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89화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상쾌한 공기로 폐부를 환기했다.
메케하지도 않고, 습하지도 않은 맑은 공기.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란 심장과 긴장된 근육을 풀었다.
박성훈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저 멀리 하나의 점처럼 보이는 아파트를 응시하며 물었다.
“저기, 저게 생존자들이 있는 아파틉니까?”
“그런 거 같아요.”
난 옆구리에 차고 있던 망원경으로 그곳을 살폈다.
거리가 상당하기에 평범한 망원경으로는 생존자의 유무까지 확인할 수 없었다.
여기서 아파트까지의 거리는 족히 1.4㎞.
빌라촌을 가로질러 이동한다면 1㎞ 정도는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들고 있던 망원경을 다시금 가방에 넣고, 박성훈과 일행에게 얘기했다.
“여기 빌라촌만 지나면 좀비들도 별로 없을 거예요.”
“생존자들의 숫자는 파악됩니까?”
“모르겠어요. 좀 더 붙어서 확인해야 될 거 같아요.”
빌라들의 간격은 2m.
6층 높이가 주는 압박감은 보통이 아니었다.
박성훈은 뒤에 있는 병사에게 얘기했다.
“무전병, 지금부터 무전은 꺼두도록.”
“알겠습니다.”
“박재형 씨도 무전기 꺼요.”
나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박성훈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좀비들이 정리되지 않은 지역입니다. 위급 상황에 무전이 들어오면 위치 발각될 수도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무전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 소대장은 안전을 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고개를 끄덕이며 무전기의 전원을 껐다.
박성훈은 일행의 모습을 가볍게 살피며 얘기했다.
“갑시다. 되도록 밑에 보지 말고 뛰어요.”
* * *
옥상 난간에 서서 지면을 바라봤다.
“후…….”
한 차례 심호흡과 함께 가장 먼저 옆 건물로 뛰었다.
탓!
시멘트 처리된 난간 부위는 두 발이 앞뒤로 나란히 설 수 있기에, 조금이나마 발돋움 판 역할이 되었다.
제자리멀리뛰기로 1㎞를 가야 하면 부담이지만, 도움닫기가 가능하다면 충분히 체력을 아끼며 이동할 수 있다.
뒤를 돌아보며 어서 오라고 손짓하자 박성훈과 분대원들, 그리고 일행이 차례대로 뛰었다.
전완수는 옥상에 착지하며 두 눈을 빛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역시, 이거 재밌어.”
이전에도 이런 상황을 즐기더니, 역시 별나다고 해야 좋을지, 긍정적이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반면에 김희연은 건물 하나를 뛰어넘었을 뿐인데, 벌써 다리가 풀린 모습을 보였다.
“희연아, 너 괜찮아?”
“아…… 네, 괜찮아요.”
김희연의 이마 위로 맺힌 식은땀.
안색도 창백했다.
이에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너 설마…… 고소공포증 있어?”
김희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옥상으로 올라왔고, 우리의 체취를 맡은 좀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수가 없기에, 난 김희연을 등에 업으며 얘기했다.
“꽉 잡아.”
김희연을 등에 업고 난간 위에 올라서자, 내 목을 조르는 손길이 느껴졌다.
탓!
사람 하나 등에 업고 2m를 뛰어도 여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선두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한 일.
내가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자, 박성훈은 가장 앞에서 건물을 뛰어넘으며 각 건물의 옥상을 확보했다.
난 가장 뒤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살피며 이동했다.
몸이 굳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 휴식하기 위함이었다.
체육학원에 다닐 당시, 몸이 굳은 사람은 움직임부터 티가 난다.
자신감 없는 표정을 시작으로 하체의 균형이 흐트러진다.
그런 사람들이 오기로 달려들면 꼭 일이 터진다.
대략 500m쯤 왔을까, 군인 중 한 명의 호흡이 불규칙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난 다급히 박성훈의 곁으로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박성훈도 상당히 지쳤는지,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여기서 5분만 쉬었다가 가죠.”
“아닙니다. 아직 더 갈…….”
박성훈이 반박하려 하기에, 뒤에 있는 병사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박성훈은 그제야 분대원의 상태를 알아채고 병사의 곁으로 달려갔다.
이미 병사의 눈은 반쯤 풀려 있었다.
발밑에는 좀비들이 있고, 단 한 번의 실수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상황.
아무리 군인이라도, 잡념이 많아지고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체력이 급격히 떨어진 것으로 보였다.
어제의 피로도 가시지 않았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박성훈은 분대원의 볼을 양손으로 잡으며 얘기했다.
