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 속 게임 캐릭터가 되었다 87화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자, 이정우는 눈꼬리를 치켜뜨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방법이라고?”
“얼마나 남았나, 절반은 왔나? 이런 생각은 다 제쳐두고, 그냥 땅만 보고 걷는 거예요.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각성상태가 되고, 그 뒤엔 주변 경치가 보여요.”
“…….”
“그때부터 걸어야 한다는 강박보다, 경치를 감상하는 여유가 생기더라고요.”
이정우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시선을 내리깔더니,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난 이정우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마냥 떼쓰고 투정 부리고, 불평불만하고 걱정만 가득한 사람들, 그것도 여유 있을 때나 가능한 거예요. 아니면 출발선에 있는 사람들이나.”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다?”
“찔리면 형이 그랬다는 거죠.”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하자, 이정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입맛을 다셨다.
이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기숙사 탈출하기 전에는 그랬어요. 모든 게 무서워서, 보름 동안 한 걸음도 못 움직였어요.”
“…….”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아요? 막상 출발하니 계속해서 뭐가 나오잖아요. 우리가 걸어온 만큼 새로운 방안이 나오잖아요.”
“좋은 것도 나오지만, 안 좋은 게 더 많이 나오니 그러지.”
“그럴 때 땅만 보고 걷는 거예요. 쫄지 말고, 좋은 게 나올 때까지 걷는 거예요.”
이정우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았다.
뒤이어 이야기를 엿듣고 있던 정진영이 슬쩍 다가오며 얘기했다.
“재형이 말이 맞아. 오늘 힘들었다고 해서 겁먹을 필요 없어. 어차피 내일은 더 힘들 테니까.”
방긋방긋 웃으며 저런 얘기를 하다니.
어처구니없어서 웃음이 터졌다.
이정우는 간신히 웃음을 그치며 얘기했다.
“위로야 욕이야? 하나만 해 인마. 뜬금없이 촌철살인이네.”
“그래 인마. 이러나저러나 가시밭길이야. 네가 대표라서 생각이 많은 건 알겠는데, 다들 가시밭길인 거 알아. 그러니 괜히 머리 쓰지 마. 네 머리만 아파. 됐지?”
이정우는 그제야 진심으로 웃으며 활기를 되찾았다.
역시…… 난 위로에 소질이 없다.
정진영은 단 몇 마디로 분위기를 바꿔버리는데, 난 그게 안 된다.
뒤이어 이정우는 정진영과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얘기했다.
“너희들 덕에 웃는다. 아주 든든해.”
“나 아니면 누가 너랑 듀엣곡 연주하겠냐?”
예전부터 느꼈지만, 역시 둘은 죽이 잘 맞는다.
동아리방에 남은 형들이 이정우와 정진영이어서 다행이다.
“밥 다 됐어요! 밥 먹어요!”
뒤이어 윤혜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다 같이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땅만 보고 걷던 기나긴 하루 끝, 마침내 경치를 감상할 시간이다.
* * *
키릭- 키…… 릭.
어둠이 내려앉은 산업도로 사거리.
그곳으로 낡은 수레바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체가 잘려나가고, 왼팔이 기이하게 꺾인 알파 변종.
버스의 삼각뿔에 갈려 기절했던 변종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놈은 남은 팔로 바닥을 짚으며 어딘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알파 변종이 도달한 곳은 3구의 변종 시신이 있는 어느 고층건물 앞.
일찍이 군인들의 손에 벌집이 되어 사망한 변종들의 시신이었다.
놈은 죽은 동료들의 시신을 오른손으로 쓰다듬더니, 눈동자를 굴리며 침을 흘리기 시작했다.
“배…… 고파. 배고…… 파?”
뒤이어 입을 쩍 벌리며 망설임 없이 동료들의 시신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콰득! 으적, 으적, 쩌억!
허기에 시달리는 들짐승처럼, 단단한 뼈와 질긴 살점을 씹으며 주린 배를 채웠다.
크르르르…….
그러자 얼마 남지 않은 좀비들이 소리를 듣고 변종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참이나 동료들의 살점을 뜯어먹던 변종은 뒤에서 나타난 좀비들을 보고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서로를 경계하는 모습.
변종이 다친 상태라는 걸 아는지, 좀비들은 변종의 먹이를 넘보고 있었다.
