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17화
뒤이어 무전기 너머로 이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모르니 권총 챙기고, 보호대랑 소총, 쇠뇌는 여기 두고 가자.
“보호대는 왜요?”
-박성훈 소대장님 처음 만났을 때 기억 안 나? 들어가면 신체검사부터 할 게 뻔한데, 보호대 때문에 발목 잡힐지도 몰라.
“……대뜸 저희를 공격하면 어떡하죠?”
-바리케이드를 만들고 경비까지 있다면 체계가 잡혀 있다는 뜻이야. 좀비가 아니라는 것만 증명되면 선제공격하진 않을 거야. 손전등 챙겨.
이정우의 말에 따라 필요한 장비만 챙겨서 버스에서 내렸다.
습한 안개 속에서 뒤를 돌아보자, 이곳으로 걸어오는 이정우와 설여원, 그리고 이덕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덕배를 데려가는 게 옳은 선택인지 모르겠다.
이런 속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나?
내가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는지, 이정우는 태연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덕배 아저씨가 있어야 안전해. 나이가 주는 신뢰가 있으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이덕배가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학생들, 사람 앞에 두고 놀리는 거 아니야. 나도 마음만은 청춘이라고.”
“나쁜 뜻은 아니었습니다.”
이정우가 싱겁게 웃으며 쳐다보자, 이덕배는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세월이 야속하다. 야속해.”
설여원은 전방을 유심히 살피더니,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얘기했다.
“저 앞은…… 시신이 꽤 많은데?”
“바리케이드 앞이라서 그럴 거야. 주변에 살아 있는 좀비는 없어?”
“여기선 안 보이는데, 가까이 접근하면 또 모르지. 살아 있는 좀비가 있을지도.”
난 손목과 발목을 풀며 얘기했다.
“여원이랑 제가 선두에 설게요. 덕배 아저씨랑 정우 형은 뒤로 붙어주세요.”
대열을 정비하고, 발소리를 죽인 채 천천히 바리케이드로 접근했다.
설여원과 달리 이정우와 이덕배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시야가 확보된 사람과 아닌 사람의 압박감은 천지 차이였다.
크르르르…… 카하아…….
대략 500m 정도 나아가자, 자욱한 안개 속에서 목젖을 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지면에 널브러진 시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설여원은 바닥을 살피며 얘기했다.
“발목 조심해요. 아직 살아 있는 좀비가 꽤 있어요.”
그러자 뒤에 있던 이덕배가 내게 헌팅 나이프를 건네주었다.
주먹으로 때려죽이면 소리가 울리기 때문에, 헌팅 나이프로 좀비들을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이에 가볍게 목례하며 지면에 널브러진 좀비들의 안구를 꿰뚫었다.
대부분 빈사 직전의 좀비들이기에, 안전하게 좀비 카운트를 높일 수 있었다.
지난 3주간 튜닝숍을 수비하며 처리한 좀비만 대략 500마리에 달했다.
지금처럼 안정적으로 카운트를 높일 수만 있다면, 1000마리도 불가능한 수치는 아닐 것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거대한 장벽의 형체가 두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충 설치한 바리케이드가 아니었다.
철판을 하나씩 용접하고, 4m까지 안정적으로 쌓아 올린 하나의 벽이었다.
설여원은 바리케이드 위로 손전등을 점멸하며 보초들의 시선을 유도했다.
그러자 바리케이드 위에서 웅성거리는 육성이 들려오고, 오래 지나지 않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정지!”
바리케이드와 5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보초들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뒤이어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위에 있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생존자라면 불빛 세 번 점멸하고, 벽 앞으로 오세요.”
설여원은 손전등을 세 번 점멸한 뒤, 이정우와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훅, 하고 숨을 뱉으며 한발 앞서 바리케이드 앞으로 걸어갔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눈부신 빛이 날아들기에, 난 눈살을 찌푸리며 양손으로 빛을 가렸다.
그러자 바리케이드 위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치직-
-생존자 맞습니까?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정체 모를 여자의 목소리.
“생존자 맞습니다. 들여보낼까요?”
-일단 들여보내고, 신체 검사한 뒤에 이동 경로 파악하세요.
“알겠습니다.”
덜- 컹.
바리케이드의 하단부에서 높이 1m의 철판이 열렸다.
저기로 들어오라는 건가?
