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04화
튜닝숍에 도착할 때까지 좀비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미 정리해둔 길이라 그럴 수도 있지만, 최현의 말에 따르면 튜닝솝의 위치가 신의 한 수였다고 한다.
대단지 아파트는 혁신도시 쪽으로 들어가야 나오고, 각산을 지나야 다수의 아파트가 보인다고 한다.
안심역 근처에도 아파트가 있지만 아직 분양이 끝나지 않은 신축이었고, 대로 맞은편으로 300m는 들어가야 아파트 단지와 빌라촌이 나온다고 한다.
튜닝숍이 기가 막힌 곳에 있다고 해야 좋을까?
덕분에 좀비들의 공격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차량을 점검할 수 있었다.
튜닝숍에 있던 일행은 모두가 한슬기를 반겨주었다.
아이들은 한슬기의 배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고, 이민정은 편안한 의자로 한슬기를 안내했다.
한슬기는 사람들의 따스한 관심에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그동안 꾹꾹 눌러둔 눈물이, 수문 터지듯 쏟아지고 있었다.
박재우와 황덕록은 들고 온 가방을 책상 위에 놓고 곧장 쇠뇌 제작에 들어갔다.
전완수와 이덕배, 이현배, 최만석, 천호진은 차량 수리에 열을 올렸고, 이정우와 정진영은 보초를 서며 일행의 안전을 신경 썼다.
이윽고 완전히 해가 저물 무렵, 윤혜리와 김희연은 국자를 들고 모두를 불렀다.
3층 높이의 튜닝숍이기에, 주거공간은 자연스레 3층이 되었다.
다 같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한슬기가 겪은 일을 전해 들었다.
예상대로 한슬기는 혁신도시에 있었다고 한다.
평소 냉장고를 꽉 채워두는 편이라서 안개가 퍼진 직후 한 달가량 이찬혁과 꼼짝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조대는 오지 않고, 통신 장비도 복구되지 않고, 식량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해서 하는 수 없이 탈출을 감행했다고 한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파트에 다른 생존자는 없었나요?”
“저희 동에 2명 더 있었어요. 낚시가려고 새벽부터 움직인 할아버지들이었죠.”
“그분들은 어떻게 되셨어요?”
한슬기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 숙였다.
뒤이어 입술을 달싹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참…… 좋은 분들이었는데…….”
머릿속으로 낚싯대를 들고 있는 고령의 남자들이 그려진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그들 덕에 지금의 한슬기가 있겠지.
한슬기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며 마음을 추스르더니,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혁신도시의 중앙부는 좀비 소굴이나 다름없기에, 생존자들은 외곽으로 크게 돌아서 이동했다.
그러다 혁신도시의 외곽에 있는 코스트코로 들어가게 되었고, 문제의 경관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사건은 이 뒤에 생기기 시작했다.
처음엔 경관들도 환하게 웃으며 한슬기와 이찬혁, 그리고 고령의 어르신들을 반겨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보름에 한 번씩…… 사람들이 사라졌어요.”
“사라져요?”
“네, 꼭 보름만 되면…… 순찰 나간 남자들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순찰을 나간 남자들이 보름마다 2명씩 사라지는 현상이 반복되자, 생존자들은 권총을 소지한 경관들에게 순찰을 부탁했다.
경관들도 처음엔 생존자들을 진정시키는 모습을 보이더니,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혔는지 과격하게 변했다고 한다.
“남자들 사이에 몸싸움이 있었고…… 저랑 같이 탈출했던 할아버지들이 싸움을 말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러다 한 분이…….”
한슬기는 아랫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말을 이었다.
“경관이 쏜 총이 할아버지의 심장에 맞았고, 그때부터 모든 게 틀어지기 시작했어요.”
그 뒤로 권력을 쥔 경관들이 생존자들을 폭행하기 시작했고, 경관에게 빌붙는 사람, 노예가 되는 사람, 저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슬기와 이찬혁은 상황이 악화되는 걸 보고 탈출을 감행했고, 경관들의 추격을 피해 간신히 혁신도시를 벗어났다고.
난 한슬기의 얘기를 듣고 결인들의 얼굴을 살폈다.
다들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은근슬쩍 내 얼굴과 김희연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사과대의 사건과 유사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풀리지 않은 의구심이 남았다.
