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12화
최현은 남학생의 표정을 살피더니,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한슬기가 탈출할 무렵, 경관들과 생존자들 간의 몸싸움이 있었다고 한다.
경관들은 반항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쏴 죽였고, 결국 20명의 생존자가 남았다고 한다.
좀비들에게 죽은 것도 아니고,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이 21명이나 되는 것이다.
거기서 이성을 잃은 경관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옆에 있는 사람 죽여. 친구든, 가족이든, 안 죽이면 나한테 죽어.
생존자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이도 저도 못 하자, 경관은 초읽기를 시작했다.
전완수는 최현의 설명을 듣고 인상을 찌푸리더니, 죽은 경관의 안면에 몇 번이고 쇠뇌를 발사했다.
퉁! 퉁! 퉁! 퉁!
“그만해 미친놈아!”
설여원이 소리쳤지만, 전완수는 까드득 이를 갈며 분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결국, 보다 못한 최만석이 전완수를 뜯어말렸다.
“완수 학생, 그만. 이미 죽었잖아.”
“이런 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야 돼요. 예전에 사주 보러 가서 들었어요. 얼굴이 못 알아볼 정도로 훼손되면 환생도 못 한다고.”
미신이란 걸 알면서도, 지금의 분노를 해소하기 위해 전완수는 뭐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설여원도 전완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기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정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최현을 쳐다봤다.
계속 설명하라고 하자, 최현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얘기했다.
“다들 머뭇거릴 때…… 가장 먼저 나서서 사람을 죽인 게 저 학생이에요.”
“중학생밖에 안 된 놈이 사람을 죽였다고?”
정진영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최현은 이마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같이 탈출한 소꿉친구가 있었던 거 같아요. 그 친구를 죽이고 경관들 편에 선 거죠.”
“이런 X발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같은 새끼!”
전완수가 온갖 상스러운 욕을 입에 담으며 남학생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최만석과 정진영, 그리고 최현까지 전완수를 뜯어말렸다.
쩍!!
그 순간, 코스트코를 울리는 도끼질 소리에 모든 일행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이정우를 쳐다봤다.
생존자와 관련된 일은 언제나 신중함을 유지하던 이정우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남학생의 목덜미를 손도끼로 찍었다.
가장 놀란 사람은 정진영이었다.
그는 이정우의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며 읊조렸다.
“이정우 너, 너 이게 무슨 짓이야.”
“…….”
“걔 중학생이야. 미성년자라고!”
반면에 이정우의 표정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엿보였다.
이정우는 도끼날에 묻은 혈흔을 교복에 닦으며 얘기했다.
“소꿉친구를 죽인 놈이야. 가는 데 순서 없다는 거, 본인도 알아야지.”
“…….”
“더 늦기 전에 돌아간다. 다들 권총이랑 실탄 챙겨.”
이정우의 말에 설여원과 전완수, 최현은 군말 없이 움직였다.
반면에 정진영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과 청소년에겐 관대했던 이정우.
친구의 단호한 모습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찜찜함이 남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최만석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정진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정진영이 쳐다보자, 최만석은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누군가는 선택을 내렸어야 하는 일이야.”
“…….”
“그게 대표의 일이고.”
* * *
“으으…….”
흐려졌던 정신이 돌아오자,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반사적으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어? 삼촌! 삼촌 일어났다!”
옆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러자 아랫배에 떨어지는 물수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내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준 모양이다.
“삼촌! 삼촌!”
가뜩이나 정신없는데, 아이들은 내 팔을 잡고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어? 오빠!”
뒤이어 김희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고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리자, 촛불을 들고 오는 김희연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곧 김희연의 목소리를 들은 윤혜리와 이민정, 한슬기까지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이 방방 뛰며 정신 사납게 만들자, 보다 못한 윤혜리가 장군이를 데려와 아이들 사이에 풀었다.
왈! 왈!
금호강 건너의 애견숍에서 챙긴 애견 이동장 케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기에 밤에는 케이지에 넣어두는 편이지만, 아이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장군이를 풀었다.
한창 활발한 시기의 장군이는 쉴 새 없이 3층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까르륵거리며 장군이를 따라 휴게실로 뛰어갔다.
