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92화
출발할 때 무전기의 전원을 꺼둔 게 패착이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바로 옆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주변을 살폈다.
더는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설마 전완수와 최현, 김희연이 베이스캠프로 이동한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이 엄습했다.
베이스캠프로 가봐야 하나?
그래, 다소 위험하지만 베이스캠프를 확인해야겠다.
그곳에 도착하면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변종이 위협적인 건 사실이지만, 일전에 버스에서 변종을 상대하며 가능성을 봤다.
혼자 변종을 처리하진 못하더라도, 지금 신체 능력이면 당하진 않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재빨리 옥상을 넘나들며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덜컥.
대략 300m 정도 이동했을까?
좌측에 있던 옥탑방 방문이 열렸다.
화들짝 놀라며 헌팅 나이프를 치켜드는 찰나, 다급해 보이는 남자가 검지로 입술을 가린 채 나를 쳐다보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난 남자의 얼굴을 보고 반사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완수였다.
옷에 혈흔이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좀비를 피해 이동하는 과정에 육탄전도 벌인 모양이다.
자초지종을 물으려는 찰나, 그는 내 옷깃을 쥐고 옥탑방으로 밀어 넣었다.
바닥에 엎어지며 놀란 눈으로 전완수를 쳐다보자, 그는 계속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보이며 창밖을 가리켰다.
전완수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보자, 하나의 작은 점처럼 보이는 물체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옥상 바닥에 널브러진 네 구의 시체.
그 위로 납작 엎드려 살점을 뜯어먹는 존재.
변종?
아니, 저건 변종이 아니다.
거무죽죽한 피부와 난생처음 보는 외형.
마른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자, 옆에 있던 최현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게 베타 변종이야?
“아니야.”
“그럼 뭐야. 알파 변종은 아니잖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라스트아크를 하며 수많은 변종을 봐왔지만, 저런 변종은 내 기억 속에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구석에 있던 김희연이 입술을 파르르 떨며 얘기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나타나서는…… 군인들을 학살했어요.”
“총을 맞고도 멀쩡해?”
눈꼬리를 치켜뜨며 묻자, 옆에 있던 전완수가 마른침을 삼키며 얘기했다.
“순식간에 벌어졌어. 불도저처럼 밀고 들어오더니…… 총에 맞아도 끄떡없었어.”
“베이스캠프에 있던 4명이 전부 당한 거야?”
“순식간이었다니까? 저거 졸라 강해.”
전완수가 이토록 당황하는 건 처음 봤다.
어떻게든 군인들을 돕고 싶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난 퍼석한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다른 군인들은? 너희랑 같이 있던 두 명은 어디 갔어?”
“몰라, 좀비들 유인하다가 중간에 흩어졌는데 어디 갔는지 안 보여.”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내가 얼빠진 표정을 짓자, 전완수는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아주 X된 거지.”
현 상황을 설명하는 최적의 표현이었다.
뒤이어 전완수는 내 전신을 훑더니,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소대장은? 생존자는 찾았어?”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전완수는 불행 중 다행이라며 내 등을 토닥였다.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묻자, 전완수는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얘기했다.
소대장과 내가 떠난 뒤로 20분 동안 쉬지 않고 옥상을 뛰어다녔다고 한다.
하지만 도망치면 도망칠수록 좀비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기에, 이곳 옥탑방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시선이 분산된 좀비들도 덩달아 갈라서기 시작했고, 좀비들이 수색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렸다고 한다.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서서히 사그라든 뒤에야 다시금 밖으로 나와 약속장소에 모였다고 한다.
모두가 모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이에 전완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여기서 군인들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어, 그러다 네가 지나가는 거 발견한 거고.”
어쩌지?
계속 기다리는 게 옳은 선택인지, 아니면 찾아 나서는 게 옳은지 모르겠다.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첩첩산중이다.
난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고심에 잠겼다.
생각하자.
어떻게든 최선의 선택을 내려야 한다.
아니, 최선은 아니더라도 최악은 피해야 한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두 명의 군인은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변종이 나타나기 전까지 총성은 들리지 않았으니, 남은 두 명의 군인은 이곳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면, 그들도 베이스캠프에 있는 군인들처럼 격발했을 테니까.
