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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98화 (98/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98화

다음 날 아침, 일찍이 잠에서 깨어나 차량 상태를 점검하고 남은 볼트를 확인했다.

“일찍 일어났네?”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고 있던 볼트를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자, 설여원이 기지개를 켜며 걸어오고 있었다.

설여원은 하품을 하며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내게 턱짓하며 물었다.

“뭐해?”

“재고 확인.”

“도와줄까?”

“괜찮아, 거의 다 했어.”

설여원은 볼트를 넣어둔 상자 옆에 앉더니, 입맛을 다시며 멍하니 정면을 응시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한참이나 정면을 응시하더니, 혼자 피식 웃으며 물었다.

“야, 박재형.”

“왜.”

“어떻게 할 거야?”

“뭐가.”

“사람들 말이야.”

설여원도 생존자들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설여원은 눈꼬리를 치켜뜨며 내 표정을 살피더니, 싱겁게 웃으며 물었다.

“너도 모르겠구나?”

“사람들이 알아서 하겠지.”

“만약 모든 사람이 같이 가겠다고 하면? 그땐 전부 데려갈 수 있어?”

“…….”

설여원의 집요한 질문에 들고 있던 볼트와 수첩을 내려놓고 뚱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사실…… 정말 모르겠다.

생존자들이 박성훈을 따라가면 불안하고, 그렇다고 모두를 데려갈 자신도 없다.

이전처럼 동전으로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

실개천 너머의 생존자들은 함께 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봤기에, 그들은 데려가도 괜찮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금호강 건너의 생존자들은?

판단 기준도 없고, 심신이 지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대답을 회피하자, 설여원은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얘기했다.

“재형아.”

“…….”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

그 말에 눈꼬리가 꿈틀거렸다.

조심스레 설여원을 쳐다보자, 그녀는 싱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처음 봤을 땐 엄청 이성적이었는데, 요즘에 감성적인 거 알아?”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니까 그렇지.”

“그럴수록 더 이성적이어야지.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려야지.”

나도 안다.

알기에…… 더욱 조심스러운 것이다.

생존자들을 외면한다면 일행의 감정도 흔들릴 것이다.

사람이니까.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쌓이고 쌓이면 불신이 자리 잡을 것이다.

난 마른세수를 하며 잠시 고민한 뒤, 설여원에게 물었다.

“이런 건 정우 형한테 얘기해야지 왜 나한테 왔어?”

“네가 버팀목이니까.”

설여원은 손가락을 펴고 하나씩 접으며 말을 이었다.

“가브리엘이 선봉, 그 뒤에 레이첼, 중간이 에덤, 후방이 데니랑 로즈. 라스트아크의 기본 조합 아니야?”

“…….”

“신기하게 우리랑 딱 맞지 않아?”

일행의 성격과 잘 어울리는 직업군.

이렇게 열거하고 보니 신기하다.

성격대로 본인과 잘 어울리는 직업을 플레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멋쩍은 마음에 입맛을 다시며 물었다.

“사실 이도저도 아닌 게 에덤 아니야?”

“에이, 섭섭한 소리. 에덤이 척추지. 척추 없이 사람이 어떻게 걸어.”

가브리엘이 눈, 레이첼이 심장, 데니와 로즈가 다리.

적절한 비유라 생각한다.

하지만 에덤이 척추라…….

척추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있으려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설여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은 눈 없이도 살 수 있고 다리 하나 없어도 살 수 있지만, 척추 부러지면 아무것도 못 하는 거 알지?”

“심장 없이는 살 수 있냐?”

“그래서 정우 오빠가 대표잖아. 심장이니까.”

“거참, 사람 할 말 없게.”

“그러니 네가 흔들리면 우리는 아무것도 못해. 고민하지 말고 질러.”

“…….”

“척추가 하겠다고 하면 다들 따를 거야. 그러니 망설이지 마. 우리 몸뚱이만 생각해. 괜히 들고 갈 생존자들 생각하지 말고. 무거우면 좀 버려야지 어떡해.”

지금쯤 이정우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설여원 덕분에 생각이 정리됐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이정우가 있는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설여원이 묻기에, 난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심장 만나러.”

