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101화
좀비들의 피로 질퍽하게 젖은 양손을 바라보며 생각이 많아졌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건 좋지만, 반대로 폭력에 익숙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예전엔 좀비를 처리하고 양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는데, 지금은 잔잔한 미동만이 전부였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렇게 익숙해져도 괜찮은 걸까.
타닷-
그 순간, 우측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황급히 가드를 올리며 백스텝을 밟았다.
“나야, 재형아.”
귓가로 들려오는 설여원의 목소리.
들고 있던 양손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설여원과 박재우, 황덕록, 최현은 쓰러진 좀비들을 쳐다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황덕록은 본인이 들고 있는 쇠파이프를 쳐다보더니,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이런 게 다 무슨 소용이냐. 쟤는 주먹을 때려잡는데.”
멋쩍은 마음에 쓴웃음을 지으며 화제를 돌렸다.
“어서 가자, 늦겠다.”
“저쪽은 확인 안 해도 돼?”
최현이 골목을 가리키며 묻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저쪽? 왜.”
“좀비들이 모여 있던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골목 안에 좀비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불안한 건 사실이지만, 생존자의 발자취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생존자가 아니더라도 좀비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작은 단서조차 우리에겐 큰 도움이 되기에, 난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여원이랑 내가 앞장설 테니까 재우랑 덕록이가 중앙, 현이가 후방 봐줘.”
설여원은 들고 있던 쇠뇌를 등에 메고 헌팅 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좁은 골목에선 언제 어디서 좀비가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헌팅 나이프를 쥐고 있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박재우와 황덕록, 그리고 최현까지 각자의 무기를 손에 들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발소리를 죽인 채 골목으로 들어섰다.
설여원은 쉴 새 없이 좌우를 살피며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은 전완수가 없기에, 설여원에게 부담이 갈 수밖에 없었다.
설여원은 한참이나 말없이 전진하더니, 왼팔로 내 앞을 막으며 검지를 입술로 가져다 댔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을 응시하는 설여원.
설마 변종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설여원의 표정에서 두려움이나 당혹감은 엿보이지 않았다.
저건…… 긴가민가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이에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뭐 있어?”
“……다들 떨어지지 말고 딱 붙어서 따라와.”
설여원은 경계를 풀고 성큼성큼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사방을 주시하며 설여원의 뒤로 붙었다.
대체 뭘 봤기에 저렇게 무턱대고…….
“컥…… 커헉…….”
뒤이어 귓가를 스치는 숨넘어가는 소리에 다급히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설여원은 바닥에 주저앉아 지면에 쓰러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설여원이 바라보는 존재를 확인하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사람이다.
좀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
설여원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름 모를 남자의 손을 잡아주고 있었다.
뒤늦게 돌아온 정신에, 난 남자의 곁에 무릎을 꿇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괜…….”
차마 괜찮냐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상태는 한눈에 봐도 좋지 않았다.
전신을 좀비들에게 물어뜯기고, 장기의 생김새를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남자의 입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설여원을 쳐다보자, 설여원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얘기했다.
“변이까지 얼마 안 남았어.”
좀비에게 물리면 20분 이내에 변이가 시작된다.
남자의 두 눈은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목선을 타고 오르는 푸른 혈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좀비로 변이되는 과정을 두 눈으로 지켜보는 건 처음이었다.
더 늦기 전에 죽여야 되나?
아직 인간의 정신이 남아 있을 텐데?
좀비로 변하면 죽여?
내가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최현이 다가와 남자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최현은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죽여…… 달래.”
데니의 능력으로 남자의 심정을 읽은 모양이다.
최현의 대답을 듣고 남자의 눈을 쳐다봤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불규칙적이던 숨이 서서히 잦아들자, 꿈틀거리던 남자의 상체가 물에 젖은 수건처럼 축 늘어지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난 허공을 바라보며 지금의 착잡한 마음을 한숨으로 달랬다.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지금껏 아등바등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이토록 냉정하고, 냉담했다.