코스트코는 식량도 많은데, 굳이 인육을 먹을 필요가 있나?
팔짱을 낀 채 고심에 잠겨 있는데, 옆에 있던 설여원이 긴가민가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슬기 언니.”
“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저보다 언니잖아요.”
“아…… 응.”
“혹시 혁신도시에 이상한 좀비는 없었어요?”
“이상한 좀비?”
설여원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뒤이어 머릿속으로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하진.
이하진처럼 혁신도시에도 대장 좀비와 같은 존재가 있다면?
경관들이 이하진의 역할을 하고, 총기까지 소지한 상태라면?
한슬기는 눈살을 찌푸린 채 곰곰이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갸우뚱거리며 얘기했다.
“모르겠어. 순찰은 남자들만 나가서…… 나는 몰라.”
설여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옆에 있는 윤혜리를 쳐다봤다.
윤혜리는 설여원과 시선을 주고받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한슬기의 옆으로 갔다.
그리고 한슬기의 손을 잡으며 얘기했다.
“다들 질문 그만해요. 오늘은…… 너무 힘든 하루였잖아요.”
한슬기는 입술을 앙다문 채 윤혜리의 손을 맞잡았다.
난 그 모습을 보고 허탈하게 웃으며 설여원과 윤혜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첫 번째 에피소드를 클리어한 파티의 특전으로, 윤혜리는 라스트아크의 직업을 얻게 되었다.
윤혜리의 직업은 데니.
한슬기가 거짓말을 하는지, 혹은 진실만을 얘기하는지, 저런 식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설여원은 윤혜리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턱짓으로 옆방을 가리켰다.
휴게실에서 따로 보자는 시선.
이를 파악한 결인들은 다 먹은 밥그릇을 치우는 척,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휴게실로 향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전완수는 입맛을 다시며 얘기했다.
“얘기 끝났으면 나 국 한 그릇만 더 먹어도 돼?”
“그만 좀 먹어.”
설여원이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하자, 전완수는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거참 너무하네. 나도 힘든 하루였다고!”
여전히 눈치가 없었다.
* * *
휴게실에 모인 결인들은 탁자 앞에 둘러앉아 윤혜리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달칵.
뒤이어 윤혜리가 들어오고, 그녀는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한 뒤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사실이에요. 슬기 언니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스트아크에 대한 것도 모르고요.”
“코스트코에 생존자는 몇 명이나 있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윤혜리는 손가락을 접으며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꽤 많은지, 양손으로 접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몇 번이고 재차 확인한 뒤, 확신에 찬 표정으로 얘기했다.
“이틀 동안 죽은 사람이 없으면 44명이요.”
“이틀? 이틀은 어디서 나온 기준이야.”
“남편분이랑 이틀 전에 코스트코에서 탈출한 거 같아요. 코스트코에 대한 기억은 이틀 전이 마지막이었어요.”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얘기했다.
“44명이면 우리한테 희소식 아니야? 40명 이상이 생존 중인 쉘터잖아.”
설여원의 말을 듣고 다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두 번째 에피소드 방랑자의 클리어 조건 중의 하나.
40명 이상이 생존 중인 쉘터 3개를 찾아야 한다.
그러자 정진영이 손가락을 튕기며 얘기했다.
“잠깐만, 각성 퀘스트가 쉘터의 파괴 아니야? 잘하면 코스트코에서 각성 퀘스트가 생성될 수도 있겠네.”
정진영의 말에 이정우는 팔짱을 낀 채 고심에 잠긴 모습을 보이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다들 너무 쉽게 여기는 거 같은데, 상대는 총을 들고 있어. 쉽게 볼 상황이 아니라고.”
“총은 우리도 있잖아. 심지어 우린 소총이고.”
정진영이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이정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총격전이 시작되면 다 같이 죽자는 거나 마찬가지야. 몰려드는 좀비는 어떻게 하려고? 대장 좀비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총성이 울리면 탈출할 수 있어?”
이정우의 반박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난 가만히 턱을 매만지며 현 상황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생각을 거듭하면 분명 허점이 발견되기 마련.
그러다 문득, 머릿속으로 빗금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놓치고 있던 게 떠올랐다.
