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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124화 (124/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24화

성 대표를 따라 얼마나 이동했을까.

사거리의 모습이 안개 너머로 나타나자, 성 대표는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지신호를 보냈다.

나도 덩달아 멈춰 서자, 성 대표는 권총을 손에 쥐며 얘기했다.

“여기서 대기하게나.”

“네?”

“저쪽 끝에 마트가 있거든. 내가 먼저 가서 확인하고 오겠네.”

좌측 골목길을 가리키는 성 대표.

갈 거면 같이 가야지, 여기서 대기하라고?

홀로 위협을 무릅쓰고 식량을 구하러 가는 영웅처럼 보이고 싶은 건가?

이런 속이 뻔히 보이는 거짓말에 따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죽창을 들고 있는 20명의 사람들은 성 대표를 바라보며 얘기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대표님.”

“대표님만 믿습니다.”

“몸조심하세요.”

그렇게 걱정되면 같이 가든가.

어처구니없는 마음에 코웃음이 터지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아부와 아첨으로 점철된 생존자들이었다.

성 대표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난 옆에 있는 설여원에게 물었다.

“보여?”

“골목이 구불구불해서 정확하게 안 보여.”

설여원은 멀어지는 성 대표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시야에서 사라진 모양이다.

하는 수 없이 뒤에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저는 대표님이 걱정돼서 따라가야겠습니다.”

“젊은 친구, 괜히 나서지 말고 여기 있어.”

죽창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내 앞을 막아섰다.

이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여러분은 걱정 안 돼요? 이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반박하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로 눈치를 보며 주춤거리는 사람들.

덕분에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도 성 대표를 믿고 따르는 게 아니다.

성 대표의 떡고물을 받아먹으면서, 상황에 따라 도망치기 위해 여기 남은 것이다.

전완수와 최현은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더니, 내 옆에 붙으며 얘기했다.

“우리는 들어갑니다. 아저씨들은 여기 있어요.”

전완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발 앞서 골목으로 향했다.

전완수를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는…… 간사한 사람이 너무 많다.

난 고개를 저으며 전완수의 뒤를 따랐다.

가로 폭 2m의 비좁은 골목길.

설여원의 말대로 경사가 많고, 구불구불한 지형이었다.

전완수를 따라 한참을 들어가자, 앞서가던 전완수가 오른손을 들며 정지신호를 보냈다.

뒤이어 어깨너머로 슬쩍 돌아보며 내게 속삭였다.

“앞에, 좀비 두 마리.”

“주변 건물 옥상이나 창가에 좀비들 보여?”

“건물에는 없어. 골목에만 두 마리. 근데 좌측으로 꺾이는 부분이라 옆에 좀비들이 더 있을 가능성도 있어.”

전완수의 브리핑에 뒤에 있는 설여원을 쳐다보며 쇠뇌를 가리켰다.

내가 직접 나서도 되지만, 지형이 불리한 탓에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좌측에 몇 마리의 좀비가 있을지 가늠할 수 없으니까.

설여원은 내 옆으로 다가서며 쇠뇌를 견착했다.

전완수도 쇠뇌를 견착하더니, 설여원을 쳐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내가 오른쪽. 네가 왼쪽.”

퉁! 퉁!

가로로 빗금을 그으며 날아간 볼트는 정확하게 좀비들의 이마와 관자놀이를 꿰뚫었다.

박재우와 황덕록의 손을 거치면서 이전에 사용하던 쇠뇌보다 빠르고, 관통력도 향상된 것으로 보였다.

설여원은 들고 있던 쇠뇌를 어깨에 둘러메고, 헌팅 나이프를 손에 쥐며 얘기했다.

“골목이 좁으니까, 여기서부터는 내가 앞장설게.”

전완수가 사용하는 카타나는 지형상 마음껏 휘두르기 불편한 게 사실이었다.

전완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뒤에 있는 최현의 옆으로 붙었다.

설여원과 내가 앞장서고, 좀비들의 머리를 관통한 볼트를 회수했다.

그 뒤에 좌측으로 10걸음 정도 나아갔을까?

타닥- 탁- 타닷-

이곳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귓바퀴를 간질였다.

