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95화
“생존자 구출한 뒤에, 재형 오빠 무전이 들어왔어요. 미확인 변종이 저희 쪽으로 이동한다고, 어서 대피하라고.”
“그렇다고 재형이를 두고 와?”
“저희도 최선을 다했어요. 재형 오빠 올 때까지 고가도로 돌면서 좀비들 처리하고, 어떻게든 버텼는데…… 저기 있는 군인들이 애기해 줬어요. 재형 오빠가…… 수류탄을…….”
김희연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쏟았다.
설여원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자, 그 모습을 보다 못한 강 병장이 얘기했다.
“제 손으로 직접 수류탄을 건네줬습니다. 박재형 씨는…… 변종과 함께 자결을 택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왜…… 왜! 당신들 군인이잖아! 다른 방법이 있었을 거 아니야!”
“…….”
“시신은, 시신은 봤어요? 확실하게 봤어? 재형이 죽은 거 확실하냐고!”
“시신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고가도로로 이동하는 길에 폭음을 들었습니다. 분명 박재형 씨가 있던 골목이었어요.”
설여원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눈물을 글썽이더니, 고개를 저으며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읊조렸다.
“아니야, 그럼 아니야. 시체를 확인한 것도 아니잖아. 재형이 그렇게 쉽게 안 죽어.”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최현이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로 얘기했다.
“하…… 미안하다, 여원아.”
그러자 설여원은 최현에게 삿대질을 하며 두 눈을 부라렸다.
“그런 말 하지 마. 아니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여원아…….”
“씨X! 아니라고!”
설여원이 분기를 가라앉히지 못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이정우가 설여원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정해. 우리가 완수랑 현이한테 뭐라 할 자격이 돼?”
“그래서 제가 간다고 했잖아요! 딱 한 번 같이 안 갔는데, 그래서 내가 가겠다고 했잖아!”
설여원이 눈물을 글썽이며 광분한 모습을 보이자, 뒤에 있던 정진영이 다가오며 얘기했다.
“재형이 데리러 갈 사람 앞으로 나와.”
“야, 정진영.”
이정우가 반박하려 하자, 정진영은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난 시체라도 봐야겠어. 확인하기 전엔 못 믿어.
“…….”
“그 자식 좀비도 주먹으로 때려잡는 놈이야. 쉽게 죽을 리 없어.”
“수류탄을 정면으로 맞고 살아남는 건 말이 안 돼.”
“정면으로 맞았다는 보장 있어? 궁지에 몰려도 잡초처럼 살아남은 게 재형이야. 난 재형이 찾으러 갈 거니까 말리지 마.”
이정우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더니,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박성훈에게 얘기했다.
“소대장님.”
“네, 이정우 씨.”
“전술 차량, 저희가 빌릴 수 있겠습니까?”
박성훈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이정우는 단호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박성훈은 입맛을 다시며 한숨을 내쉬더니, 세차게 혀를 차며 얘기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뒤이어 병사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다들 경계 강화하고 대기. 지금부터 1시간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모든 지휘권은 강 병장이 인계하고, 생존자들 데리고 부산으로 이동한다.”
박성훈이 이정우를 쳐다보자, 이정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술 차량에 탑승했다.
박성훈이 운전석에 오르자, 설여원은 후다닥 조수석으로 달려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전완수와 최현이 전술 차량으로 향하자, 정진영이 두 사람을 말리며 얘기했다.
“너희 둘은 남아. 여기 지켜줄 사람도 있어야지.”
“죄책감 느끼고 싶지 않아요. 저희도 갈게요.”
“재형이 시신이라도 찾으면 죄책감이 없어질 거 같아?”
“…….”
“너희만 죄책감 가지는 거 아니야. 뭐라 하는 사람 없으니까 여기 있어.”
정진영은 손도끼를 쥐고 전술 차량에 올랐다.
부르릉-
네 사람을 태운 전술 차량은 쏜살같이 상가 지역을 빠져나갔다.
* * *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눈을 떠도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고, 정신은 너른 우주를 떠다니는 것처럼 몽롱했다.
