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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118화 (118/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18화

양수라는 말에 이신혜는 주춤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난 이신혜에게 진정하라고 손짓하며 무전기를 들었다.

“혜리야, 얘기해.”

-흐으이…… 어떡해요. 양수, 양수 터졌어요. 아기 나온다고요, 지금.

“진정해. 옆에 이민정 씨 계셔?”

-민정 이모 지금 못 움직여요. 슬기 언니 옆에 딱 붙어 있는데 어떻게 움직여요!

윤혜리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책상 앞에 있던 이신혜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게 무전기를 달라고 했다.

찰나의 망설임 끝에 무전기를 건네주자, 이신혜는 침착하게 물었다.

“아기 머리 보입니까?”

-흐으윽…… 누구세요오…….

“아기 머리 보이냐고!”

-흐이이잉…… 민정 이모…… 어떤 여자분이 애기 머리 보이냐고 물어요…….

저걸 무전기에 대고 얘기하면 어떡해.

이정우와 설여원, 심지어 나도 없는 상황에 분만이 시작됐으니, 윤혜리는 공황에 빠진 것으로 보였다.

한참이나 대답을 기다리자, 윤혜리 대신 이민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머리는 안 보여요.

“지금 어디예요. 빨리 병실로 옮겨야 합니다.”

-아기랑 산모 둘 다 위험한 거예요?

“아니요, 거기가 어딘지 몰라도 아기가 태어나면…… 좀비들이 몰려올 겁니다.”

아기와 산모만 생각하기도 벅찬 상황에, 이신혜는 좀비들의 공격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이덕배가 이정우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 그럼 차…….”

이정우는 이덕배의 옆구리를 찌르며 고개를 저었다.

상황이 다급한 건 사실이지만, 이들에게 좀비카의 존재를 알리는 건 섣부른 판단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그걸 또 들었는지, 이신혜는 이덕배를 쳐다보며 물었다.

“차? 여러분 차 타고 오셨어요?”

“아니요, 여기에 구급차 있냐고요.”

이정우가 태연하게 묻자, 이신혜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없어요. 그리고 차가 있더라도…… 밖에 끌고 나가는 건 자살행위에요.”

이에 난 뻐근한 어깨를 풀며 얘기했다.

“바리케이드 열어둬요. 제가 가서 데려올게요.”

“아니…… 아직 확인해야 하는 절차가 남았…….”

“아기랑 산모부터 살리고 생각합시다. 처벌은 나중에 받을 테니까.”

여기까지 얘기하고 다급히 바리케이드로 달려갔다.

바리케이드 상단에 있는 보초들에게 열어달라고 하자, 그들은 임시초소에 무전을 보내며 확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기에, 바리케이드 위로 올라가 밑으로 뛰어내렸다.

“어어어! 잠깐! 여기 4m…….”

“입구 열어둬요!”

보초들에게 외치며 쏜살같이 버스로 달려갔다.

바리케이드에 버스까지는 600m 거리.

난 훅, 하고 숨을 뱉으며 읊조렸다.

“가속.”

떵!!

지면을 박차며 튀어 나가자, 아스팔트 바닥으로 거미줄 모양의 균열이 생겼다.

고막을 때리는 바람 소리와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풍경.

허벅지와 정강이로 느껴지는 조임과 양팔의 근력이 팽팽하게 줄다리기를 한다.

두 눈 부릅뜬 채 숨도 쉬지 않고 버스까지 달렸다.

스킬 급가속의 발동어는 간략하게 ‘가속’이라고 지었다.

다급한 상황일수록 발동어는 짧아야 하기에, 앞글자를 지웠다.

5초밖에 지속되지 않지만, 스킬을 사용하면 체력적인 부담을 덜 수 있었다.

600m를 돌파하는 데 1분이 걸리지 않았다.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버스에 올라타자, 어쩔 줄 몰라 하는 일행의 사이로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는 한슬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홀로 힘겨운 사투를 이어가는 와중에도, 좀비들이 달려들까 봐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었다.

난 한슬기를 번쩍 들며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모든 차량 천막으로 덮고, 다들 근접 무기만 들고 따라와.”

“보호대도 벗어?”

전완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버스에서 내렸다.

뒤이어 이민정이 다가와 한슬기의 입에 수건을 물렸다.

혹여나 치아가 상할까 봐, 섬세한 부분까지 돌보는 모습을 보였다.