죽은 남자의 눈을 감겨주고, 옆에 있는 설여원에게 헌팅 나이프를 달라고 했다.
“푹 쉬세요.”
방금 죽은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좀비로 살아가는 것보다, 이 사람도 이런 결과를 바랄 것이다.
차마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외면한 채 남자의 목을 헌팅 나이프로 썰었다.
보호대의 틈새로 흘러 들어오는 뜨거운 핏물에, 마음이 아려왔다.
남자의 핏물이 내 안의 인간성을 사포로 긁는 것처럼 느껴졌다.
완전하게 머리와 몸통을 분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폐부에 들어찬 탁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두 눈을 감고 묵념했다.
부디 고통이 없는 곳에서, 푹 쉬기를 바란다.
띠링-
그 순간, 라스트아크 특유의 알람 소리와 함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타락한 경관: 난이도 A]
-타락한 경관과 그의 무리를 처단하세요.
-클리어 보상: 희박한 확률로 상점 이용권을 획득합니다.
-클리어 조건: 죽은 ‘이찬혁’의 아내를 찾아야 합니다. 또한 ‘이찬혁’을 궁지로 몰아넣은 무리를 처단하세요.
-제한 시간: 48시간
긴급 퀘스트가 생성됐다.
퀘스트 내용을 확인하고 일행을 돌아보자, 다들 홀로그램을 확인하고 있었다.
설여원은 모든 내용을 확인하고 내 얼굴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재형아, 무전기 줘봐.”
“무전기? 무전기는 왜.”
“튜닝숍에 있는 사람들도 퀘스트 생성됐는지 물어봐야지.”
아, 그래.
순순히 무전기를 건네주자, 설여원은 곧장 이정우를 불렀다.
“정우 오빠, 제 목소리 들려요?”
치지직- 치직- 삑.
-얘기해. 듣고 있어.
“오빠도 퀘스트 생성됐어요?”
-퀘스트? 무슨 퀘스트.
“퀘스트 공유할 테니까 공유되는지 봐봐요.”
설여원이 퀘스트 공유를 누르자, 뒤이어 이정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락한 경관? 이거 맞아?
“네 맞아요.”
-너희 어디야. 뭐 하는데 퀘스트가 생성돼?
“설명하면 길어요. 나중에 돌아가서 말씀드릴게요.”
-아니야, 움직이지 말고 기다려. 진영이랑 완수 데리고 갈게.
“그런 상황 아니에요.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긴급 퀘스트가 생성됐으니, 우리가 사고라도 친 줄 아는 모양이다.
도와주려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정우가 나오면 수비팀에 허점이 생길 것이다.
설여원은 중천에 있는 태양을 살피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해 떨어지기 전에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퀘스트는 결인들 모두 공유된 거죠?”
-어, 다들 홀로그램 확인했어.
“퀘스트 공유하려고 연락한 거예요.”
-야, 근데 재형이는 어디 가고 네가 무전을 보내? 걔 또 무리하는 건 아니지?
“옆에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여튼, 이 정도면 과잉보호 수준이다.
내가 또 독단적으로 나선 줄 아는 모양이다.
설여원은 이정우와 무전을 마친 뒤, 내게 무전기를 건네주며 얘기했다.
“퀘스트 보상 때문에 공유한 거야. 확률로 지급되는 보상이라면, 확률을 높이는 게 당연하니까.”
“조금 전까지 묵념하던 사람치고 태세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니냐?”
최현이 싱겁게 웃으며 묻자, 설여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얘기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빠릿빠릿하게 행동하는 건 좋다.
하지만 이찬혁의 아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공유하면 어떡해?
이번 퀘스트는 제한 시간이 있단 말이다.
단서라도 찾고 공유하든가.
자칫 잘못하면 튜닝숍에 있는 일행까지 일주일간 능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기 위해 한마디 하려는 찰나, 설여원은 최현을 쳐다보며 물었다.
“현아, 위치 파악했지?”
“가는 길이야. 가까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멍하니 서 있자, 설여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물었다.
“안 가?”
“아니, 어디…….”