-에덤 화이트.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먼발치서 들려온 목소리는…… 마치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
고통도, 슬픔도 없는 공간.
절망의 육체를 떠나 마침내 영혼의 본질로 돌아온 기분.
“에덤 화이트.”
그 순간,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인간의 형체를 띤 새하얀 빛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목구비마저 새하얀 빛으로 보이지만, 그가 내 얼굴을 직시한다는 걸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원하는 답이자, 네가 생각하는 존재.”
“그럼 여긴…… 저승입니까?”
“그 무엇도 아닌 세계. 무형의 공간. 또 다른 차원.”
저게 무슨 말이야.
스스로 판단하라는 건가?
얼떨떨한 정신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자, 그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게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구나.”
“…….”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네가 선택한 정의를 관철하여 뜻하는 바를 이루거라.”
“인류의…… 생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조심스레 질문하자,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당신이 바라는 건 뭡니까. 원하는 게 있으니 좀비를 창조한 거 아닙니까?”
“종의 균형.”
“균형?”
“네가 어느 편에 서서 싸우든, 네게 주어진 결과는 똑같을 것이다.”
“예?”
“시간이 다 되었다. 이제 그만…….”
“잠깐, 아니 잠깐만!”
다급히 그의 말을 자르며 아직 묻지 못한 것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좀비를 만든 이유가 뭡니까? 당신이 원하는 게 균형이라면…… 최소한 변종은 만들지 말았어야죠. 밸런스고 뭐고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균형을…….”
“인간의 생사는 내게 관심 밖의 일이다. 내가 말하는 균형은 더욱 고차원적인 사고이며, 난 차원을 창조하고 관리하는 존재일 뿐 생명의 탄생과 성장, 진화, 발전은 모두 너희들의 선택이었다.”
“……지구의 균형을 말하는 게 아니라고?”
눈꼬리를 치켜뜨며 되묻자, 그는 점점 밝은 빛으로 변하며 읊조렸다.
“시간이 다 되었다. 언젠가 나를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때 모든 것을 알게 될 테니, 지금은 너의 정의를 관철하며 꿋꿋하게 살아남거라. 그것이 지금의 네게 바라는 내 진심이니.”
화아악-!
눈부신 빛이 순식간에 주변을 에워싸고, 난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 * *
까악- 까악-!
귓가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묵직한 눈꺼풀을 천천히 들고, 아직 빛에 적응되지 않은 눈을 몇 차례 깜박였다.
까악!
“어어! 깜짝이야.”
푸드득-!
바로 옆에 있던 까마귀도 놀랐는지, 후다닥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키자, 전신이 욱신거리고 머리가 울리는 것을 느꼈다.
“윽…….”
앓는 소리를 내며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살피자, 참혹한 전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뒤늦게 기억의 조각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변종, 변종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수북하게 쌓인 시신들을 살폈다.
대부분이 신체의 일부가 절단 나거나, 사라진 상태였다.
그리고 시신들의 사이로, 사지가 잘려나간 변종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류탄을 직격으로 맞은 변종과 좀비들은, 대부분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내 몸은 왜 멀쩡한 거지?
양손의 떨림도 사라졌고, 숨도 가쁘지 않았다.
아참, 발목.
뒤늦게 발목의 상태를 살피자, 반쯤 떨어져 나갔던 발목이 온전히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바닥에 주저앉아 양손으로 발목을 주물렀다.
아프지 않다.
심지어 샤워하고 나온 것처럼, 깨끗하기까지 했다.
잠깐, 변종에게 아랫배도 물렸던 것 같은데?
호들갑을 떨며 양손으로 아랫배를 만지작거렸다.
피부도 매끈하고, 배 속의 장기도 제대로 붙어 있었다.
뭐지?
내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건가?
그럴 리가.
내가 느꼈던 고통은 거짓이 아니었다.