난 뒤에 있는 일행을 쳐다보며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먼저 들어가서 내부의 상황을 확인하고, 일행을 들여보내는 게 안전하다고 판단했다.
상체를 숙여 내부로 들어서자, 삼면이 철창으로 가로막힌 상태였다.
이건…… 가두겠다는 거 아니야?
뚜벅- 뚜벅-
반사신경을 높인 뒤로 미세한 소리까지 파악하는 능력이 생겼다.
청각과 후각의 인지 범위가 넓어졌다고 해야 좋을까?
일반인의 5배에 달하는 반사신경 덕에, 남들이 듣지 못하는 미세한 발소리까지 내 귀에는 들렸다.
소리의 근원지를 쳐다보자, 그곳에서 누렇게 변한 가운을 입은 여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자그마한 손전등을 얼굴에 비추며 얘기했다.
“여기 보세요.”
시력…… 검사?
의사가 있는 모양이다.
전공은 모르겠지만, 의사가 있다는 건 희소식이었다.
한슬기의 출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악의는 없어 보이니, 순순히 의사의 말에 따라 신체검사를 진행했다.
속옷만 입은 채 상처의 여부를 검사받았다.
그동안 바리케이드 상단에 있던 보초가 내려와 내 옷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돌려받은 옷을 입자, 의사는 철창을 열어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내부로 들어서며 조심스레 레그홀스터를 확인했다.
권총은 뺏겼지만, 그 옆에 있던 무전기는 온전히 붙어 있었다.
권총에 시선이 팔려 무전기를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다.
바리케이드 내부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건물의 윤곽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공간을 넓게 쓴다는 뜻인데…… 대체 얼마나 사람이 많기에 여기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한 걸까.
뒤이어 설여원이 들어오고, 설여원도 삼면이 가로막힌 철창을 보고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검사받은 분만 들어올 수 있어요.”
가운을 입은 여자가 태연하게 얘기하자, 설여원은 뚱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난 어깨를 으쓱이며 별수 없다는 시늉을 보였다.
그러자 설여원은 입맛을 다시며 내게 얘기했다.
“고개 돌려. 쳐다보면 죽는다?”
이에 시선을 돌린 채 안개 속의 상황을 살폈다.
바리케이드 내부 도로는 좀비들의 시신이나 핏자국도 찾아볼 수 없었다.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인데…… 바리케이드 위에 보초가 4명뿐이라는 게 의심스러웠다.
설여원이 들어온 뒤로 이정우, 이덕배까지 검사를 마치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이덕배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구시렁거렸다.
“못돼먹은 놈들, 권총은 왜 가져가?”
“여러분은 외부인이니까요.”
의사는 태연한 목소리로 딱 잘라 얘기했다.
대략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데,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의사는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우리를 안개 속으로 안내했다.
그러자 설여원은 내 귓가에 입술을 갖다 대며 얘기했다.
“100m 앞에 텐트 4개. 그중 하나는 20인용 텐트야.”
바리케이드에서 100m 떨어진 거리에 지어진 임시초소.
이들의 조심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수의 생존자가 바리케이드 근처에 있으면 체취를 맡은 좀비들이 달려들지도 모르기에, 적절한 거리로 100m를 설정한 모양이다.
텐트 근처에 다다르자, 가운을 입은 여자가 손전등을 세 번 점멸했다.
그러자 텐트 앞에서 5명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들은 이곳으로 손전등을 비추며 얘기했다.
“정지. 소속.”
“캐슬 4단지 의료팀 이신혜.”
“……신원 확인했습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생존자를 찾았어요.”
“생존자요?”
생존자라는 말에 의구심 가득한 목소리로 되묻는 경비들.
생존자가 찾아오는 일이 많지는 않은 모양이다.
경비들은 서로 속삭이는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더니, 손전등을 내리며 이신혜에게 얘기했다.
“들어오세요.”
이신혜를 따라 20인용 텐트로 들어서자, 중앙에 커다란 책상이 놓여 있었다.
이신혜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살피더니, A4용지 4장을 우리에게 건네며 얘기했다.
“작성하세요.”
나이와 성별, 직업, 특기 등을 적는 공란이 보이고, 지금껏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상세하게 기재하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정우를 흘깃 쳐다보자, 그는 미세하게 고개를 저었다.
