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26화
여전히 엉뚱하다고 해야 좋을지, 뇌에 필터 기능이 없다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최현의 말에 설여원과 전완수도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곽 대표는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어쩌면…… 저 친구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사람이 어쩜 저리 태연할 수 있지?
대놓고 험담을 하는데 화를 안 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쉘터를 공격한다!
이런 시나리오는 불가능할 것 같다.
곽 대표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다.
곽 대표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더니, 내 얼굴을 쳐다보고는 물었다.
“300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당신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인데, 후회는 없습니까?”
“숫자는 중요하지 않아요. 300명이든 3명이든, 미꾸라지가 있는 한 물은 맑아지지 않습니다.”
“그럼 출발하기 전에, 여기서 실험하고 가도 되겠습니까?”
“여기서요? 무슨 실험이요.”
“아까 말씀하셨잖아요. 생존자를 코앞에 두고도 제 수하들이 명령에 따르는지 확인하고 싶다고.”
“…….”
“쉘터를 공격했을 때 제 수하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생존자들을 공격하면…… 전 300명을 섭취하지 못할 겁니다.”
곽 대표의 말에 난 목덜미를 주무르며 계속 얘기하라고 했다.
곽 대표는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다소 위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 주제에 이런 요구를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실험 겸, 당신의 자질도 보고 싶네요. 과연 300명의 목숨을 가벼이 여길 만큼의 능력이 되는지 말입니다.”
곽 대표의 말에 뒤에 있던 설여원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예요?”
“300명을 죽이는 건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아니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어떻게 재형이랑 저기 있는 멍청이들을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해요?”
그러자 곽 대표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얘기했다.
“성 대표가 저를 속였다 한들, 그동안 함께 한 시간까지 부정하고 싶진 않네요.”
“…….”
“그리고 쉘터에 있는 사람들도…… 저와 함께 땀 흘리며 바리케이드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곽 대표의 말에 전완수와 설여원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콧방귀 뀌며 고개를 저었다.
금방이라도 반기를 들 것 같아서, 난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얘기했다.
“아니야, 오히려 좋아. 곽 대표님 말대로 하자.”
“야!”
설여원은 미간을 찌푸리며 내 팔을 잡았다.
이에 진정하라는 말을 남기고 곽 대표를 쳐다봤다.
“곽 대표님,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얘기하시죠.”
“수하들이 명령에 불복종하고 덤벼들지도 모르니, 저 혼자 실험대에 서겠습니다.”
곽 대표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하죠.”
가볍게 목례하며 대답하자, 뒤에 있던 설여원이 또다시 내 팔을 잡아끌며 얘기했다.
“너 미쳤어? 무슨 생각…….”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만날 만약에, 혹시 모르니, 혹시라도, 이런 말만 하지 말고 네 생각 좀 해! 네 몸뚱이는 머릿속에 없니? 왜 자꾸 무리수를 둬?”
속사포처럼 들려오는 잔소리에, 난 이마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죽을 생각도 없고, 무리할 생각도 없어. 이번 기회에 나도 실험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또 무슨 실험? 너 실험할 때마다 보는 사람은 얼마나 조마조마…….”
“좀비화를 쓸 거야.”
“……뭐?”
설여원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전완수는 인상을 쓰며 내게 물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정신력 스탯을 높인 뒤로 써본 적이 없잖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지금 상태로는 불안해서 마음대로 쓰지도 못하잖아.”
“곽 대표의 수하만 500마리야. 그건 알고 하는 소리야?”
“저번엔 150마리를 처리하고도 시간이 남았어. 지금은 지속시간도 늘었으니 가능할 것 같아. 만약 위험해지면…… 그땐 너희가 도와줘.”
“아이 미친놈아!”
전완수는 대뜸 욕설을 뱉으며 나무라기 시작했다.
전완수와 설여원이 뜻을 굽히지 않자, 옆에 있던 최현이 팔짱을 끼며 덤덤하게 얘기했다.
“야, 내 생각에는 재형이 말이 맞아.”
“넌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하고…….”
“뭐가 이상해? 지금보다 좀비화 쓰기 좋은 조건이 어디 있어? 만약 실패하면 곽 대표님이 직접 나서서 말릴 수도 있고, 우리가 유리한 지점에서 보조 맞출 수도 있잖아.”