숨쉬기도 힘든 고통에 몸서리친 게 조금 전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러다 문득, 시야의 우측 상단에서 점멸하는 노란 불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밑으로 붉은색으로 표시된 보호대의 내구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손목 보호대: 사용 불가]
[팔꿈치 보호대: 사용 불가]
[상완 보호대: 사용 불가]
[허벅지 보호대: 사용 불가]
[무릎 보호대: 사용 불가]
*보호대가 복구되는 동안 기능을 상실합니다.
(남은 시간: 11시간 40분)
내구도가 20% 미만으로 내려가면 12시간의 복구시간이 소요된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게 어디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시야에서 점멸하는 노란 빛을 따라 홀로그램을 살폈다.
-변종을 처리했습니다. 카운트 100점이 주어집니다.
-스킬 ‘좀비화’의 요구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요구조건: 변이바이러스 흡입(Clear)
변이바이러스를 흡입했다고?
언제?
그러다 문득, 미확인 변종이 내 아랫배를 헤집던 순간이 떠올랐다.
놈의 타액이 내 혈액에 들어왔을 것이고, 그 과정에 변이바이러스를 획득한 건가?
이걸 획득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강제로 주입 당한 건데.
그건 그렇고 좀비화?
이름부터 불길한 스킬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스킬 설명을 읽어내려갔다.
[좀비화]
-20분간 좀비의 성능을 지닙니다.
-좀비에게 물려도 감염되지 않으며, 모든 신체 능력이 2배 증가합니다.
-좀비화 발동 후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개방됩니다.
-좀비화는 20분간 지속되며, 지속시간이 끝나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좀비화가 끝나면 ‘과부하’ 효과가 적용되어 24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가 반감됩니다.
-좀비화의 재사용 대기시간은 100시간입니다.
-스탯 ‘정신력’을 높이면 좀비화의 유지시간이 증가합니다.
눈앞의 홀로그램을 보고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내가 좀비로 변하는 게 스킬이라고?
이걸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좀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좀비에게 물려도 변이되지 않는 건 장점이나, 페널티를 무시할 수 없었다.
24시간 동안 모든 능력치 반감, 게다가 재사용 대기시간은 무려 100시간.
정말 최후의 최후까지 아끼다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해야 하는 스킬이었다.
좀비화 발동 후에 사용할 수 있는 스킬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24시간 능력치 반감 페널티를 적용받는 건 다소 위험했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세상.
지금의 24시간은 생사가 오가는 순간이 너무나도 많았다.
띠링-
뒤이어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또 다른 문장이 떠올랐다.
-에덤 화이트의 이스터에그가 개방되었습니다.
-에덤 화이트의 고유 스킬이 생성됩니다.
고유 스킬?
패시브 스킬을 말하는 건가?
고민할 필요 없이 플레이어 정보를 열었다.
-캐릭터 이름: 에덤 화이트
-능력: 강화
-스탯: 근력 22(Max), 체력 22(Max), 반사 신경 5(+6), 동체 시력 5(+5), 정신력 10
-스탯 2: 골밀도 5(+9), 표피강화 5(+9)
*스탯 2는 2포인트에 1스탯씩 증가합니다.
-현재 처리한 좀비의 수: 372/700
-남은 포인트: 0
-패시브 스킬: 재생
재생은 또 뭐야.
혹시 예전에 완수가 얘기했던 캐릭터 배경인가?
에덤 화이트는 연구소에서 인체 실험을 당하던 군인이었고, 잘려나간 신체 부위도 자가재생되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스터에그가 발동되며 에덤 화이트의 고유 능력이 개방된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처리한 좀비의 수가 372나 된다고?
변종을 잡고 얻은 100의 카운트를 제외하면 260마리가량을 때려잡았다는 얘기.
아무리 계산해도 200마리가 안 될 것 같은데…….
설마 어시스트 카운트?
고가도로에 있는 일행에게 서둘러 돌아가라고 했는데, 돌아가지 않고 좀비를 처리한 모양이다.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겠지?
다급히 무전기부터 손에 쥐었다.
“아…….”
내 몸은 멀쩡한데, 무전기는 망가진 상태였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패시브 스킬 덕에, 난 폭발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