“기현아, 나 봐봐.”
“이, 이병 박기현.”
“괜찮아? 불편한 데 있으면 말해.”
“괘, 괜찮습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데, 괜찮다는 말을 쩌렁쩌렁하게 한다.
박성훈은 다급히 이병의 입을 막으며 좌우로 눈을 굴렸다.
나 역시 혹여나 좀비가 들었을까 봐, 청각을 곤두세웠다.
다행히 목젖을 가는 좀비들 특유의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병은 연거푸 침을 삼키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박성훈은 이병의 상태를 유심히 살피더니, 옆에 있는 병사들에게 얘기했다.
“너랑 너, 그리고 너는 기현이랑 같이 여기에 베이스캠프 만들고 대기.”
“옥상에 말입니까?”
“생존자 전부를 데리고 다시 돌아와야 돼. 생존자들도 중간에 휴식할 장소가 필요해.”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지친 이병을 눕혀두고 베이스캠프를 만들기 시작했다.
박성훈은 쳐다보자, 그는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우린 계속 이동하겠습니다.”
* * *
그 뒤로 300m 정도 이동했을까?
건물 사이를 가로지르는 차도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족히 10m 폭의 도로.
박성훈은 옥상에 놓인 물건들을 살피더니, 로프를 들고 옥상 구석에 있는 철근 기둥에 칭칭 감는 모습을 보였다.
밧줄로 건물을 연결하는 건…… 추후 생존자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안전하게 이동하기 위함인가?
건물 사이를 밧줄로 연결해서 이동하려는 건 알겠는데, 맞은편은 어떻게 연결하려고 그러지?
난 난간 위로 올라가 맞은편 건물을 살폈다.
이번 건물은 난간의 폭이 얇아서 간신히 서 있는 게 한계.
제자리멀리뛰기로 10m를 뛰어야 한다.
이건…… 나도 불가능.
곤란한 표정을 짓자, 박성훈은 내 곁으로 다가와 얘기했다.
“전 1층으로 내려가서 반대편 건물로 이동하겠습니다.”
“같이 가요.”
“여기 계세요. 저 혼자 갑니다.”
“안 됩니다.”
난 박성훈의 팔을 잡으며 단칼에 거절했다.
박성훈을 혼자 보내선 안 된다.
이곳의 군인들은 박성훈을 향한 신뢰가 두텁다.
그만큼 박성훈이 사망하는 순간 질서가 사라지고 무법자들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다.
힘의 균형을 박성훈이 조율하고 있는데, 저 밑으로 혼자 보내는 건 말도 안 된다.
난 주변을 살피며 얘기했다.
“소대장님이랑 저, 그리고 몇 분만 추려서 이동하죠.”
방성훈은 덤덤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뒤에 있는 병사들을 쳐다봤다.
“너, 너, 그리고 박재형 씨, 이렇게 이동하겠습니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레그홀스터에 넣어둔 헌팅 나이프를 뽑았다.
소대장은 옥상의 철문 앞으로 걸어가 우리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낸 뒤, 문을 열어젖히며 계단으로 진입했다.
크르르르르…….
계단에 있던 좀비들이 소리를 듣고 반응한다.
좀비들이 큰 소리를 내기 전에 처리해야 하는 걸 박성훈도 알기에, 그는 착검할 새도 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대검을 뽑아 좀비의 관자놀이에 찔러넣었다.
난 난간을 타고 단숨에 밑에 층으로 뛰어내렸다.
중간에서부터 좀비들을 처리하며 공간을 확보했다.
4층에 있던 두 마리의 좀비를 순식간에 처리하고, 발소리를 죽인 채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과 복도에만 총 12마리의 좀비가 있었다.
이는 현관이 열려 있다는 뜻.
박성훈은 2층 계단에서 걸음을 멈춘 뒤, 손등으로 인중을 닦으며 얘기했다.
“둘은 내려가서 좌우 경계하고, 박재형 씨는 저랑 반대편 건물로 달립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박성훈은 뒤에 있는 군인들에게 이동하라는 손짓을 보였다.
두 명의 군인은 착검을 마치고 안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뒤를 내가 따르고, 소대장이 후방을 담당했다.
예상대로 현관 유리문은 산산이 조각난 상태였다.
바닥에 유리 파편을 조심해서 이동…….
빠드득-
앞서가던 두 명의 군인이 유리 파편을 못 보고 그대로 지르밟았다.
그 찰나의 정적이, 마치 펄스 계수기의 사망 신호처럼 느껴졌다.
크르르르르…… 카학!
거리 곳곳에서 목젖을 가는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릿속으로 경종이 울린다.