수시로 한슬기의 상태를 살피며 바리케이드 앞에 도달하자, 벌써 이신혜와 다른 의료진들이 마중을 나온 상태였다.

“이쪽으로!”

이신혜를 따라 쉬지 않고 달렸다.

임시초소를 지나 한참을 나아가자, 고가도로와 함께 드넓은 교차로가 눈에 들어왔다.

뒤이어 아파트 단지의 윤곽이 안개 너머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파트 외벽에 적힌 캐슬 4단지라는 글자.

4단지의 입구에도 바리케이드가 설치된 상태였다.

다행히 이신혜가 미리 무전을 보냈는지, 바리케이드는 좌우로 활짝 열려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동의 입구를 지나 10층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두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후들거리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단 몇 분 만에 전속력으로 2km 이상 달린 것 같다.

10층 1001호에 들어서자, 거실에 놓인 여러 의료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신혜의 지시에 따라 침대에 한슬기를 눕히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한발 늦게 들어온 설여원과 이정우, 이덕배는 거실의 상황을 확인하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신혜는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일행을 쳐다보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보호자 한 명 빼고 전부 나가요.”

걱정되는 마음에 너도나도 보호자를 자처하자, 설여원이 남자들을 밀치며 얘기했다.

“밖에서 순산 기원해 줘요. 여긴 여자들한테 맡기고.”

난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 눈치껏 빠져주었다.

현관 밖으로 나가자마자 바닥에 대(大)자로 뻗었다.

산책하듯이 달린 것도 아니고, 전력으로 달린 탓에 폐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덕배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수고 많았다는 말을 건네주었다.

반면에 이정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여기로 오고 있는 거야?”

“어차피 일행이 있다는 것도 들켰잖아요. 전부 오라고 했어요.”

“무기 들고 오는 건 아니지?”

“근접무기만 챙기라고 했어요. 보호대도 벗어두라고 했고. 차량도 천막으로 덮어두라고 했어요.”

이정우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이어 내 얼굴을 흘깃 쳐다보며 물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그렇지, 그렇게 달리고 10층까지 계단을 뛰어오르네. 그것도 한슬기 씨 들고.”

“저도 놀랐어요. 마음이 급하니까 되네요.”

싱겁게 웃으며 대답하자, 이정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우린 굳게 닫힌 현관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부디 아기와 한슬기가 건강하기를.

순산을 기원했다.

* * *

이정우가 현관을 지키는 동안 이덕배와 나는 1차 방어선 앞에 있는 임시초소로 향했다.

경비들을 따라 초소 앞에 다다르자, 신체검사를 마친 일행이 죽창을 들고 있는 무리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재형아!”

내 모습을 발견한 전완수가 오른손을 흔들자, 죽창부대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열댓 명의 사람이 내 일행을 위협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에는 10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6명이나 있는데, 어른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고 위협하는 모습에 피가 거꾸로 치솟는 걸 느꼈다.

난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급히 그들의 곁으로 달려갔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죽창부대를 밀치며 항의하자, 몇몇이 내 어깨를 붙잡고 짓누르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으라고?

하체에 힘을 주고 꿈쩍도 하지 않자, 일행을 향하던 창끝이 내게 쏠렸다.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자, 죽창을 들고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치닫자, 이덕배가 헐레벌떡 달려오며 얘기했다.

“이봐요, 다들 말로 합시다. 좀비한테 겨눠야지 왜 사람한테 창을 들이밀고 그래.”

이덕배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타이르듯 얘기했지만, 그들은 무기를 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스륵-

뒤이어 임시초소의 천막을 열어젖히며 낯선 남자가 걸어 나왔다.

대략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그가 들고 있는 건 이정우와 나, 설여원과 이덕배가 작성한 서류였다.

남자는 서류를 앞뒤로 흔들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 정체가 뭐야? 경산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

남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콧방귀를 뀌며 물었다.

“걸어오진 않았을 테고, 차는 어디 있어?”

“걸어왔습니다.”

“어이 학생,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해야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깨끗하게 정돈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올백으로 넘긴 머리와 다림질이 잘된 옷차림.

딱 봐도 이곳에서 힘깨나 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뒤이어 남자와 비슷한 연배로 보이는 두 명의 남녀가 다가왔다.