“야, 내가 한 말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이다? 눈, 심장, 척추, 이런 얘기하지 마.”

“알았어, 설눈알.”

“죽을래?”

설여원은 얼굴을 붉히더니, 주먹을 불끈 쥐며 달려왔다.

이에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도망쳤다.

* * *

이정우도 설여원과 내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개천 너머의 생존자들과 합류할 때는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지금은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이미 마음을 굳힌 것처럼.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박성훈은 모든 생존자 앞에서 얘기했다.

“저희는 부산으로 갑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이고, 저희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 겁니다.”

“어, 어떻게 이동할 거예요?”

생존자 중 한 사람이 조심스레 오른손을 들며 묻자, 박성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곧장 고속도로 타고 이동할 겁니다.”

“생존자 구출하러 나왔다면서요. 만약 다른 생존자 만나면 지나칠 자신 있어요?”

혹여나 위험에 처할까 봐, 금호강 건너의 생존자들은 벌써부터 방어적인 모습을 보였다.

박성훈은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제가 누군가를 구할 처지가 아니라는 거, 저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곧장 아크로 이동하려는 겁니다. 고속도로를 타고 부산까지 한 번에 이동할 계획이니, 함께하실 분들은 지금 앞으로 나오세요.”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금호강 건너의 생존자들은 우르르 박성훈의 앞으로 향했다.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들도 살고 싶어서 저러는 거니까.

더는 알량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저들의 선택이니까.

금호강 건너의 생존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 김희연의 친언니만이 움직이지 않고 이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뒤이어 김희연의 언니는 내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희연이는…… 여러분이랑 함께하는 거죠?”

이건 내게 묻지 말고 김희연에게 물어야지.

슬쩍 김희연을 쳐다보자, 그녀는 후다닥 달려오며 언니의 손을 잡았다.

“내 걱정하지 말고 언니 먼저 부산으로 가.”

그러거나 말거나, 김희연의 언니는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내게 얘기했다.

“저도…… 여러분이랑 같이 갈게요.”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김서연이요.”

“저희랑 같이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시죠?”

“알아요. 저도 싸울 준비 됐어요.”

김희연은 황급히 김서연과 내 사이를 가로막으며 얘기했다.

“아니에요 오빠. 언니는 부산으로 보내고…….”

그러자 김서연은 김희연의 입을 막으며 얘기했다.

“열심히 할게요. 저도 데려가 줘요.”

김서연은 단호한 표정으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한숨을 내쉬며 이정우를 쳐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음대로 하라는 시늉을 보였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던 설여원이 서글서글한 표정을 지으며 김서연에게 얘기했다.

“김서연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 스물셋이요.”

“어? 저보다 언니네요. 우리 앞으로 잘해봐요. 언니.”

원래 이렇게 붙임성이 좋았나?

설여원도 못 본 새 많이 달라졌다.

처음엔 쭈뼛거리고, 일행의 눈치를 보기 바빴던 설여원.

하지만 학생회관에서 매점을 탈환한 뒤로 서로 유대감도 생기고 믿음이 생겨서 그런지, 지금은 주도적인 사람이 됐다.

뒤이어 이덕배와 이현배, 천호진, 최만석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우린 이미 정했어.”

“저희랑 같이 가시는 거예요?”

“짐이 되진 않을 거야. 걱정하지 말게.”

이덕배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토닥였다.

다시 한번 짚고 넘갈 필요가 있기에 우리의 행선지를 얘기하자, 옆에 있던 이현배가 입을 열었다.

“거참 귀에 딱지 앉겠네. 알아, 알아. 아니까 같이 가겠다는 거야.”

쓴웃음을 지으며 천호진을 쳐다보자, 천호진은 헤벌쭉 웃으며 얘기했다.

“어차피 제 고향도 포항이거든요. 겸사겸사.”

얼추 팀이 갈라졌으니, 난 박성훈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혹여나 가는 길에 베타 변종이 나타날지도 모르기에, 베타 변종의 특징을 다시 한번 복기시켰다.