윤혜리는 내심 아이들의 안전이 걱정되는지, 덩달아 휴게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아이들이 사라지자, 이민정은 내 곁에 쭈그리고 앉으며 물었다.
“재형아, 괜찮니? 어디 아픈 곳은 없고?”
이민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이마에 손등을 얹었다.
물수건을 누가 올려줬나 했더니, 이민정이 올려준 모양이다.
“여긴…….”
“튜닝숍이야. 덕배 씨랑 현배 씨가 업고 왔는데 기억 안 나?”
이민정의 말에 흐릿한 기억의 조각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좀비화를 쓰고…… 그 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만취한 뒤에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 일부가 소멸했다.
하나하나 되짚은 결과, 내가 저지른 만행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광기에 취한 나머지 좀비들을 학살하고, 일행까지 위협하고 말았다.
“정우형이랑 완수, 현이는…….”
내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자, 김희연은 들고 있던 촛불을 탁자에 내려놓고 후다닥 2층으로 내려갔다.
“재형 학생!”
뒤이어 이덕배가 얼굴을 붉히며 내게 달려왔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내 볼을 붙잡고 이리저리 상태를 확인하더니, 대뜸 품에 안으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인심 좋은 삼촌이 있다면…… 이런 느낌이려나?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덕배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 있어요? 다들 괜찮아요?”
“괜찮아, 재형 학생 덕에 다들 살아 돌아왔어.”
“지금 어디 있어요? 정찰 나간 거예요?”
“그건…….”
이덕배는 이마를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이정우와 정진영, 전완수, 최현, 설여원, 최만석이 퀘스트를 완료하기 위해 코스트코로 이동했다는 얘기를 듣고, 난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핑-
그러자 고막을 찌르는 날카로운 이명이 들려오고, 달팽이관에 문제라도 생겼는지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자, 이덕배가 다가와 부축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다들 안전할 거야.”
“그걸 어떻게 확신해요. 코스트코에 있는 놈들은 권총도 소지하고 있…….”
그 순간, 시야의 우측 상단에서 반짝이는 노란불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반짝인 거지?
이덕배의 부축을 받으며 벽에 등을 기대고 앉은 뒤, 홀로그램부터 확인했다.
[타락한 경관: 난이도 A(Clear)]
-지급된 아이템: 상점 이용권.
퀘스트 완료라고?
성공한 건가?
정말 나 없이 해낼 줄이야.
엷은 미소를 지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이덕배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갑자기 왜 웃어?”
“성공했어요.”
“뭐를.”
“퀘스트요. 코스트코 우리가 장악했어요.”
홀로그램은 파티원을 제외한 타인에게 보이지 않기에, 이들의 눈에는 내가 실없는 웃은 거로 보였을 것이다.
맞은편에 있던 김희연도 홀로그램을 확인하더니, 퀘스트 완료 문구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절한 동안 퀘스트가 완료된 줄 알았는데, 내가 깨어남과 동시에 퀘스트를 완료한 모양이다.
성공했다는 말에 이덕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들 안전한 거야? 다친 사람은 없고?”
“거기까진 알 길이 없어요. 무전기 들고 간 사람 없어요?”
“아, 내가 무전치고 올게. 여기서 기다려.”
이덕배는 후다닥 무전기를 가지러 갔다.
난 이덕배가 돌아올 동안 퀘스트 완료 보상을 확인했다.
-상점 이용권 1장
1장으로 살 수 있는 건 한정적이었다.
보호대를 구매하거나, 보호대를 강화하거나, 혹은 응급키드를 구매하는 게 전부였다.
내 입장에서는 보호대를 강화하는 게 최선이지만, 아직 보호대를 얻지 못한 김희연과 윤혜리, 황덕록이 마음에 걸린다.
파티원들의 보상 여유를 확인한 뒤에 결정해야겠다.
홀로그램을 닫으려는 찰나, 이번엔 플레이어 정보에서 점멸하는 노란 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고민할 필요도 없이 플레이 정보를 열었다.
[플레이어 정보]
-캐릭터 이름: 에덤 화이트
-능력: 강화
-스탯: 근력 22(Max), 체력 22(Max), 반사신경 5(+6), 동체 시력 5(+5), 정신력 10
-스탯 2: 골밀도 6(+9), 표피강화 6(+9)
*스탯 2는 2포인트에 1스탯씩 증가합니다.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700/700(Clear)
-남은 포인트: 70
-스킬: 좀비화
-패시브 스킬: 재생
포인트 70개?
