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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88화 (88/373)

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88화

이덕배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이정우가 이마를 문지르며 얘기했다.

“생존자가 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지만…… 지금은 밤이 깊었으니 내일 움직이자.”

“그래야죠. 대신 내일 아침에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계획은 짜두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생각해둔 거 있어?”

이정우의 물음에 지도를 살피며 얘기했다.

“고가도로까지 차량으로 이동하고, 그 뒤에 도보로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유는?”

“산업도로 쪽에 모든 좀비를 처리한 건 아니니까요. 고가도로는 좀비들 정리도 끝났고, 만약 좀비들에게 둘러싸이더라도 빠져나오기 쉬운 지형이에요. 소대장님이 2차 위치로 고가도로를 설정한 것도 회피 기동이 수월하기 때문 아닌가요?”

박성훈을 쳐다보며 묻자, 그는 금세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했다.

“맞습니다. 그럼 고가도로 맞은편의 공터로 돌아서 산업도로 맞은편의 빌라촌으로 이동하죠. 빌라촌에선 각개 분대별로 수비진영부터 만들고…….”

“아니요.”

박성훈의 말을 자르자, 그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너무 단칼에 잘랐나?

난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비진영을 만드는 건 위험해요. 빌라촌은 골목이 많아서 엄폐한 좀비들까지 확인하기 어렵고요.”

“빌라촌을 지나지 않고 어떻게 아파트까지 들어가겠다는 겁니까?”

“빌라촌을 이용하지 않겠다는 게 아니에요. 옥상만 이용하면 됩니다.”

“……옥상?”

일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옥상을 넘나드는 게 최적의 방안이라는 걸 몸소 터득했다.

이러한 부분을 박성훈에게 설명하자, 그는 팔짱을 낀 채 고심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그는 한숨을 내쉬며 얘기했다.

“중무장은 어렵겠습니다. 탄통을 들고 옥상을 이동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괜찮아요. 변종들은 이미 처리했고, 좀비는 소총과 수류탄만 있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으니까요.”

박성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다.

난 주변에 있는 일행을 돌아보며 얘기했다.

“다 같이 움직이는 건 오히려 독이니, 우린 소수만 뽑아서 움직이자. 완수랑 현이, 그리고 희연이만 따라와.”

다들 반박 없이 흔쾌히 승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눈꼬리를 치켜뜨며 물었다.

“나는? 여기 남으라고?”

“수비팀도 시야 확보가 가능한 사람이 필요해.”

“완수가 남아도 되잖아.”

난 슬쩍 고개를 돌려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곳에는 전수연도 앉아 있었다.

위급상황 발생 시, 전완수는 모두의 안전보다 여동생의 안전을 가장 먼저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설여원을 이곳에 두고, 전완수를 데려가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설여원은 내 시선을 느꼈는지, 입맛을 다시며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박성훈은 신기하다는 듯이 얘기했다.

“다들 대단하네요.”

“네?”

“서로 남겠다고 해도 모자를 판에, 여러분 같은 생존자는 처음 봅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서, 어깨를 으쓱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수비 인력도 필요하니, 다른 사람들은 남아주세요. 소대장님은 한 개 분대만 선출해 주시고요.”

소대장에게 명령하는 민간인.

선 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소대장은 반박하지 않고 따라주는 모습을 보였다.

뒤이어 이정우는 이덕배와 이현배를 쳐다보며 물었다.

“저 친구들 쇠뇌 좀 빌려도 되겠습니까?”

“가져가. 자네들이 원하는 건 뭐든 줘야지.”

이정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안건이 정리되었기에, 난 사람들의 표정을 살피며 얘기했다.

“내일 아침 일찍 움직입니다. 다들 피곤할 테니, 오늘은 일찍 자요.”

벗어두었던 보호대를 착용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박성훈이 내 팔을 잡으며 얘기했다.

“야간경계는 4분대가 담당할 테니 박재형 씨도 주무세요.”

“…….”

배려해 주겠다는데 굳이 반대할 필요는 없었다.

박성훈의 말에 가볍게 목례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 * *

다음 날 아침, 구출작업에 나설 인원이 1층에 모였다.

쇠뇌 촉은 한 사람당 30발.

쇠뇌를 어깨에 메고, 쇠뇌 촉이 들어 있는 가방은 허리에 찼다.

벌써 무게가 상당하다.