박성훈은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은 뒤,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강 병장과 김 상병은 양손 두둑하게 기다란 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상자 속의 물건을 보고, 난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아니…… 이걸 저희가 받아도 돼요?”

“여러분이라면 신뢰할 수 있으니까요. 어디 가서 이거 제가 줬다고 얘기하면 안 됩니다. 알려지면 저 큰일 나요.”

박성훈의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난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야 군대에 몸을 담고 있는 군인이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강 병장과 김 상병이 들고 온 상자에는 K2소총 8정과 다량의 탄알집, 수류탄이 들어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소총을 바라보자, 뒤에 있던 이덕배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상자를 받아들었다.

“총도 쏴본 적 없는 친구들한테 이런 걸 주면 어떡하나? 어쩔 수 없이 내가 알려줘야겠구먼. 으하핫!”

“그래서 드리는 겁니다. 도움이 되면 좋겠네요.”

박성훈의 처음 보는 환한 미소.

우리와 함께하지 못하는 걸 진심으로 아쉬워하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난 진심을 담아 박성훈과 뒤에 있는 병사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박성훈은 가볍게 거수경례하며 얘기했다.

“꼭 부산에서 다시 만나면 좋겠습니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여기 계신 분들과 미리 부산을 닦아두겠습니다.”

“네, 꼭 다시 만나요.”

“몸조심 하세요.”

“소대장님도요.”

박성훈과 우린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나누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군인들과 금호강 생존자들이 탑승한 전술 차량과 군용 트럭이 멀어지고,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야, 개이득.”

뒤에 있던 전완수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더니, 군인들이 사라진 뒤에야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얘기했다.

이에 나 역시 싱겁게 웃으며 남은 사람들을 쳐다봤다.

이제 우리도 새로운 여정을 떠나야 한다.

“지금부터 투표하도록 하겠습니다. 안심역은 1번, 곧장 수성구로 간다는…….”

“그건 이미 얘기 끝났어.”

이정우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내 말을 잘랐다.

“네? 언제요.”

“오늘 아침에. 너 차량 점검하러 나갔을 때 우리끼리 얘기했거든. 만장일치로 안심역 나왔어.”

내심 반대 의견이 있으면 어떡하나 고민했는데, 다들 같은 생각이었다니.

천만다행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행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지금은 소총이 생겼으니, 생각 바뀐 사람은 지금 얘기해요.”

“소총이 생긴 건 희소식이지만 함부로 사용할 수 없잖아? 소총보다 쇠뇌가 소음도 적고, 안정적인 건 사실이니까.”

전완수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재우와 황덕록도 수긍하고, 정진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의 표정에 긴장과 설렘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에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좋아, 그럼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갑시다.”

“오케이!”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차량에 올라탔다.

* * *

하양교를 지나 왕복 2차선 도로를 따라 나아가자, 까마귀 떼가 안개 속으로 날아가는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며, 처음 시가지로 나왔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며칠 새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지옥 같은 순간들을 지나 생존자를 데리고 돌아가는 길.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풍족했다.

학교의 정문에 다다르자, 운전을 하고 있던 전완수가 입을 열었다.

“자, 지금부터 금락리 벗어납니다. 이 앞은 안전하니 피곤한 사람은 눈 좀 붙여요.”

학교의 정문을 지나 대경로를 따라 이동하면 도로의 좌측으로 끝도 없이 펼쳐진 논밭이 나온다.

길도 왕복 5차로로 넓어지고, 인적도 드문 지역.

저 앞의 대학가만 조심하면 안심역에 다다를 때까지 큰 위협은 없을 것이다.

난 전완수의 옆으로 다가가 차량 계기판을 살피며 물었다.

“기름은 충분해?”

“아직은 괜찮아. 혹시 모르니 안심역 바로 전에 청천 주유소에서 채우…… 어?”

전완수는 갑작스레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말을 맺지 못하고 핸들을 꽉 쥐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버스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외쳤다.

“다들 꽉 잡아!”

덩달아 놀란 눈으로 앞 유리를 확인한 찰나, 새하얀 안개 너머에서 순식간에 나타나는 검은 무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크어어어어어어!!

콰과과광!! 콱! 콰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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