이에 옆에 있는 일행에게 숨으라고 손짓했다.

다들 일사불란하게 환풍기와 쓰레기 더미가 쌓인 비좁은 건물 틈으로 몸을 숨겼다.

훙-

뒤이어 안개 속을 스쳐 지나가는 인영.

설여원은 고개만 빼꼼히 내밀어 안개 속을 지나간 인영을 살폈다.

터벅-

그와 동시에 좌측에서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히 설여원의 옷깃을 잡아끌자, 설여원은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반사신경을 높인 뒤로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까지 내 귀에는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귓바퀴를 간질이는 익숙한 음성.

성 대표의 목소리가 틀림없다.

“정찰병이…… 당했습니다.”

뒤이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찰병이 당해?

그렇다면…… 앞서 지나간 인영이 곽 대표라는 건가?

곽 대표와 우리의 거리는 멀어봐야 10m.

이 정도 거리라면 곽 대표의 후각에 잡힐 것이다.

터벅- 터벅-

예상대로 이곳으로 접근하는 발소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체취를 따라 점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곽 대표에게 들킨 모양이다.

찰나의 고민 끝에, 마음을 다잡고 골목으로 걸어 나갔다.

내 얼굴을 확인한 남자는 세상 놀란 표정을 지으며 멈춰 섰다.

목선을 따라 기다랗게 이어지는 푸른색의 혈관.

핏기가 사라진 창백한 피부.

말을 하지만, 붉게 충혈된 눈까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좀비로 변한 곽 대표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곽 대표와의 거리는 1m.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곽 대표님.”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성 대표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곽 대표의 뒤에 있던 성 대표도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며 입술을 벙긋거렸다.

다른 생존자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정찰병을 세워둔 건가?

그렇다면 말이 된다.

정찰병의 신호가 사라졌으니 대화를 중단하고 달려온 모양이다.

뒤이어 설여원과 전완수, 최현도 건물 틈새에서 걸어 나왔다.

성 대표는 일행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자, 자네가 왜…… 왜 거기서 나와.”

난 성 대표의 물음을 무시하고, 곽 대표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곽 대표님, 아셔야 하는 게 있습니다.”

“예? 아니…… 당신은 누구…….”

“곽 대표님, 지금 성 대표한테 속고 있는 거예요.”

“……예?”

“당신 뒤에 있는 성 대표, 저 사람이 쉘터를 망치고 있다고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자, 지금의 혼란스러운 마음이 그의 표정과 몸짓으로 나타났다.

뒤이어 내가 입고 있는 보호대를 유심히 살피더니, 경계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당신…… 그 보호대는…….”

“플레이어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데니의 능력으로 알게 된 진실이니, 진정하고 들어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데니라는 말에 돌발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난 황금동 쉘터에서 겪은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들려주었다.

* * *

모든 이야기를 전해 듣고 곽 대표는 멍한 표정을 짓더니,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뒤에 있던 성 대표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본인의 최측근도 모르는 비밀을 내가 알고 있으니, 성 대표도 심히 당황한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서 화를 내면 본인의 치부를 들키는 꼴이기에, 입술을 다문 채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쇠뇌를 견착하며 얘기했다.

“거기 아저씨, 도망칠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아.”

성 대표가 겁에 질린 모습을 보이자, 상황을 지켜보던 곽 대표가 황급히 설여원과 성 대표 사이를 가로막으며 물었다.

“지금 그 말, 제가 어떻게 믿습니까.”

“믿고 말고는 곽 대표님 선택입니다.”

곽 대표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갈등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람이 사기를 당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반응.

현실부정.

곽 대표의 얼굴만 봐도 그 심리가 엿보였다.

상황에 진전이 없자, 보다 못한 최현이 곽 대표를 쳐다보며 물었다.

“못 믿겠으면 제가 성 대표님 머릿속이라도 들여다볼까요?”

“……예?”

“성 대표님과 곽 대표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제가 확인하고, 두 분 사이의 대화를 상세하게 얘기하면 믿을 수 있겠어요?”

설득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확신을 주기도 어려웠다.

곽 대표는 최현의 접근을 경계하며 얘기했다.

“아니요,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습니다. 움직이지 말아요.”