그러니 좀비들을 피해 어딘가에 숨어 있다는 뜻인데…….
근방의 좀비들은 총성을 듣고 베이스캠프로 모여들었으니, 변종과 좀비가 뒤섞인 지역만 피해서 주변을 정찰할까?
난 생각을 정리하고 전완수에게 얘기했다.
“지도 줘봐.”
전완수가 건네준 지도를 보며 현재 위치와 베이스캠프의 위치, 생존자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흩어질 때 군인들이 어디로 뛰었는지 알려줘.”
“이쪽.”
다행히 베이스캠프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난 이쪽으로 돌아서 군인들 찾을 테니까, 너희는 고가도로까지 직진해.”
“뭔 소리야. 혼자 군인들 찾으러 가겠다고?”
“어.”
“아니 미친놈아 말 같은 소리를 해! 어떻게 혼자 보내.”
“여기서 나보다 빨리 뛸 수 있는 사람 있어?”
전완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최현과 김희연의 얼굴을 쳐다봤다.
난 전완수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얘기했다.
“고가도로 도착하면 생존자들이랑 소대장님 보일 거야. 너희도 가서 도와.”
“야, 아무리 그래도…….”
“다 같이 죽기 싫으면 빨리.”
최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보더니, 내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물었다.
“변종이랑 싸울 생각은 아니지?”
“미쳤다고 저런 거랑 싸워? 싸울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마.”
“…….”
“사람이 많아지면 발각될 가능성만 높아. 나도 섣부른 행동은 안 할 테니 먼저 가.”
애써 태연하게 얘기하자, 전완수와 최현은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각자의 무기를 손에 쥐며 얘기했다.
“꼭 돌아와라. 너 올 때까지 고가도로에 있을 테니까.”
“알았으니 무전기 켜둬. 무전 치면 바로 시동 걸고.”
두 사람은 김희연을 부축하여 밑으로 내려갔다.
1층까지 일행을 배웅한 뒤, 다시금 옥상으로 돌아와 군인들이 이동한 곳으로 향했다.
* * *
옥상을 뛰어넘으며 군인들이 숨을 만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총성을 듣고 밑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높고, 안개 속에 있을 가능성은 낮다.
4층과 5층, 옥탑방을 중점적으로 살폈다.
카하악! 카아아악!
두 주먹 불끈 쥐고 건물 내부에 있는 좀비들을 처리하며 빠르게 수색 범위를 넓혔다.
하지만 7개의 빌라를 확인할 동안, 군인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격하게 몸을 써서 서서히 허벅지가 당겨오고, 팔을 앞뒤로 휘저을 때마다 어깨와 팔뚝으로 뻐근함이 느껴졌다.
옥상을 뛰어넘을 때마다 느껴지는 부유감, 착지할 때마다 아킬레스건으로 느껴지는 팽팽함, 점점 가빠지는 숨과 초조할수록 몽롱해지는 정신.
초인적인 힘을 얻었지만, 결국 나도 사람이었다.
타다다다당!
타당! 타다다당!
그 순간, 또다시 총성이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린 찰나, 머릿속이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쪽이면…… 고가도로 쪽인데?
박성훈이 실탄을 허용한 건가?
“미친…….”
욕설을 읊조리며 재빨리 베이스캠프 방면을 살폈다.
족히 200m는 떨어진 거리.
여유롭게 시체를 뜯어먹던 미확인 생물체는 총성을 듣고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저 녀석도 청각이 존재하는 건가?
어서 알려야 한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변종이, 공터에 있는 일행을 인지했다.
지금이면 전완수도 공터에 도착했을 것이다.
난 다급히 무전기를 들고 전완수를 불렀다.
* * *
“사격 개시!”
총구에서 연달아 불꽃이 터지며 수십 발의 탄알이 좀비들에게 날아들었다.
“계단 막아! 못 내려오게 막아!”
군인들은 계단에서 내려오는 좀비들에게 쉴 새 없이 총알을 퍼부었다.
육탄전으로 좀비들을 저지하는 게 버거운 수준까지 도달했기에, 하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었다.