굶주린 하이에나와 길 잃은 사자의 대치.
크어어어어!!
선두에 있던 좀비가 목젖을 갈며 외치자,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두 부류는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에엑!!
변종은 찢어지는 비명을 내지르며 세차게 오른팔을 휘저었다.
아무리 빈사 상태에 놓인 변종이라 해도, 좀비 열댓 마리에게 당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좀비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고, 욕심을 부린 대가는 그들의 목숨이었다.
변종은 열댓 마리의 좀비를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뒤, 좀비들의 시신과 동료들의 시신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뜨득- 뜩- 쩍- 으드득-
시신을 먹으면 먹을수록, 알파 변종의 신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신이 풍선처럼 부풀기 시작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지름 3m의 ‘구’ 형태를 이루었다.
* * *
저녁 식사가 끝나고, 모닥불 근처로 생존자들이 둘러앉았다.
화기애애한 생존자들을 바라보며 입가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세상은 멸망했지만, 사람들의 생기있는 모습에 마음 한편이 따뜻해졌다.
옆에 있던 설여원은 불멍을 때리더니, 뒤이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정우 오빠랑 진영이 오빠 어디 갔지?”
조금 전까지 옆에 있었는데, 두 사람이 사라졌다.
덩달아 주변을 살피자, 저 멀리서 다가오는 정진영과 이정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어쿠스틱 통기타를 들고 모닥불로 걸어오고 있었다.
소리결의 역사라고, 절대로 부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붉은색 기타와 갈색 바디의 통기타.
사람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리자, 정진영은 헛기침을 하며 얘기했다.
“모닥불이 있는데 통기타가 빠질 순 없잖아?”
주변 좀비들의 정리가 끝났기에, 연주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괜스레 동아리 엠티의 기억이 떠올랐다.
엠티를 가면 연례행사처럼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기타를 연주했었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두 사람은 기타를 조율하며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정우와 정진영의 연주가 시작되자, 10세 미만의 아이들과 10대 학생들은 발그레 미소를 띠며 연주를 감상했다.
어른들은 아련한 눈빛으로 모닥불을 바라보거나, 두 눈을 감고 연주에 귀를 기울였다.
박성훈과 군인들도 피로에 젖은 몸을 선율에 맡기며 위로받는 모습을 보였다.
귓불을 어루만지는 아름다운 선율에, 나도 두 눈을 감고 지금의 여유를 만끽했다.
두 사람의 연주가 끝나자, 사람들의 박수가 이어졌다.
좀비를 의식해서 그런지, 박수갈채가 아닌 은은한 박수였다.
이정우는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얘기했다.
“재형이 너도 한 곡 뽑을래?”
“제가요?”
“너도 잘 치잖아. 빼지 말고 한 곡 들려줘.”
그러자 옆에 있던 설여원이 두 눈을 빛내며 물었다.
“재형이 너도 기타 칠 줄 알아?”
“나도 결인이거든?”
싱겁게 웃으며 되받아치자, 설여원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양손으로 턱을 괴었다.
간만에 기타를 잡아서 어색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기타를 조율하고, 무슨 곡을 연주할지 고민했다.
어둑한 세상, 평온한 분위기, 따뜻한 모닥불.
이런 순간에 어울리는 곡이라면…… 하나 있다.
양손으로 주먹을 쥐었다 펴며 손가락을 풀어준 뒤, 연주를 시작했다.
마사키 키시베의 잠 못 이루는 밤.
시작과 동시에 귓불을 어루만지는 선율에, 주변에서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4분의 연주가 끝나자,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너도 나도 내 곁으로 다가왔다.
“삼촌 또 들려주면 안 돼요?”
“방금 들었던 거 또, 또!”
방긋방긋 웃는 아이들의 모습에 덩달아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다른 곡을 연주하려고 했는데, 한 번 더…….
치지직- 치직- 삑.
-올빼미 여기는 참수리. 응답 바람. 이상.
그 순간, 박성훈의 무전기로 경계근무 중인 군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엷은 미소를 짓고 있던 박성훈은 금세 덤덤한 표정으로 돌변했다.
“귀소 감도 삼삼 참수리 송신 바람. 이상.”
-귀소 감도 삼삼 산업도로 방면 폭죽 발견. 이상.