그는 차분하게 최현을 진정시키더니, 뒤에 있는 성 대표를 쳐다보며 물었다.

“성 대표님, 지금 이 학생들이 한 얘기. 사실입니까?”

“아, 아니 나는…… 그게…….”

평소의 거만하던 태도는 어디 가고, 당황한 나머지 곽 대표의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거짓을 사랑하는 자에게 진실은 독이라는 말이 있던가?

전신에 독소가 퍼진 병자처럼, 성 대표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보였다.

곽 대표는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다시 한번 성 대표에게 물었다.

“대답해요. 어서.”

성 대표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변했는지, 멍한 표정으로 곽 대표를 쳐다봤다.

뒤이어 결단을 내렸다는 듯이 옆구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으며 대뜸 내 머리에 겨누었다.

성 대표와의 거리는 고작 5m.

변명조차 떠오르지 않으니, 전원 사살이 답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반사적으로 양팔을 끌어올리며 얼굴과 심장부터 방어했다.

일반인보다 3배 이상 단단한 표피와 골밀도, 거기서 보호대까지 있으니 뇌와 심장만 보호하면 죽지 않을 것이다.

나와 성 대표 사이에 낀 곽 대표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진정하라는 손짓과 함께 입을 열었다.

“서, 성 대표님. 진정하세요.”

“곽 대표, 나도 이러긴 싫어.”

“……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네.”

“그게 무슨 말씀…….”

그 순간, 권총의 총구가 이동하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전보다 몇 배는 증가한 동체 시력과 반사신경 덕분인가?

총구의 움직임이 하나의 느린 영상처럼 두 눈에 들어왔다.

내 얼굴을 향하던 총구는 곽 대표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가속.”

이에 스킬 급가속을 사용하며 지면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곧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탕-!!

단발의 총성이 골목에 메아리치고, 은은한 화약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끝까지 분리수거가 안 되네.”

나지막이 읊조리며 성 대표를 노려보자, 그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오른손으로 총구를 막지 않았다면 곽 대표의 이마에 총알이 박혔을 것이다.

[손목 보호대: 92%]

보호대의 레벨이 올라가면서 이전보다 훨씬 견고해졌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재빨리 성 대표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팔을 꺾으며 제압했다.

두둑-

“끄아악!”

성 대표의 팔이 수수깡처럼 부러지고,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곽 대표는 멍한 표정으로 이곳을 바라보더니, 뒤이어 오만상을 찌푸리며 양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제야 본인이 속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난 당신을 믿었는데…….”

본인의 머리에 총구를 겨눴던 성 대표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다.

곽 대표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그의 두 눈에서 여러 감정이 가득 담긴 눈물이 떨어졌다.

배신감, 분노, 허탈함, 죄책감 등, 만감이 교차할 것이다.

지금은…… 곽 대표를 압박해선 안 된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차피 주변 일대는 곽 대표의 수하들이 포진하고 있을 테니, 총성과 비명으로 인한 공습도 걱정할 필요 없었다.

그렇게 1분 정도 지났을까?

곽 대표는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내게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뭡니까.”

“박재형입니다.”

“나한테…… 나한테 성 대표의 비리를 얘기한 이유가 뭐죠?”

이런 상황에도 존대를 사용하는 곽 대표의 모습에, 나까지 마음이 아려왔다.

만난 지 5분도 안 됐는데, 그의 성품을 알 것 같았다.

난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성 대표뿐만이 아닙니다. 김 대표, 공 대표, 그 밑에 있는 생존자들까지, 전부 타락했어요.”

“어떻게 확신합니까.”

곽 대표의 물음에 난 우측 골목을 가리키며 얘기했다.

“방금 총성이 들렸는데, 도와주러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잖아요.”

“…….”

“대로에 죽창 들고 있는 사람이 20명이나 되는데……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아요.”

곽 대표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골목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주먹을 파르르 떨었다.

난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지금 이 상황…… 받아들이기 힘든 거 압니다. 하지만 인정하셔야 돼요.”

“뭘, 대체 뭘 인정하라는 겁니까.”

“당신이 호구였다는 거.”

인간을 수호하려는 숭고한 마음을 어떻게 호구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곽 대표를 도발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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