한슬기는 쫓기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순찰하는 것도 꺼리던 경관들이 한슬기를 뒤쫓을 만큼, 한슬기에게 가치가 있는 건가?
난 윤혜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혜리야. 한슬기 씨가 탈출할 때, 혹시 쫓아오는 경관이 있었어?”
윤혜리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코스트코에서 탈출할 때 두 명이 쫓아온 거로 보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안 보여요.”
“그 어느 순간이 어디야?”
윤혜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얘기했다.
“혁신도시 벗어난 뒤로 안 보여요. 포기한 거 같은데.”
“쫓아오던 경관이 발포했어? 권총 쏘는 모습은 보여?”
“아니요, 총도 안 쏘고 소리도 안 지른 거 같아요.”
윤혜리의 말을 듣고 주먹을 불끈 쥐며 얘기했다.
“알았다.”
그러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정우가 물었다.
“뭘 알아?”
“혁신도시의 상황이요.”
“무슨 근거로?”
“형, 이상하지 않아요? 안개 속에 좀비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경관들이 한슬기 씨랑 이찬혁 씨를 추격했다는 게?”
이정우는 설명을 바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모두를 쳐다보며 얘기했다.
“믿는 구석이 있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래요? 그리고 생존자가 탈출하면 식량이 늘어나는 거니 경관들 입장에서는 오히려 긍정적인 상황인데, 굳이 탈출한 사람들을 붙잡으려 했다는 것도 웃기잖아요.”
“대장 좀비가 혁신도시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야?”
“확률이 높은 정도가 아니라 확실하다는 거죠. 경관들이 대장 좀비와 접점이 있고, 코스트코에 있는 생존자들을 먹이로 던져주고 있는 거예요.”
“…….”
“생존자 입장에서 제일 먼저 떠올리는 건 당연히 식량이고, 혁신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코스트코를 떠올리겠죠. 경산에서 온 우리도 코스트코를 떠올렸는데.”
“…….”
“경관들은 거기에 진을 치고, 생존자가 알아서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예요. 대장 좀비에게 생존자들을 먹이로 주고, 본인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거라고요.”
설명을 마치자, 이번엔 윤혜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럼 혁신도시 벗어나서 경관들이 쫓아오지 않은 이유는 뭐예요?”
“혁신도시가 경계인 거지.”
“경계요?”
“대장 좀비의 수하들이 버티고 있는 경계. 혁신도시를 벗어나면 경관들도 좀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거야.”
“그럼…… 경관들은 좀비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거예요?”
“경관들은 그렇게 생각하겠지. 꼬박꼬박 먹이만 넣어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생존자가 사라지면…… 마지막에 경관들을 먹겠네요.”
“그렇지.”
생존자가 양이라면 경관들은 양치기 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리하는 게 대장 좀비인 것이다.
“잠깐만, 나 질문 있어.”
전완수는 오른손을 번쩍 들더니,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장 좀비는 300명의 인간을 먹으면 강화되잖아. 그럼 한 번에 먹고 강해지면 되는 걸, 왜 생존자들을 사육해?”
“지금까지 먹은 생존자의 숫자랑 아직 살아 있는 생존자의 합이 300이 안 될 수 있잖아. 변종으로 변이되지 않기 위해 수치를 유지하면서 인간을 사육하는 거지. 물론 300명을 먹는다고 해서 변종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고.”
“허, 미쳤네.”
전완수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현 상황을 이해하고 생각이 많아진 것으로 보였다.
반면에 단 한 사람, 최현은 손톱을 깨물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워낙 엉뚱한 친구라, 이번엔 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현아, 무슨 문제 있어?”
최현을 쳐다보며 묻자,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마른세수와 함께 입을 열었다.
“지금 재형이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대장 좀비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챘을 거야.”
“왜, 무슨 근거로.”
“혁신도시 경계에 정찰병이 있을 거라며.”
최현의 표정을 보고 괜스레 나까지 불안해졌다.
애써 태연하게 쳐다보자, 최현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우리가 한슬기 씨 구출하러 가던 길, 진짜 기억 안 나?”
순간, 최현의 말을 듣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망치로 머리를 맞는 기분이었다.
최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지하도에만 좀비가 있었잖아. 거기가 혁신도시 경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