공터에 모인 생존자들은 김희연을 따라 일사불란하게 차량에 탑승하고, 전완수와 최현은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좀비들을 처리하며 버텼다.
치지직- 치직- 삑.
-완수야! 전완수!
뒤이어 전완수의 무전기로 박재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완수는 대답할 여력이 없기에, 뒤에 있는 박성훈에게 무전기를 던졌다.
박성훈은 무전기를 받아들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박재형 씨! 대체 어디 있는 겁니까!”
-빨리 대피해요!
“현 위치 보고하세요! 저희가 가겠습니다!”
-올 생각하지 말고 가라고요! 변종이 그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탄알은 충분합니다! 걱정하지 말고 위치부터…….”
박성훈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전완수가 달려와 무전기를 낚아채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변종이라니, 우리가 봤던 그놈?”
-그래 인마! 빨리 튀어!
전완수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박성훈을 쳐다보며 얘기했다.
“전부 차에 타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직 우리 병사들과 박재형 씨가…….”
“다 죽기 싫으면 빨리!”
전완수는 박성훈의 팔을 잡고 강제로 끌고 갔다.
박성훈이 저항하려 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최현까지 가세하여 박성훈의 팔을 잡았다.
뒤이어 최현은 도끼눈을 뜨며 얘기했다.
“가면서 설명할 테니까 빨리. 여기 있다간 다 죽어요.”
“…….”
최현의 살벌한 표정에 박성훈은 마른침을 삼키더니, 그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앞에 있는 병사들에게 외쳤다.
“후퇴! 전부 차에 탑승해!”
좀비에 대한 건 누구보다 박재형의 일행이 잘 알기에, 끝내 따르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탑승하자, 차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가도로로 나아갔다.
* * *
난 변종의 행동을 관찰했다.
놈은 연거푸 고개를 흔들더니, 서서히 상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무슨…….”
말문이 막혔다.
키가 3m는 되는 것 같고, 양팔은 손등이 바닥에 끌릴 정도로 축 처져 있었다.
하체는 인간의 무릎과 달리 반대로 접히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씹고 있던 인간의 살점을 삼키더니, 공터 방면을 미동도 없이 응시하기 시작했다.
총성과 좀비들의 울음소리로 점철된 공터.
이미 늦은 건가?
변종의 청각에 생존자들의 아우성이 들어간 모양이다.
내버려 두면 안 된다.
저런 괴물이 상가 지역까지 이동하면 전멸이다.
내게 있는 무기는 쇠뇌와 볼트 30발, 헌팅 나이프, 수류탄 하나가 전부였다.
상대할 수 있을까?
싸워서 이기진 못하더라도, 시간은 끌 수 있지 않을까?
문득, 예전 유명한 프로게이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싸워서 이긴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하는 게 아니라, 지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경기에 임한다는 말이.
저 녀석을 이기진 못하더라도, 이곳 지형을 이용한다면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쇠뇌를 견착하고, 망설임 없이 변종의 곁으로 다가갔다.
60m 거리까지 접근한 뒤, 고가도로 방면을 응시하는 변종의 뒤통수를 향해 쇠뇌를 발사했다.
퉁!
딱!
정확히 뒤통수에 맞았는데, 볼트는 바위에 부딪힌 계란처럼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고가도로를 응시하던 변종은 고개를 돌리더니, 내 얼굴을 똑바로 직시했다.
안구가…… 없다.
눈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만이 자리 잡고 있었다.
껴어어…… 껴걱! 껴어어…….
돼지 멱따는 소리?
혹은 금방이라도 숨넘어갈 것 같은 끔찍한 울음소리.
털끝이 곤두서고,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을 마주한 것처럼,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건…… 내가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껴어어어어어어억!!
변종의 찢어지는 비명에 귀가 먹먹해지고, 골이 울렸다.
귀에서 이명이 들리고, 머릿속으로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변종의 위치를 살피자, 놈은 지면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공중으로 족히 5m는 뛰어오르는 말도 안 되는 탄력.
60m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기 시작했다.
삶을 갈망하는 현장에서는 모든 감각이 살아 숨 쉰다.
순식간에 아드레날린이 폭주하며 전신으로 퍼지는 혈류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