움직일 때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흔들리지 않도록 더욱 꽉 조여 맸다.

헌팅 나이프의 상태를 확인하자, 이가 나간 부위가 듬성듬성 보였다.

좀비의 숫자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기에, 시작부터 맨손으로 처리하는 건 부담이었다.

헌팅 나이프로 간을 보고, 추후 좀비들의 숫자에 따라 판단할 것이다.

일전에 퀘스트를 통해 얻은 칼갈이가 있기에, 무뎌진 날을 예리하게 갈았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전투팀을 쳐다보자, 다들 굳은 결의가 엿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뒤에 있는 수비팀을 쳐다보자, 그들은 애써 엷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해서 다녀오라는 말을 남겨주었다.

예전에는 불안한 표정으로 배웅하더니, 지금은 미소 지을 여유도 생겼다.

저들의 미소가 살아서 돌아오라는 무언의 응원이라는 걸 알기에, 난 엶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다녀오겠습니다.”

* * *

군인들은 전술 차량과 군용 트럭에 타고, 전완수와 최현, 그리고 김희연과 나는 승합차에 몸을 실었다.

일찍이 좀비들 정리가 끝난 좌측 2차선 도로로 나아갔다.

고가도로까지 다소 돌아가는 길이지만, 대로로 이동하는 것보다 안전한 길이었다.

고가도로 맞은편에 위치한 공터에 차를 정차하고, 안개 속에서 시야 확보가 가능한 전완수가 한발 앞서 주변 상황을 탐색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차량에서 내린 김희연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희연아.”

“네, 네?”

조심스레 김희연을 부르자, 그녀는 말까지 더듬으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실전에 투여된 건 이번이 처음이니, 김희연이 긴장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김희연을 데려온 건 당연히 퀘스트 때문이었다.

등고선에 위치한 아파트에 도달했을 때, 김희연의 퀘스트가 완료되지 않으면 또 다른 방안을 떠올려야 한다.

난 엷은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얘기했다.

“걱정하지 마. 별일 없을 거야.”

“아…… 네.”

김희연은 옆구리에 차고 있는 칼자루를 손에 쥐며 심호흡을 반복했다.

김희연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노파심에 칼 잡는 방법부터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그렇게 잡으면 손 다쳐. 반대로 쥐어. 이렇게.”

“이렇게요?”

“그렇지, 찌르는 게 아니라 찍는 것처럼.”

“아, 손 때문이면 괜찮아요. 덕록 오빠가 손 조심하라고 여기 테이프 감아줬어요.”

김희연의 식칼을 자세히 보니, 검지가 찍히지 않도록 동그란 철판을 덧대고 테이프를 칭칭 감아둔 상태였다.

황덕록이 이렇게 꼼꼼한 성격이었다니.

겉모습과 달리 세심한 녀석이었다.

싸우는 방법을 배우고 싶다고 나설 때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까지 잘 챙기는 모습.

예전 사과대에서 질질 짜던 모습은 사라지고, 든든한 아군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뒤이어 탐색을 나갔던 전완수가 돌아오며 얘기했다.

“저 앞은 안전하니 따라와요.”

군인들과 함께 전완수를 뒤따랐다.

드넓은 공터를 가로질러 한참을 나아가자, 도로에 인접한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발소리를 죽인 채 계단 위로 올라서자, 길 건너로 몇몇 상가 건물과 빌라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전완수는 상체를 숙이며 속삭이는 목소리로 얘기했다.

“상가 건물 앞으로 좀비들이 좀 있어요.”

“몇 마리?”

“40마리 정도.”

상가 앞에 40마리라면, 빌라촌에는 더 많은 좀비가 숨어 있을 것이다.

난 헌팅 나이프를 손에 쥐며 옆에 있는 박성훈을 쳐다봤다.

박성훈은 들고 온 탄알집을 확인하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바깥을 배회하는 좀비가 40마리라면, 내부에는 더 많은 좀비가 있을 겁니다. 전부 처리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저 앞에 있는 놈들만 조용히 처리하죠.”

“문제는 저 좀비들의 특징입니다. 박재형 씨가 그랬잖아요. 공명하는 좀비들이 있다고.”

까다롭다.

도로 폭은 족히 20m.

우리가 도달하기 전에 좀비들이 먼저 공명할 것이다.

빌라촌만 안전하게 진입하면 그 뒤는 술술 풀릴 텐데.