그러다 문득, 한 박자 늦게 현 상황이 이해되었다.
최현은 이찬혁의 머릿속을 들여다봤다.
그럼 이찬혁에게 일어난 일을 이미 파악했을 것이고, 아내의 위치와 타락한 경관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냈을 것이다.
일전에 탈영병들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변종의 숫자와 대단지 아파트의 상황까지 파악한 최현이 아닌가?
퀘스트 진행에 데니가 없으면 안 되는 이유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멋쩍은 마음에 이마를 긁적이며 얘기했다.
“가자.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가야지.”
민망함에 어깨를 풀며 앞서가자, 최현은 내 옷깃을 잡으며 얘기했다.
“그쪽 아니고 이쪽이야.”
* * *
최현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얼마나 이동했을까.
설여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내게 물었다.
“재형아, 이 근처가 각산 아니야?”
이 동네 지형은 내 전문이 아니다.
뒤에 있는 박재우와 황덕록을 쳐다보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덕록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피며 얘기했다.
“이 앞에 조개구이 가게 하나 있을 거야. 거기만 지나면 철물점 거리 나와.”
황덕록의 말을 듣고 뒤에 있는 최현에게 물었다.
“현아, 이찬혁의 아내는 어디 있어?”
“기억을 들여다봤을 땐 빌라였어. 철물점이랑 가까운 거리야.”
“빌라 주변에 좀비들은 얼마나 되는지 알아?”
“좀비들한테 발각돼서 아내만 빌라에 숨기고 본인이 미끼가 된 거 같아. 그러다 골목에 갇혀서 죽은 거야.”
“그럼 빌라 주변엔 별로 없겠네.”
그러자 앞에 있던 설여원이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만약에 아내가 죽었으면 어쩌지?”
“아직 살아 있을 거야. 아내가 죽었으면 퀘스트 실패가 떴겠지.”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설여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현의 안내에 따라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한참이나 나아갔다.
이찬혁이 좀비들을 끌고 도망친 길이라서 그런지, 별다른 움직임은 포착되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뒤에 있던 황덕록이 호들갑을 떨며 얘기했다.
“다들 그만. 정지. 여기야.”
안개 때문에 한 박자 늦게 현 위치를 확인한 모양이다.
설여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여긴 철물점 없는데?”
“옆에 조개구이 가게 있잖아. 여기서 왼쪽으로 빠지면 바로 보일 거야.”
설여원은 우측에 있는 조개구이 가게를 보고 아, 하는 탄성을 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덕록이 얘기한 대로 좌측으로 빠져나가자, 기다랗게 이어진 철물점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15평 크기가 철물점들이 가로 3m 폭의 일방통행로를 따라 좌우로 빼곡하게 이어져 있었다.
안개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수 없지만, 최소 10개 이상의 점포가 모여 있었다.
설여원은 근방에 좀비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가장 앞에 있는 철물점으로 향했다.
철물점 내부는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두컴컴했고, 비릿한 쇠 냄새가 안개 속에 퍼져 있었다.
박재우와 황덕록은 들고 온 가방을 열고 필요한 물품을 황급히 챙겼다.
그동안 설여원과 최현이 입구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난 점포들을 돌며 좀비의 유무를 살폈다.
텅- 탕- 탕.
20m 정도 왔을까?
맞은편의 점포에서 셔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내려가 있는 셔터.
마른침을 삼키며 점포 앞으로 다가가자, 셔터 너머로 목젖을 가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안에 좀비가 갇혀 있다.
울음소리로 보아 한 마리.
뒤에 있는 일행을 쳐다보자, 새하얀 안개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설여원은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곧 내게로 걸어오는 설여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난 설여원을 쳐다보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셋 하면 셔터 올려.”
“처리하게?”
“계속 두드리면 다른 좀비들이 몰려올지도 모르잖아.”
설여원은 앞뒤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셔터의 하단을 붙잡았다.
“하나, 둘, 셋!”
드르르르르륵!
크……!
쩍!!
놈이 울기 전에, 두 눈 부릅뜨고 주먹부터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