뒤이어 박성훈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뛰어.”
크어어어어!!
사방에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난 지면을 박차며 앞만 보고 달렸다.
고작 10m 거리인데,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건물의 윤곽이 눈에 들어오고, 현관의 유리문이 눈에 들어온다.
하필 맞은편 건물의 유리문은 멀쩡한 상태였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에덤의 능력이지.
“흡!”
힘차게 숨을 들이켜며 유리문을 향해 발길질을 날렸다.
챙그랑!!
유리문이 산산 조각나며 계단에 있던 두 마리의 좀비와 눈이 마주쳤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좀비들.
당황하고 있을 새가 없다.
좀비로 변한 노부부의 안구에 헌팅 나이프를 내지르고, 계단과 복도의 안전을 확보하며 옥상으로 향했다.
박성훈과 군인들은 헐레벌떡 내 뒤를 따랐다.
카하악!
4층에 도달한 순간, 현관의 걸쇠에 걸려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좀비가 문밖으로 팔을 뻗어 내 옷깃을 잡았다.
좀비의 악력에 상체가 휘청거리는 찰나, 뒤따라온 군인이 좀비의 팔뚝에 대검을 내지르며 가차 없이 비틀었다.
넘어지진 않았지만, 내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박성훈이 한발 앞서 옥상으로 향했다.
그는 옥상으로 통하는 철문의 문고리를 쥐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잠겼습니다!”
성인 두 명이 나란히 서면 꽉 막히는 계단이었다.
바깥의 좀비들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문을 열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한다.
난 위에 있는 박성훈과 병사들에게 외쳤다.
“문부터 따요! 여긴 제가 막겠습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박성훈이 대검을 들고 내려오려 하기에, 그를 밀치며 얘기했다.
“방해하지 말고, 문부터.”
난 들고 있던 헌팅 나이프를 레그홀스터에 집어넣고, 두 주먹을 말아쥐며 계단을 응시했다.
크어어어어!!
카하아악!! 하악!!
뒤이어 비명을 내지르며 계단을 올라오는 좀비들.
망설임 없이 좀비들의 안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떡!!
코앞의 좀비는 안면이 함몰되며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
쉴 새 없이 주먹을 내지르고, 발길질을 가하며 좀비들이 올라오지 못하도록 저지했다.
카학!
그 순간, 난간을 타고 올라온 좀비 하나가 내 어깻죽지를 노렸다.
상황에 집중할수록 동체 시력이 향상되며 놈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두 눈에 들어왔다.
모든 세포가 살아 숨 쉬는 기분.
재빨리 상체를 틀어 팔꿈치로 놈의 인중을 가격했다.
콧대와 인중이 내려앉으며 그대로 난간 사이로 추락하는 좀비.
모든 보호대를 골고루 사용하며 내구도를 조절했다.
그어어어어…… 그어어어…….
뒤이어 1층에서 들려오는 공명 소리.
역시, 이렇게 많은 좀비가 있는데 공명 좀비가 없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아직 멀었습니까!”
“거의 다 됐습니다!”
좀비들을 처리하며 위에 있는 사람들을 슬쩍 쳐다보자, 그들은 개머리판으로 문고리를 내려치기 시작했다.
텅-!
뒤이어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고, 옥상 문이 열렸다.
병사들이 쓰러지듯 옥상에 들어서고, 박성훈은 이곳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열렸습니다! 빨리 와요!”
가장 앞에 있는 좀비에게 발길질을 가하고, 재빨리 방향을 틀어 계단을 뛰어올랐다.
크어어어어!!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철문을 닫고, 문 너머의 지옥을 경계했다.
손톱으로 칠판을 긁는 것처럼 듣기 거북한 소리가 귓바퀴를 스치고, 절규나 다름없는 좀비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가는 바람에 문을 잠글 수 없었다.
지금은 광기에 휩싸인 좀비들이 철문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공명 좀비가 올라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공명 좀비는 문을 당겨서 열어야 한다는 걸 아니까.
박성훈은 다급히 옥상 난간으로 달려가 지면의 좀비들을 살폈다.
안개의 표면이 일렁이고 있었다.
박성훈은 안개의 상태를 살피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얘기했다.
“저 정도면 최소 400마리는 됩니다. 격발해야 돼요.”
“안 됩니다. 옥상에서 격발하면 금호강 앞에 있는 좀비들도 듣게 될 거예요. 수류탄으로 간신히 유도했는데, 그놈들까지 부를 생각이에요?”
“그럼 어쩌겠다는 겁니까!”
박성훈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게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