그들의 뒤에도 경비원으로 보이는 열댓 명의 사람이 줄줄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이고, 김 대표님 벌써 나오셨어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거만한 남자를 김 대표라 부르며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김 대표는 여자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호출 받았으니 빨리빨리 나와야지요. 우리 공 대표님은 늦으셨습니다?”

“우리 경비대가 교대하는 시간이었거든요. 미안해요. 그래도 우리 김 대표님이 항상 이렇게 재깍재깍 움직여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두 사람이 시시덕거리자, 또 다른 남자가 입을 열었다.

“김 대표, 좀비들의 공격은 없는 겁니까?”

“아이고 성 대표. 내 정신 좀 봐. 보다시피 생존자들이 찾아왔어요. 좀비들의 공격은 없었습니다.”

“그럼 생존자가 왔다고 보고해야지. 이신혜 그 양반은 왜 지원요청을 하고 난리야?”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한 대표랑 강 대표가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밑에 사람들 관리를 건성으로 하는 것 같습니다.”

“기강이 다 죽었구먼. 이거 안 되겠어. 내가 한 마디 해야지.”

김 대표, 공 대표, 성 대표.

세 사람의 모습을 보고 경멸감이 들었다.

이런 하찮은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게다가 이토록 견고한 바리케이드는 또 어떻게 설치한 거고?

뒤이어 성 대표란 사람은 내 얼굴을 곁눈질로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다가왔다.

“아이고, 그쪽이 여기 생존자들 대표인가 봅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악수를 청하는 성 대표.

내가 미동도 하지 않자, 그는 눈꼬리를 치켜드며 물었다.

“살고 싶어서 들어온 것 아닙니까?”

“…….”

“그럼 줄을 잘 서야지, 학생?”

초면에 기선제압을 하겠다는 건가?

보아하니 사람 숫자로 밀어붙이며 압박감을 조성하고, 위계질서랍시고 어깨에 힘주는 것 같은데…….

모조리 처리하고, 이 쉘터 우리가 먹는 건 어떨까.

내가 주먹을 말아쥐자, 옆에 있던 이덕배가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다급히 내 팔목을 잡았다.

그러자 성 대표는 이덕배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조소를 지었다.

“아, 이쪽이 대표시구나?”

“초면에 서로 얼굴 붉히지 맙시다. 우리가 밖에 있다 와서 다들 예민해진 상태라 그러니,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이덕배도 화가 많이 났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악화되지 않도록, 화를 가라앉히며 조곤조곤하게 얘기했다.

“얼굴을 붉혀?”

하지만 성 대표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금세 미간을 찌푸리며 이덕배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보쇼. 누가 얼굴을 붉혔다고 그래? 지금 내 정성을 몰라주고 얼굴 붉히는 건 그쪽이잖아.”

성 대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김 대표가 후다닥 달려와 그를 진정시켰다.

“아이참, 성 대표 또 그런다. 바깥에 있던 사람들이잖아요. 우리가 너그러이 용서합시다. 예?”

“이래서 야만인들이 안 된다는 거야. 지성인이면 지성인답게! 예의가 있어야지 말이야. 물에 빠진 사람 구해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이덕배마저 눈살을 찌푸리자, 성 대표란 사람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얘기했다.

“어이 당신, 눈 똑바로 안 떠? 이런 근본도 없는 놈들이…….”

“그만!!”

그 순간, 4단지 방향에서 까랑까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하자, 자욱한 안개 너머에서 수십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오래 지나지 않아 선두에서 걸어 나오는 두 명의 남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른 대표들과 달리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두 명의 남녀.

성 대표는 불청객이라도 마주한 것처럼 몹시 언짢은 표정을 짓더니,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우리 강 대표랑 한 대표, 이제 오는 겁니까?”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보면 몰라요? 생존자가 와서 검사하고 있죠.”

“신체검사도 끝났고, 이동 경로 파악도 완료됐습니다. 또 무슨 검사요.”

한 대표란 여자가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성 대표의 옆에 있던 김 대표가 대신 입을 열었다.

“인성검사에서 위험의 소지가 다분하다고 보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사람을 죽였냐는 문항을 계속 회피하고 있어요.”

“…….”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잖아요? 우리 한 대표의 검사는 허점이 많고, 불확실하다고.”

“아이들을 데려왔고, 임산부와 함께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에요. 이보다 완벽한 방증이 있습니까? 이분들에게 인성을 논하는 건 실례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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