최현의 의견에 전완수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여원도 안심할 수 없는지, 최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현아, 곽 대표가 우릴 공격할 가능성도 생각해야지. 우리가 보조 맞추는 순간을 이용해서 곽 대표가 우릴 덮치면…….”
“저기…… 다 들립니다만.”
곽 대표가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하자, 설여원은 눈을 흘기며 다시금 최현을 쳐다봤다.
최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무전 보내지 뭐.”
“……무전?”
“쉘터에 있는 사람들한테 곽 대표님의 실체 까발리면 되잖아. 그건 곽 대표님도 원치 않죠?”
곽 대표는 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에 설여원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 같이 자폭이라도 하자는 거야?”
“뭔 자폭이야? 정우 형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아니면 설마 너…… 정우 형 올 때까지 버틸 자신이 없는 거냐?”
최현이 싱겁게 웃으며 묻자, 설여원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뒤이어 곽 대표를 슬쩍 쳐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하긴, 우리가 평범한 좀비한테 죽을 정도는 아니지.”
“저기…… 다 들립니다. 여러분.”
곽 대표는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뒤이어 곽 대표는 나와 내 일행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엷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그리운 모습이네요.”
그립다는 말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수성못으로 수색을 나가기 전에, 황금동 쉘터가 어떤 모습이었을지 얼추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곽 대표는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박수를 치더니, 우리의 시선을 유도하며 얘기했다.
“준비됐으면, 시작할까요?”
“잠시만요. 대로로 나가서 실험하죠.”
“넓은 지형이면 박재형 씨가 불리할 텐데요.”
“말했잖아요. 저도 제 능력을 확인하고 싶다고.”
내가 괜찮다고 하니, 곽 대표는 다른 말 없이 승낙하는 모습을 보였다.
“끄으으…….”
뒤이어 기절했던 성 대표가 앓는 소리를 내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곽 대표의 두 눈이 번뜩이고,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성 대표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콰득-!
곽 대표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반사적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 자리에서 성 대표의 머리를 뜯어먹은 뒤, 입가에 묻은 혈흔을 닦으며 얘기했다.
“박재형 씨가 제 의견을 승낙했으니, 저도 본보기는 보여야죠?”
곽 대표의 말에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곽 대표도 성김공을 향한 배신감이 극에 달한 것으로 보였다.
내가 곽 대표라면 당장 쉘터로 달려갔겠지만, 곽 대표는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끝까지 침착함을 유지했다.
이 자리에서 성 대표를 섭취했다는 건…… 정말 내 자질을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다.
* * *
대로로 향하자 20명의 죽창부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상태였다.
총성을 듣고 도와주러 오지는 못할망정, 상황이 악화됐다고 생각했는지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설여원과 전완수, 최현은 대로를 마주 보는 건물 4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내게 준비됐다는 무전을 보냈다.
곽 대표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내게 물었다.
“만약 제 수하들이 박재형 씨를 공격하면, 그땐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쉘터에 있는 생존자들을 제가 섭취하는 건 불가능할 텐데요.”
“섭취가 어렵다면 전부 수하로 만들어요.”
“저는…… 이미 500마리를 채웠습니다. 더는 수하를 부릴 수 없어요.”
“수하들이 저를 공격한다면 이 자리에서 500마리 모두 잃을 겁니다.”
“그렇게 자신 있습니까?”
“보면 압니다. 500마리가 전멸하면 근방의 좀비들 수하로 받아들이고 쉘터를 공격하는 거로 하죠.”
싱겁게 웃으며 대답하자, 곽 대표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이었다.
“하나만 더 물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제 생각에는 수성못에 사이코패스들이 살아 있을 확률이 희박한데, 박재형 씨는 무슨 근거로 확신하는 겁니까?”
“변종이 여기로 오지 않잖아요.”
“…….”
“수성못에 아직 먹잇감이 남아 있으니, 변종이 떠나지 않는 겁니다.”
황금동에서 수성못까지는 족히 3㎞에서 3.5㎞.
멀다면 먼 거리지만, 대로를 따라가면 도착하기에 쉘터가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종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다는 건…… 아직 수성못에 미련이 남아 있다는 방증이었다.
변종의 미련이라면 당연히 살아 숨 쉬는 인간, 먹잇감일 것이다.
곽 대표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무운을 빕니다.”
곽 대표는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쉬더니,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크어어어어어어!!!