그러자 좀비들을 관찰하던 전완수가 입을 열었다.

“야, 방법 있다.”

“어떤 방법.”

“저기 있는 놈들이든 안에 있는 놈들이든, 큰 소리로 유인하면 되는 거 아니야? 총소리처럼 크면 되는 거잖아.”

전완수는 옆에 있는 군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마에 상병 계급장을 달고 있는 군인은 어벙한 표정으로 소대장과 전완수를 번갈아 쳐다봤다.

마치 ‘나더러 죽으라고?’ 이런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완수 가리킨 건 병사가 아니라, 그의 수류탄이었다.

박성훈은 이를 알아채고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수류탄으로 좀비들의 시선을 유도한 뒤에 이동하자는 겁니까?”

“네, 저쪽 멀리 던지면 빈틈이 생길 거예요. 대신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똥꼬 빠지게 뛰어야겠죠? 놈들이 돌아오기 전에 빌라 꼭대기로 올라가야 돼요.”

수류탄의 폭음이라면 근방의 모든 좀비를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체취를 따라올 가능성이 있으니, 최대한 멀리 이동해야 한다.

박성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에 있는 상병에게 얘기했다.

“수류탄 투척하고 이동한다.”

“알겠습니다.”

상병이 수류탄을 손에 쥐자, 다들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상병은 훅, 하고 숨을 내뱉더니, 안전핀을 뽑으며 있는 힘껏 수류탄을 투척했다.

수려한 호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수류탄.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이 귀를 막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쾅!!!!

지면이 울리는 진동과 함께 우레와 같은 폭음이 울려 퍼졌다.

폭음은 거리 곳곳으로 메아리쳤다.

이윽고 폭음이 잦아들 무렵, 폭음이 잦아든 자리로 좀비들의 포효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크어어어어어어!!!

거리에 있던 좀비들은 일제히 목젖을 갈며 개 떼처럼 이동하기 시작했다.

발치에서 들리는 말발굽 소리.

두려움을 자극하는 소리에 털끝이 곤두섰다.

발소리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박성훈은 고개만 내밀어 좀비들의 위치를 살폈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숙이며 놀란 눈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그의 표정만 봐도 부가설명은 필요 없었다.

뒤이어 상병의 옆에 있던 일병이 덩달아 수류탄을 손에 쥐며 얘기했다.

“혹시 모르니 하나 더 투척하겠습니다.”

일병의 말을 듣고 난 온몸으로 그를 뜯어말렸다.

그러자 일병은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말까지 더듬으며 물었다.

“왜, 왜 그러십니까? 지금이 기회인…….”

“죽고 싶어요? 그거 던지면 우리 여기 있다고 알리는 꼴이에요.”

안전핀을 안 뽑아서 망정이지.

저기 있는 좀비들 속에는 공명 좀비도 있을 것이다.

수류탄이 날아든 방향을 보고 우리의 위치를 유추해 낼 수 있는 지능이 있단 말이다.

한 놈이라도 우리의 위치를 알아채는 순간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된다.

박성훈도 이를 알기에, 나를 제재하지 않았다.

전완수는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주시하더니, 곧 오른손을 흔들며 이동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박성훈은 그 신호에 맞춰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도로를 가로질렀다.

최현과 전완수가 그 뒤를 따르고, 난 얼어붙은 김희연을 부축하며 다급히 일행의 뒤를 따랐다.

안개 속에 들어찬 메케한 냄새, 발치에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도로를 건너자마자 상가들을 지나 빌라촌으로 이동했다.

좁은 골목 끝으로 서서히 드리우는 빌라촌의 모습.

가장 앞에 있는 빌라 1층으로 소대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빌라에 들어서자마자 1층과 2층의 안전을 확보하고, 계단의 창문을 통해 바깥 상황을 살폈다.

안개를 뚫고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군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전속력으로 달리는 와중에도 사주경계를 잊지 않았다.

모두가 들어온 뒤에도 한동안 바깥을 주시했다.

다행히 꼬리를 밟힌 사람 없이, 좀비들에게 발각되지 않고 빌라촌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들어온 박성훈은 내 어깨를 톡톡 치며 위로 올라가라는 손짓을 보였다.

견착하고 있던 쇠뇌를 다시금 어깨에 메고, 헌팅 나이프를 손에 쥐며 옥상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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