라스트아크와 관련된 이야기는 제외하라는 것으로 보였다.
이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란을 채워나왔다.
경산에서 탈출한 과정을 상세하게 적고, 특기에는 체력이라고 적었다.
작성한 용지를 이신혜에게 건네려는 찰나, 하단에 적힌 문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볼펜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이정우를 쳐다보자, 그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yes or no.
어떤 항목을 표시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것이다.
이신혜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더니, 옆에 있는 경비들에게 얘기했다.
“이 사람들 잡아요.”
“예?”
“잡으라고!”
그러자 다섯 명의 경비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리를 붙잡았다.
그냥 모조리 제압하고 안으로 들어갈까?
머릿속을 배회하는 잡념에 긴장감이 고조되는 찰나, 이신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장 상태만 다시 확인하겠습니다. 저항할 생각이라면 접어둬요. 우리는 제압하더라도 저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 죽을 테니까.”
이런 상황을 이미 겪어본 적이 있는 건가?
일촉즉발의 상황에, 저렇게 태연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난 마음대로 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까닥였다.
이신혜는 옷 수색을 하며 내게 물었다.
“왜 망설였습니까.”
“뭐를요.”
“마지막 문항이요.”
마지막 문항을 망설였기에 때문에 옷 수색을 하는 건가?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죽인 적이 있으니까.”
“이유는.”
“내 일행이 위험했으니까. 쫓아낼 거면 쫓아내요.”
“살려고 온 것 아닙니까?”
“원래 사람은 이기적이잖아요.”
애써 덤덤하게 얘기하자, 옷 수색을 하던 여자의 손이 머뭇거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뒤이어 수색을 멈추고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차갑게 내려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멋있는 줄 아니?”
“……네?”
“사람 죽인 게 자랑이냐고. 뭐가 그렇게 뻔뻔해?”
자랑처럼 들렸나?
전혀 그런 의도는 아니었고, 그런 생각은 1도 품은 적이 없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무의식적으로 이정우를 쳐다봤다.
이정우도 이런 반응은 생각 못 했는지, 마른침을 삼키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이덕배가 대뜸 소리쳤다.
“오만하기 짝이 없는 년!”
이신혜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이덕배를 쳐다봤다.
이덕배는 두 눈을 부릅뜨고 씩씩거리더니, 힘겹게 화를 가라앉히며 얘기했다.
“뻔뻔하다고? 자네 귀에는 정말 그렇게 들렸나? 이 학생이 하는 말이 정말 뻔뻔하게 들렸느냐 이 말이야!”
“……뭐요?”
“저 얼굴이 자랑하는 사람으로 보여? 여기 있는 학생들, 피눈물을 삼키는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어! 그런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뭐? 사람 죽인 걸 자랑하냐고?”
“…….”
“아주 속부터 꼬여서는, 뻔뻔한 건 당신이 뻔뻔한 거지! 이런 쉘터라면 우리가 마다해!”
이덕배는 경비들의 손길을 뿌리치더니,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가져간 무기를 돌려달라고 소리쳤다.
난 이덕배의 얼굴을 쳐다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저렇게 신사답게 반박할 줄이야.
누군가를 때리거나, 물건을 부수거나, 그런 폭력적인 행동 없이 말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저것도…… 연륜이라고 봐야 하나?
이신혜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덕배와 눈싸움을 주고받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뒤이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초면에 실례했습니다. 워낙…… 이상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잖아요.”
“……나도 미안하네. 세상이 이 지경이 되고 다혈질적으로 변해서 말이야.”
고조되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진화되었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신혜에게 물었다.
“여긴 생존자가…….”
치지직- 치직-
-오빠! 재형 오빠!
그 순간, 옆구리에 있던 무전기에서 윤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신혜는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봤고, 나도 놀란 눈으로 이신혜를 쳐다봤다.
“아, 아니 이건…….”
이신혜는 후다닥 책상 앞으로 달려가 또 다른 무전기를 손에 쥐었다.
“지원 바람! A구역 지원 바람!”
숨겨둔 일행이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숨겨둔 건 맞지만 악의를 지닌 건 아닌데…… 어떡하지?
난 격하게 손사래 치며 얘기했다.
“진정하세요. 설명하겠습니다.”
“움직이지 마!”
치지직- 치직-
-오빠 대답 좀 해요! 슬기 언니 양수 터졌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