폭죽이란 말에 들고 있던 통기타를 내려놓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육안으로 확인하기엔 지나치게 먼 거리.
뒤따라 올라온 설여원이 망원경을 건네주기에, 망원경을 들고 삼거리 방면을 살폈다.
망원경 덕에 허공에서 터지는 은은한 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이라 생존자들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고, 거리가 먼 탓에 망원경으로도 폭죽이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다.
바닷가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딱딱이 폭죽.
산지에 지어진 아파트에, 생존자 유무가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 * *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다 같이 계획을 세웠다.
이덕배는 지도를 펼치며 내게 물었다.
“재형 학생, 아파트 외벽에 있는 무늬 확인했나?”
“너무 어두워서 무늬까지 보이진 않아요. 폭죽도 간신히 보이는 정도예요.”
이덕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맞아. 개나리 아파트까지 족히 3㎞는 떨어져 있거든. 산업도로 지나서 1.5㎞는 더 들어가야 개나리 아파트야.”
아파트 이름이 개나리 아파트인 모양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박성훈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거기에 아파트가 있다고요? 지도에 등고선으로 표시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자 이덕배는 싱겁게 웃으며 얘기했다.
“워낙 구석에 지어진 아파트라 이 동네 토박이 아니면 존재 자체를 모를 거야. 처음 분양할 때는 인기가 좋았지만, 그것도 벌써 30년 전이지.”
“…….”
“그때는 11층 아파트라는 말에 은근히 인기가 많았어.”
박성훈은 이덕배가 가리키는 지점을 유심히 쳐다보며 고심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지도에 표시된 도로의 상태로 보아, 차량이 들어가기는 힘든 길이었다.
흔히 시골에 가면 보이는 비포장도로, 경운기가 지나다니는 길.
박성훈은 가만히 턱을 매만지더니,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군용트럭이나 버스가 들어가는 건 힘들 것 같습니다. 이쪽 도로 회전반경이 얼마나 되는지 몰라도, 이 지도가 정확하다면 도랑에 빠질 게 뻔해요.”
그러자 이덕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얘기했다.
“걸어가면 되잖아. 어차피 좀비들도 얼추 정리됐고, 이제 변종도 없으니 말이야.”
“산업도로까지는 안전하게 이동한다 쳐도, 그 뒤편의 상황은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박성훈은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차로 이동할 수도 없고, 좀비들의 숫자도 파악할 수 없으니 다른 방안을 생각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과잉반응 아닌가? 산업도로 맞은편은 주거지역도 아니어서 좀비도 별로 없을 텐데.”
이덕배의 의견에 이번엔 내가 반박했다.
“아니요. 조심해서 나쁠 게 없어요. 여기 있던 좀비들과 변종의 숫자를 생각했을 때, 산업도로 맞은편에도 좀비들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슨 기준으로?”
이덕배의 질문에, 난 조성훈에게 들은 정보를 얘기해 주었다.
대장 좀비가 거느릴 수 있는 수하는 최대 500마리.
우리가 처리한 변종의 숫자는 8마리에 달하기에, 최대 4000마리의 좀비가 이곳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수하로 만들지 못한 좀비까지 고려한다면 그 숫자는 4000이 넘을 것이다.
군인들이 몇 마리의 좀비를 처리했는지 몰라도, 절반도 처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하자, 박성훈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저희가 처음 이곳에 와서 발견한 변종이 3마리였습니다. 추후에 5마리의 변종이 나타났으니, 산업도로 맞은편에도 다수의 좀비가 분포되어 있다는 말이 되죠.”
이덕배는 박성훈의 말을 듣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변종 다섯 마리는 왜 산업도로 맞은편으로 이동했다가 돌아온 거지? 산업도로 맞은편에 뭐가 있다고. 거기 빌라촌 제외하면 전부 논밭인데?”
이덕배의 물음에 박성훈 대신 내가 대답해 주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만…… 아마 5마리의 대장 좀비는 생존자가 있다는 걸 알고 산지로 이동했을 겁니다. 그 과정에 변이가 시작돼서 변종으로 변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대장들이 변종으로 변했으니, 부하 좀비들만 거기 남아 있다는 거야?”
“그렇죠. 대장이 죽으면 상명하복 관계도 사라지니까요.”