *
“여원아, 여기서 보여?”
“주변에 건물이 많아서 잘은 안 보이는데, 얼추 끝난 거 같아.”
설여원의 말을 듣고 무전기를 들었다.
“정우 형, 제 말 들리세요?”
치지직- 치직- 삑.
-어 재형아. 얘기해.
“사람들은 어때요. 다들 안전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괜찮아. 좀비들도 돌아가는 추세고.
“그럼 곽 대표 돌아오면 얘기 마무리하고 돌아갈게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 있는데…….
치지직-
-한지현입니다.
한지현의 목소리에 난 놀란 눈으로 설여원을 쳐다봤다.
설여원도 당황했는지, 내 얼굴을 쳐다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전완수와 최현도 놀란 미어캣처럼 쳐다보기에, 난 목을 가다듬으며 얘기했다.
“한 대표님이 왜 정우 형 무전기를…….”
-상황은 이정우 씨에게 들었습니다. 곽 대표, 살아 있는 겁니까?
“……주변에 다른 사람 있습니까?”
-저랑 이정우 씨뿐이에요. 그러니 어서 대답해요. 곽 대표, 살아 있어요?
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이 순간이 찾아오리라 생각은 했지만, 예상보다 너무 빠르다.
찰나의 망설임 끝에 무전기에 대고 얘기했다.
“오늘…… 해 떨어지면 곽 대표님과 함께 쉘터로 가겠습니다.”
-살아 있는 겁니까? 정말 살아 있는 거예요?
“마음 단단히 먹고 기다리세요. 제가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괜히 나서서 이것저것 설명하기보다, 뒷일은 두 사람에게 맡기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이정우도 나와 같은 생각이기에 곽 대표의 처지를 설명하지 않은 게 아닐까?
곽 대표가 대장 좀비로 변했다는 말을 들었다면, 살아 있냐는 질문은 하지 않을 테니까.
“재형아, 저기.”
창가에 있던 전완수가 창밖을 가리키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안개를 살폈다.
안개가 일렁이는 것으로 보아, 곽 대표와 수하들이 돌아오는 모양이다.
1층으로 내려가자, 곧 건물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오는 곽 대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곽 대표님, 어떻게 됐습니까?”
“약속대로 정리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대로에 있는 좀비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밖에 있는 수하들, 처음 데려간 숫자보다 줄어들었는데요? 저항이 거센 편이었나요?”
“아닙니다. 수하로 만든 사람이 140명. 5단지에 가둔 사람이 150명 정도 됩니다.”
“나머지 10명은요?”
“10명이 아니고 정확하게는 22명입니다.”
하긴, 성김공 측의 생존자가 정확히 300명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5단지에 가둬?
설명을 바라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곽 대표는 차분한 목소리로 현 상황을 들려주었다.
4단지 앞에 있던 사람 중에 140명은 좀비로 변했고, 도망친 150명은 추후 섭취를 위해 5단지로 몰아서 가두었다고 한다.
추후 섭취를 위해 전원 5단지에 가두고 싶었지만, 먹잇감을 직면한 수하들이 말을 듣지 않아서 140명은 좀비로 변했다고 한다.
곽 대표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5단지? 거긴 어딥니까.”
“C 구역 바로 앞에 있는 아파트에요. 대로를 기준으로 북쪽에 있는 1, 2, 3, 4단지와 달리 혼자 남쪽에 있는 단지죠.”
“괜찮은 겁니까? 거기 있는 사람들이 도망칠 가능성은…….”
“없습니다. 5단지는 산에 둘러싸인 형세라 대로가 아니면 나올 구멍이 없어요. 현재 제 수하들이 입구를 막아둔 상태고요.”
“5단지는 생존자들의 주거공간으로 사용하지 않는 모양이죠?”
“네, 그쪽은 황금네거리와 가깝다 보니, 은신처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들어보니 4, 3, 2, 1단지 순으로 좀비들을 정리하고, 마지막에 5단지를 정리했다고 한다.
황금네거리와 가장 가까운 곳에 지어진 아파트라서 거주공간으로 적합하지 않았고, 이에 사거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3, 4단지가 캐슬 생존자들의 은신처가 되었다고 한다.
굳이 C 구역 바리케이드를 멀리 설치한 이유는 뭐지?
이 부분을 곽 대표에게 묻자, 그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1단지부터 4단지까지는 범어공원이 둘러싸고 있는 형세라 남쪽 대로만 막으면 좀비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남쪽 대로라면…… 5단지 입장에선 북쪽 대로군요.”
“네, 10차선대로죠. 그래서 1단지 끝에서 5단지 끝을 가로막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5단지도 산에 둘러싸인 형세고 1단지부터 4단지도 산에 둘러싸인 형세라면, 황금네거리로 이어지는 대로만 틀어막으면 방어가 수월할 것이다.
지리적 요소까지 생각해서 지은 견고한 쉘터였다.
지형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가만히 턱을 매만지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곽 대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150명, 바로 안 죽여서 실망했습니까?”
내가 150명 때문에 고민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에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실망은 아니고…… 5단지에 갇힌 사람들이 탈출할 가능성은 얼마나 되나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제 수하들이 모든 입구를 봉쇄하고 있으니까요. 무기가 있을 때도 도망치기 바빴는데, 머릿수도 줄어든 마당에 탈출이 가능할까요?”
하긴, 괜한 걱정이었다.
5단지에 있는 사람들은 힘을 합치진 못할망정, 지금쯤 서로 옥신각신하고 있을 것이다.
남은 22명의 생존자는 곽 대표가 인간이던 시절부터 신뢰하던 사람들이기에, 공격하지 않고 내버려 뒀다고 한다.
이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 22명은 어떻게 구별한 겁니까? 어디 있는 줄 알고.”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습니다.”
“그곳이요?”
“4단지 앞이요. 그들은 4단지로 가서 항의하지 않고, 공 대표 측의 아파트에 모여서 바리케이드 수비를 강화했더군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200명이 넘는 사람이 4단지 앞에 모여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B 구역 수비는 텅텅 비어버렸고, 22명의 사람은 B 구역보다 수비 범위가 좁은 H아파트에 모여 수비를 강화한 모양이다.
H아파트라면 공 대표의 관할구역이었고, A 구역 바로 옆에 있는 단지였다.
곽 대표는 H아파트를 사수하는 22명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를 버리지 않았기에, 곽 대표가 살려두었다고 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