간만에 들어보는 포효에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차올랐다.
손바닥으로 땀이 고이고, 목덜미에 힘이 들어갔다.
“후…….”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가볍게 몸을 털고, 두 주먹을 말아쥐며 정면을 응시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귓바퀴를 간질이는 말발굽 소리, 그 속에서 메아리치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온다.’
자욱한 안개 너머로 5차선 도로를 가득 채우는 좀비들의 인영이 나타났다.
놈들은 내 얼굴을 보고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이더니, 곽 대표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생존자를 공격하지 말라는 곽 대표의 명령에 머뭇거리는 모습.
그어어어어어…….
하지만 좀비들 사이에 있던 공명 좀비가 울부짖자, 다른 좀비들도 덩달아 공명하기 시작했다.
카하아악!! 카학!!
그러자 선두에 있던 좀비들이 목젖을 갈며 달려들었다.
먹잇감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는…… 대장의 명령이 통하지 않았다.
재빨리 가드를 올리며 달려드는 좀비들을 향해 빠르게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쩍!! 퍽!! 빠각, 퍽!!
안면이 함몰되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쓰러지는 좀비들.
쉴 새 없이 좌우로 눈을 굴리며 좀비들의 위치를 살폈다.
이전보다 반사신경은 5배나 증가했고, 동체 시력은 4배나 증가했다.
좀비화를 사용하지 않아도 좀비들의 움직임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타닥-
좀비들이 좌우로 흩어지며 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어디, 반사신경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볼까?
사방에서 좀비들의 손길이 날아들자, 전신의 털끝이 곤두서며 놈들의 위치가 머릿속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레이더에 포착되는 미사일처럼, 가까운 손길부터 하나씩, 놈들의 위치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뒤.’
돌아볼 새도 없이 돌려차기를 날리자, 관자놀이가 으깨지는 감촉이 뒤꿈치로 느껴졌다.
‘오른쪽.’
회전하는 오른발이 지면에 닿자마자, 발목와 골반, 허리, 어깨 순으로 비틀며 주먹을 뻗었다.
좀비의 콧대가 내려앉으며 뒤에 있던 좀비들까지 볼링핀처럼 쓰러졌다.
‘좌측.’
재빨리 스텝을 밟으며 좌측으로 옆차기를 날렸다.
복부를 뚫고 들어가는 왼발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지고, 좀비들의 움직임이 마치 느린 영상처럼 두 눈에 들어왔다.
상황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의 효과가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보호대도 Lv.2로 올라가면서 내구도 감소 폭이 대폭 줄었다.
이 정도면…… 뚫고 들어가는 것도 가능할 것 같은데?
“가속.”
쾅!!
지면을 박차며 정면으로 보이는 좀비들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벌어졌던 거리가 좁혀지고, 핏기가 가신 좀비의 안면이 두 눈에 들어왔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
두 눈 부릅뜨며 좀비의 콧대에 박치기를 가하자, 놈은 반응조차 못 하고 안면이 함몰되었다.
표피강화와 골밀도 스탯을 높인 덕에 좀비의 콧대에 박치기를 가해도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뒤이어 재빨리 스텝을 밟으며 좀비들을 뚫고 들어갔다.
쾅!! 쩍!! 떠덕! 떡! 콱, 뻑!!
승모근을 비틀며 쉴 새 없이 주먹을 내질렀다.
오른손 스트레이트, 왼손 스트레이트, 오른손 스트레이트, 오른손 훅, 왼손 스트레이트.
손끝으로 느껴지는 저릿한 타격감과 모든 근육을 팽팽하게 잡아주는 허벅지와 허리.
발끝으로 느껴지는 아스팔트 바닥의 단단한 촉감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돌아가는 발목과 무릎까지.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며 오감을 자극한다.
급가속이 유지되면 5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족히 열댓 마리의 좀비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후…….”
문제는 폐활량.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이니, 급격하게 줄어드는 체력으로 인해 한 차례 현기증이 일었다.
크어어어어!!
내가 지치든 말든, 좀비들의 공격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향후 어떤 스탯을 높여야 하는지 알았으니, 이제 확인해야 할 건 하나뿐.
크어어어…… 억!
코앞까지 다가온 좀비의 안면을 손에 쥐고, 그대로 지면에 내려찍으며 읊조렸다.
“다이브.”
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