와…… 뽕 맛 제대로다.
뭘 찍어야 잘 찍었다고 소문이 날까.
일단 싸움의 기초가 되는 골밀도와 표피부터 강화해야겠다.
띠링-!
-골밀도와 표피강화가 최대수치에 도달했습니다.
고작 하나씩 높였을 뿐인데, 최대수치에 도달했다는 메시지가 출력됐다.
스탯 1은 15포인트가 최대수치였지만, 스탯 2는 두 배의 포인트를 소모하는 만큼 10이 최대수치였던 모양이다.
뒤이어 또 다른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스탯 1의 근력과 체력 스탯이 개방됩니다.
-개방된 스탯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전 포인트의 2배가 필요합니다.
-골밀도와 표피강화가 MAX에 도달했습니다. 추후 개방을 위해서는 근력과 체력 스탯이 최대수치에 도달해야 합니다.
근력과 체력의 옆으로 MAX라고 적혀 있던 글자가 다시금 0으로 바뀌었다.
기본 능력치와 추가 능력치를 합산한 이유가 뭔가 했더니, 개방된 스탯을 높이기 위해서는 포인트가 2배로 들기 때문이었다.
더는 놀랍지도 않았다.
난이도가 Hell로 바뀌면서 내 예상을 벗어나는 게 한두 번도 아니니까.
남은 포인트는 어디에 투자하는 게 좋을지 곰곰이 생각한 끝에, 당장 필요한 스탯부터 높이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 없이 정신력에 15개의 포인트를 투자했다.
지금의 정신력으로는 좀비화를 버틸 수 없고, 좀비화를 사용한 뒤에 개방되는 스킬도 사용할 수 없다.
좀비화를 쓰자마자 광기에 휩싸이는 바람에, 좀비화 도중에 개방되는 스킬도 확인하지 못했다.
‘어라?’
15개의 포인트를 투자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력이 최대수치에 도달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력은 최대수치가 다른 건가?
좀…… 더 투자해야 하나?
정신력에만 총 30개의 포인트를 투자했지만, 최대수치에 도달했다는 메시지가 출력되지 않았다.
게임이면 천장 시스템이라도 있어야 할 것 아냐?
이건 뭐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도 아니고.
설명이라도 친절하게 해주면 어디 덧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욕부터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남은 36포인트는 정말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근력과 체력을 높이는 게 좋을까, 아니면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을 높이는 게 좋을까.
밸런스를 생각한다면 역시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이 옳다.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이 향상되면 좀비들에게 둘러싸여도 지금처럼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다.
근력과 체력처럼 추가 스탯 15가 천장일 수 있으니,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도 15까지 높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최대수치에 도달했다는 메시지는 출력되지 않았다.
이에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근력과 체력은 15가 최대수치였고, 그 뒤에 새로운 스탯이 생성되었다.
반면에 정신력은 30까지 올려도 새로운 스탯이 생성되지 않았고,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도 15까지 올렸지만 새로운 스탯이 생성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 정신력은 육체에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스탯이 아니라 또 다른 개념이라는 건데…….
문득, 머릿속으로 반짝이는 빗금이 스쳐 지나갔다.
‘스킬 아니야?’
정신력은 좀비화와 관련된 스탯이었다.
어쩌면 반사신경과 동체 시력도 스탯 2로 이어지는 스탯이 아니라, 스킬과 관련된 게 아닐까?
이번처럼 무리하게 좀비를 상대하는 일만 아니면 100마리의 좀비는 거뜬하게 처리할 수 있다.
변종도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니, 체력과 근력은 잠시 접어두고 새로운 도전에 투자할 때라 생각한다.
자칫 잘못하면 망캐(망한 캐릭터)가 될 수도 있지만, 내 가설이 사실이라면 새로운 스킬을 통해 위험천만한 순간을 모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긴장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천천히, 반사신경에 포인트를 투자했다.
16, 17, 18, 19, 그리고 20이 되는 순간.
띠링-
-반사신경이 최대수치에 도달했습니다.
-새로운 스킬이 생성됩니다.
-스킬 ‘급가속’이 생성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